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0화
180화. 진범 (2)
시문은 조금 놀란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성좌 검은 염소가 ‘혼돈 이 망할 새끼가! 무슨 개짓거리를 하고 다니는 거야?’ 인상을 확 찌푸립니다.]
공허의 흔적을 드러낸 시점부터.
성좌 검은 염소가 연신 반응을 보내오는 것이다.
‘뭔가 아는 게 있는 건가?’
시문은 검은 염소에게 물어보려 했으나.
“형! 괜찮아?!”
“시, 시문 님!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먼저 물어오는 이들이 있었다.
“아. 그게…….”
시문은 허공에 떠오른 검은 염소의 반응을 힐끔했다.
‘반응이 더 없는 걸 보니, 뭔가를 생각하고 있나 본데.’
그렇다면 검은 염소의 성격상, 이쪽에서 먼저 물어보기보다는.
‘먼저 이야기를 꺼내길 기다리는 게 현명하겠지.’
판단을 내린 시문의 시선이 두 사람을 향했다.
“간단해. 공허의 흔적을 발현시킨 거야.”
“공허의 흔적이요?”
“그게 뭔데?”
고개를 갸웃하는 두 남자.
“말 그대로야. 그냥 공허로 어떤 기술을 쓰면.”
시문은 허공으로 그어진 검보라색 기운을 툭 건드렸다.
“이렇게 흔적이 남는 거지.”
정말 별거 아니라는 듯.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는 시문.
그에.
“그런 말은 처음 듣는데? 선배. 들어본 적 있어요?”
“나도 없어.”
두 남자는 의문을 표했다.
당연했다.
다이아 최상위권과 랭커라는 위치.
객관적으로 볼 때, 플레이어로서 정점을 찍은 이들 아니던가?
“시문 님. 제가 나름 아레나 8년 차입니다만…… 공허가 흔적을 남긴다는 건 금시초문입니다.”
특히나 박진욱은 무려 8년이라는 아레나 경력을 지니고 있음에도.
공허가 흔적을 남긴다는 소리를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나도 그래. 형. 공허 능력자는 딱 3번 만나봤거든? 근데 흔적 같은 건 들어본 적도 없어.”
“당연히 그렇겠지.”
시문은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건 정규 아레나가 시작된 이후, 대략 3년 후에 풀리는 정보니까.’
이종족을 비롯해.
갤럭시 아레나에서 희귀한 것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정규 아레나.
공허의 흔적은 정규 아레나가 시작되고 3년이 지날 때쯤 알려지게 된다.
정확히는 분석 당했다고 해야겠지.
‘앤드류였지? 당시 공허 특성을 지닌 암살계 플레이어에게 공허의 흔적을 알아냈던 게.’
후에 미국을 대변하는 하이랭커가 되는 앤드류 번스.
그는 당시 미국 내에서 골칫덩이였던 공허 특성의 빌런을 잡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고.
결국 자신의 SS급 특성인 분석으로 공허의 흔적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고로.
“이건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정보거든.”
아직 비정규 아레나인 지구엔 알려지지 않은 정보였다.
당연히 플레이어로서 정점을 찍었거나.
오랜 기간 아레나를 뛴 베테랑도 모를 수밖에 없었다.
시문의 답에 김시혁은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형만 아는 정보로구나.”
그러면서도 별다른 의심의 기색은 보이지 않았고.
“과연! 시문 님이십니다.”
이는 박진욱 역시 마찬가지였다.
역으로 조금 찝찝해진 시문이 물었다.
“내가 어떻게 아는지 안 물어봐?”
“굳이? 형이 사람 놀라게 하는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 뭐.”
“전 아레나 치료제를 개발하신 시점부터. 시문 님이 무엇을 하시든 믿기로 했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답하는 김시혁과 눈을 반짝이며 신뢰를 보여오는 박진욱.
둘의 태도에 시문은 잠시 말을 잃었으나 그뿐.
‘……참.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절대적인 신뢰를 보여오는 김시혁과 박진욱에 시문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기분은 좋네.’
문득.
시문의 머릿속에는 전생의 이맘때가 떠올랐다.
‘전생의 이맘땐 진욱 씨는커녕, 시혁이와 연락도 하지 않고 지냈는데…….’
어떻게든 마력불능을 극복해 보겠다고.
