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8화
208화. 힘이 다가 아니란다 (1)
시문은 고개를 돌려, 뒤편에 내리꽂힌 물체를 확인했다.
사각형의 단면에 위로 올라갈수록 가늘어지는 방첨탑.
표면에는 온갖 뜻 모를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고.
그 정점인 꼭대기는 꼭 피라미드를 축소해놓은 듯.
뾰족한 4면체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이어.
[성좌 라가 ‘당신들은 이만 가보는 게 좋겠군요. (맞아! 나만 볼 거니까. 너희는 얼른들 꺼지라고!)’ 엔네아드를 향해 손짓합니다.]
[엔네아드의 성좌들이 아쉬운 얼굴로 입맛을 다십니다.]
[성좌 라가 눈을 부라리자, 당신을 향한 엔네아드 성좌들의 시선이 점차 멀어집니다.]
시문의 앞으로 주르륵 떠오르는 메시지.
그렇게도 애가 탔던 걸까?
성좌 라는 관심을 보이던 엔네아드의 성좌들을 모두 물렸고.
[성좌 검은 염소가 ‘미친 이중인격자 새끼. 결국 합류했구만.’ 못마땅한 표정을 짓습니다.]
[성좌 천마가 ‘허허! 뭐 어떤가? 격도 저만하면 최고이거늘’ 수염을 쓸며 웃습니다.]
[성좌 오딘이 ‘맞아. 어느 차원의 할망구보다야 덜 미치기도 했고.’ 얄밉게 생글거립니다.]
[성좌 검은 염소가 ‘이 콩알만 한 애새끼가! 아스가르드 진짜 한번 끝장내 봐? 앙?!’ 눈을 부라립니다.]
[성좌 제우스가 ‘놔두게. 어차피 자네가 나서지 않아도, 예정되어 있지 않나? 우리도 그렇고.’ 씁쓸하게 웃습니다.]
[성좌 바알이 ‘으음.’ 고개를 까딱입니다.]
왕들의 픽에 속하는 시문의 성좌들이 줄줄이 라의 합류를 환영해주었다.
그런 성좌들의 반응 속에서.
‘끝장이 예정돼? 저게 무슨 말이지?’
유독 제우스의 반응이 시문의 시선을 끌었으나 그뿐.
“망할! 아티팩트가 얼마 안 남았어!”
“괜찮아! 덕분에 100마리나 줄였잖아!”
“맞아! 안정화됐어! 이대로 버티기만 해!”
450여 마리의 소환수.
이젠 350여 마리가 된 소환수와 차르 길드의 전투가 들려왔기에.
시문은 성좌들의 반응을 한 손으로 슥 치우고.
근 5미터에 달하는 오벨리스크에 집중했다.
‘전생의 파라오 칼리드 샤리프의 오벨리스크에 비하면 한참 작긴 하네.’
전생의 하이랭커이자, 성좌 라의 후원자였던 칼리드 샤리프.
그가 소환했던 수십 미터의 오벨리스크에 비하면 한참 작은 크기였으나.
‘나도 계속 성장하면, 칼리드의 오벨리스크처럼 거대한 크기로 연성이 가능할 테니까.’
어차피 자신은 계속 성장하지 않는가?
오벨리스크의 크기나 스펙은 별문제가 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내친김에 정보창이나 볼까?’
시문은 한 걸음 다가가, 오벨리스크의 정보창을 확인했다.
[오벨리스크]
등급 – 모조품 (51%)
엔네아드의 지배자 성좌 라의 방첨탑.
사용할 수는 있지만, 어째서인지 제힘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한다.
시문은 가장 윗줄에 있는 문구.
‘51%?’
모조품 (51%)에 시선을 집중했다.
‘마지막으로 소모성 신화급 무기의 완성도를 확인했을 때가 40%였던 거 같은데…….’
그간의 성장 덕분일까?
심지어 최근 연성력을 연달아 올린 것도 큰 영향을 끼친 것인지.
‘완성도가 51%라니.’
오벨리스크의 완성도는 51%에 달했다.
이는 바꿔말해.
‘아스트라페와 같은 다른 소모성 신화급 무구들도 51%의 완성도를 지니겠지.’
타 소모성 신화급 무구들 역시 같은 완성도를 지니고 있다는 뜻.
“많이도 올랐네.”
미소가 절로 지어지는 시문.
당연했다.
‘그간 열심히 스펙업을 한 보람이 있네.’
