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0화
220화. 핏빛 심연 (3)
저편의 촉수들을 연상시키듯.
붉은 문틈 사이로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검붉은 마기.
단순히 그 외향뿐만이 아니다.
부그르르.
봉인이 완전히 깨진 것인지.
흘러나온 마기는 아즈쉬타의 심해수를 들끓게 할 정도로 강력한 기운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
시문은 순도 높다 못해, 위험한 수준의 마기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시문만이 아니었다.
키이이잉!
연신 날카로운 이명을 토하고 있는 왼쪽 눈.
정확히는 오딘의 눈에 추가된 마안도 발광 수준으로 날뛰고 있었다.
또한.
‘바알과 천마가 반응한 것도 그렇고. 확실하겠군.’
성좌 바알과 천마.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6명의 성좌 중 둘이 가지는 공통점은 하나.
바로 마기였기에.
‘이 너머에…… 레메게톤의 원본이 있는 거야.’
시문은 핏빛 심연의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런 시문의 귓가로.
-이게 어찌…….
당혹스러움을 담은 황홀한 이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가 공주 아샤즈였다.
-왕이시여. 정말 괜찮으시단 말이오?
그녀는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마기.
그것과 접촉하고도 멀쩡한 시문을 불신의 눈으로 바라봤다.
무리도 아니었다.
‘저건 태초의 마기이거늘!’
핏빛 심연의 문에서 흘러나오는 마기.
나가 왕족의 비사엔 태초의 마기로 서술된 저 기운은.
‘왕께서 마기를 다루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마족도 급에 따라 독이 되는 마기인데…….’
마기를 사용하는 종족인 마족조차 급이 낮으면 목숨이 위험할 수 있는 태초의 마기였으니까.
그런 아샤즈의 불신이 뒤섞인 염려에.
“전 괜찮아요.”
시문은 괜찮다는 듯, 미소로 화답했다.
도리어 한발 나아가.
“오히려 편한걸요?”
어느새 스멀스멀 자신을 옭아매는 마기를 휘감는 시문.
놀랍게도.
스르륵.
마족에게도 독이 되는 태초의 마기는 부드러운 비단처럼 시문의 전신을 휘감아왔다.
마치 본래부터 그의 기운이었다는 듯 말이다.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그 모습에.
-……그래 보이는구려.
아샤즈는 헛웃음을 머금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내.
-그럼 문을 열겠소.
핏빛 심연의 문으로 향하는 아샤즈.
하나.
스륵.
-음?
문틈에서 흘러나온 마기는 아샤즈의 접근을 부드럽게.
그러나 단호하게 가로막았고.
스르르.
다른 마기들이 움직여.
“어?”
뒤편에 있던 시문을 먼저 끌어왔다.
꼭 입장에 순서를 두는 것처럼 말이다.
기운이 의지를 가지고 순서를 나누는 이 불가사의한 광경에.
-……아무래도 왕께서 먼저 입장하시는 것이 나아 보이는구려.
아샤즈는 어이가 없으면서도.
어딘가 납득하는 얼굴로 한 걸음 물러났고.
“그, 그러죠.”
왠지 뻘쭘해진 시문은 볼을 슬쩍 긁으며 핏빛 심연의 문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그그극.
돌이 갈리는 소리와 함께 입구가 열리는 핏빛 심연.
내부엔 우주에 뿌려진 액체처럼.
막대한 양의 검붉은 마기가 일말의 변화도 없이 중앙을 맴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앙.
고대 그리스의 석조물과 비슷한 양식의 익숙한 제단이 자리하고 있었다.
‘플래티넘 데뷔전에서 아르스 게티아를 봤을 때랑 똑같네.’
지난 플래티넘 데뷔전에서 처음 아르스 게티아를 만났을 때처럼.
제단 위에 놓인 물건은 눈을 깜빡일 때마다, 책과 열쇠의 형태를 오가고 있었다.
단, 그때와 한 가지 다른 것이 있다면.
‘붉은색이 반이네.’
완전 흑색이었던 아르스 게티아와 달리.
