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1화
211화. 힘이 다가 아니란다 (4)
TWC 채널.
러시아에서 개최되는 길드전의 전반적인 중계를 맡고 있는 이곳은.
[아아! 조나단.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저, 저도 잘 모르겠군요.]
혼란으로 가득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제 해설 인생에서 이런 일은 생전 처음 겪는군요. 마이클도 저만큼의 연차가 있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갑자기 화면 전체가 짙은 녹색으로 뒤덮였는데. 그 후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건 처음입니다!]
심드라실과 차르 길드의 플래티넘부 길드전.
그 중계 화면이 짙은 녹색 말곤 그 어떤 모습도 보이지 않는 탓이었다.
[갤럭시 아레나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걸까요? 그렇다면 선수들은 모두 무사한지가 가장 큰 관건이겠는데요?]
[고말숙과 김시문의 소환수들에게 먼저 아웃당한 니콜라이와 길드원들을 보면. 무사하기는 한 것 같습니다.]
세계 최고의 아레나 방송 채널답게.
조나단의 말에 맞춰 얼른 녹색의 화면에서 차르 길드의 대기실로 화면을 전환하는 송출팀.
그곳엔.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상부에선 뭐라는데?”
“설마 길드에서도 답이 없어?”
“빌어먹을!”
일찍이 탈락한 차르 길드의 길드원들.
대부분 전투계의 복장인 그들은 저마다 휴대폰을 보거나, 고성을 지르며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이 포착됐다.
특히.
차르의 길드원 중 가장 큰 체격을 지녔기 때문일까?
“아오! 형은 뭘 하길래 전화를 안 받는 거야!”
쾅!
니콜라이 이바노프가 거칠게 책상을 내리치곤.
불안한 얼굴로 휴대폰을 붙잡고 있는 모습이 유난히 이목을 끌었다.
화면을 보던 마이클도 답답했으나,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은 채.
[이런! 차르 길드도 아직 정확한 상황은 알 수 없나 보군요.]
세계적인 아레나 채널의 캐스터의 저력을 보여주었고.
[그런 것 같습니다. 그리고 차르 길드가 모른다면, 아마 러시아 주최 측도 정확한 상황을 알진 못할 것으로 보이네요.]
해설 조나단 역시 최대한 표정을 관리하며 상황을 정리해 나갔다.
그때.
츠측!
한쪽으로 분할시켜두었던 길드전의 녹색 화면에 노이즈가 발생했다.
[아! 무슨 변화가 생긴 걸까요? 갑자기 화면에 노이즈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마이클의 말이 끝나자마자.
스르르르.
물로 씻어내듯.
녹색의 화면이 줄줄 흘러내리며, 내부의 상황을 보여주었다.
우뚝 솟은 백금의 오벨리스크.
[어어! 심드라실의 김시문과 고말숙이 아까의 그 탑과 함께 굳건하게 서 있습니다!]
[다행히도 우리 쪽에서만 상황이 보이지 않은 거지. 길드전은 정상적으로 진행되었나 보군요.]
그 앞으로 고말숙을 곁에 딱 붙이고 있는 시문의 모습이 드러났고.
[반대로 차르 길드의 인원들은 아무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쯤 되면 심드라실의 승리가 확정적인 것 같은데요?]
해설 조나단의 말을 신호로.
[플래티넘부 길드전의 승리 길드는 심드라실 길드입니다.]
[플래티넘부 길드전을 종료합니다.]
길드전의 승리를 알리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럼 지금까진 스킬 때문에 화면이 가려진 걸까요? 그렇다면 대체 무슨 스킬이길래 송출 화면마저…….]
조나단의 추측이 끝나기도 전에.
[긴급 상황으로 길드전을 잠정 중단합니다.]
[주최 측의 대표자는 즉시 응답 바랍니다.]
심상치 않은 메시지가 화면 위로 떠올랐다.
* * *
길드전 전용 접속기기.
사람 두엇이 눕고도 충분히 남을 만한 크기의 캡슐이 열린다.
이어.
“후.”
캡슐을 빠져나온 미남자.
시문은 짧은 한숨을 내쉬며 이리저리 몸을 꺾었다.
그의 옆으로.
“이게 대체…….”
고말숙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이내.
