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6화
226화. 신념이란 (3)
검은 염소와 바알, 천마까지.
성좌들 사이에서도 최고로 평가받는 이들이 놀라움을 표한다.
실제로.
스르르르.
그들이 어둡게 물들였던 천계의 하늘은 여명을 맞이하듯.
삽시간 밝아지고 있었고.
그 속에서.
훌륭하구나.
하구나…….
나…….
고음도 저음도 아닌.
형용할 수 없으나, 분명한 거룩함이 담긴 목소리가 메아리친다.
그에.
“아아!”
“아, 아버지!”
두 명의 대천사.
라파엘과 가브리엘이 황급히 무릎을 꿇어 예를 표한다.
이어.
그의 뜻에 따르거라.
거라…….
라…….
또 한 번의 메아리를 마지막으로.
스륵.
쏟아지던 빛이 사라졌다.
형용할 수 없는 빛이 사라진 이후.
라파엘은 그 어떤 때보다 활기가 넘쳐났다.
“정말! 정말 잘됐어! 가브리엘!”
이유야 간단했다.
“아버지께서 친히 강림하시다니! 너의 깨달음을 달가워하시는 게 분명해!”
거의 모습을 비추지 않던 아버지께서 직접 강림하셨으니까.
가브리엘 역시 무감정한 얼굴 위로 조금 상기된 감정을 내비쳤다.
하나.
“아마 그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 라파엘.”
그녀는 마냥 기뻐하지 않고.
아버지의 강림에도 아직 어둠이 남아 있는 곳을 바라봤다.
그곳엔.
-이건 좀 놀랍네. 저 두문불출하는 노인네가 얼굴을 비출 줄이야.
-허허. 마지막으로 본 지가 억겁은 넘었던 거 같은데 말일세.
-음.
어떤 성좌라도 기겁할 이름의 존재들과.
턱을 괸 채.
손가락으로 제 턱을 톡톡 두드리는 한 인간이 서 있었다.
“네 말이 맞아. 가브리엘. 시문 님 때문이기도 하겠지.”
“아버지께선 분명 시문 님의 뜻대로 하라 하셨죠?”
“그래. 그러셨지.”
라파엘 역시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씀은 루시퍼에 대한 정보도……. 시문 님이 원치 않는다면 묻지 말라는 뜻일 거야.”
“그렇겠죠.”
잠시 복잡해지는 가브리엘의 시선.
이내.
“후. 아버지께서 그리 말씀하셨으니. 그가 원치 않는다면 강요할 수 없지요.”
가브리엘은 가벼운 숨을 픽 내쉬곤 고개를 저었다.
그녀를 보는 라파엘의 시선이 조금 짓궂어진다.
“어머. 강요를 할 수 있긴 하고?”
“…….”
말이 없어지는 가브리엘.
‘예전이었다면 타락자의 심판을 위해, 소멸을 각오하더라도 덤벼들었겠지만…….’
은청색으로 변한 그녀의 눈동자는 사색에 빠진 한 인간을 담았고.
“……지금의 저로선 불가능할 것 같군요.”
고개를 슬쩍 숙이며, 혼잣말처럼 작게 읊조렸다.
그런 가브리엘을 본 라파엘의 얼굴이 살짝 멍해졌다.
무리도 아니었다.
‘바, 방금…….’
늘 무미건조했던 자신의 자매.
그나마 분노와 같은 강렬한 감정은 미약하게나마 드러내던 그녀의 눈과 입가가.
‘웃은 거야?’
미미하게 휘어졌으니까.
하나 잠시일 뿐.
“그럼 아버지의 말씀을 이행하죠.”
또각.
곧 본래의 무표정한 얼굴로 걸음을 내딛는 가브리엘에.
“으, 응? 아! 그래야지!”
눈을 꿈뻑이던 라파엘은 얼른 정신을 차리고 따라붙었다.
* * *
한편.
‘왜지?’
시문은 유려한 미간을 조금 모은 채.
톡톡.
길고 흰 손가락으로 턱을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방금 그 빛…….’
거룩했던 목소리와 함께 쏟아졌던 빛.
그것은 단순히 이곳 전체를 비추기만 한 것이 아니라.
‘분명 내 전부를 꿰뚫었었어.’
불가항력.
그로 인해 마치 영혼까지 발가벗겨지는 기분이랄까?
