제249화
249화. 변화하는 겨울 (1)
또각.
높은 하이힐 소리.
어느 사무실에서든 들릴 법한 소리였으나.
작금의 상황에선 서늘하게만 느껴졌다.
무리도 아니었다.
“손을 내밀어라. 미스 덴슨.”
검은 양복과 코트.
그 사이로 드문드문 보이는 갑주 등의 무장을 한 무리가.
철그럭.
척 보기에도 평범해 보이지 않는 수갑을 들고 들이대지 않는가?
그러나 올리비아 덴슨은 두말없이 양손을 내밀었고.
철컥.
오크도 쉽게 풀지 못할 만한 크기의 족쇄가 그녀의 여리고 하얀 손목을 구속했다.
이어.
또각.
또 한 번의 하이힐 소리가 들려온다.
검은 의복의 무리를 가르고 다가오는 늘씬한 체구의 여성은.
“오랜만이야? 덴슨.”
끼고 있던 선글라스 아래로 나긋나긋한 눈웃음이 드러난다.
하나 작금의 상황을 따져보면.
그리고 그녀가 누구인지를 따져보면.
“오랜만입니다. 레이나.”
저 웃음은 명백한 비웃음이라는 걸.
올리비아 덴슨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레이나라 불린 여성은 나긋나긋한 미소 그대로.
“꼴이 좋아?”
비웃음을 내던졌다.
“세상 도도한 척은 혼자 다 떨더니…… 결국 길드의 명령까지 무시하고.”
“길드의 명령이 아닌, 길드 마스터의 명령이었습니다.”
“아하핫!”
올리비아의 대꾸에 웃음을 터뜨리는 레이나.
“이봐 덴슨. 너 정말 미쳐버리기라도 했니? 그게 그 말이잖아?”
싱글거린 그녀는 어처구니가 없는 목소리로 물었고.
“명백히 다릅니다.”
올리비아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얼굴로 답했다.
그에.
“하…… 재수는 없어도, 나름 똑똑한 년이라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그것도 아니구나?”
레이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진실로 황당한 얼굴이 되었다.
윈터퀸 올리비아 덴슨.
그녀를 싫어하는 건 개인적인 영역이고.
그 총명함과 능력만큼은 레이나 역시 인정하는 부분이었거늘.
“그 잘난 윈터 퀸이 아주 맛이 가버렸어. 아시안들한테 물이라도 든 거야 뭐야?”
지금의 올리비아에게선 윈터 퀸이라는 이름값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긴, 요즘 실적도 시원치 않다며? 콩알만 한 나라의 플레이어 하나 못 낚아서, 이렇게 지부까지 마련하고.”
팔짱을 낀 채.
올리비아를 흘낏하며 말끝을 흐리던 레이나는.
“뭐, 누구든 전성기는 있으니까. 너도 유통기한이 다 된 거겠지.”
픽 웃고는 품속을 뒤적거려,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우리 길마님도 참~. 시대가 어느 땐데. 꼭 이런 건 친필로 쓰는지.”
그것을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던 레이나는 종이를 쫙 펼쳤다.
그러곤.
“영업부 부장 올리비아 덴슨은 길드의 규정을 무시하고. 우크라이나의 블라블라~.”
종이에 적힌 내용을 쭉 읽어나가던 그녀는 제멋대로 말을 끝맺더니.
“굳이 다 안 읽어줘도 되지?”
종이를 휙 치웠다.
“여하튼, 이러한 죄목으로 집행부가 널 구속하는 거야. 이의는 없길 바라.”
“그런 태도로 용케 집행위원직을 유지하고 있었군요.”
“뭐 어때? 어차피…….”
아메리칸 드림의 길드 마스터.
데릭의 친필 서류로 보이는 종이를 장난스럽게 살랑살랑 흔드는 레이나.
그러나 올리비아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만큼은.
“집행되면 뒷말은 나오지도 못하는걸?”
무척이나 섬뜩했다.
그래.
마치 연쇄살인을 즐기는 살인마처럼 말이다.
“덴슨. 넌 참 재수 없게도 껍데기는 쓸 만하게 태어났으니. 장기 적출이나 실험 따위엔 쓰이지 않을 거야.”
“……구속된 이들에게 지금껏 그딴 짓을 하고 있었습니까?”