눈앞의 원본은 핏빛 심연처럼 검붉은색을 띠고 있다는 것.
[성좌 바알이 ‘으음.’ 놀란 눈으로 고개를 끄덕입니다.]
[성좌 천마가 ‘이런 곳에 숨겨져 있었을 줄이야. 솔로몬. 고놈도 참 지독하군.’ 혀를 찹니다.]
[성좌 제우스와 오딘, 검은 염소와 라가 고개를 끄덕입니다.]
주르륵 떠오르는 성좌들의 반응.
그에.
‘솔로몬이라…….’
잠시 솔로몬이라는 이름을 곱씹던 시문은.
‘전생에도 후원자 없이 이름만 잠시 등장했던 성좌였는데. 상위 서열 성좌들에겐 유명한 성좌인가?’
전생의 기억을 잠시 되새기곤.
‘어차피 지금은 소정규니까. 솔로몬은 그때 가서 알아봐도 늦지 않겠지.’
고개를 슬쩍 저으며, 제단을 향해 다가갔다.
스륵.
흡사 기체로 이루어진 형태를 만진 것처럼 부드럽게 흩어지는 레메게톤의 원본.
시문은 그것을 향해 손을 뻗었고.
기체는 시문의 손에 이끌려 제단에서 벗어났다.
그러자.
-잠시만 왕이시여!
다급히 들려오는 황홀한 이명.
-아무리 그래도 직접 손을 대는 것은 위험하오!
팔이 없어 다소 불편한 걸음걸이긴 했으나.
아샤즈는 다급한 얼굴로 시문을 만류하려 했다.
하나 거기까지.
-세, 세상에…….
고고하던 나가 공주의 입이 떡 벌어진다.
무리도 아니었다.
‘저건 마계의 최고 성좌. 바알의 저주를 받은 물건이거늘……!’
바알.
마계 성좌들 중 서열 1위이자, 마계의 최강자.
당연히 신왕급으로 꼽히는 그는 말로 전부 서술할 수 없을 만큼 강대한 존재였고.
그런 존재의 저주를 받은 물건은 당연히 같은 성좌급이 아니고서야.
-…….
감히 건들 수도 없어야 했는데.
분명 그랬는데.
“아샤즈?”
마치 본래부터 제 물건인 것마냥.
그것을 한 손에 둥둥 띄우며 자신을 바라보는 시문.
그에 잠시 말을 잃었던 아샤즈는.
-……아니, 아무것도 아니오.
시문에 한해선 ‘상식적인 영역’을 아예 닫아버렸다.
‘올림푸스의 무구들도 그렇고. 천마신공도 사용하는 분이니, 바알과 연이 있다 해도 딱히 이상할 것도 없지.’
고개를 절레 젓는 아샤즈.
실제로 그녀의 예측은 완벽했다.
[성좌 바알이 ‘으음.’ 묵묵히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녀가 그토록 걱정했던 저주의 당사자.
성좌 바알은 시문이 레메게톤의 원본을 가지길 바라는 것이다.
단지.
이전과 다른 것이 하나 있었다.
[성좌 검은 염소가 ‘이봐. 정말 괜찮겠어? 2장은 빼는 게 더 좋지 않냐?’ 바알에게 묻습니다.]
[성좌 라가 ‘그러게 말입니다. (괜히 그 고리타분한 놈에게 빌미 주지 말고, 우리 6명으로 끝내자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성좌 바알이 ‘으음…….’ 잠시 고민을 합니다.]
바로 앞선 ‘아르스 게티아’의 획득 때와 달리.
다들 그리 기뻐 보이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반응이 왜 저래?’
성좌들의 미적지근한 반응에 시문은 곧바로 정보창을 확인했다.
[아르스 테우르기아]
등급 – 신화
다섯 개로 이루어진 레메게톤의 두 번째 장이자 열쇠.
다섯 가지를 모두 모을 시, 레메게톤을 얻을 수 있다.
‘설명은 아르스 게티아와 크게 다를 바가 없는데?’
첫 번째 원본인 아르스 게티아와 크게 다를 바가 없는 정보창.
