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8화
238화. 체르노젬 (4)
영화 속 귀신, 혹은 마녀의 비명처럼.
“꺄아아아아악!!”
높은 톤의 비명이 찢어질 듯 터져 나온다.
이상할 것도 없었다.
“팔! 내 팔!”
비명을 내지른 흑인 여성.
그녀의 오른팔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니까.
오직.
치이익.
애처롭게 피어오르는 허연 김만이 그 자리를 대신할 뿐이었다.
팔을 잃은 고통도 고통이지만.
말리나의 머릿속은 다른 충격으로 물들어 있었다.
“어떻게…… 대체 어떻게 케찰코아틀 님의 사기를!”
진녹색과 회색의 기운.
성좌 케찰코아틀의 사기는 성좌의 기운이었기에.
마법이 아닌 권능으로 치부되는 힘이건만.
어찌 권능을 뚫는 것을 넘어, 자신의 팔을 날려 버리냔 말이다.
물론 이는 갑작스러운 사태로 인해 격해진 감정일 뿐.
‘저 뇌전…… 저것도 권능으로 이루어진 거야!’
그녀의 이성은 작금의 사태를 명확히 직시하고 있었다.
문제는.
‘저게 케찰코아틀의 사기를 꿰뚫을 정도란 말이야?’
천마옥에서 터져 나온 뇌전의 위력이었다.
‘분명 사기로 응축시켜 치웠는데!’
조각난 천마옥을 똘똘 뭉치다 못해, 아예 응축까지 시켰던 사기.
그것을 뚫고 나온 것은 고사하더라도.
방어를 위해 추가적으로 케찰코아틀의 사기를 더 둘렀음에도.
천마옥에서 터져 나온 뇌전은 그녀의 오른팔을 소멸시켜버렸다.
권능은 권능으로.
권능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으로 비추어볼 때.
‘저놈의 권능이…… 내가 사역하는 권능보다 더 강력하다고?’
이는 권능 대 권능의 싸움에서 밀려났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개소리!”
저도 모르게 육성을 내지르는 말리나.
그도 그럴 것이.
‘깃털뱀의 진이 드네프르 강 동부 전역에 펼쳐져 있거늘!’
깃털뱀의 진.
죽음의 성좌 케찰코아틀이 만들어 낸 진은 케찰코아틀의 성역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심지어 이 비옥한 체르노젬의 생명력을 원동력으로 쓰고 있지 않은가?
그런 말리나의 귓가로.
“최대한 빠르게 처리하려고 했는데…… 과연 깃털뱀의 진이라 이건가?”
뚜렷한 미성이 들려온다.
말리나는 시선을 돌리기도 전에.
“본 러쉬!”
남은 한 팔부터 내저었고.
드드득.
케찰코아틀의 사기 속에서 큼직한 뼈 무더기가 날아들었다.
어지간한 바위만 한 크기.
하나.
우드득.
몸을 뒤틀며 드래고노이드를 활성화시킨 시문은 가볍게 주먹을 내질렀고.
콰각!
묵직하게 날아들던 뼈 무더기는 단박에 박살이 나 흩어졌다.
시문은 손을 털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사기로 뼈까지 창조해 내다니. 깃털뱀의 진이 확실히 사기적이긴 하네.’
뼈라면 뼈, 시체라면 시체 등.
사령술은 최소한의 관련 재료는 있어야, 해당 마법의 사용이 가능했다.
그리고 그 재료에 얼마나 구애받지 않느냐가.
네크로맨서의 전반적인 실력을 가르는 척도가 되었고.
고작 사기만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한 말리나는 사실상.
“지금은 네 오빠와도 비빌 수 있겠어.”
세계 최고의 네크로맨서이자, 데스페라도의 핵심 멤버.
데스 로드 말리크급이나 다름없었다.
그래.
‘이런 부분’만 놓고 본다면 말이다.
“하지만 전반적인 마법의 구조나 디테일은 많이 떨어지네. 그냥 강한 힘만 휘두르는 격이야.”
“지X! 네크로맨서도 아닌 새끼가, 감히 내 앞에서 사령술을 논해?”
