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9화
209화. 힘이 다가 아니란다 (2)
고말숙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오만한 녹색의 여성을 바라봤다.
“에이션트 드래곤이라고? 저게?”
에이션트 드래곤.
안 그래도 아레나 최상위 용족.
그중 최강인 드래곤의 태생으로 무려 만 년의 세월을 산 존재.
덕분에.
‘랭커대 아레나에서도 소문으로만 등장하던 존재 아냐?’
최상위권 플레이어들인 랭커들마저도.
아레나 내부의 소문으로나 듣던 존재 아닌가?
하나 그 휘황찬란한 타이틀들과 다르게.
‘머리 색만 빼면 아무리 봐도 뭐 없어 보이는데…….’
앞에 있는 녹색의 여성은 그다지 특별하거나 대단해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에이션트 드래곤이란 말이지……?”
고말숙은 그녀를 무시하거나, 얕잡아보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당장 이 기분 나쁜 녹색의 세계를 만들어 낸 것도 그렇지만.
‘김시문. 이 자식이 이렇게 진중하게 나오는 건 본 적이 없으니까.’
세계의 거대 세력들을 상대할 때도 매사가 여유롭던 시문 아닌가?
그런 시문이 몸소 진중해진 만큼.
고말숙 역시 쉽게 달려들지 않고, 에이션트 드래곤의 눈치를 보았다.
그걸 느낀 것일까?
“차르 길드라고 했던가? 그곳의 머저리들과 다르게, 제법 사리 분별이 되는 버러진가 보구나.”
녹색의 여인.
에트라는 작은 비소를 머금으며 고말숙을 흘겼다.
평소 같으면 곧장 주먹을 날렸을 텐데.
“하!”
고말숙은 코웃음을 칠 뿐.
섣불리 달려들지 않았다.
물론 이는 주먹에 한정해서일 뿐이지.
“꼴에 드래곤이라고. 재수 없게 있는 척 X나 하네.”
그녀의 입은 에이션트 드래곤의 앞이라고 가리는 법이 없었고.
“뭐라?!”
당연히 거칠 것 없이 살아온 에이션트 드래곤.
“감히 인간 따위가! 이 에트라에게 무어라 지껄인 것이냐!”
에트라는 곧장 성을 냈다.
그리고 우리의 미스 X발께선.
“드래곤은 귓구녕이 없냐? 재수 없는 척 X나한다고. X발아.”
한 치의 밀림도 없이 대꾸했고.
“네 이년!!”
에트라는 곧장 노성을 내질렀다.
에이션트 드래곤이라는 존재에 걸맞게.
고오오오오.
보이지 않는.
그러나 숨길 수 없는 거대한 존재감이 순식간에 고말숙을 짓눌렀다.
“큽!”
두 눈을 부릅뜨는 고말숙.
그녀의 앙칼지던 눈은 어느새 핏발이 섰고.
이는 그녀의 고운 이마와 목덜미 역시 마찬가지였다.
“씨……!”
욕을 내뱉기도 힘든 것일까?
저도 모르게 휘청거리는 무릎을 되잡은 고말숙은.
끼아아아악!
살기 어린 비명과 함께 피처럼 시뻘건 기운.
천살성의 힘을 풀어놓고 나서야.
“헉헉!”
전신을 바닥으로 짓누르던 존재감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하나 이는 일시적일 뿐.
고오오오오.
달리 드래곤 피어라는 단어가 존재하듯.
드래곤의 근본적인 기세이기도 한 에트라의 피어는 곧장 고말숙의 전신을 압박했다.
“아오! X랄 같기는!”
다행히 몸이 땅으로 처박히는 것만은 면했으나.
‘숨쉬기도 벅차잖아!’
타이트하다 못해, 작은 옷이라도 입은 것처럼.
전신을 조여오는 답답함에 고말숙은 신경질적으로 천살성의 힘을 이용해 저항했고.
“호오라?”
성을 표출하던 에트라의 눈에 흥미가 어렸다.
“인간 암컷. 너, 천살성의 소유자구나?”
천살성에 대해서 잘 아는 것일까?
