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5화
195화. 회수 (1)
“4천 800억 나왔습니다. 더 없나요? 아! 5천억 나왔습니다!”
흑백 가면의 여성이 힘있게 외친다.
“입찰하시는 분은 더 안 계실까요?”
여성의 물음에.
자리한 이들 중 90%가 입찰을 알리는 제스처를 취했으나.
“그럼 카운트 들어가겠습니다.”
보이지도 않는 것인지.
흑백 가면의 여성은 반응조차 하지 않고 카운트에 들어갔다.
결국.
“……2, 1! 이번 스탯 증강제는 5천억에 발텐베르크 길드가 낙찰합니다.”
독일의 최강 길드.
발텐베르크가 스탯 증강제를 낙찰받았다.
그에.
“이보시오. 오너, 이게 지금 뭐 하자는 거요?”
중년의 흑인 남성.
아메리칸 드림의 부길마인 콜린이 불만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이유는 간단했다.
“우리 모두 심드라실 길드에서 똑같은 경매 참가권을 얻었잖소!”
방금 독일의 발텐베르크가 낙찰해간 스탯 증강제만 벌써 3개째였으니까.
“한데 낙찰에 차별을 두다니! 암시장의 오너가 이리 대담할 줄은 몰랐소만!”
콜린이 발텐베르크 측 대표가 앉은 곳을.
정확히는 그의 옆에 놓은 2개의 스탯 증강제를 가리키자.
“어머~ 아까 제가 다 설명해드리지 않았던가요?”
암시장의 오너.
린은 부유 마법으로 발텐베르크 측에 스탯 증강제를 투하하며.
“아무래도 아메리칸 드림의 부길마님껜, 제 안내가 부족했나 보네요.”
특유의 간드러진 목소리로 답했다.
“경매 방식을 다시 공지드릴게요.”
경매장 뒤편으로 턱짓을 하는 린.
그러자.
파앗.
그녀의 뒤로 내용이 담긴 화면이 떠올랐다.
“이번엔 보기 좋게 화면까지 띄워드렸습니다~.”
린은 그중 가장 윗줄에 진하게 표시된 내용을 가리켰다.
“경매의 참가 길드는 각자 1개의 스탯 증강제만을 낙찰받을 수 있다, 보이시죠?”
가면으로 드러난 그녀의 매력적인 입술이 곡선을 그렸고.
“그리고 아메리칸 드림의 부길마이신 콜린 님께선, 처음에 1조 2천억으로 최고가에 하나를 낙찰하셨답니다?”
하얗고 긴 손가락은 콜린의 자리에 놓인 스탯 증강제를 가리켰다.
“해서 낙찰 제한 개수를 모두 채우셨으니, 더 이상의 입찰이 불가능한 거죠.”
그에.
쾅.
“그러니 하는 소리 아니오!”
자리를 박차며 일어나는 콜린.
“여기 참가 길드가 모두 하나씩 낙찰한 게 아니잖소!”
200여 개가 넘는 길드.
애당초 그들이 맨 윗줄에 명시된 조건처럼.
다들 스탯 증강제를 하나씩만 낙찰해갔다면, 콜린 역시 이렇게 성을 토하진 않았을 터.
“아까부터 저 발텐베르크를 비롯한 10여 개의 길드들만 계속 입찰해가고 있지 않소!”
린은 기다렸다는 듯.
“그 내용은 바로 이다음 줄에 명시되어 있답니다?”
두 번째 줄에 있는 내용을 가리켰다.
“판매자가 ‘지정한 특정 길드들은 개수 제한 없이 낙찰할 수 있다.’ 라고요.”
포인트까지 강조해주는 린.
그에.
“이!”
콜린은 입술을 달싹이며, 무어라 말을 내뱉으려 했으나.
“참고로 전 판매자께서 내거신 조건을 거래 대행으로서 이행하는 것뿐이랍니다?”
판매자가 내건 조건을 린에게 따져봐야 달라지는 것은 없었기에.
그는 두 주먹을 부르르 떨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 모습에.
“이해하신 걸로 알고 경매는 마저 이어가도록 할게요. 이제 수량은 2개 남았네요. 최저가 3천억부터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린은 싱긋 웃으며 경매를 이어갔고.