“야. 너 뭐냐?”
그 얼굴 그대로 시문을 바라보는 고말숙.
그에.
“뭐가?”
시문은 애써 모르는 척하며 고개를 갸웃했고.
“방금 거기서 일어난 일들 말이야!”
고말숙은 답지 않게.
“어째서 에이션트 드래곤이 여기에 나타난 거야? 용제라느니, 저편의 귀빈이라느니 그건 또 뭐고? 왜 그년이 자기들한테 오라 마라 하는 건데?”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었다.
당장 에이션트 드래곤만 해도 놀라울 지경인데.
에트라가 내뱉은 말들이나, 갑작스레 등장한 그 아라크레아라는 무시무시한 존재까지.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당연히 궁금할 수밖에 없는 노릇.
시문은 그런 고말숙을 말없이 바라봤다.
가장 먼저든 생각은 다름 아니었다.
‘말숙이한테 전부 다 이야기를 해야 하나?’
드래곤 피어의 위협부터.
강대한 공허의 사도로 인한 공허의 침식까지.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 곁에 꼭 붙여두었던 만큼.
용족들과의 관계나 저편과의 관계 등을 대략적으로 들어버린 고말숙.
사실 말해주는 것 자체야 큰 문제는 아니었으나.
‘아직 플래티넘인 말숙이를 휘말리게 하고 싶진 않은데…….’
벌써부터 용족이라는 강력한 적을 만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동시에.
‘하지만 전생의 말숙이가 용족과 마찰이 아예 없었던 것도 아니고…….’
전생이라는 변명을 대어서라도.
동생들에게도 차마 꺼내지 못했던 이야기를, 지금의 상황을 이유 삼아 말하고 싶었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아…….”
시문의 입에서 짧은 탄식.
혹은 신음이라 부르기도 애매한 호흡이 흘러나왔다.
시문은 멍한 눈으로.
그러나 선명해진 정신으로 고말숙을 바라봤다.
‘나…… 외로웠구나.’
회귀라는 기적.
그것이 단순한 축복이 아니라는 것쯤은.
이번 삶은 바꿔버리겠다고 다짐한 그 날부터 알고 있었다.
용족이란 거대한 적과 마지막에 보았던 그 정체 모를 거대 눈알, 그리고 지구의 멸망까지.
어찌 보면 고작 1레벨의 플레이어였던 자신이 해결하기엔.
규모가 너무 큰 일들이었으니까.
그랬기에.
‘마냥 함께 싸우기만 하는 동료가 아니라, 이런 이야기들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던 거야.’
말만이라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하.”
피식 헛웃음을 흘리는 시문.
갑작스레 자신도 몰랐던 자신의 속내를 알게 되면.
어이가 없는 감정과 이유 모를 허무감이 밀려들기 마련이었으니까.
그리고.
“야. 김시문.”
그런 시문의 마음을 읽은 것일까.
사락.
답지 않게 시문의 옷깃을 소심하게 붙잡은 고말숙은.
“그…… 말하기 어려우면 말 안 해도 돼.”
시문처럼 복잡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난 그냥 에이션트 드래곤이니 뭐니 하면서. 갑자기 X나 위험한 새끼가 찾아오니까. 그래서…… 그 뭐냐…….”
어딘가 가려운 사람처럼.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살짝 꼬는 고말숙.
시문은 그런 그녀를 보며.
“걱정돼서?”
하고 싶어 하는 말을 정확히 짚어주었고.
“그, 그래! X발 그거!”
고말숙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물어본 거니까. 불편하면 걍 개소리 들었다 생각하고, 막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라.”
말숙이는 알까.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이 시문보다도 복잡하다는 것을.
“정말이지…….”
고개를 절레 저으며, 또다시 피식 웃음을 흘리는 시문.
그러나 이번엔 헛웃음이 아닌.
“좋아. 말숙아. 말해 줄게.”
진실로 흘러나오는 웃음이었다.
‘그래. 회귀까진 아니더라도. 지금 나와 용족, 대륙성 간의 관계 정도는 털어놓는 게 좋겠지.’
어차피 자신과 함께 가는 이상.
언젠가 맞부딪치고 알게 될 관계 아니던가?
더불어.