여러 스펙들의 증가로 연금술의 힘이 강해지고 있다는 건, 몸소 체감하고 있었으나.
가장 성장이 더디던 신화급 무기의 완성도가 이렇게 떡하니.
수치로 체감시켜주지 않는가?
“그럼 성능도 확인해 봐야겠지?”
뒤편의 전투지로 고개를 돌린 시문은.
하늘을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어디 보자. 시동어가…….’
전생에서 파라오 칼리드 샤리프가 오벨리스크를 사용했던 기억을 떠올리곤.
“떠올라라. 케프리.”
그 시동어를 머금었다.
우웅.
뒤편에 박힌 오벨리스크가 작은 이명을 토한다.
이어.
지이이잉!
찬란한 백금의 빛줄기가 뾰족한 오벨리스크의 꼭대기에 내리꽂혔고.
오벨리스크 표면에 새겨진 정체 모를 문양들이 휘황찬란한 백금의 빛으로 달아올랐다.
이내.
파아앙!
고요한 연못에 돌을 던진 듯.
발광하는 오벨리스크를 중심으로 퍼져나가는 백금의 광휘.
그것은 가장 가까이 있던 시문을 비롯해, 고말숙과 소환수들을 휘감았고.
그들의 눈앞으로 단출하지만.
[오벨리스크 사용자의 아군으로 인식되었습니다.]
[능력치가 51% 증가합니다.]
“역시. 훌륭하네.”
아주 말도 안 되는 문구를 떠올렸다.
* * *
화면을 환하게 밝히는 빛.
갑작스레 퍼져나온 백금의 광휘에.
[아! 눈부신 광휘가 심드라실의 길드원들을 휘감습니다!]
[정확히는 2명의 인간과 소환수라고 해야겠죠. 어찌 됐건, 심상치 않아 보이는 것은 분명하네요!]
심드라실과 차르 길드의 길드전을 중계 중이던 TWC의 두 남자.
마이클과 조나단은 절로 감탄을 흘렸다.
이내.
[조나단? 그런데 말이죠.]
의문 어린 얼굴로 묻는 캐스터 마이클.
그도 그럴 것이.
[심드라실의 인원을 휘감은 저 빛이 대체 무슨 역할을 하는 걸까요?]
화려한 이펙트 치고.
백금의 광휘로 인한 변화가 보이지 않는 탓이었다.
조나단은 세계적인 아레나 채널의 해설자답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제 아레나 경험상, 아마 버프류가 아닐까 싶은데요.]
턱을 톡톡 두드리며, 백금의 광휘의 정체를 추측했고.
[버프요? 전투 도중에 버프가 그리 중요할까요? 애당초 버프가 있어 봐야 큰 도움이 되진 않을 거 같은데요.]
[그렇긴 합니다만, 당장 김시문의 소환수만 300여 마리가 넘지 않습니까? 버프의 질보단 적용되는 이의 숫자로 봐야죠.]
[아아! 그렇게 보면 확실히 이득일 것 같습니다!]
조나단의 추측과 계산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아니.
한발 더 나아가서.
“미, 미친!!”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아니. 능력치가 51%나 증가한다니? 갑자기 이게 뭔 개소리야?’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창에 명시된 ‘능력치 51%’라는 문구.
능력치를 무려 절반이나 올려 준다는 말과 진배없지 않은가?
갑작스런 고말숙의 경악에 기습 대신.
“어이. 미스 X발. 갑자기 왜 그러지?”
척하니 어깨에 철퇴를 걸치며 물어오는 니콜라이.
그에.
“닥쳐 봐. 근돼새끼야!”
눈길도 주지 않고 욕을 때려 박은 고말숙은 서둘러 상태창을 열었다.
‘아니겠지? 설마 내 주력 능력치를 51%나 올려 주는 거라면……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
분명 버프를 받았거늘.
무슨 저주라도 걸린 사람처럼 덜덜 떨리는 눈동자로 제 상태창을 살피는 고말숙.
이내.
“아…….”
그녀의 새빨간 입술에서 짧은 탄식이 흘러나온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마기 스탯이!’
마기 스탯.
천마신공을 익힌 그녀에겐 주력 스탯이라고 볼 수 있는 그것이.
“……진짜 올랐잖아?”
실제로 51%의 증가치를 보인 것이다.
“하, 하하…….”
아까의 살귀 같은 모습은 어디 갔는지.