‘빌어먹을!’
콜린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김시문! 설마 이런 조건을 달 줄이야!’
심드라실 길드의 글로벌 공공자원을 막아주는 조건으로 내걸었던 스탯 증강제의 경매권.
그것을 위해 미국 대표인 마커스를 움직여, 안건 철회를 성공시켜 주었거늘.
이렇게 구입 개수에 제한을 주다니!
‘안 그래도 가장 비싼 가격에 낙찰했는데. 이 무슨 봉변이란 말인가!’
방금 독일이 세 번째로 낙찰받은 가격은 5천억.
자신은 1조 2천억에 하나를 낙찰받았다는 것을 고려해보면.
속이 쓰리다 못해, 뒤집히는 상황이었다.
‘제길! 이럴 줄 알았으면 첫 경매 때 그렇게 달리는 게 아니었는데!’
물론 경매 시작 전에 린이 사전 공지를 하긴 했으나.
실물로 영접한 스탯 증강제에, 그깟 공지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던 콜린이었다.
콜린뿐만이 아니었다.
‘하긴, 다른 길드들도 첫 경매 때부터 아득바득 달려들었었지.’
타국의 길드들 역시 첫 경매 때, 이를 악물고 경매에 참가했었고.
실제로 일본의 마사무네 길드는 1조 1천억으로 마지막까지 따라붙기도 했었다.
한데 두 번째 경매에서 콜린의 입찰을 무자비하게 씹어버리는 린을 보며.
스탯 증강제의 경매가는 순식간에 반으로 줄었고.
덕분에 아메리칸 드림만 1조 2천억이라는 값비싼 시범 케이스가 된 것이다.
빠득.
콜린은 이를 갈았다.
‘애당초 이딴 영약이 제작할 수 있었으면 진작 보여줬었어야지!’
경매장의 오너를 통해 도착했던 스탯 증강제의 샘플과 정보창.
이후 아메리칸 드림의 내부는 발칵 뒤집어졌었다.
정확히는 콜린을 중심으로 한 몇몇의 간부진이라고 해야겠지.
이유야 간단했다.
‘그랬으면 그 안건에 찬성하자는 말은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았을 텐데!’
이번 일을 위해 가장 큰 목소리를 냈던 게 바로 자신들이었으니까.
특히나 랭커도 아니고.
오직 시류를 보는 눈으로 부길마직에 오른 콜린으로서는 간담이 서늘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거기다 하필 올리비아 덴슨이 데릭에게 직접 따질 정도로 반대했었다니!’
뒤늦게야 알려진 사실.
바로 윈터 퀸 올리비아가 이번 안건의 작업에 대해 반대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변수가 생길 시 이번 일의 모든 결정권은 자신이 가진다.’ 라는 조건으로.
길드 마스터인 데릭과 딜까지 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덕분에.
‘망할 년! 김시문이 뭘 하건, 무조건 순응하라는 개소릴 지껄여서는!’
보통 같았으면 아메리칸 드림의 영향력을 이용해서라도.
스탯 증강제의 물량을 최대한 확보했을 텐데.
현재 길드 내에서 주도권을 쥔 올리비아의 그 망할 명령 덕분에.
대 아메리칸 드림의 부길마인 그가 이토록 꼼짝도 못 하고 당하고만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올리비아의 명령 따위가 아니었다.
‘이대로 가다간 내 입지마저 위험해진다!’
상황을 이 지경으로 만든 자신의 위치가 가장 위험했다.
그는 빠르게 경매장의 참가자들을 훑었다.
‘중복 낙찰이 가능한 길드들은 전부 성장 버프의 공공자원 지정 때 반대했던 나라의 길드들이야.’
찬성이 91%이고.
반대가 9%였던 투표.
그때 반대표를 던졌던 독일, 캄보디아 등 9%에 속한 나라의 길드만이 저렇게.
“네! 이번에도 5천억에 발텐베르크 길드가 낙찰해갑니다!”
저들만의 경매를 달리고 있지 않은가?
그를 본 콜린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고.
‘후…… 침착하자. 지금 중요한 건 스탯 증강제가 아니야. 이다음의 행보다.’
