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8화
218화. 핏빛 심연 (1)
차원 아즈쉬타.
대부분이 바다로 이루어져 있는 이 차원은 깊고 어두운 바닷속이 품은 수많은 비밀과 달리.
해수면 자체는 창공을 연상시키듯.
푸르고 잔잔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달랐다.
스으으.
본래부터 물결이 거칠기로 유명했던 영역부터.
미미한 파동 하나 들이치지 않는 영역까지.
마치 농익은 논밭 위로 바람이 스쳐 가듯.
아즈쉬타의 해수면 위로 크고 작은 파도들도 들썩이기 시작했고.
하나같이 어디 한 곳을 향해 점점 모여들고 있었다.
그리고 이 현상 원인인 한 해수면엔.
솨아아아아!
영역 하나가 통째로 구멍이라도 난 듯.
어마어마한 크기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보통 이를 본 이들은 해양지각에 거대한 구멍이 생기거나.
해저에서 일어난 화산폭발의 반향 때문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게 바다 소용돌이가 형성되는 일반적인 원리였으니까.
하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으. 으아악!”
“끄아아아아!”
“사, 살려!”
갑작스레 찾아온 심장마비처럼.
아무런 전조도 없이 찾아온 소용돌이.
이 원인 모를 대재앙에 휘말린 이들은 종족, 무력의 고하를 불문하고.
무기력하게 비명만 지를 따름이었다.
물론.
“더는 안 돼! 성력이…….”
“보, 보호막에 금이 간다!”
“수속성 마법이 먹히질 않아. 내 특성도!”
“엔다이론! 어떻게 좀 해봐!”
다이아 랭크 승급전인 만큼.
뛰어난 이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버티고 있었으나 그뿐.
말 그대로 ‘버티고’ 있는 것이지.
난데없이 등장한 대재앙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무엇보다도.
“소용돌이는 그렇다 치지만. 저 빛은 대체!”
아즈쉬타의 바닷속을 낮처럼 밝혀버린 새하얀 구체 하나가.
파직.
이 소용돌이의 중심에서 잦은 스파크를 흘리며 발광하고 있지 않은가?
“딱 봐도 터지기 직전이잖아…….”
“그땐 우리 다 죽는 거야!”
“아즈쉬타에 이런 맵 특성이 있다는 소린 못 들었다고!”
“티밍이고 지X이고 당장 활로를 찾아!!”
그나마 이 거대한 해류에 저항하던 플레이어들이 삽시간 뭉친다.
그들은 소용돌이에 저항했던 무력을 한 대 모아.
“엔다이론! 이쪽이야!”
“흐아압!!”
“물이여. 갈라져라!”
일점을 정해 쏟아부었다.
헛된 노력은 아니었는지.
스륵.
“뚜. 뚫렸다!”
“소용돌이가 갈렸어!”
“어서 움직여!”
휘몰아치는 태산과도 같은 소용돌이에 틈이 생겼고.
플레이어들은 화색을 지으며, 그곳으로 내달렸다.
그렇게.
“그래! 아무리 아즈쉬타의 해류라도 내 SS급 특성인 물의 지배자 앞에선 어림없지!”
틈을 만드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생선 머리의 플레이어가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왔다.
물론 가장 위험한 중심부에서 벗어났다 뿐이지.
솨아아아!
여전히 일대는 거친 해류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하지만.
‘좋아! 이 정도 물살이면 헤엄치는 덴 문제 없어!’
SS급 물 관련 특성을 지닌 생선 머리의 플레이어에게는 문제도 아니었고.
생김새대로 물에서 살아가는 종족인지.
생선 머리의 플레이어는 난폭한 해류를 유연하게 헤엄쳐나갔다.
이내.
“잠깐.”
빠져나가던 생선 머리의 플레이어가 움직임을 멈춘다.
‘급하게 도망갈 필요는 없잖아?’
눈을 끔뻑인 그는 천천히 뒤를 돌아봤고.
“미, 밀지 마! 밀지 말라고!”
“머리통을 깨놓기 전에 당장 비켜라!”
“내가 먼저야!”
그곳엔 소용돌이의 좁은 틈을 서로 빠져나오려는 플레이어들로 가득했다.
그를 본 생선 머리의 플레이어는.
‘이건 오히려 기회다!’
눈을 번뜩이며 물칼퀴가 달린 양손을 펼쳤다.