실성한 사람처럼.
멍하니 헛웃음을 흘리는 고말숙.
그런 그녀의 모습에.
“뭔가 신령한 빛으로 보이던데, 정작 효과는 아군을 미치게 하는 건가?”
니콜라이는 고개를 갸웃했으나 거기까지.
“뭐, 이만하면 강자에 대한 예는 충분히 지켜줬다고 본다. 미스 X발.”
철컥.
니콜라이는 어깨에 들쳐메고 있던 철퇴를 고쳐 쥐고는.
“그럼 잘 가라!”
땅을 박차며 힘껏 철퇴를 휘두르는 니콜라이.
우웅.
강기라 봐도 무방한 선명한 오러가 철퇴의 머리 부분에서 진득하게 흘러나온다.
그것이 시커먼 그림자를 드리우며, 고말숙의 머리 위를 점하는 순간.
터억.
“무, 무슨!!”
철퇴로 내려찍으던 니콜라이의 두 눈이 부릅뜨였다.
이상한 것도 없었다.
‘내, 내 철퇴를 한 손으로 잡았다고?!’
흡사 전봇대를 뽑아다, 철퇴로 만들었다고 봐도 무방한 니콜라이의 거대한 철퇴.
그의 철퇴는 무게만 따져도 약 441파운드.
약 200킬로그램에 달했다.
니콜라이와 같은 근력 관련 특성이 없다면.
어지간한 근육쟁이들도 잠깐 드는 것이 고작인 무게란 말이다.
한데 그것을.
“어떻게…….”
동양계의 여성이.
그것도 ‘한 손’으로 잡아낸단 말인가?
그런 니콜라이의 귓가로.
“……이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당연히.
“뭐라고 지껄이는 거냐!!”
여전히 부들거리며 철퇴에 힘을 실은 니콜라이는 짜증 어린 고함을 내질렀고.
“X이이이이발!!!”
그보다도 더 큰 함성이 고개 숙인 고말숙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이내.
우드득.
고말숙이 쥔 철퇴의 목 부분이 우그러진다.
니콜라이의 입이 다 벌어지기도 전에.
남은 고말숙의 한쪽 손이 뒤로 쭉 당겨졌고.
“이거 개지리잖아아악!!”
경악인지, 감탄인지 모를 함성과 함께.
천마신공(天魔神功).
격(擊) 패황쇄(覇皇碎).
이전보다 절반 이상 강력해진 패황쇄를 내질렀다.
* * *
쿠아아앙!
대지를 뒤흔들 정도로 강렬한 폭음.
일대가 자욱해질 정도의 흙먼지까지 일어났으나.
차르 길드의 유망주들은 니콜라이를 신경 쓰지 않았다.
정확히는 못 했다고 해야겠지.
그도 그럴 것이.
“내 방패가 한 방에!”
“으아아악!”
“뭐야?! 이것들이 갑자기 왜 이렇게 강력해진 거야?!”
“도, 독을 해독…… 할 수가…….”
갑작스레 말도 안 되게 강력해진 밤그늘 거미와 미스릴 골렘들.
그 덕에 겨우 균형을 맞추었던 원형진은 무색할 만치.
“사, 살려줘!!”
“내 팔!”
“쿨럭!”
허무하게 무너지고 있었으니까.
외곽을 담당하던 탱커와 전투계들이 빠르게 무너지자.
원형진의 내부는 그야말로 순식간에 박살 났고.
끼리릭!
그극.
백금의 광휘를 머금은 시문의 소환수들은 거침없이 그런 차르 길드의 유망주들을 들쑤셨다.
그리고.
분명 같은 길드원으로 참가했을진대.
“놀랍군.”
고급스러운 로브를 뒤집어쓴 존재, 에트라는 감탄을 터뜨리며.
‘김시문이 아스트라페나 레메게톤과 같은 상위 서열 성좌의 무구를 다룬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학살의 원인인 백금의 방첨탑을 바라봤다.
‘설마 라의 오벨리스크까지 사용할 줄이야.’
라의 오벨리스크.
아군으로 인식된 이의 능력을 조건 없이 증가시켜주는 신화급 무구 중 하나.
특히나.
‘용신대전 이후. 저걸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군.’
과거 용족과 신들의 전쟁에서 라의 오벨리스크를 경험한 적이 있던 그녀로선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김시문. 대체 저놈의 정체가 뭐지?’
에트라의 시선은 시동된 방첨탑을 등지고.