“다른 분야이긴 해도, 사령술은 연금술이랑 나름 비슷한 면이 있거든.”
싱글거린 시문은 저만치 떨어지고 있는 뼛조각들을 힐끔 했다.
“네 오빠 말리크였으면. 아마 내 주먹이 닿기 전에 저것들을 해체해, 다른 뼈마법들로 연계했을 거다.”
이미 발현된 마법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정령술과 같은 특이 케이스가 아니라면.
“다이아 최상위급 마법계들의 대표적인 테크닉이니까.”
그걸 본인도 아는 것인지.
“잘난 체 주둥아리는!”
눈매를 꿈틀한 말리나는 하나 남은 팔을 활짝 펼쳤다.
“그래. 네 말대로 오빠와 난 차이가 나겠지. 하지만…….”
그녀의 주변으로 모여드는 진녹색의 사기.
그것은 사라진 그녀의 오른팔을 기점으로 응축되기 시작했고.
“네놈이랑은 아니야!”
앙칼진 외침과 함께.
쿠아아아아!!
진득한 사기를 뿜어냈다.
토옹.
그것을 천마옥으로 받아치려던 시문은.
‘사령술이 아닌, 순수한 권능의 집약체인가? 역시 데스레이디. 아예 멍청한 건 아니군.’
곧바로 응축시켰던 마기를 움켜쥔 채, 허공을 박찼다.
그런 시문의 앞으로.
“어딜!”
진녹색으로 조형된 형형한 오른팔을 휘두르는 말리나.
그에 따라.
스륵.
시문의 발밑을 지나쳤던 사기의 집약체는 어느새 먹이를 쫓는 뱀처럼.
그 경로를 꺾어 날아들었다.
동시에.
“뒈졋!!”
눈앞으로 권능으로 조형된 팔을 내지르며, 시문의 양각을 조여오는 말리나.
“사후 경직! 무력화의 죽음!”
거기에 그녀의 멀쩡한 왼팔은 쉴새 없이 움직이며 저주를 끼얹고 있었다.
일촉즉발의 순간이건만.
“단순하긴.”
여유롭게 손을 내미는 시문.
이내.
따악.
그의 손가락이 튕겨지며.
화르르륵!
어마어마한 열기를 동반한 검붉은 검이 조형된다.
그것은 놀랍게도.
서걱.
“무슨!”
케찰코아틀의 사기로 조형된 말리나의 팔을 썩은 무마냥 베어 버리곤.
화륵!
곧장 뒤에서 날아드는 사기의 집약체마저 태워 버렸다.
치이이이이!
시커먼 연기로 타버린 사기가 먹구름처럼 사방을 메운다.
하나 말리나의 시야가 가려지는 일은 없었다.
이곳이 깃털뱀의 진 내부임을 따지기 이전에.
화륵.
시문의 손에 쥐어진 검붉은 검.
그곳에서 뿜어진 열기가 검게 타버린 사기의 잔재마저 불살라 버리고 있었으니까.
말리나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같은 권능인데…… 여긴 케찰코아틀의 성역인데…….”
잘려 버린 팔을 수복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열기로 일렁거리는 시문의 형상을 바라볼 뿐이었고.
“같은 권능이라는 말은 좀 실례지 않나?”
뚜벅.
시문이 한 걸음 내디디며 말했다.
고작 한 걸음 다가왔을 뿐인데.
치익.
“으윽!”
살갗이 타오르는 고통이 말리나의 정신을 일깨운다.
“기본 체급 차이를 떠나서, 애당초 말리크와 권능을 나눠 쓰는 주제에. 혼자 쓰는 나와 비비려고?”
조곤조곤.
하나 뚜렷하게 틀어박히는 목소리.
그에 말리나의 얼굴은 분노가 아닌.
“그, 그걸 어떻게!”
당황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시문은 짧게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어갈 뿐이었다.
“아, 지금의 네 오빠는 의식을 갈무리하고 있으니, 나눠 썼다고 하긴 좀 그런가?”
“너! 설마 우리 측 일을 다 알고 있는 거냐?!”
“아웃 브레이크가 발생한 시점부터, 너희의 의식이 거의 완성되어 있었다는 건 알지.”
“이!”