그에 시문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일단 승급전 중이니까. 끝나고 차차 확인해보자.’
아직 다이아 승급전 중이었기에.
아르스 테우르기아를 인벤토리에 챙긴 시문은 봉인지를 나섰다.
* * *
핏빛 심연의 입구.
맵의 지형이 아닌, 정말로 그 입구에 선 시문은.
“아샤즈. 정말 제가 가져가도 괜찮은 거예요?”
재차 아샤즈를 돌아보며 물었고.
-후후. 정말 괜찮다오.
아샤즈는 미소를 머금은 채.
-아르스 테우르기아는 여왕에게나 필요한 물건. 오히려 왕께서 가져가시니 달가울 따름이오.
우아하게 고개를 저었다.
하나 그녀의 답에도 안심이 되지 않는지.
“듣기론 여왕이 꽤 지독한 성격 같던데…… 이대로 아무런 득도 없이 돌아가면 아샤즈가 위험하잖아요.”
시문은 우려 섞인 얼굴로 말했다.
의외의 걱정이었을까?
잠시 눈을 깜빡인 아샤즈는.
-그럼 본녀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아르스 테우르기아를 요구한다면. 왕께선 주실 수 있으시오?
진중한 얼굴로 되물었고.
놀랍게도.
“물론이죠.”
시문의 대답은 곧장 튀어나왔다.
정말 예상치도 못한 답이었는지.
-…….
아샤즈는 입을 슬쩍 벌리며, 침묵에 빠져들었다.
이내.
-본녀가…… 감히 그 연유를 물어도 되겠소?
침묵을 깨뜨린 그녀는 미약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고.
“아샤즈는 제 동료잖아요. 그 목숨을 구할 수 있다면야, 아이템쯤이야 아깝지 않죠.”
싱긋 웃으며 답하는 시문.
물론.
‘어차피 이것 말고도 내겐 신화급 무구는 많기도 하고. 연금술의 성장도 계속될 테니, 정 필요하면 그때 만들면 되니까.’
신화급 무구가 이미 많은 시문에겐 아쉬울 게 없을뿐더러.
나름의 뒤가 있기에 할 수 있는 말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하나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하는 아샤즈로서는.
-동료라…….
아까보다 더욱 떨리는 목소리로 시문의 답을 곱씹을 따름이었다.
무언가 생각이 많은 것인지.
-그렇구려. 이것이 그대의…….
혼자서 작게 중얼거리던 그녀는 이내 고개를 들었다.
-……왕의 뜻은 내 잘 알겠소.
나가 특유의 날카롭고 사나운 눈이었으나, 무언가를 결심한 이처럼.
어딘가 시원스럽고 결연한 눈빛으로 시문을 바라보는 아샤즈.
이내.
미소를 머금은 아샤즈는 답지 않게.
-하나 본녀에게 넘길 필요는 없소. 농으로 던져 본 말일뿐더러.
장난스러움이 묻어나는 몸짓으로 상체를 슬쩍 털었다.
-보다시피 여왕의 질책을 피할 명분은 이미 마련된 상태라서 말이오.
휑한 그녀의 어깨가 물속에서 팔랑인다.
그에 피식 웃은 시문 역시.
“정말이죠? 나중에 서운하다고 해도 못 물려요.”
장난스러운 미소로 답해주었고.
-후후. 그건 확답해드릴 수 없겠구려. 본디 여인의 마음은 해초와도 같으니.
같은 미소로 되받은 아샤즈는 예를 갖춰 몸을 숙였다.
-그럼 본녀는 이만 실례하겠소이다. 다시 뵙는 날을 고대하겠소.
“조심해서 가요.”
몸을 돌려 나아가는 아샤즈.
-아.
멀어지던 그녀의 움직임이 잠시 멈춘다.
시문을 돌아보는 아샤즈.
-다이아 승급. 진심으로 축하드리오.
황홀한 이명의 목소리가 건네는 축하와 함께.
[제한 시간이 끝났습니다.]
[다이아 승급전이 종료됩니다.]