쏟아지던 빛은 거의 세포 단위라 불러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김시문이라는 존재의 모든 부분을 샅샅이 꿰뚫었다.
그것도.
‘의도한 게 아니야. 그냥 자연스럽게 나란 존재를 꿰뚫어 본 거야.’
그냥 시선을 보냈다는, 단지 그 하나의 행동으로 인해서 말이다.
이는.
‘전능……. 그 한 마디 말고는 표현할 방법이 없군.’
신적인 존재들을 접해 본 시문에게도 전능 그 자체의 감각을 선사했고.
시문은 딱 한 번.
이러한 경험을 겪은 적이 있었다.
‘밤의 여신 닉스. 그래, 그녀를 대면한 기분이었어.’
밤의 여신 닉스.
지난번 저승의 강 스틱스로 향했다가 보았던 히든 피스의 타르탈로스에 기거한 여신.
‘단지 눈을 마주했던 것만으로 모든 것이 빨려드는 기분이었지.’
블랙홀.
혹은 우주를 광속으로 내달리는 것처럼.
순식간에 우주 속으로 빨려드는 듯한 감각에 정신이 아득해졌던 닉스와의 첫 만남.
물론 그때와 다르게 빨려드는 것이 아닌, 빛 전체가 꿰뚫고 가는 형태이긴 했으나.
‘전능’하다는 느낌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는 곧.
‘닉스와 동급, 그 이상의 존재라는 말인데…….’
제우스를 비롯한 신왕급 성좌들도 쩔쩔매고.
저편의 대모 검은 염소마저 친구로 삼던 닉스와 동급 이상이라는 말이 된다.
‘하긴. 이름부터 야훼인데. 이상할 것도 없네.’
피식 웃음을 흘리는 시문.
이내.
‘그럼 내가 지닌 레메게톤의 원본 속에, 루시퍼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단 말인데…….’
밤의 여신 닉스가 자신의 회귀 사실을 눈치챘던 것처럼 말이다.
‘잠깐. 설마 내 회귀 사실까지도?’
웃음기를 지운 시문의 미간이 좀 더 깊게 파였다.
‘그럼 이 사실을 다 알고서도,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내 뜻에 따르라고 한 거야?’
그의 딸인 가브리엘의 깨달음을 얻게 해 준 보상일까?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루시퍼가 저지른 일들이 상당해 보이는데…….’
바알을 비롯한 성좌들의 반응도 그렇지만.
라파엘이 자신을 이곳으로 소환하고.
가브리엘이 저렇게 급발진한 이유도, 따지고 보면 다 루시퍼 때문이 아니던가?
뭔가 보통 사연이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그냥 넘기다 못해, 자신의 뜻에 따르라니?
이는 시문의 성좌들도 같은 생각인지.
-흥. 망할 노친네. 여전히 속을 모르겠다니까.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언제 속내를 내비치던 존재던가? 제 모습조차 제대로 드러내지 않는 이거늘.
-음.
저마다 야훼의 행동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그때.
“시문 님.”
가브리엘과 라파엘이 다가온다.
깨달음을 얻게 해 준 덕분일까?
라파엘만큼은 아니더라도.
가브리엘은 무표정하지만, 어딘가 유수한 은청색의 눈으로 물었다.
“생각이 많아 보이시는군요. 뭔가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아. 그게 말이죠…….”
‘당신네 아버지가 도통 무슨 생각인지 감이 잡히지 않아요.’
라고 말할 수 없던 시문은 잠시 말을 흐리더니.
“악기에 대해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었어요. 사실 제가 원해서 얻은 힘은 아니거든요.”
장난스러운 미소를 걸치며 답했다.
실제로 거짓말도 아니었다.
‘애당초 우정의 선물이라며 루시퍼가 멋대로 주기도 했고. 악기를 얻기 전엔, 나도 어떤 힘인지 전혀 몰랐으니까.’
루시퍼가 갑작스레 보냈던 선물.
심지어 갑작스레 터진 기파로 나름 곤란도 겪지 않았던가?
그런 시문의 진심을 느꼈는지.
“그건 이제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라파엘은 따스한 미소로 고개를 저었다.
“처음 시문 님을 이곳으로 초대한 것은 악기의 획득 경로와 루시퍼의 행방에 대해 묻고자 함이었지만…….”
잠시 빛이 쏟아졌던 하늘을 힐끔거리는 라파엘.