“어머. 몰랐어? 길마와 그렇게 친한 척하더니. 너 진짜 별거 아니었구나?”
화륵.
레이나의 손에 들린 친필 서류가 삽시간 불타버린다.
“그리고 그딴 짓이라니? 길드를 배신하는 쓰레기들을 이렇게 재활용하는 건, 아주 현명한 처사지.”
“미친 소리 마세요! 이 일은 제가 반드시…….”
“또또. 그놈의 잘난 척은.”
올리비아의 하얀 이마를 레이나의 손가락이 툭툭 두드렸다.
“어느 단체나, 빛날수록 그림자가 지기 마련이야. 그리고 그게 있어야, 빛날 수 있는 거고.”
“개소리! 전대 길드 마스터 때는!”
“그놈의 전대 전대. 네가 전대 길마에게 목숨을 구원받았다는 사실은 잘 알지만, 이젠 좀 놓아주고 네 걱정이나 하지 그래?”
레이나의 입꼬리가 비죽 올라간다.
“아까도 말했지만, 네 껍데기는 쓸 만하니까. 그딴 소모품이 아닌, 접대용으로 쓰일 거야.”
“설마…… 그런 쪽에도 손을 뻗친 겁니까?”
“호호! 너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집행부가 창설됐을 때부터, 가장 먼저 생긴 게 바로 접대부야.”
깔깔대던 그녀는 한심하다는 눈으로 올리비아를 흘겼다.
“겉은 멀쩡한데. 속은 앙큼한 배신자들을 재활용하기에, 이보다 좋은 게 없잖아?”
“이런 미친!”
“아아! 그놈의 미쳤다는 말은 본인에게나 하라고. 넌 다이아급 플레이어라서, 아레나산 마약으로 아주 절여버릴 거거든.”
더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손을 설렁설렁 흔들며 몸을 돌려버리는 레이나.
그에.
“레이나!!”
올리비아는 답지 않게 눈에 불을 켜며 언성을 높였으나 그뿐.
철그럭.
올리비아의 양손을 구속한 각성자용 수갑은 그녀를 일반인으로 만들어 버린 상태.
더불어.
“우선 그 재수 없는 성질머리부터 교육해야겠지.”
레이나가 손에 쥔 작은 버튼을 누르자.
끼이이익!
날카로운 이명이 터져 나왔고.
“아아악!”
올리비아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털썩 주저앉았다.
“참 기대가 돼.”
레이나는 그런 올리비아를 향해 조소를 걸쳤다.
“천하의 윈터 퀸께선 얼마나 버티실지. 진창에 처박히고도 언제까지 그리 도도할 수 있을지 말이야.”
“당신……!”
“그러게. 데릭한테 까불지 말았어야지. 어휴! 나라면 전신을 물고 빨았을 텐데. 복에 겨워 가지곤.”
나긋나긋하게.
그러나 명백한 조롱을 담은 몸짓으로 어깨를 으쓱하는 레이나.
“가자. 배신자를 집행부로 이송한다.”
“예.”
그녀의 명령에 따라.
철그럭.
“으윽!”
집행부원들은 몸을 가누지 못하는 올리비아를 거칠게 일으켜, 레이나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그들의 걸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들의 앞을 가로막은 세 명의 남자.
더 정확히는.
뚜벅.
그들의 선두에 서 있는 칼날처럼 서늘한 인상의 미중년 때문이었다.
기분이 별로 좋지 못한 것일까?
“내 명령을 전달받지 못한 건가?”
외모만큼이나, 중년인의 목소리는 서늘했지만.
“어머나~ 귀하신 분이 행차하셨네요?”
레이나는 태연하게 그런 중년인을 맞이했다.
이는 단순히 그녀가 다이아 최상위급 플레이어여서만이 아니었다.
“하긴, 명색이 아메리칸 드림의 집행위원인데. 협회장 정도면 나쁘지 않는 마중이에요.”
대륙성과 함께 세계 최강의 길드인 아메리칸 드림.
그곳에서도 힘 있기로 소문난 집행부의 위원이라는 직함 때문이었다.
그러나.
“말귀를 못 알아듣는군.”
대한민국의 협회장.
달리 철목왕이라 불리는 김무열에겐 어떤 위협 요소도 되지 않는 것일까?