입술을 질끈 깨무는 말리나.
“그, 그런데도 이따위로 까불어?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면서도?”
“안 될 거 있나?”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다 알고 있음에도.
그저 어깨를 으쓱할 뿐인 시문.
이어.
뚜벅.
시문이 또 한 걸음을 내디딘다.
당연히.
치이익.
“꺄아악!”
뜨겁던 말리나의 살갗은 아까보다 더 강하게 그을렸다.
그녀는 황급히 하나 남은 팔을 뻗어 권능의 힘을 빌어 달아나려 했으나.
‘이, 이런! 내 사기가!’
그녀의 힘이자 생명줄이었던 케찰코아틀의 사기는 뜨거운 열기에 실시간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스릉.
시문이 검붉은 검을 치켜든다.
“자, 잠깐! 나, 날 죽였다간 오빠가 가만있지 않을 거야!”
황급히 남은 한 팔을 내미는 말리나.
치이익!
덕분에 그녀의 팔이 급속도로 타올랐으나.
“우리 오빠가 누군지는 알지? 데스 로드야! 지구 최고의 네크로맨서라고!”
죽음을 앞에 둔 그녀에겐 어떤 고통도 안겨주지 못했다.
그런 말리나를 잠시 내려보던 시문은.
“내가 아는 말리크라면. 네 죽음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거 같은데.”
무심하게 읊조리곤.
“타올라라. 레바테인.”
그대로 레바테인을 시동했다.
화라라라락!
어마어마한 열기가 정면을 베어 나간다.
말리나는 비명조차 남기지 못한 채.
시뻘건 화염 속에서 모습을 감추었고.
일대에 포진되어있던 케찰코아틀의 자욱한 사기 역시.
화르르르.
레바테인의 잔불이 남김없이 불살라버렸다.
“…….”
시문은 말리나의 것으로 추정되는 미량의 잿가루를 말없이 바라봤다.
전생에 악명을 떨쳤던 빌런 중 하나였던 데스레이디 말리나.
그녀가 본격적으로 악명을 떨치게 되는 때가 바로 이 체르노젬 사건의 이후였다.
체르노젬에서의 의식을 성공적으로 끝마치고.
제 오빠와 함께 성좌의 힘을 완벽히 다루는 네크로맨서로 탈바꿈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걸로 말리나는 끝이고.’
이번 생에선 그 발판이 되는 시점에서 죽어 버렸다.
애당초 케찰코아틀의 힘을 몰아받았다 해도.
말리나는 큰 위협이 되지 않았다.
그릇의 차이랄까?
명검을 쥐여준들 그저 휘두를 줄밖에 모르는 어린아이에 불과했으니까.
물론.
‘어린애가 휘둘러도 명검은 명검. 피해가 없진 않았지.’
시문의 시선이 찬란한 빛에 휘감긴 본대를 향한다.
‘그래도 유정이 덕에 많이 살렸어.’
전생에서는 지금과 달리 실버 등급의 아웃 브레이크였지만.
인명 피해는 오히려 지금보다 심했었다.
단 하나뿐인 랭커 니키타가 아웃 브레이크 내부를 공략하는 동안.
이렇게 기습해 온 말리나에게 모두가 전멸당했으니까.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위험했던 내부 팀만 살아남게 된 것이다.
물론 그조차도.
그녀의 노예로 되살아난 플레이어들로 인해, 반절 가까이 죽어 나갔지만 말이다.
거의 전멸에 가까웠던 전생에 피해에 비하자면야, 굉장히 나은 결과라고 볼 수 있었다.
물론.
‘아직 일이 끝난 건 아니지.’
체르노젬의 일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여기까진 아웃 브레이크가 발생한 시점부터 어차피 생길 수밖에 없는 일들.’
이제부터가 중요했다.
‘아웃 브레이크쪽은 시혁이가 들어갔으니 문제없을 거고…….’
시문은 레바테인의 잔불로 완전히 깨끗해진 일대를 둘러봤다.
말리나가 휘두른 사기의 영향 때문인지 앙상하다 못해, 검게 죽어 버린 대지들.
하지만 그것은 이곳의 주변 일대일 뿐.