“아버지께서 당신의 뜻에 따르라고 하셨으니까요.”
“맞습니다.”
묵묵히 있던 가브리엘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보탰다.
“사실과 거짓의 여부를 떠나서. 아버지께서 그대의 뜻에 따르라 명하신 이상, 그저 그대의 뜻대로 하면 됩니다.”
그에.
“내 뜻대로라…….”
가브리엘의 말을 곱씹던 시문.
‘이러면 루시퍼에 대해선 더 언급할 필요도 없겠네.’
이미 신화 스탯 악기가 어떤 위력을 보이는지는 몸소 체감한 상황.
라파엘의 말대로 이 악기가 루시퍼의 고유 기운이라면.
여기서 그를 내쫓아 봐야, 악기를 잃을 확률이 높았다.
거기다.
‘루시퍼가 직접 말했었지. 자신의 본신은 따로 있다고.’
루시퍼는 아르스 테우르기아의 그는 본신이 아니라고 했었고.
시문의 성좌들 역시 루시퍼의 본신이 어디 있는지 모르지 않던가?
‘괜히 내쫓았다가, 지구의 재앙으로 돌아와 버리면 나만 골치 아프니까.’
생각을 정리한 시문은 한결 짙어진 미소로 답했다.
“그럼 전 여기 불려 와 시간만 낭비한 게 되네요? 괜한 일도 겪고.”
“그 부분은 정말 미안해요. 의도한 건 결코 아니었어요.”
“제 무례에 대해선 어떤 변명도 하지 않겠습니다.”
고개까지 숙여 가며 사과를 표하는 라파엘과 가브리엘.
나름 분위기를 풀어 보고자, 장난스럽게 말한 것이건만.
‘이게 아닌데…….’
진지하게 사과하는 두 대천사에 시문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이내.
“뭐, 좋아요.”
이왕 이렇게 된 거.
“전 플레이어니까. 말로만 그러지 말고, 깔끔하게 보상으로 정리하죠?”
시문은 대놓고 보상을 요구했다.
“저도 딱히 루시퍼에 대한 정보를 드리진 못했지만, 헛걸음에 시간 낭비를 한 건 사실이잖아요?”
“물론이에요. 애당초 루시퍼의 행방도 맨입으로 알려 달라는 마음은 없었답니다.”
라파엘은 따스한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가브리엘이 난입하기 전까지.
그녀는 시문이 플레이어임을 알고, 나름의 보상까지 준비해 두지 않았던가?
“이건 보상으로 준비했던 저의 힘이 담긴 성물이에요. 루시퍼의 정보와 상관없이, 사과의 뜻으로 드릴게요.”
라파엘은 어느새 금색의 빛무리로 조형된 십자가를 내밀었다.
대천사 라파엘의 힘이 담긴 성물.
그녀의 이명이 치유의 대천사임을 고려해 보면.
‘보나 마나 치유와 관련된 힘이 담긴 성물이겠지.’
당연히 천계의 대천사는 상위 서열 성좌인 만큼.
저 성물에 담긴 치유력은 가히 상상을 초월할 수준일 터.
‘잠깐. 그러고 보니 체르노젬 사건이 얼마 남지 않았지?’
추수의 계절인 가을에 터지는 체르노젬 사건.
물론 그전에 손을 쓸 생각이긴 했지만.
‘혹시 모를 보험으로 치유력을 지닌 성물도 나쁘진 않은데…….’
어차피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는 생명체만 치료가 가능하지 않은가?
체르노젬에서 벌어지는 일을 되짚어 보면.
라파엘의 힘이 담긴 성물은 만일을 대비했을 때, 아주 요긴하게 쓰일 터였다.
그래.
만일을 대비했을 땐 말이다.
‘보험은 말 그대로 보험일 뿐, 라파엘의 성물이 쓰일 상황까지 가지 않을 수도 있어.’
그렇게 되면 저 보상은 큰 쓸모가 없게 된다.
‘애당초 필요하면 성물이 아닌, 신화급 물건을 연성하면 되기도 하고.’
고로.
“무척이나 마음에 듭니다만. 다른 걸로 받을 순 없을까요?”
“다른 거요?”
저런 1회성의 성물이 아닌, 지속적으로 효력을 얻을 수 있고.
나아가 앞으로의 가능성까지 지닌 형태의 보상이 필요했다.
시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이전부터 유정이와 접촉이 있던 것으로 압니다.”