“내 명령을 전달받지 못 했냐고 물었다.”
김무열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아니.
한결 더 서늘해진 목소리로 되물을 따름이었고.
“명령? 한국의 협회장께서, 우리 집행부에게 무슨 명령을 내리셨을까요?”
레이나 역시 지지 않고 고개를 갸웃하며, 김무열의 뒤편에 서 있는 금발의 남성.
“미스터 덴슨?”
올리버 덴슨을 바라봤다.
그러자.
“아메리칸 드림의 영업부 부장, 올리비아 덴슨은 탈세를 비롯한 불법적인 영입 행위 등. 여러 혐의로 현재 출국 금지된 상태입니다.”
올리버는 협회 측 공문으로 보이는 서류를 줄줄 읊어 내렸고.
“하!”
레이나는 코웃음을 터뜨렸다.
그도 그럴 것이.
“천하의 윈터 퀸께서, 탈세를 포함한 불법을 저지르셨다? 그것도 이런 콩알만 한 나라에서?”
윈터 퀸 올리비아 덴슨.
그녀의 철두철미함을 누구보다 잘 아는 탓이었다.
“너무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오네.”
더군다나 레이나가 아는 한.
올리비아 덴슨이라는 여자는 이까짓 불법을 저지른 사람이 아니었다.
설령 불법들을 저질렀다 해도.
‘협회가 알아차릴 수도 없게 진행했겠지. 저년이 어떤 년인데.’
이걸 협회 측에서 알아차리지도 못하게 진행했을 테고 말이다.
‘엿같아도. 능력 하난 뛰어나니까.’
그러니 길드 마스터인 데릭이 그토록 끼고 돌던 것 아니던가?
뭐, 이젠 아니지만.
“결국 혐의잖아요? 증거도 없이 출국 금지라니. 말이 되는 처사라고 생각해요? 거기다.”
대꾸하는 레이나의 한쪽 눈썹이 삐쭉 올라간다.
“듣자 하니 ‘내 명령’이라고 하시던데. 제 귀엔 협회장의 개인적인 권력남용으로밖에 안 보이는데요?”
“그래서?”
“그래서 ‘철목왕’으로서의 명령을 들어줄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뭐, 한국 협회의 명이라도 똑같았겠지만.”
유달리 철목왕임을 강조하는 레이나.
그것이 협회장이 아닌, 개인의 권력남용을 꼬집는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었으나.
김무열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내 명령에 불복한다……라?”
레이나의 말을 곱씹을 뿐이었다.
그에.
“호호! 그럼 내 상관도 아니고, 고작 한국의 협회장 따위에…….”
레이나의 답이 이어지려던 찰나.
콰앙!
벽면에서 갑작스런 폭음과 함께.
꾸드드득.
짙은 갈색의 나무뿌리가 튀어나온다.
하나 과연 아메리칸 드림의 집행위원인 것일까?
곧장 팔을 들어 올린 레이나는 즉시 호신강기를 둘러.
까가각!
머리통을 뚫어버릴 듯.
들이닥치는 거대한 뿌리를 막아 냈다.
그러나 완벽히 막아 내기는 무리였는지.
“큭!”
레이나의 몸은 몇 걸음이나 더, 옆으로 밀려났다.
그런 그녀의 귓가로.
“집행부의 부장인 크리스도 아니고. 고작 집행위원 따위가 감히…….”
듣기만 해도 베일 것 같은 목소리가 파고든다.
목소리만이 아니었다.
“내게 건방을 떨어?”
아까보다 더 서늘해질 수 있을까 싶은 매서운 눈빛.
동시에.
화아아아.
피부가 아릿할 정도로 강렬한 기세가 레이나의 전신을 덮쳐온다.
레이나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떡 삼켰다.
‘과연 철목왕…… 1세대 현역 랭커답군.’
나름 다이아 상위권을 구가하는 레이나이건만.
눈앞의 철목왕은 절로 식은땀을 흐르게 만들었다.
실제로 그녀의 뒤를 따르던 집행부원들은.
“윽!”
“크, 크흠!”
아무런 타격도 없이 그저 뻗어 나오는 기세를 대면한 것만으로도.
작게 신음을 흘리지 않는가?
20여 명에 달하는 집행부원 중 멀쩡한 이는 단 둘뿐이었다.