말리나의 사기가 닿지 않은 영역은 식생들이 시들시들하지만.
아예 죽어 버리지는 않았다.
시문은 만족스러운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땅의 상태를 보니. 아직 체르노젬 전체에 영향을 뻗치진 못했나 보군.’
거기다.
‘깃털뱀의 진의 영역을 넓혀야 할 말리나가 죽었으니. 말리크 본인이 직접 움직여야 하겠지.’
그런 시문의 예상대로.
스아아아아.
갑작스런 진녹색의 사기와 함께.
“쯧. 쓸모없는 것.”
차가운 목소리의 흑인 남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앞선 말리나와 똑같은 잿빛 머리칼의 남자.
데스 로드 말리크였다.
“기껏 권능을 나눠주었더니. 뼈 한 조각 남기지 못하다니.”
시문을 힐끔한 그는 시니컬한 미소로 허공을 향해 손을 뻗어 무언가를 그러쥐곤.
“일어나라. 말리나. 네 역할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형체도 없이 사라진 제 동생을 불렀다.
그러자 놀랍게도.
꺄아아아악!!
찢어질 듯한 비명과 함께 흐릿한 형상이 나타난다.
점차 선명해진 그것은 익숙한 형상을 취했다.
방금 한 줌의 재로 사라져 버린 말리나였다.
[뜨거워! 뜨거워!!]
레바테인의 열기가 그토록 강렬했는지.
전신이 녹아내린 형태의 말리나는 연신 비명을 질러냈다.
그런 동생을 보는 말리크의 인상이 찌푸려진다.
“영혼도 태워 버린다라…….”
하지만 그것은 동생의 죽음 때문이 아닌, 그녀의 영혼에 남겨진 상처 때문이었다.
“너. 어떻게 한 거지?”
곧장 시문을 향하는 말리크의 시선.
그의 눈엔 동생을 잃은 슬픔은 조금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평범한 권능으로 할 수 없는 일인데…… 어떻게 육체와 영혼을 동시에 태운 거냐?”
마법사 특유의 호기심만을 담고 있을 뿐이었다.
제법 충격적인 상황이었으나.
“글쎄. 몸소 체험해 보는 게 어때?”
이미 말리크가 어떤 인물인지 잘 아는 시문은 레바테인을 고쳐 쥘 뿐이었다.
그의 도발에.
“재밌군.”
말리크의 한쪽 입꼬리가 슬쩍 올라간다.
“감히 날 상대로 그게 가능할 거라 생각하나?”
“불가능하진 않겠지만…… 여러모로 귀찮긴 하겠지. 깃털뱀의 진을 너 혼자 이용할 테니까.”
“호오? 깃털뱀의 진에 대해 잘 아는 눈치로군.”
“잘 알지. 네 부하들인 죽음의 형제단이 지키고 있을 의식의 제단을 박살 내면, 이 일의 대부분이 끝난다는 것도.”
그 말에 대번에 굳어버리는 말리크의 얼굴.
“……네놈. 그걸 어떻게 안 거냐?”
“글쎄. 한 번 죽었다 살아나서?”
“그런가? 그럼…….”
솨아아아아!!
말리나의 그것과 비교할 수도 없는 엄청난 사기가 터져 나온다.
“두 번 죽여서 알아내는 수밖에!”
순식간에 거대한 낫의 형상을 취한 진녹색의 사기.
앞선 말리나와 다르게 완벽하게 정제된 권능이 시문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하지만.
화르륵!
시문은 여유로운 미소로 레바테인을 휘두를 뿐이었고.
‘저 검. 그렇군. 저놈도 권능을 다룰 수 있는 거로군.’
레바테인의 위력을 한눈에 알아차린 말리크는 눈매를 꿈틀거렸으나 그뿐.
‘그래봐야…… 성좌를 등에 업은 내 상대는 아니야.’
휘두르는 대형 낫에 더욱 힘을 실을 뿐이었다.
그때.
오싹.
“헛!”
성좌 케찰코아틀에게 유례없는 후원을 받고 있음에도.
서늘한 감각이 등줄기를 타고 오른다.
말리크는 곧바로 본능이 알리는 대로 공격의 경로를 꺾었다.