‘서바이벌형 승급전은 무조건 킬 수가 우선 순위, 여기서 무지성으로 공격만 쏟아 낸다면…….’
1대1로는 잡기 힘들었던 상위 플레이어들을 대거 쓸어버릴 수 있었다.
당연히 그 과정에서 나오는 킬 수는 말할 것도 없었지.
“크핫!”
광소를 터뜨리는 생선 머리의 플레이어.
우웅.
물갈퀴 달린 두 손으로 짙푸른 기운이 흘러나온다.
그에 호응하듯.
솨아아.
거세게 휘몰아치던 주변의 바닷물들이 급속히 모여들었고.
곧 온갖 형태의 투사체로 조형되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물이여. 틈을 조여라!”
SS급 특성 물의 지배자.
그 이름에 걸맞게.
꾸드드.
기껏 벌려놨던 소용돌이의 틈은 점차 좁아지기 시작했다.
당연히.
“뭐, 뭐야?!”
“틈이 좁아진다!”
“이런 미친! 빨리 나와!!”
빠져나오려던 플레이어들은 더욱 안달이 났고.
그런 이들의 위로.
쐐애애액.
바닷물로 조형된 투사체들이 쏟아졌다.
“흐흐! 킬은 잘 먹어주마!”
곧 이어질 킬 소식에 생선 머리의 플레이어가 즐거운 미소를 짓는 순간.
파직.
“응?”
굵직한 벼락 한 줄기가 생선 머리의 플레이어를 스쳤고.
이를 신호로.
파츠츠츠측!!
소용돌이 중심부에서 두 눈이 멀 정도로 하얀 폭발이 일어났다.
아니.
이걸 폭발이라고 할 수나 있을까?
스스슥.
하얀빛에 닿은 모든 것들이 한 줌의 재가 되어 흩어진다.
두 눈이 멀어버린 것인지.
아니면 소멸된 세상은 백색으로 변하는 것인지.
모든 것이 사라져버린 백색의 세상 속에서.
‘나…… 살아는 있는 건가?’
그저 멍하니 눈을 끔뻑이는 생선 머리의 플레이어.
이내.
“너구나.”
시리도록 무감정한.
그러나 절로 등허리가 저릿할 정도로 퇴폐적인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 압도적인 목소리의 주인공을 보고 나서야.
생선 머리의 플레이어는 깨달을 수 있었다.
“한창 몰이 중인데. 감히 숟가락을 올리려던 놈이.”
자신은 아직 살아 있으며.
이 강렬한 빛에 눈이 멀지도, 육체가 재로 타버리지도 않은 것은.
모두 저 백금의 존재의 관심 하나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거기까지 깨닫자.
‘설마…… 방금 그 소용돌이가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었다는 말이야?!’
엄청난 충격이 머릿속을 강타했다.
‘그, 그만한 소용돌이를 자가적으로 일으킨 거라고?’
물과 관련된 종족이기 이전에.
SS급 물 특성 물의 지배자를 지니고 있는 자신이다.
그렇기에 누구보다 잘 알았다.
방금 그 대재앙의 표본인 소용돌이는 자신으로선 감히 일으킬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힘이라는 걸.
심지어.
‘나만이 아니야! 우리 종족의 랭커들도 저런 규모의 소용돌이를 일으키진 못할 텐데!’
동족의 랭커들조차 엄두도 내지 못하는 힘.
물론.
‘최상위 종족인 나가나 요툰의 랭커급이면 또 모르겠지만…….’
최상위 종족의 랭커급이면 또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그 거대했던 소용돌이가 끝이 아니지 않은가?
지금 이 백색의 세상을 만든 구체까지 떠올려 보면.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일이었고.
‘애당초 그런 존재가 플래티넘일 리가 없잖아!’
다이아 승급전에 존재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 생선 머리 플레이어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쯧. 원래라면 더 끌어모을 생각이었는데…….”
백금의 존재는 혀를 차며, 그 유려한 턱을 톡톡 두드릴 뿐이었다.
그는 무언가를 보듯.
허공을 슥 훑었고.
“뭐, 468킬이 추가됐으니. 이젠 따라잡고 싶어도 불가능하겠지.”
이 상황에 대한 충격이 달아날 만큼, 파격적인 말을 내뱉었다.
“무, 무슨 소릴…….”