“SSS급 특성 중에서도 유달리 강한 특성이거늘. 그걸 한낱 인간 암컷이 쥐고 있다니…….”
에트라의 녹색 눈엔 어느새 성난 감정 대신.
짙은 흥미만이 가득했다.
이내.
“하지만 각성은커녕, 제대로 개화조차 하지 못한 모양이군.”
짙었던 흥미는 삽시간 비소와 경멸로 물들었고.
“하긴, 인간 따위에겐 지나치게 과분한 힘이지. 이럴 때 보면 아레나놈들도 참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말이야.”
그녀의 말에.
‘각성이라고?’
시문이 잠시 고개를 갸웃했으나 그뿐.
우드득.
곧바로 드래고노이드를 활성화한 그는 헐떡이는 고말숙의 앞을 가로막았다.
“푸하!”
압박감이 상당했던 것인지.
뒤에서 고말숙의 힘찬 숨소리가 터져 나온다.
하나 시문은 그녀를 돌아보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너!”
에이션트 드래곤 에트라.
지금껏 고고하기만 하던 그녀가 처음으로 경악을 내비친 것이다.
“어떻게 인간이 그만한 수준의 용력을……!”
점점 입이 벌어지는 에트라는 저도 모르게 시문의 전신을 훑어냈다.
이내.
“아…….”
시문의 전신을 훑던 에트라의 날카롭던 눈매가 묘하게 풀어진다.
그뿐인가?
하얗다 못해 창백했던 그녀의 볼과 귓가는 색조 화장이라도 한 것마냥.
실시간으로 붉어지기 시작했다.
앞에서 드래곤 피어를 막아 주는 시문 덕에 여유가 생겼는지.
“야. 너 꼬리는 언제 생겼냐? 그러고 보니 머리랑 키도 좀 기른…….”
시문의 뒤에서 옆으로 걸어 나오던 고말숙.
말끝을 흐린 그녀는 멍한 눈으로 훌쩍 커져 버린 시문을 올려다보더니.
정면에 있는 에트라가 자신과 같은 표정인 것을 포착했다.
그러자.
“……저년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멍했던 얼굴 위로 분노라는 감정이 그라데이션 되는 고말숙.
당연하게도.
“천한 잡것이 감히 뭐라?!”
그녀와 같은 상황이던 에트라 역시 곧바로 분노를 터뜨렸고.
자로 잰 듯 똑같이.
그러나 뜬금없이 격노하는 두 여성의 모습에 시문은 눈을 끔뻑였다.
그도 잠시.
“눈 돌려 이 X년아!”
“이 방자한 미친년을 보았나!”
파츠측!
허공에서 스파크가 일어날 정도로.
격렬한 마찰을 일으키는 고말숙과 에트라.
물론 아무리 천살성이라곤 하나.
이제 막 플래티넘에 오른 고말숙이.
“그 건방진 눈알부터 터뜨려주마!”
고오오오오.
현 러시아의 최고 랭커인 이반 이바노프마저 무릎 꿇린 에트라의 피어를 이겨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크윽! 왜? ‘만년이나 산 할망구’라면서…… 미친년은 처음 보냐!!”
고말숙은 천살성으로 저항하며, 발악적으로 외쳤다.
감히 자신의 피어에도 꾸준히 발악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저! 저 방자한 버러지가 끝까지!!”
에트라의 노성이 순식간에 귀청을 두드릴 만큼 커졌고.
그녀의 눈동자에선 녹색 안광이 눈부실 정도로 발광했다.
“죽. 어. 라!”
대단한 격노를 담은 에트라의 고함.
그것은 곧 녹색의 법칙이 되어, 고말숙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때.
고말숙을 향해 날아드는 녹색의 죽음 앞으로.
키이잉!
날카로운 이명이 터져 나온다.
이명의 주인인 시문은 곧장 날아드는 녹색의 죽음을 마주하곤.
“사. 라. 져. 라.”
백금의 명령을 내뱉었다.
그러자.
파츠츠측!
녹색의 아지랑이와 백금의 아지랑이.