집행부로 배정받을 수 있는 최소 스펙이 플래티넘부터라는 것을 돌이켜보자면.
‘역시 늙어도 호랑인 호랑이라는 건가…….’
현재 김무열의 기세는 과거의 명성 그대로였다.
하지만.
까각.
호신강기로 나무뿌리를 쳐낸 레이나는 거리를 물리며 말했다.
“제가 무례했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만, 제 직위를 잊지 않으셨으면 하는군요.”
“직위?”
“잘 모르시는 것 같아,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전 아메리칸 드림의 집행위원이에요.”
아무리 철목왕이라곤 하나.
결국 세계 최고를 구가하는 아메리칸 드림에 반목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게 가능했다면 진즉, 그간 마찰이 있었던 수많은 세력이 덤벼들었을 테니까.
그럼 당연하게도.
세계 최고의 길드라는 타이틀 역시 얻지 못했을 것이다.
“한데 협회장이신 분이 이런 식으로 절 긁으면, 국제적인 문제로 번지지 않겠어요?”
그러니.
“이쯤에서 물러나신다면. 아메리칸 드림의 집행위원을 공격한 건은 함구해드리죠.”
하나.
“하…… 크리스가 부하를 잘못 가르쳤군. 하긴, 아레나에서도 멍청한 놈이었으니.”
철목왕이라는 명성을 듣기만 해와서일까?
“잘 들어라. 계집. 이 나라에서…….”
레이나가 내민 답은 현명하지 못했다.
“내가 하지 못하는 것은 없다.”
콰르르륵!
또다시 터져 나오는 폭음.
이번엔 위아래에서 치솟은 공격이었기에.
“으윽!”
호신강기로도 완전히 방어하지 못한 레이나의 몸이 허공을 날았다.
이어.
콰가강!
또다시 천장을 비롯한 사방의 벽면이 터진다.
대체 이 빌딩 어디에 나무가 자리하고 있는 것인지.
꾸드득.
트롤 팔뚝만큼이나 두터운 나무뿌리들이 곧장 그녀를 꿰뚫을 듯.
허공을 가르며 쏘아졌고.
‘망할! 이건 못 막아!’
레이나의 얼굴은 대번에 낭패감이 어렸다.
이내.
‘이렇게 된 이상…….’
허공을 날던 그녀의 시선이 바로 뒤편.
멀쩡하게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두 남녀를 향한다.
두 남녀 역시 대기하고 있던 것인지.
가만 서 있던 몸을 움직이려는 순간.
“워워. 진정하세요.”
뚜렷한 미성이 파고들었고.
꾸득.
날아들던 굵은 나무뿌리들은 순식간에 돌진을 멈추었다.
이미 발현된 이능을 즉시 멈춰버리는 기술은 감탄을 흘릴 만한 수준이었으나.
“허억!”
간신히 착지에 성공한 레이나도.
그리고 그녀를 도우려던 두 남녀도 김무열의 테크닉에 감탄한 여유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출국만 막아 달라고 했더니 이게 무슨…… 어라? 최 비서님까지 오셨네.”
“협회장님께서 행차하시는데. 제가 어찌 놀고 있겠습니까.”
철목왕인 최측근인 골렘 최창욱과 태평하게 인사를 나누는 저 남자는.
“하하! 그것도 그렇네요. 아! 올리버 씨. 오랜만이에요.”
“오, 오랜만입니다. 시문 씨.”
김무열과 같이 예상치도 못한 인물이었으니까.
동시에.
“저놈이 여길 왜?”
“김시문……!”
뒤에서 가만 대기하고 있던 두 남녀의 목표이기도 했었다.
그 소릴 들은 것일까?
김무열과도 인사를 나누려던 시문의 시선이 이곳을 향한다.
그러곤.
“어?”
두 눈이 동그라지는 시문.
이내.
“당신들은…… 폭탄마와 마담?”
그의 입에서 두 남녀의 별칭이 흘러나오자마자.
“네놈!”
아랍계의 중년인.
폭탄마 모가담은 즉시 손을 내밀었고.
“모가담! 잠…….”
곁에 있던 마담이 그를 말릴 틈도 없이.
콰아아아아아앙!
강렬한 폭발이 아메리칸 드림 한국 지부를 집어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