혼자 아득바득 이를 갈며 힘겹게 살았었지.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참 행복하구나.’
그토록 지독했던 마력불능도 사라졌고.
이젠 자신을 절대적으로 신뢰해 주는 동생과 동료까지 생기지 않았나?
또한.
‘유정이도…….’
마력불능이 걸린 이후.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하고 그대로 떠나보내야 했던 유정이까지 제 곁에 있다.
그리고 그 소중한 동생은 지금 벼랑 끝에서.
전생과 비슷한 결말을 맞이하려 하고 있었다.
시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가신다.
‘이번엔 절대 놓지 않아.’
전생과 다르게 지금까지 쥐어왔던 것.
그리고 앞으로 쥐게 될 것들까지.
무엇하나 놓치지 않으리라.
시문은 착 가라앉은 눈으로.
“어쨌거나. 공허의 흔적이 이렇게 남아 있다는 건.”
사아아.
점차 희미해지는 검보라색 궤적을 다시 한번 건드렸다.
“이순철 회장을 죽인 범인이 공허 능력자라는 증거지.”
그 말에.
“잠깐.”
무언가 짐작이 가는 게 있는 걸까?
“공허 능력자라면 설마…….”
김시혁의 얼굴은 무섭도록 빠르게 굳었고.
“그래. 네가 생각하는 게 맞아.”
시문은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회장실의 CCTV는 유정이가 입장하기 직전에 꺼졌지. 그리고 이순철 회장은 그 시점에 목이 날아갔어.”
시문의 시선이 자연스레 입구를 향한다.
“유정이가 고작 문 한 짝을 두고도 눈치채지 못할 수준의 암살계라면. 전 세계에 딱 세 명뿐이지.”
눈매가 가늘어지는 시문.
그런 시문의 말을.
“거기서 공허 특성을 지닌 암살계는 한 놈뿐이죠.”
박진욱이 이어받았다.
“공허 질주자 다니엘. 그놈이 분명합니다.”
공허 질주자 다니엘.
랭커급 암살계이자, 세계 최강의 빌런 조직인 데스페라도의 핵심 멤버.
그를 아는지.
“하!”
코웃음을 치며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올리는 김시혁.
“데스페라도 이 개자식들이! 저번에 형을 기습한 것도 모자라서 또!”
이내.
“형. 대체 숙부는 뭘 하고 있는 거야?”
녀석은 시문을 홱 돌아봤다.
“그 사이코 새끼들이 두 번이나 한국에 발을 들이는데, 대체 왜 모르고 있는 거냐고!”
“시혁아. 진정해라. 이건 숙부도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시문 작게 한숨을 쉬며 동생을 달랬다.
“백악관까지 테러했던 놈들이잖아. 아무리 숙부라도 놈들의 입국을 다 알아차릴 순 없어.”
거기다 데스페라도엔 뛰어난 공간 능력자가 있지 않은가?
천하의 협회장도 그들의 움직임을 모두 잡아낼 순 없었다.
“그래도!”
“그만.”
단호하게 끊어버리는 시문.
그에 김시혁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지만 그뿐.
“시혁아. 지금은 그런 걸로 감정 소비하는 것보다, 여기 일을 처리하는 게 먼저다.”
“……알았어. 형.”
지극히 현실적인 말이었기에.
분을 삭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문은 거의 다 사라져가는 공허의 흔적을 향했다.
그리곤.
찰칵.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는 시문.
“일단 이걸로 유정이의 무죄는 입증될 거야.”
시문은 그것을 곧바로 김무열에게 보냈다.
“그럼 우리는? 무죄를 입증할 증거를 찾았으니 이제 끝인 거야?”
“아니. 이제 진범을 잡아 족쳐야지.”
“어떻게?”
시문은 싱긋 웃으며.
스륵.
이젠 거의 사라져가는 공허의 흔적을 다시 쓸었다.
사아아아.
공허의 흔적이 아까와 같이 진득한 검보라색 기운을 흘려댄다.
“내가 공허의 흔적을 좀 읽을 수 있거든.”
애당초 회장실에 들어선 순간부터.
시문의 눈에는 훤히 보였었다.
창문에서 의자 머리로 이어지는 공허의 흔적이 말이다.
‘아마 칭호 저편의 시선을 받는 자 때문이겠지. 아니면 옵시디언 타블렛 때문이든가.’