선택은 훌륭했다.
쩌어어어엉!
어마어마한 공명음이 터져 나오며.
쩌적.
케찰코아틀의 권능으로 조형된 거대한 낫에 금이 간다.
화르륵.
그 반동으로 레바테인까지 피해낸 말리크는 이 정신 나간 기습의 주인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유정……!”
휘황찬란한 백색의 빛을 휘감고.
그에 똑같은 빛을 입은 철퇴의 여전사를 말이다.
하지만 정작 그녀는 말리크에게 관심이 없는지.
“미안해요. 오라버니. 본대에 라파엘의 가호를 설치하다 보니 좀 늦어졌어요.”
대담하게 등까지 보이며, 시문을 바라볼 뿐이었고.
“괜찮아. 딱 맞춰왔어.”
시문은 부드러운 미소로 이유정을 반겼다.
이내.
따악.
손가락을 튕기는 시문.
어느새 그의 발목엔.
팔랑.
금색의 날개 두 쌍이 자라나 있었다.
“그럼 유정아. 아까 말한 대로 잠시만 수고해 줘.”
“맡겨 주세요.”
파앙.
허공을 박차고 순식간에 멀어지는 시문.
그 방향이 어디인지는 잘 알고 있었기에.
“네놈!”
말리크는 곧장 뼈로 이루어진 날개를 달고 뒤쫓았으나 거기까지.
“어딜 가시는 거죠?”
“빌어먹을!”
또다시 덮쳐오는 서늘한 기운에 추격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부아아아앙!
섬뜩한 파공음이 머리 위를 스친다.
그것을 피해낸 말리크는 2차로 밀려드는 성력의 여파에 인상을 찌푸렸다.
“이유정. 죽고 싶나?”
“죽어…… 요? 지금 네크로맨서인 그쪽한테, 제가 죽는다고 했나요?”
진심으로 어이없어하는 이유정.
“그런 개소리는 됐고,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당장 비켜라. 그럼 답할 생각 정도는 해보도록 하지.”
“뭐하러 그래요?”
유려한 눈썹을 꿈틀한 이유정이 성력이 그득한 손을 들어 올린다.
“당신네들이 사족을 못 쓰는 특효약이 여기 있는데.”
그에.
“하! 감히 날 고문하시겠다? 정말 죽고 싶어서 환장했나 보구나. 이유정.”
코웃음을 친 말리크는 보란 듯이 두 팔을 활짝 펼쳤다.
그러자.
솨아아아아!
그에게서 치솟은 진녹색의 사기가 구름까지 꿰뚫고 올라간다.
“이곳은 내 성좌의 영역이다.”
보기만 해도.
그리고 실제로도 어마어마한 존재감을 과시하는 말리크.
“아무리 성녀라 불리는 네년이라도. 이곳에서 날 이길 순 없어.”
“아하핫!”
말리크의 으름장에 이유정은 맑은 웃음을 터뜨리며 하늘을 향해 손바닥을 펼쳤다.
그 위로.
화아아아아아!
말리크의 사기에 뒤지지 않는 빛이 내리꽂힌다.
“죄송한데요.”
그것을 거머쥔 이유정의 등 뒤로.
“성좌는 너만 있는 게 아니에요. 이 새끼야.”
펄럭.
순백의 날개가 펼쳐졌다.
* * *
콰가강!!
강렬한 폭발이 쉬지 않고 이어진다.
그를 동반한 충격파가 무자비하게 고막을 흔들었으나.
쿠쾅!
폭발의 원인인 세 사람은 쉬지 않고 공방을 이어나갈 따름이었다.
이내.
스륵.
허공으로 녹아드는 하루토.
어느새 저 높은 상공에 나타난 그는.
“하핫! 이거 참, 시간 끌기 정도는 거뜬할 줄 알았는데…….”
흐르지도 않는 땀을 닦아내는 시늉을 하며 싱글거렸다.
“고작 둘만 상대하는 데도 진이 다 빠지네. 과연 랭커는 랭커야?”
그러면서도 니키타가 아닌 김시혁만을 향하는 하루토의 시선.
명백히 한쪽을 무시하는 행위였으나.