묘한 미소로 자신을 바라보는 뚜렷한 이목구비의 미남자를 향했다.
‘당최 뭐 하는 놈이길래 상위 서열 성좌들의 무구를. 그것도 하나같이 신왕급의 무구만을 다루는 것이냐.’
어지간한 최상위 종족들도 쉽사리 허락받지 못하는 것이 상위 서열 성좌들의 무구다.
한데 한낱 인간 따위가.
상위 서열 성좌 중에서도 으뜸인 신왕들의 무구만 골라서 사용하다니?
‘물론 라의 오벨리스크치고…… 많이 약한 느낌이 들긴 하다만…….’
그거야 김시문의 근간이 비천한 인간임을 고려하면 이상할 것도 없었다.
오히려 자연스럽다고 해야겠지.
“흐음.”
로브 속.
에트라의 녹색 눈동자가 의문으로 가늘어진다.
하나 그도 잠시일 뿐.
“뭐. 이제 와서 놈의 정체 따위야, 아무런 의미도 없지.”
어차피 제 손에 죽을 놈 아니던가?
코웃음을 친 에트라는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스으으.
그녀의 하얀 손끝에선 짙은 녹색의 기운이 흡사 끈적한 독액처럼.
또옥.
바닥으로 떨어져 스며들었고.
스으으으.
떨어진 녹색의 기운이 빠르게 전투지로 파고들었다.
차르 길드의 유망주들과 시문의 소환수들을 모두 아우를 만큼.
녹색의 기운은 순식간에 거대한 원을 이룬다.
이내.
“에키드나 님의 권능으로 명하노니…….”
에트라의 읊조림에 따라, 점차 녹색의 기운이 짙어졌고.
“차원이여. 갈라져라.”
그녀의 말을 끝으로.
솨아아아!
일대는 순식간에 짙은 녹색으로 물들었다.
* * *
거대한 녹색 페인트통 속으로 떨어진 듯.
어둡고 음습했던 숲은 그 형태만 유지할 뿐.
모든 것이 짙은 녹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유일하게 녹색으로 물들지 않은 곳.
우웅.
백금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오벨리스크 앞에서.
“크, 크흠! 이제 좀 놓지?”
시문은 옆에 끼고 있던 고말숙을 놓아주었다.
엉거주춤 내린 그녀는 숨을 고르곤 시문을 돌아봤다.
“새끼. 이 누나가 아무리 좋아도 그렇지. 이렇게 아무 때나 막 끌어안고 그러면 곤란…….”
정확히는.
돌아보려고 했다.
“뭐, 뭐야 저건?”
멀지 않은 곳.
시문의 소환수와 차르 길드원들이 한참 싸우고 있었던 전투지가 눈에 들어오기 전까진 말이다.
꾸륵.
꾸르륵!
마녀의 가마솥처럼.
정체 모를 녹색의 액체들로 부글부글 끓는 전투지.
그 혐오스러운 광경에 눈살이 찌푸려짐도 잠시.
“과연 듣던 대로구나. 김시문.”
이곳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아니.
묘하게 어울리는 거만한 목소리의 주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곳엔.
“그 짧은 순간에 차원 분리를 눈치채고. 용케도 영향권에 들지 않는 라의 영역으로 달아나다니.”
이 공간의 주인인 것처럼.
녹색의 머리칼과 눈동자를 지닌 여성이 오만한 걸음걸이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옆에서 부글거리는 녹색의 지역을 힐끔했다.
“아쉽구나. 네놈 정도면 이곳을 유지하기에 아주 좋은 에너지원이 되었을 텐데.”
“저게!”
오만한 비웃음에 눈에 불을 켜는 고말숙.
그러나.
“안 돼.”
곁에 있던 시문이 곧바로 튀어 나가려는 고말숙을 가로막았다.
평소 같으면 크게 한소리라도 했을 고말숙이건만.
그녀는 별 대꾸 없이 한 걸음 물러났다.
이유야 간단했다.
‘대체 뭐 하는 년이길래. 이놈이 저런 얼굴을…….’
진중하다 못해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
저렇게 어두운 시문의 얼굴은 처음 보는 탓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현명한 판단이었는지는.
“우리 2용제께서 어지간히도 열을 받았나 보군? 이런 누추한 곳에 에이션트 드래곤을 다 보내고 말이야.”
“머, 뭐? 에이션트 드래곤?!”
곧바로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