맞붙은 두 개의 법칙이 강렬한 스파크를 토하며 맞물렸고.
“마, 말도 안 돼!”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에트라의 경악과 함께.
“어찌 인간이 왕의 눈을!”
파아아앙!
두 개의 아지랑이가 소멸하며, 거센 파공음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 * *
휘이이이.
돌풍과도 같은 바람이 녹색의 세상을 휩쓴다.
그 중심에 서 있는 녹색의 여성.
“답해라! 김시문!”
에트라는 경악으로 물든 얼굴로 소리쳤다.
무리도 아니었다.
“어찌 네놈이 왕의 눈을 지니고 있단 말이냐!!”
왕의 눈.
시문이 지닌 왼쪽 눈은 그녀가 섬기는 위대하신 용제들의 그것과 똑같았으니까.
아니.
차마 상상도 못 할 불경이었지만.
‘마치 1용제이신 크루아흐 님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용제들 중 최강인 제1용제 크루아흐.
저 인간의 눈은 1용제의 눈과 똑같은 격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그녀의 가슴은 여전히 아니라고.
인간 따위가 그럴 리 없다고 소리치고 있었으나.
격앙된 그녀의 감정과 달리.
‘김시문의 용력은 나와 비교해서 한참 밀린다. 한데 나의 용언과 맞먹는다?’
에이션트 드래곤의 뛰어난 이성은 벌써부터 방금의 현상을 해석하고 있었다.
‘이는 용력의 양이 아닌 질로서 우위를 점했다는 말인데…….’
그녀보다 한참 부족한 용력으로 내뱉은 용언임에도 불구하고.
한 치의 밀림도 없던 시문의 용언.
에트라는 순식간에 이 믿지 못할 이변의 답을 내렸다.
‘왕의 눈이 지닌 격만으로 나의 용언에 맞섰단 말인가…….’
스스로 도출해내고도 도무지 믿지 못할 답.
심지어.
‘일반적인 드래곤도 아니고. 이 에트라의 용언에?’
용족의 태생 중 최고에 자리한 드래곤.
거기다 무려 만 년의 세월로 드래곤의 여생 중 가장 강력한 시기인 에이션트급 아니던가?
한데 그런 자신의 용언을 용족도 아닌 고작 한낱 인간 따위가 상쇄시키다니?
“그럴 리 없다!”
세차게 고개를 저은 그녀는 매서운 눈초리로 시문을 쏘아보았다.
“답해라. 김시문. 대체 어찌 네놈이 왕의 눈을 지니고 있는 것이냐? 또 그 모습은 어찌 된 것이지?”
“글쎄. 내가 그걸 답해줄 이유가 있나?”
하나 시문은 여유롭게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고.
“네놈!”
당장 뼈와 살을 발라버릴 듯.
그런 시문의 모습에 목에 핏대가 서던 에트라는.
“후. 그래. 뭐, 좋다.”
흐트러진 녹색의 머리칼을 정돈하며, 가라앉은 눈으로 시문을 응시했다.
“어떤 영문이건 간에. 곧 죽을 놈이니, 열을 올릴 필요도 없지.”
“죽어?”
그녀의 위협에 시문은 피식 웃음을 흘렸고.
에트라는 입꼬리를 비죽 끌어올렸다.
“상황 파악이 전혀 안 되나 보구나. 아직도 이곳이 길드전의 영역인 줄 아는 건가? 하긴, 아무리 내 용언까지 막아 냈어도, 천한 태생은 어쩔 수 없는 게지.”
코웃음을 친 그녀는 보란 듯이.
주변을 향해 양팔을 벌렸다.
“이곳이 어떤 곳인 줄 아느냐?”
“네 용력과 희생양들로 만들어 낸 공간? 그 정도로 보이는데.”
마치 결계 특성의 능력자가 만든 결계 속 공간이랄까?
오딘의 눈은 미지의 공간도 어느 정도 답을 알려주었고.
“괜히 왕의 눈을 얻은 건 아니로구나. 그래. 제법 비슷했다.”
에트라는 오만한 얼굴로 고개를 까딱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2용제이신 에키드나 님의 독자적인 영역이라 할 수 있지.”