니키타는 딱히 자존심이 상한다거나 하는 기색을 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과연 검성. 직접 겪어보니 훨씬 강하군.’
속으로 하루토의 행동에 깊은 공감을 하고 있었다.
‘명성이 실력에 비해, 한참 못 미칠 수준이야.’
보통 국력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랭커의 가치를 따져볼 때.
본래 실력보다 조금 더 높게 평가하기 마련이었거늘.
김시혁은 과장이 조금도 붙어있질 않았다.
오히려 소문이 부족할 지경.
그리고.
“미친…….”
“저게 우리랑 같은 사람이라고?”
일렁이는 공간의 벽에 갇힌 내부팀들은 탈출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멍하니 전투를 지켜볼 뿐이었다.
물론 딱 두 명.
“빌어먹을! 여기도 막혔네. 꼬마. 거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고말숙과 유우토는 사방으로 주먹과 검을 휘두르며 쏘다녔다.
하지만.
지잉.
둘의 공격으론 어림도 없는 것일까.
공간의 벽은 작은 흠집조차 가지 않았다.
그런 두 사람의 귓가로.
“애송이들까지 격리해가며 싸우려니까. 이거 여간 힘든 게 아니야~.”
능글맞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높은 허공에서 부유 중인 하루토였다.
그는.
쐐애액.
“어이쿠! 무서워라.”
득달같이 날아드는 김시혁과 니키타의 강기를 피해내며.
“역시 전투는 나랑 안 맞는다니까.”
능글맞게 어깨를 으쓱였고.
김시혁과 니키타는 강기 세례로 그런 하루토의 도주로를 제한하며.
파앙.
에어워크로 거리를 좁혔다.
“흐음. 여기서 모서리의 힘을 더 쓰면 당분간 고생하는데…….”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오는 두 랭커를 힐끔한 하루토는.
“뭐, 어쩔 수 없나?”
아쉬운 얼굴로 입맛을 다시곤, 손을 내밀었다.
“그럼 모서리의 짐승님. 좀 부탁한다고?”
언제 도달했는지.
슈아악!
검강을 휘감은 김시혁의 검이 그의 손을 베어온다.
하지만.
“역방향의 시공간.”
하루토의 입이 움직이는 것이 먼저였다.
경악스럽게도.
뚝.
조금이지만 하루토의 손목을 베어가던 김시혁의 검강이 거짓말처럼 멈춘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
“…….”
뒤이은 니키타의 암기와 저 멀리 입구로 나아가던 언데드들까지.
이 아웃 브레이크 내부 전체가 시간이 멈추어버린 듯.
모든 것이 얼어붙었고.
“후. 조금만 늦었으면 손목이 그대로 날아갔겠네.”
그 속에서 유일하게 움직이는 하루토는 피가 흐르는 제 손목을 쥔 채.
“다행이야~. 그 미친 박사한테 치료는 안 받아도 돼서. 그럼…….”
싱글거리며 손가락을 튕기며.
“휘말리기 전에 얼른 튀어야지.”
모습을 감추었고.
그렇게.
쩌저적.
내부의 시공간이 무너져내렸다.
* * *
위이이잉!
갖가지의 사이렌 소리가 사방에서 고막을 두들긴다.
경고를 주기 위한 목적에 걸맞게.
왜앵왜앵!
무서울 정도로 맹렬하게 울리는 사이렌은 듣기만 해도 숨이 조여올 정도였다.
실제로.
저벅.
어느 아포칼립스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난장판인 도시 한복판에 떨어진 뚜렷한 눈매의 여성.
“여, 여긴…….”
고말숙은 답지 않게 말을 더듬으며, 하얗게 질린 얼굴로 뒷걸음쳤다.
그럴 수밖에.
“여기가 왜……!”
플래티넘의 플레이어가 된 지금까지도.
쉬지 않고 그녀를 괴롭혀왔던 악몽의 한 장소였으니까.
그리고 어김없이.
크아아아!
끔찍할 정도로 익숙한 울음소리와 함께.
“말숙아! 얼른 뛰어! 얼른!”
“엄마!”
끔찍할 정도로 익숙한 장면이 재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