한결 차분해진 눈으로 어느새 4병이 되어버린 발덴베르크의 스탯 증강제를 바라봤다.
‘최정상 길드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차별한다는 건, 심드라실의 심기가 무척이나 상했다는 걸 알리는 것일 테지.’
현실적으로.
개인 간의 이익이나 욕심을 내려놓고.
객관적으로 보자면 충분히 기분 나쁠 만했다.
심드라실의 성장 버프는 따지고 보면 일종의 사유재산 아니던가?
그런 재산을 국제기구를 움직여 빼앗으려 했으니.
화가 안 난다면 비정상이겠지.
그러니.
‘일단 심드라실 길드를 달래주고, 관계를 최대한 개선해야 한다. 스탯 증강제는 그 후의 문제야.’
당장 중요한 것은 심드라실 길드의 화를 풀어주고.
그 관계를 개선함이 먼저였다.
‘당장 성장 버프의 대여일도 곧 끝이 나니까.’
안건이 날아가 버린 시점에서.
저쪽의 성장 버프를 건들 수 있는 명분은 아예 사라져버렸으니 말이다.
“그럼 마지막 스탯 증강제의 경매를 시작하겠습니다~.”
린이 마지막 스탯 증강제를 무대 위로 올린다.
그것을 확인한 콜린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출구로 몸을 돌렸다.
이는 콜린만이 아니었다.
저벅.
경매에 더 이상 참가하지 못하는 200여 개의 길드들.
딱 1개씩밖에 낙찰받지 못한 참가자들 전원이 출구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길마님. 긴급 사탭니다.”
“지금 당장 길드 창고를 열어…….”
“우리 쪽 연맹 대표에게 연락을…….”
마치 모두 한 마음인 것처럼.
어딘가와 급히 통화를 하면서 말이다.
* * *
[속보! 갑작스레 한국을 방문하는 세계 연맹의 대표들!]
[각국 최정상 길드들도 찾아와, 부길마들도 더러 있어]
[줄줄이 이어지는 세계 정상들의 한국 방문, 왜?]
[아침부터 VIP 행렬, 협회 몸살!]
[아레나 전문가들, ‘심드라실의 성장 버프 건 때문일 가능성 높아’]
[성장버프, 뭐가 달라졌길래? 이번 이슈의 모든 것!]
각종 포털사이트로 잇달아 쏟아지는 뉴스들.
실제로.
“내가 누군지 알고 이러는 건가!”
“대체 얼마나 더 기다리란 말이에요!”
“난 바쁜 사람이란 말이오!”
대한민국 각성자 협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바쁜 상태였다.
“죄송합니다. 대기표에 맞춰서 안내 중이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다음 분 들어가십니다!”
“혹여나 준비해 오신 물건이 있다면 안쪽으로 부탁드립니다!”
“함께 오신 수행원분들은…….”
세계 연맹의 대표들부터.
각국의 최정상에 위치하는 길드의 인사들, 그리고 그들의 수행원까지.
한날한시에 수백 명의 중대 인사들을 맞이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리고 그런 협회의 최상층.
이 역대급의 난리 중 가장 한적한 협회장실에는.
뚜렷한 이목구비의 미남자가 소파에 척 늘어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어찌나 바빴으면.
“난리도 아니군.”
최상층인 협회장실에도 이 난리가 전해져왔다.
그런 남자의 귓가로.
-어쩔 수 없잖아? 당장 내일이 성장 버프를 재계약하는 날이니까.
명랑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거기다 스탯 증강제를 대놓고 차별 판매했는데. 애가 안 닳게 생겼겠어?
현자의 돌의 말에.
“하긴. 그렇긴 하지.”
시문은 감고 있던 눈을 뜨며, 즐거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게 왜 그런 얼토당토않은 욕심을 부려서, 이 고생을 하는지 원.”
-원래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법이라잖아.
“……넌 그런 말을 어디서 듣는 거냐?”
-어디긴. 미디어 매체지. 이 차원의 몇 안 되는 장점이잖아?
너스레를 떠는 현자의 돌.
그에 헛웃음이 나왔으나 그뿐.
-어쨌거나 아래층에 VIP 응접실이라고 했나? 거기서 온갖 기운이 다 느껴지는 걸 보면, 사과 선물도 아주 범상치 않나 본데?