뭐, 어느 쪽이든 간에.
시문에겐 유리에 흠집이 난 것처럼.
공간을 어그러뜨린 공허의 흔적이 보였고.
그 흔적들은.
‘저쪽으로 움직였군.’
날카로운 손톱으로 긁어낸 듯.
창문 밖, 건물 옥상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시문은 놈이 남긴 흔적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다니엘의 성격을 고려해 보면, 아마 아직 한국에 있을 가능성이 높아.”
“하긴, 그 미친놈은 자신의 암살로 생기는 난장판을 참 좋아했지.”
“아레나에서도 매번 지X 했잖냐. 몰래 팀킬해 놓고 분란 관음하는 거.”
몇 차례 당한 적이 있는지.
아주 질색을 하는 김시혁과 박진욱.
“내가 랭커급만 됐어도 그 자식 목을 진작 따버렸을 텐데!”
특히 박진욱은 아주 이를 갈아댔다.
“잘됐네요. 이번에 따버리면 되니까.”
시문은 그런 박진욱에게 웃어주곤.
“그럼 바로 가죠.”
“알았어.”
“좋습니다!”
반쯤 열린 창문을 향했다.
그리곤 손가락을 튕겨, 인체 연성을 하려던 찰나.
[성좌 검은 염소가 ‘아가야. 내 아무래도 이 일에 대해 좀 알아봐야겠다.’ 당신을 응시합니다.]
끊어졌던 검은 염소의 반응이 눈앞으로 떠올랐고.
[성좌 검은 염소가 당신에게 미션을 겁니다.]
이는 미션까지 이어졌다.
시문은 곧바로 미션을 확인했다.
[미션]
-성좌 검은 염소는 당신이 찾아낸 공허의 흔적에 짙은 관심을 표합니다.
공허의 흔적을 남긴 ‘주인’을 찾으십시오.
보상 : 다면의 추적자 슈브쥴 (선지급), 업적 포인트 5,000
고작 사람 하나 찾는 조건으론 너무나 과한 보상.
특히나.
‘보상을 먼저 지급해 준다고?’
선지급이라는 문구는 시문의 시선을 확 끌었다.
‘슈브쥴이라…… 별칭까지 있는 걸 보면 범상치 않은 존재 같은데.’
그걸 선지급으로 주겠다니?
하나 시문의 얼굴은 마냥 밝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은 정규 아레나도 아니잖아? 저만한 존재를 선지급해 주기엔 무리가 있지 않나?’
척 봐도 범상치 않은 선지급 보상.
안 그래도 선지급인데.
저만한 존재를 비정규 아레나에서 허용할 리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해당 차원은 아직 정규 아레나가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선지급 보상의 수정을 부탁드립니다.]
시스템은 곧바로 보상 수정을 요구했고.
[성좌 검은 염소가 ‘쯧. 잘 넘어가나 했더니.’ 혀를 차며 보상을 수정합니다.]
검은 염소는 평소와 다르게 별도의 항의 없이.
[미션의 보상이 갱신되었습니다.]
미션을 수정했다.
‘역시. 아무리 검은 염소라도 이건 좀 무리겠지.’
정규 아레나와 비정규 아레나는 그 무게부터가 다르니까 말이다.
시문은 바뀐 보상을 확인했다.
보상 : 공허 사냥개 (선지급), 업적 포인트 5,000점
‘공허 사냥개? 그냥 추적만 해라 이건가?’
선지급 보상의 네임벨류가 확 떨어진 것이 체감되었지만.
‘뭐, 상관없지. 내가 흔적을 쫓으려면 일일이 손을 써야 하니까.’
애당초 추적이 귀찮았던 시문은 별다른 아쉬움 없이 미션을 수락했다.
그러자.
사아아아.
정면의 차원이 갈라지고.
크릉.
정체 모를 검보라색의 네발짐승이 나타났다.
개의 외견이면서도 머리엔 산양의 뿔이 달린 기묘한 형태.
“가, 갑자기 뭐야!”
“형!”
갑작스러운 공허 사냥개의 등장에 박진욱과 김시혁은 경계를 취했으나 그뿐.
끼잉.
시커먼 외견과 달리.
시문의 손에 머리를 비비는 공허 사냥개를 보곤 경계를 풀었다.