“맞아요. 이유정 님은 천사장을 제외한 저희 모두가 관심 깊게 보고 있는 플레이어죠.”
“천사장을 제외한 모두가요?”
“그럼요. 천족이 인간으로 잘못 태어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성력에 관한 잠재력이 상당하거든요.”
“허어……. 그건 몰랐네요.”
비록 신왕급인 천사장이 제외되긴 했어도.
대천사들은 성력 부분에서 하나같이 상위 서열의 성좌 아니던가?
그런 대천사들의 주시를 한 몸에 받고 있다니?
‘과연 우리 유정이야!’
역시 내 동생.
그러한 뿌듯함에 시문은 잠시 흐뭇한 얼굴이 되었고.
그런 시문의 미소를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시문 님께서 뭘 원하시는지 알겠네요. 후후. 정말 자애로우신 분이군요.”
따스하게 웃은 라파엘은 말을 이었다.
“이 성물 대신, 제가 이유정 님에게 그만한 후원을 하길 바라시는 거군요?”
뭔가 약간의 오해가 있는 듯했으나.
“맞습니다.”
결국 결론은 같았기에.
시문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힐러계에선 최고로 평가받는 유정이다.
라파엘에게 다양한 후원을 받는다면 그 성장력은 엄청날 터.
앞으로 그 성장력을 바탕으로 활약할 그녀의 가치는 1회성 성물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또한.
‘혹여나 체르노젬에서 문제가 생긴다 해도, 그땐 라파엘의 후원을 받는 유정이의 도움을 받으면 되니까.’
그것도 1회성 성물과 달리, 여러 번이나 말이다.
하나.
“좋아요. 단! 아버지께서 인정하신 분이고. 가브리엘과 더불어 혈육이 아닌데도 유정 님을 이렇듯 챙기시니…….”
이런 시문의 계산까진 미처 알지 못하는 라파엘로선.
“대천사로서 그냥 받아들일 수만은 없죠.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유정 님을 후원할게요.”
그저 시문의 자애에 대해 감탄만을 보내올 뿐이었다.
그녀의 말에 시문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다, 고개를 갸웃했다.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후원.
그건.
“그런데 라파엘. 그 정도면 그냥 유정이의 배후성이 되는 편이 낫지 않나요?”
사실상 배후성과 다름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냥 배후성이 되는 게 라파엘에게도 여러모로 좋을 텐데?’
그러한 시문의 의문에.
“그게…….”
라파엘은 조금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시문과 가브리엘을 힐끔거리더니.
“실은……. 유정 님께는 이미 배후성 제의를 했으나, 거절당했답니다.”
씁쓸한 미소로 답했고.
“거, 거절을 당해요?!”
시문은 두 눈을 부릅떴다.
그도 그럴 것이.
“아니! 대체 왜요?”
라파엘은 상위 서열의 성좌 아닌가?
그것도 성력을 지닌 유정이에겐 더없이 완벽한 성좌일 텐데?
그러나.
“라파엘뿐만이 아닙니다. 시문 님.”
시문의 충격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저와 다른 대천사인 우리엘 역시, 그녀에게 배후성 제의를 거절당했습니다.”
무표정하게 말을 내뱉는 가브리엘.
그녀의 말에 시문은 입을 떡 벌렸다.
‘아니……. 유, 유정아?’
전생에 등장한 대천사는 라파엘뿐이라, 다른 대천사들의 힘은 잘 알지 못하지만.
같은 상위 서열의 성좌들인 만큼, 분명 대단한 힘을 지닌 존재들일 터.
‘유정이는 시혁이처럼 따로 배후성을 못 두는 특성도 없을 텐데…….’
왜 대천사들의 제의를 거절한단 말인가?
놀란 시문을 가만 보던 가브리엘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거절 이유도 물어봤습니다만.”
“뭐, 뭐라던가요?”
“자신은 천사들을 배후성으로 둘 자격이 없다더군요.”
“예? 그게 무슨 소립니까?”
“그야 저희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가브리엘은 그때를 회상하듯.
허공을 보며 잠시 말끝을 흐렸다.
이내.
“그때 그녀의 눈은 한때, 제가 존경했던 이의 눈과 똑같았습니다.”
“존경했던 이?”
시문의 되물음에 잠시 멈칫한 가브리엘은 드물게 인상을 찌푸리더니.