아레나 종료를 알리는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 * *
서울 강남의 한 빌딩.
“흐흥~”
세련된 높은 빌딩의 복도엔 한 금발의 남성이 빠른 걸음으로 흥얼거리고 있었다.
‘이것만 결재받으면 셀리랑 즐거운 저녁을…… 흐흐!’
깔끔하게 묶어 내린 포니테일의 흑발.
최근 한국 지부로 지원 온 셀리를 떠올린 남성의 미소는 떠나질 않았다.
결재 사인으로 그의 퇴근을 확정 지어 줄 여성.
“……누나. 뭐해?”
제 누이를 보기 전까진 말이다.
정확히는.
“옆에 서류들은 뭔데? 점심때 줬던 그대로잖아!”
그녀의 책상에 쌓인 서류 더미라고 해야겠지.
하나 삿대질까지 해가며 언성을 높이는 남동생의 무례에도.
오피스 정장에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짐 없는 금발의 여성.
“…….”
올리비아는 멍하니 한곳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성을 토하던 올리버 역시 자연스레 그런 누이의 시선이 바라보는 곳으로 향했고.
볼 수 있었다.
[아, 죄송합니다. 여러분. 잠시 송출을 중단해야 하는 일이 있어서요.]
세계를 흔들고.
겨울 여왕이라 불리는 악마 같은 누이까지 뒤흔들었던 남자.
[다이아 랭크로 승급했네요. 다들 응원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김시문?”
김시문을 말이다.
화면을 본 올리버의 얼굴이 점차 해괴해진다.
“설마…… 지금까지 김시문 방송을 보고 있었던 거야?”
결국.
“결재 업무까지 미루면서?!”
경악으로 넘어가는 올리버의 얼굴.
무리도 아니었다.
‘뉴욕에 아웃 브레이크가 일어났을 때도, 자기 서류 결재는 마무리하던 인간인데!’
비록 아웃 브레이크의 규모 자체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아웃 브레이크란 것 자체가 갤럭시 아레나 이후 몇 번 없었던 일이었기에.
당시 미국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살벌했었다.
온갖 사이비, 종말론자들이 날뛰었던 건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미국 전역이 떠들썩했던 아웃 브레이크에도.
칼같이 제 일을 처리하던 누이가 고작 아레나 방송 하나에 업무까지 뒤로하다니?
“뭐라고 답 좀 해 보라고!”
버럭 소리를 내지르는 올리버.
효과가 있었던 것일까.
“이!”
쾅!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는 올리비아.
그에 자연스레.
“헉!”
올리버는 몸이 기억하는 대로 가드를 올렸으나 그뿐.
여느 때와 같은 하이킥이 날아들지는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누, 누나?”
악마 같은 누이는 그를 징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후원이라니!!”
순수하게 책상에 놓인 화면.
즉, 시문의 방송을 보고 일어난 것이었으니까.
올리버는 좀처럼 보기 힘든 누이의 경악에 고개를 갸웃했다.
‘후원?’
유망주들의 방송을 하루 이틀 보는 것도 아니고.
올리비아 역시도 아레나를 진행할 때, 많은 팬들에게 받는 것이 후원 아니던가?
뭐 그리 놀랄 일이냐는 생각으로 누이의 책상에 다가간 올리버는.
“미, 미친!!”
누이와 똑같은.
아니.
보다 더한 경악을 내뱉었다.
무리도 아니었다.
[?? 차원의 ?????? 님이 AP 1,000,000을 후원하셨습니다.]
=당신. 인간 종족이 맞습니까?
제대로 표기조차 되지 않는 이름.
그러나 그간 봐온 지구의 것과는 아예 다른 후원 메시지가 떠올라 있지 않은가?
그것도.
[????차원의 ?? 님이 AP 1,000,000을 후원하셨습니다.]
=어느 차원의 소속인지 궁금하군.
[??? 차원의 ?????? 님이 AP 1,000,000을 후원하셨습니다.]
=자네. 혹시 우리 차원으로 전향할 생각 없나?
환전 시 100억이 넘어가는 AP로 줄줄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