시문은 달가운 미소로 그런 공허 사냥개의 머리와 뿔을 쓰다듬었다.
“이 흔적 좀 추적해 줄래?”
시문이 공허의 흔적을 가리키자, 그것을 열심히 킁킁거리는 사냥개.
이내.
컹컹!
녀석은 크게 짖고는 창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 * *
잠실의 종합 운동장.
어스름한 저녁이 내려앉은 그곳의 지붕에는.
“알고 있다고.”
후드를 걸친 한 남자가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알고 있으면 즉각 귀환해라.
“나한테 명령하지 마. 죽여 버리기 전에.”
톡 쏘아붙이는 후드의 남성.
그 아래론 마약중독자를 연상시키듯.
퀭한 눈에 수척한 얼굴이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다니엘. 이건 명령이 아니다.
“이래라저래라 하는 게 명령이지 그럼 뭐야?”
-김무열이 각성자 출국 금지령을 내렸다. 이게 뭘 뜻하겠나?
전화 너머의 목소리.
제법 중후함을 담은 목소리는 남자의 짜증에도 흔들림 없이 말을 이었다.
-뭔가 눈치챈 거다. 당장 공범 혐의를 받는 검성과 밤사냥꾼을 구속하지 않은 것부터가…….
전화 너머에서 점차 복잡한 단어들이 흘러나온다.
“아아! 그딴 건 모르겠고.”
그것을 재빨리 끊어낸 다니엘은 말했다.
“의뢰는 완수했어도 이대론 못 떠나. 분탕이라도 한 번 더 치고 가야 덜 억울하겠어.”
-다니엘!
“시끄러! 이왕 이렇게 된 거, 그 김시문인가 뭔가 하는 놈을 조지고 갈게. 그럼 되잖아?”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니다만, 놈의 곁에는 검성이 붙어 있어 힘들 거다.
“그럼 도후 아줌마는 어때? 죽다 살아나서 퇴물 됐다며?”
-이영희라…… 나쁘지 않겠군. 1세대 영웅이니, 우리 몸값도 오를 테고.
“그치? 거기다 제 어미를 죽이면, 그 도도한 년도 멘탈이 나가버릴걸? 킥!”
상상만 해도 즐거운지.
연신 킥킥대는 다니엘.
“그럼 도후 목은 따고 갈 테니까. 출국금지 풀리면 바로 이동할 수 있게 준비나 해둬.”
-알았다.
연락을 끊고.
휴대폰을 품속으로 집어넣는 다니엘.
‘이유정. 아시안 년 주제에 감히 날 거부한 대가를 제대로 치르게 해주겠어!’
그는 살기를 너머.
광기 어린 눈으로 바쁘게 움직이는 시내를 내려봤다.
그때.
“쥐새끼가 있네?”
시내를 내려다보던 다니엘의 팔이 순식간에 휘둘러진다.
이어.
케엥!
개의 그것을 연상시키는 비명이 터져 나왔고.
다니엘은 퀭한 눈으로 비명의 원인을 돌아봤다.
그곳엔 산양 뿔이 달린 시커먼 개.
“공허 사냥개?”
공허 사냥개는 미간에 암기가 박힌 채 쓰러져 있었다.
“저게 왜 여기에…….”
더 이상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우웅.
희미한 이명.
보라색 강기를 두른 다니엘의 단검이 곧장 위를 향해 휘둘러진 것이다.
까가각!
환한 불똥이 어스름한 일대를 잠시 비춘다.
기습자를 확인 다니엘은 짤막한 헛웃음이 흘렸다.
“하! 눈치챈 건 김무열 하나만이 아니었나 보네?”
“그 무능한 인간이 눈치챌 정돈데. 내가 모를 건 또 없지.”
백색의 강기를 검에 두른 청량한 미청년.
“무능한 인간? 이봐 김시혁. 김무열은 네 숙부 아니냐?”
김시혁이었다.
그는 무척이나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가족 관계상으론 그렇지.”
마지 못해 고개를 까딱였고.
“아니 뭐 이런 놈이…….”
다니엘의 어이가 더 없어지려던 순간.
“호오!”
그의 퀭한 눈에 이채가 서렸다.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요즘 떠들썩한 김시문 아닌가? 안 그래도 찾아가려 했었는데. 알아서 기어 왔네?”
김시혁의 뒤로 다가오는 시문을 발견한 것이다.