‘말숙이와 미리 터놓으면. 나중에 시혁이나 유정이에게도 이야기하기 편할 테니까.’
왜 그런 것 있지 않은가?
가족보단 가까운 친구에게 더 할 수 있는 말들이 많은 것 말이다.
그렇게 활짝 웃는 시문의 미소에.
“…….”
고말숙의 뚜렷한 눈매가 슬쩍 풀렸다.
하나 한결 후련해진 마음 덕분인지.
“사실은 말이야.”
그런 고말숙의 변화를 캐치 못 한 시문이 이야기를 꺼내려던 찰나.
쾅!
“오라버니! 말숙아!”
“두 분 다 괜찮으십니까?!”
방의 문이 박살 나며 이유정과 박진욱이 다급한 얼굴로 난입했고.
시문이 뭐라 답하기도 전에.
“응급 구조사들! 이쪽으로!”
“응급처치부터 해라!”
“힐러부터 입장시키세요!”
주최 측으로 예상되는 무리들이 우르르 방안으로 난입했다.
* * *
한차례의 소동이 가시고.
대기실로 돌아온 시문과 일행들의 표정은 무척이나 어두웠다.
“그러니까.”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녹색의 화면으로 전환된 이후. 차르의 길드원들은 모두 사망했다는 말이죠?”
차르 길드.
에이션트 드래곤인 에트라가 난입하기 전까지.
함께 길드전을 치루던 그들이 전부 사망했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예. 시체가 나오지 않아 확신은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만…… 방금 전, 갤럭시 아레나 측에서 사망을 선고하더군요.”
이번 길드전의 주최 측 대표라 소개한 남자.
바실리는 깔끔하게 넘긴 금발의 머리칼을 쓸며 한숨을 내쉬었다.
“해서 심드라실의 참가자들도 위험할까 판단되어, 이렇게 긴급 구조팀을 꾸려온 것이죠.”
“그렇군요.”
전부 죽었다라?
시문은 한 손으로 턱을 괴곤, 에트라가 처음 녹색의 영역을 펼쳤을 때를 떠올렸다.
‘아쉽구나. 네놈 정도면 퍽이나 좋은 에너지원이 되었을 텐데.’
그렇게 말했던 에트라의 시선은 분명.
‘중앙의 그 부글거리던 녹색 지역을 힐끔했었지.’
그로 되짚어 보건대.
‘그 부글거리던 것이 에너지화된 차르 길드의 유망주들이었나 보군.’
아마 녹색의 공간을 유지하기 위한 에너지원으로 쓰이고 있었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허참…….”
헛웃음이 절로 나오는 시문.
새삼 죽음이 눈앞까지 다가왔던 일이라는 게 체감되는 것이다.
“그래서 말입니다.”
그런 시문을 힐끔한 바실리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괜찮으시다면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차르의 길드원들이 어떻게 죽은 것인지 물어도 될는지요?”
“아…….”
시문은 난감한 얼굴로 볼을 살짝 긁었다.
“죄송하지만 그건 어렵겠네요.”
정중하지만 단호한 거절.
하나 바실리는 언성을 높인다거나, 따지고 드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역시. 시문 님께서도 갤럭시 아레나의 언질을 받으셨나 보군요.”
갤럭시 아레나.
이번 길드전이 끝나자마자, 러시아의 주최 측에 메시지를 보내온 것이다.
[해당 길드전에서 일어났던 일은 언급이 불가능합니다.]
라는 메시지를.
시문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부디 언급을 자제해달라는 메시지를 보내더군요.”
물론 신왕급 성좌들이라는 든든한 뒷배에다, 현 사건의 전적인 피해자인 시문으로선.
무시하려면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는 입장이었지만.
“자제해달라…… 참 갤럭시 아레나다운 경고로군요.”
그 사실을 모르는 바실리와 주최 측으로선.
목숨이 위험했는데도.
협박까지 당한 불쌍한 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좋습니다. 해당 길드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더 묻지 않겠습니다.”
가져온 서류에 펜을 휘갈기는 바실리.
이내 서류 작성이 전부 끝이 났는지.
“후우. 흉조는 겹쳐서 온다더니. 세르게이 대표님과 이반 님까지 암살당한 마당에 이런…….”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품속에서 담배를 한 대 빼어 물었고.