“독자적인 영역?”
“신화급 무구를 다루는 넌 알겠지. 성좌들은 저마다의 영역이 있다는 것을.”
시문은 말없이 고개를 주억였다.
타르타로스에서 만났던 밤의 여신 닉스도 그렇고.
경계의 방직공과 검은 염소의 영역 역시 들른 적이 있던 시문 아니던가?
“물론 일부만을 도려내어 온 것에 불과하나…… 결국 신의 영역. 이곳엔 아레나의 가호가 닿질 않지.”
말을 내뱉던 에트라의 얼굴에 잔혹한 미소가 깃든다.
이유는 다름 아니었다.
“고로 이곳에서의 죽음은 곧 현실에서의 죽음. 당연히 아레나나 성좌들 역시, 개입이 불가능하다.”
“……그렇군.”
죽음과 더불어.
아레나와 성좌들의 단절까지 입에 담았음에도.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는 시문.
그게 의외였던 것인지.
“호오? 제법 의연하구나. 과연, 그만한 껍데기를 입을 자격이 있는 놈이야.”
에트라는 이채 어린 눈으로 말을 이었다.
“해서 말이다. 내 특별히 너에게 한 가지 자비를 내려주겠다.”
“자비?”
뜬금없는 제안에 눈매를 꿈틀하는 시문.
에트라는 무척이나 오만한 얼굴로 답했다.
“복종까진 명하지 않겠다. 얌전히 날 따라오거라.”
“뭐?”
삽시간 해괴해지는 시문의 얼굴.
에트라는 즐겁다는 듯.
“훗. 좋지 않으냐?”
날카롭게 손질된 손톱을 매만지며, 시문을 바라봤다.
“본래라면 이곳에 오자마자 널 죽일 생각이었다. 나의 주군이신 2용제께서 그걸 바라셨지. 하지만.”
에트라의 눈매가 묘한 열기로 슬쩍 올라갔다.
“널 생포해달라는 데피나의 부탁도 그렇고. 왕의 눈에 그…… 껍데기까지 몸소 확인하고 나니. 이대로 죽이긴 아깝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어디 그뿐이던가?
‘김시문은 2용제께서도 해내지 못했던 새로운 용종을 탄생시켰다.’
시문의 태생이 어떻든 간에.
그가 해낸 업적은 분명 감탄을 넘어, 찬사를 보내도 부족하지 않은 것이었다.
반대로 그런 시문을 데려간다면.
‘용제들께서 그토록 염원하시는 업적에 큰 보탬이 될 터.’
당연히 그런 시문을 데려간 그녀에겐 더없는 은총이 쏟아질 것은 자명한 사실.
더불어.
‘저…… 아름다운 모습을 맛도 보지 못한 채, 이대로 소멸시킬 순 없는 노릇이지.’
지난 만 년간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
음습하고 간지러우며, 씹어 삼켜버리고 싶을 정도로 뜨거운 그 감정에.
할짝.
에트라는 저도 모르게 새빨간 입술을 핥았고.
“저년이 진짜!!”
시문의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고말숙은 대번에 성을 토했다.
시문은 한층 더 탄탄해진 팔로 그녀를 가로막곤 단호히 말했다.
“답이야 예상했겠지만, 거절하지.”
“전혀 예상 못 한 답이다만, 왜지? 네놈은 잃을 것이 많지 않은가?”
에트라는 몹시도 이해가 가지 않는 얼굴로 시문을 바라봤다.
“혹여나 용제들께서 널 해코지할 거라 생각한다면, 인간의 태생다운 착각이라고 해두겠다.”
“착각?”
“그렇다. 특히 내가 모시는 2용제께선 용족의 대모답게, 용족에 호의적인 이들에겐 한없이 자비로운 분이시지.”
전도라도 하듯.
저벅.
2용제를 찬양하는 에트라는 한 걸음 걸어 나와.
시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분께선 충성스러운 능력자를 우대한다. 그간 네가 이룬 모든 업적을 인정하고, 받아줄 것이다. 나아가 그 어느 용족들보다도 총애하시겠지.”