시문은 피식 웃으며 답했다.
“대단하신 데스페라도께서 열이 좀 오르셨나 보군. 공허 질주자께서 친히 날 찾아주고.”
“좀 오른 게 아니라 아주 불이 났지. 특히 모가담은 널 분자 단위로 폭파시킬 거라며 난리도 아니라고.”
폭탄마 모가담.
같은 데스페라도의 핵심 멤버를 언급하며 이죽거리는 다니엘.
흡사 시문이 겁이라도 집어먹길 바라는 태도였으나.
“아아. 종이 접던 그놈 때문인가? 이름이 아마 제이스 클라크였지?”
시문은 대수롭지 않게 말을 받았고.
“과연.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놈이네. 아주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어.”
그 모습에 다니엘의 비소는 살기로 번졌다.
그때.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건 네가 아닐까?”
슈아악!
서늘한 목소리와 함께 들이닥치는 백색의 검강.
다니엘은 그것을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스륵.
공허 속으로 스며들어 김시혁의 검격을 피해냈다.
이어.
멀지 않은 곳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다니엘.
김시혁은 그런 다니엘을 차가운 눈초리로 쏘아봤다.
“감히 내 앞에서 형을 죽인다는 소릴 다 지껄이고.”
“형?”
다니엘의 미간이 슬쩍 찌푸려진다.
이내.
“아하! 김시문, 김시혁. 그래, 그렇군. 너희 형제였구나?”
단검을 빙글 돌리며 작게 감탄하는 다니엘.
“근데 전혀 안 닮았는데 말이지. 정말 둘이 형제 맞아?”
“네가 알 바는 아니지.”
“하긴. 그렇긴 하네.”
킥! 하고 웃음을 흘린 그는 재차 검격을 준비하는 김시혁과.
“다니엘 이 개자식! 저번 아레나에서 당한 트롤을 제대로 갚아주마!”
무시무시한 눈으로 시문의 곁에서 쏘아보고 있는 박진욱을 바라봤다.
‘검성에 밤사냥꾼까지…… 이러면 아무리 나라도 힘들겠어.’
애당초 직업 간의 상성만 따져도 그랬다.
예로부터 전투계는 암살계의 카운터.
검성 김시혁과 같은 실력자는 더욱 극심한 상성을 자랑했다.
하물며 같은 암살계인 밤사냥꾼까지 있다면야.
“쯧. 기술이 알려질까 봐 최대한 아껴두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네.”
“아끼지 말고 팍팍 써. 앞으론 영영 못쓰게 될 텐데.”
우웅.
검강 특유의 이명을 토하며 달려드는 김시혁.
“하핫! 네 말대로야. 김시혁.”
다니엘은 그런 김시혁의 돌진에도 웃음을 터뜨릴 따름이었고.
“목숨이 걸린 상황에선 아끼지 말고 털어야겠지.”
사아아.
공허가 어린 왼손으로 허공을 쥐었다.
“그럼 나중에 보자고.”
이어.
“공허 추방.”
짧게 읊조리며 허공을 쥔 손을 그대로 치워버리는 다니엘.
놀랍게도.
당장이라도 다니엘을 두 동강 낼듯한 기세의 김시혁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시, 시혁아!”
그에 박진욱이 경악을 토했으나 그뿐.
“박진욱. 넌 별거 아니긴 하지만…… 난 확실한 걸 좋아해서 말이야. 너도 좀 이따 보자고.”
아까와 똑같이 공허를 쥔 손으로 박진욱마저 없애버리는 다니엘.
“흐흐! 김시문? 이제 우리 둘만 남았네?”
그는 살기가 그득한 미소를 지으며.
“그러게.”
“크핫! 눈 하나 깜짝 안 해? 하긴, 그 정도 배짱은 있으니 지금까지 건방을 떨어왔겠지.”
단검에 진득한 공허를 덧씌웠고.
“부디 온몸이 뒤틀려도, 그 배짱은 유지하길 바라마.”
그대로 시문을 향해 휘둘렀다.
사아아.
초승달 모양의 진득한 공허가 궤적을 그리며 날아든다.
“나도 마찬가지야. 다니엘.”
시문은 두 팔을 활짝 벌려.
“부디 지금의 배짱을 끝까지 유지하길 바랄게.”
날아드는 공허를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