“예. 복수를 갈망하는 눈. 그녀의 눈은 분명 천사가 타락하기 직전의 눈이었죠.”
내키지 않는 듯 답했고.
“복수……?”
시문의 얼굴은 급격히 어두워졌다.
짐작 가는 바가 있는 것이다.
‘설마……. 이순철 회장의 일을 아직 마음에 두고 있는 건가?’
이순철 회장.
전생에서 이유정의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되었던 존재.
‘그 일은 다 털고 일어난 줄 알았는데…….’
설마 이순철 회장을 암살한 데스페라도나 대륙성에 대한 복수심인 것일까?
아니면 자신이 모르는 다른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따로 알아봐야겠군.’
그렇게 마음을 다잡은 시문의 귓가로.
“아마 이유정은 괜찮을 겁니다.”
가브리엘의 무심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그녀는 천족이 아닌 인간. 복수심에 불탄다 해서, 저희처럼 근본이 변해 버리진 않으니까요.”
“근본이 변해요?”
“예. 설령 그녀가 천륜을 거스른다 한들. 성력을 잃거나, 아예 다른 존재가 되는 건 아니잖습니까?”
가브리엘의 말에.
‘하긴. 전생에도 그랬지.’
이순철 회장과 대한민국 수뇌부들의 머리를 생방송으로 날려 버리던 그 장면이 떠오른다.
그러고 난 후에도.
이유정은 뒤늦게 도착한 각성자 진압 부대마저 압도적인 성력으로 쓸어버리고.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으니까.
어쨌거나.
‘유정이만 괜찮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지.’
유정이에게 나쁜 문제만 생기지 않는다면.
그녀가 어떤 복수를 행하든 상관은 없었다.
‘내겐 내 사람이 먼저니까.’
마음이 한결 편해지자.
“생각해보니 그렇네요. 조언 감사해요. 가브리엘.”
시문은 그 감정을 그대로 담아 감사를 표했고.
“따, 딱히 조언이랄 것도 없습니다!”
어울리지 않게 잠시 당황을 내비치던 가브리엘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에.
“호호! 딱히 천륜을 저버리지 않아도, 변하는 근본이 있긴 하네요.”
라파엘은 영문 모를 웃음을 흘렸고.
“흠! 그나저나, 저에겐 따로 원하는 것이 없으십니까?”
가브리엘은 라파엘의 말을 자르듯.
황급히 헛기침을 하며 시문을 향해 물었다.
“원하는 거요?”
“예. 제가 범한 원을, 당신은 은으로 돌려주지 않았습니까? 저 역시 확실한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아아. 보상 말이군요.”
고개를 끄덕인 시문은 잠시 턱을 괴었다.
‘가브리엘에게까지 보상을 받을 생각은 못 했는데…….’
이내.
“아! 하나 있긴 하네요.”
시문이 손바닥을 딱 치며 답하자.
“그게 뭐죠? 말씀만 하십시오.”
가브리엘은 어딘가 불안한 눈으로 라파엘을 힐끔거리며 빠르게 물어왔다.
* * *
녹색의 바다가 펼쳐진 듯.
말로 차마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자연 경관.
그 속에선.
“헤헤! 뀨웅아! 여기야!”
-뀨웅!
한 아이와 알록달록한 용족.
-꺄하하! 시여나~ 같이 가!
-뀨웅이 등에 타니까 엄청 재밌어!
그리고 형형색색의 정령들이 연신 웃음을 터뜨리며 뛰놀고 있었다.
얼마 가지 않아.
한눈에 담기지도 않는 거대한 고목.
“에르네! 에르네! 나 와써요! 뀨웅이도!”
-뀨우!
그곳에 도착한 아이와 용족은 한 여성을 향해 힘차게 소리쳤고.
-우리도! 우리도 왔어!
-맞아! 에르넨! 우리도 왔어!
뒤따른 수십의 정령들 역시 메아리처럼 따라 말했다.
“후후. 여긴 부딪칠 곳이 많으니까. 조심해야 하는 거 알죠?”
에르넨은 싱그러운 미소로 그런 방문객들을 맞았다.
그때.
“음?”
싱그러웠던 에르넨의 미소가 사라진다.
이유는 간단했다.
아아~.
성가와 같은 이명과 함께.
화아아아아아!
거룩한 빛무리가 드넓은 녹음 위로 쏟아졌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