하나 생선 머리의 플레이어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파스스.
생선 머리의 플레이어는 재가 되어 흩어졌다.
* * *
백색의 세상이 서서히 사그라든다.
가장 먼저 들려온 건.
파지지직!
강렬한 뇌성이었다.
방금 사라진 뇌기의 세상이 아쉽다는 듯.
츠츠측.
허연 뇌기는 연신 어두워져 가는 바닷속을 날름거렸고.
솨아아아.
거세게 휘몰아치는 해류 역시.
방금의 거대했던 소용돌이가 아쉬운 듯.
연신 일대를 맴돌며, 남은 여운을 즐기고 있었다.
물론 이는 뇌기와 바다 둘에 한해서일 뿐.
=…….
=…….
=…….
방금의 광경을 목도한 타 종족들은 여운을 즐기긴커녕.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에.
-ㄷㄷ. 채팅창 고요한 거 보소.
-외계인 형들 침묵해버렸는데?
지구의 채팅창에서 의문이 올라왔으나 그뿐.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 아닐까?
-ㅇㅇ 채팅 속도 지금 반의반으로 줄어버림 ㅋㅋ
-어쩔 수 없지. 일단 새로 유입된 시청자가 절반이 넘고. 이번 마법은 꽤 봐온 나도 좀 벅차.
-그렇긴 하지 ㅋㅋ. 내가 이 형 방송 초기 청잔데. 이번 건 좀 셌음.
-ㄹㅇ 나도 거의 초기 시청잔데. 쉽지 않네.
-역시 시문햄. 씨다 씨.
이번 전투는 그간 봐온 시청자들 역시 쉽게 넘기기 힘든 광경이었기에.
지구의 채팅창도 별반 다른 것은 없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의 원인인 시문의 앞으론.
[일격에 플레이어 300명 이상을 처치했습니다.]
[업적 ‘한 방에 성좌 곁으로’를 달성하셨습니다.]
[업적 포인트 5,000점을 획득합니다.]
이번 최다킬 관련 업적이 떠올랐다.
이어.
[성좌 제우스와 포세이돈이 손뼉을 마주치며, 굉장히 흡족해합니다.]
[성좌 라가 불만스러운 눈으로 두 성좌를 흘깁니다.]
[성좌 제우스와 포세이돈이 업적 포인트 5,000점을 후원합니다.]
만족스러운 두 성좌의 반응과 함께.
업적 포인트 5,000점이 추가로 지급되었다.
‘이러면 총 만 점이니까…… 남는 장사네.’
아스트라페와 트리아이나를 최대치 이상으로 연성.
아르스 마그나로 융합까지 시킨 비용은 5,000점.
그로 인해 벌어들인 업적 포인트는 총 10,000점이니.
충분히 남는 장사였다.
거기다.
[현자의 돌이 리바운드를 최소화합니다.]
[현자의 돌의 등급과 레벨에 비례해, 소모되었던 업적 포인트 300점을 돌려받습니다.]
현자의 돌의 페이백까지.
물론.
‘기존 교환값인 500점을 기준으로 돌려주는 모양이네. 하긴, 최대치를 억지로 넘긴 거니까.’
두 무구에 각각 사용했던 1,000점이 아닌.
기존의 500점을 기준으로 150점씩 돌려주었으나.
‘따지고 보면 작은 값이 아니지.’
300점이면 헤르메스와 같은 일반적인 성좌의 무구 하나를 연성할 수 있는 값이다.
시문은 흡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곤.
‘그나저나, 라가 불만이 많나 보군.’
이전부터 꾸준히 불만을 표하는 라의 반응을 다시 확인했다.
성좌와 관련된 무구를 사용할 때마다 불만을 표하던 라.
‘뭐. 왜인지는 대충 짐작은 가지만.’
그의 불만이 무엇인지는 대충 짐작되었기에.
‘언제 각 나오면 한번 사용해줘야겠어.’
피식 웃은 시문은 다시 어둑해진 심해로 몸을 돌렸다.
* * *
아즈쉬타의 심해.
본래 해저도 보이지 않는 시커먼 어둠만이 가득해야 했는데.
해저에서 새빨갛고 음산한 기운이 핏물처럼 스며 나오며, 주변을 은은하게 밝히고 있었다.
그에.
-이곳이니라.
앞장서서 나아가던 로브의 나가가 드디어 이동을 멈춘다.