용족의 대모.
2용제의 총애란 실로 가늠할 수 없는 것이었으나.
“다시 말하지만, 거절한다.”
시문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고.
“하! 이래서 천한 것들이란…….”
코웃음을 친 에트라의 눈매는 짜증에 이어, 곧 분노로 승화했다.
“제 주제도 모르고, 그저 되지도 않는 자존심을 세우는구나.”
“자존심이라기보단, 지금의 용제들과는 결코 함께 갈 수 없는 운명이라고 해두지.”
시문의 답에.
“무슨 개소리냐?”
에트라는 짜증 어린 의문을 표했으나 그뿐.
“말해 줘도. 넌 절대 모를 거야.”
“건방진 것!”
묘한 시문의 대답에 분노만 가중된 그녀는 노성과 함께.
파아앗!
환한 녹색의 빛에 휘감겼다.
그 크기는 순식간에 빌딩만 한 수준으로 커졌고.
그것이 무엇인지 잘 아는 시문은.
‘현신이라…… 본격적으로 해보겠다. 이건가?’
팔짱을 낀 채.
여유로이 그녀의 현신을 바라볼 따름이었다.
이윽고.
“어차피 네놈에게서 필요한 건 그 잘난 머리통뿐.”
고오오오오!
아까완 차원이 다른.
세상을 짓누르는 듯한 존재감이 사방으로 내려앉았고.
그 드래곤 피어를 머금은 에트라는.
“나머지는 옆에 그 방자한 암컷과 함께. 형체도 없이 녹여주마!!”
세찬 분노를 터뜨리며.
우우웅!
거대한 마법진 수십 가지를 제 주변으로 그려나갔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이명을 토하는 마법진들.
실제로 에이션트 드래곤의 캐스팅인 만큼, 마법의 발동은 코앞에 도달해 있었다.
그에.
“으윽…… 야! 뭐해?! 당장 째야지!”
곁에서 드래곤 피어에 저항하던 고말숙은 힘겹게 시문의 팔목을 붙잡았다.
시문은 팔을 움직여, 말숙이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이어.
“도망칠 거였으면. 애당초 사안은 쓰지도 않았어.”
시문과의 최대한 밀착했기 때문일까?
“가, 갑자기 그게 뭔 헛소리야!”
드래곤 피어에서 벗어난 고말숙은 당황스레 소리쳤으나 그뿐.
“저게 끝까지! 오냐! 둘을 아주 쌍으로 보내주겠다!”
곧장 터져 나오는 에트라의 노성과 고수준의 마법들에 묻혀버렸다.
앞으로 죽음이 도달하기까지 단 10초도 남지 않은 상황.
“X발!”
생명체라면 누구나 지니고 있을 생존본능부터.
‘이렇게 뒤진다고? 이 고말숙이가?’
온갖 적신호가 고말숙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하나.
‘그래. 어쩌면 이렇게 가는 것도…….’
천살성의 기운 때문인지.
죽음을 눈앞에 둔 고말숙은 초연하다 못해, 어딘가 편안하고 만족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단지.
‘별 도움도 못 되고 뒤지는 게 좀 억울하긴 하지만. 뭐, 죽으면 그것도 다 끝이니까.’
이번에도 제 무력이 부족했다는 자책감이 마지막까지 그녀를 괴롭힐 뿐.
흡사 불꽃놀이처럼.
파츠츠측.
쐐애액!
쏟아지는 고위 마법의 향연 속에서.
스윽.
시문이 오른쪽 손을 들어 올렸고.
고말숙의 시선은 자연스레 그런 시문의 손을 향했다.
이내.
‘반지?’
그의 새끼손가락에 있는 검보라색의 얇고 가는 반지를 인식하는 순간.
“말숙아. 이제부터 절대 내 옆에서 떨어지지 마.”
죽음을 앞두고 있다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퇴폐적인 목소리가 그녀의 귓속으로 파고들었고.
그렇게 녹색의 세상 위로.
“와라. 렝의 거미여.”
스아아아아!
검보라색 세상이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