“그래. 나도 느껴져.”
이어지는 녀석의 말에 시문은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레나 부산물로 건축된 건물인데. 이렇게까지 기운이 느껴질 줄이야.’
강자들이 특유의 분위기와 기세를 가지고 있듯.
고등급의 아이템들 역시 저마다의 기운을 내뿜기 마련이었으니까.
-하아앙~ 이 고급진 기운! 대충 느껴도 최소 S급 이상의 재료와 아티팩트들이 분명해!
어지간히도 좋은 것인지.
가슴 정중앙에서 부르르 떠는 현자의 돌.
시문이 모처럼의 여유를 만끽하며, 그런 녀석을 쓸어주려던 그때.
똑똑.
협회장실의 문이 두드려졌다.
“들어오세요.”
시문의 허락과 동시에 열리는 문.
찾아온 이는 다름 아니었다.
“형. 아주 살판났다? 나만 저 지옥에 던져두고.”
청량한 외모의 미남.
동생 김시혁이었다.
뚱한 녀석의 얼굴에 시문은 피식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너만 던져뒀냐? 숙부랑 진욱 씨도 같이 있잖아. 어차피 일의 태반은 그 두 사람이 처리할 텐데 뭐.”
“심드라실의 대외적인 길드 마스터는 나잖아. 나도 나름 일을 한다고.”
“그래봐야 사과받고 고개 끄덕이는 정도겠지. 이게 어디서 엄살이야. 죽을래?”
“혀엉! 나 진짜 힘들었다고! 숙부나 선배는 저런 자리를 즐기지만, 난 아니란 말이야!”
어지간히도 힘들었지.
웬일로 약한 모습을 보이는 김시혁.
뭐,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
‘저놈 성격상 저렇게 앉아서 업무 보는 것보다, 뭐 하나 때려 부수는 게 더 편할 테니.’
앞으로 개기면 종종 써먹어야겠군.
그렇게 고개를 끄덕인 시문은 물었다.
“근데 왜 벌써 왔어? 아직 사과 행렬 안 끝났을 텐데?”
“개인적으로 형이랑 꼭 만나고 싶다는 사람이 있어서.”
김시혁의 대답이 시문은 대번에 얼굴을 굳혔다.
“김시혁. 형이 말했지? 스탯 증강제 때문에, 난 오늘 모습을 비추지 않아야 한다고.”
“아는데. 왠지 저분은 만나봐야 할 거 같아서 그랬어.”
“저분?”
그에 고개를 갸웃하는 시문.
“응. 올리비아 덴슨 씨 말이야.”
“아.”
짧게 탄식하는 시문.
잠시 턱을 괴던 그는.
“좋아. 판단 잘했다. 안으로 모셔.”
고개를 주억이며 허락했고.
김시혁은 곧장 협회장실의 문을 열었다.
또각.
차갑고 정돈된 하이힐 소리가 들려온다.
H형 스커트에 세련된 오피스룩을 입은 금발의 여성.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문 님.”
올리비아 덴슨은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고.
“반가워요. 올리비아. 이쪽으로 앉으세요.”
시문은 그런 그녀를 자리로 안내했다.
그러곤.
따악.
손가락을 튕겼다.
쪼르륵.
테이블을 소재로 연성된 팔들이 저 뒤에 있던 다기로 이동해 순식간에 차를 끓여낸다.
“한잔하세요. 혹여나 뜨거운 게 싫으시면, 식혀 드셔도 되고요.”
그 정도 능력은 있으시잖아요?
그렇게 말하며 싱긋 웃는 시문.
친절한 어조였으나.
올리비아는 이전과 달리, 묘하게 그어진 선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고저 없는 눈으로 김이 나는 차를 내려다보며.
“……많이 실망하셨을 겁니다.”
굳어버린 입술을 찬찬히 움직였다.
“그렇게까지 이야기를 나누고, 이리 거하게 뒤통수를 쳤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고해성사를 하듯.
차분하게 말을 이어나가는 올리비아 덴슨.
“아메리칸 드림을 대신해.”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지금까지의 정중함과 차원이 다른 몸짓으로.
“이 모든 일을 진심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허리를 직각으로 숙여, 사과를 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