소름 끼치도록 황홀한 이명이 도착을 알려왔으나.
“이봐. 이거 일 난 거 아냐?”
뒤따라오던 거구의 여성은 좀처럼 목적지에 관심을 두지 못했다.
무리도 아니었다.
“당신도 방금 봤잖아. 바다 전체가 번쩍한 거!”
백색의 섬광.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짧다고도 할 수 없는 빛이 아즈쉬타의 깊은 심해까지 밝히지 않았던가?
“뭐, 그 덕분에 잘 찾아오기는 했지만…… 그 위력은 말도 안 되는 수준이었어. 꼭 권능과 같았다고!”
거구의 여성은 생김새와 않게 어깨를 슬쩍 떨었다.
하지만 로브의 나가는 말없이 그런 거구의 여성을 바라볼 뿐이었고.
“하여간에. 높으신 분들은 어째 죄다 똑같은지. 당신 동족들이 다 죽었을지도 모르는데. 관심이 없다고?”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콧김을 훅 내뿜은 그녀는 허공을 이리저리 터치했다.
이내.
“미, 미친!!”
찢어질 듯 커지는 여성의 두 눈.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가 펼친 아레나 보드엔.
1위 – 김시문 500킬.
2위 – ?? 39킬.
3위 – ??? 14킬.
4위 …….
거인족의 유망주인 그녀로서도 처음 보는 스코어가 기록되어 있었으니까.
‘그럼 아까 그 백색의 빛이 그 인간의?!’
그녀의 커다래진 두 눈이 파르르 떨린다.
이런 종목의 특성상.
해당 플레이어를 직접 대면해야만 이름과 같은 정보들이 떠올랐고.
그녀가 나가들과 합류한 이후.
만난 플레이어는 쉬라네를 제외하곤 딱 한 명뿐이지 않은가?
‘그럼 쉬라네는…… 죽은 거야?’
다이아 상위권의 마법계.
심지어 바다라는 환경에 나가 종족이지 않은가?
아무리 패작으로 약해졌다 하지만.
이번 승급전에서 그녀의 적수가 될 이들은 손에 꼽을 텐데.
그때.
출렁.
충격에 빠진 그녀의 감각에 무언가가 걸려들었다.
“누구냐!”
거구의 여성은 대번에 날을 세우며, 그곳을 돌아봤으나 거기까지.
“넌…….”
그녀의 경계는 금방 사라졌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협력자.
“쉬, 쉬라네?!”
쉬라네가 살아 돌아온 것이다.
물론 4개의 팔과 기다란 하반신에 구멍 두 짝이 나긴 했지만 말이다.
출혈이 상당한 것인지.
안색이 핼쑥한 쉬라네의 부상 부위에선 흘러나오는 핏물도 상당히 적었다.
그러나.
“쿠, 쿨럭!”
한 줌도 되지 않는 핏물까지 토하면서도.
그녀의 두 눈 만큼은 생기가 가득했다.
그래.
꼭 죽음 속에서 희망을 찾아낸 여타 생명체들처럼 말이다.
“위험…… 겨우…….”
힘겹게 말도 아닌 것을 내뱉는 쉬라네.
“부디…….”
그녀는 물살에 힘없이 흔들리는 손을 로브의 나가를 향해 뻗었다.
그러나.
당연히 그녀를 살려주리라 믿었던 쉬라네도.
거구의 여성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해가 가지 않는구나. 쉬라네. 네가 왜 아직까지 살아 있는 것이냐?
황홀만 목소리와 정반대되는 말의 내용 때문이었다.
하지만 두 여성의 경악은 시작일 뿐이었다.
“맵 이름이 왜 그런가 했더니. 여기 때문이었구나.”
놀랍도록 퇴폐적인 목소리.
어느새 나타난 김시문이 주변을 슥 훑더니.
“오랜만이에요. 아샤즈.”
로브의 나가를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든다.
그리고.
-아아. 그렇군. 그대가 일부러 살려 보낸 것이로구나? 여전히 영민해. 이젠 본녀가 제대로 된 예를 차려도 되겠어.
로브의 나가.
-다시 뵙게 되어 참으로 반갑소. 왕이시여.
아샤즈가 그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하는 모습에.
“이, 이게 무슨!”
“…….”
거인족 여성과 쉬라네는 입을 쩍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