“잠깐. 뭐라고 방금 뭐라고 하셨죠?”
시문은 굳은 얼굴로 그런 바실리를 향해 되물었다.
잠시 눈을 깜빡이는 바실리.
이내.
“아, 방금 나오셨으니 소식을 못 들었겠군요.”
작게 탄식하며 고개를 끄덕인 바실리가 말했다.
“러시아의 연맹 대표인 세르게이 님과 그를 호위하던 차르 길드의 랭커 이반 이바노프 님, 그리고 상위권 플레이어들까지 모두 사망한 채 발견되었습니다.”
“그런!”
깜짝 놀라는 시문.
그도 그럴 것이.
‘러시아에서 러시아의 대표와 랭커, 최고 길드의 플레이어들이 암살당했다고?’
말이 되지 않는 일이지 않은가?
심지어.
‘이반 이바노프는 현 러시아 최고의 랭커이자, 하이랭커인 인물인데?’
물론 전생에서 러시아의 멸망과 함께 사망하긴 했어도.
그건 정규 아레나가 진행된 지 몇 년이 지났을 때의 일.
현재로선 러시아 최고의 플레이어가 이반 이바노프일 텐데.
‘암살을 당하다니?’
하나 시문의 의문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짐작되는 배후가 있는 것이다.
‘대륙성이 이번 일을 덮으려고 암살을 했나 보군.’
현 지구에서 용족과 관련된 세력은 시문이 아는 한 대륙성밖에 없었으니까.
‘보나 마나 러시아 대표 세르게이를 통해 이번 일을 꾸미곤, 수가 틀리니 증거를 인멸하려고 한 거겠지.’
하지만 한 가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있었다.
‘아무리 대륙성이라 해도, 이렇게 소리소문없이 이반 이바노프를 암살하기란 불가능할 텐데?’
심지어 차르 길드의 상위 플레이어들 역시 암살당했다지 않은가?
‘이건 종리추가 직접 나서도 불가능한 일이야. 한데 어떻게…….’
미간을 찌푸리던 시문의 얼굴이 확 펴진다.
‘그렇군! 데피나! 그 드래곤의 소행인 거야!’
애당초 드래곤이라는 존재 자체가 성룡급만 되어도.
이길 수 있는 플레이어가 지구에는 없는 상황이었었으니까.
당연히 러시아 최고의 랭커를 비롯한 상위 플레이어들이라 해도.
드래곤을 상대로 살아남을 순 없는 노릇이겠지.
그렇게 가정하면.
대륙성이 갑자기 차르 길드의 뒤통수를 친 상황이 납득된다.
‘아무리 거칠 게 없는 대륙성이라도, 차르 길드만큼은 끝까지 동료로 대우해주었어.’
당장 전생의 니콜라이 이바노프와 러시아의 플레이어들이 그 증거 아니던가?
같은 난민 출신의 하이랭커인 동생 김시혁과 달리.
니콜라이와 차르 길드의 플레이어들은 끝까지 대륙성의 우대를 받았었다.
‘그런 러시아의 주요 인물들을 서슴없이 암살했다는 건. 종리추의 뜻이 아닌, 데피나가 펼친 독단적인 일이란 말이 되는데…….’
톡톡.
유려한 손가락으로 천천히 턱을 두드리는 시문.
이게 깊은 고민에 빠질 때 나오는 습관이라는 것을 잘 아는 시문의 일행들은 조용히 그를 바라봤고.
“저…… 시문 님?”
그를 모르는 바실리와 주최 측은 의문 어린 눈으로 시문을 불렀다.
그때.
콰앙!
강렬한 폭음과 함께 대기실의 문이 박살 난다.
“김시문! 미스 X발! 당장 나와라!!”
문을 박살 내고 나타난 근육질의 남자.
니콜라이 이바노프는 제 애병인 거대한 철퇴를 움켜쥔 채.
“어째서 너희 둘은 멀쩡한 것이냐! 왜 나의 형과 길드원들만 죽은 것이냔 말이다!”
거친 고함을 내질렀다.
흡사 버서커를 연상시키듯.
핏발선 눈으로 노려보는 니콜라이.
그를 마주 보는 시문의 눈에.
‘잠깐만. 이거 잘하면?’
이채가 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