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0화
170화. 일타쌍피 (3)
검보라색의 거미줄.
작은 팔찌에서 시작되었다곤 믿을 수 없을 만치 풀려난 거미줄은 섬 일대를 아예 휘감아버렸고.
당연히 거대한 고치 속의 세상은.
스아아아아.
생명체라면 기겁할 공허와 암흑만이 가득했다.
신기한 것은.
[만족스럽군. 아주 만족스러워!]
분명 거미줄이 휘감은 것은 작은 섬인 실미도뿐이었는데.
[이토록 빨리 데려올 줄은 참으로 몰랐어.]
이 시커먼 공허의 공간은 광활한 우주를 연상시킬 정도로 넓다는 것이다.
하나 아무도 이 공간의 괴리에 대한 의문을 표하지 않았다.
못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지.
쿠웅.
행성 하나를 통째로 꿰어버릴 정도로 거대한 다리.
그런 다리를 줄줄이 달고 있는 거무튀튀한 존재가.
[한데…… 불순물이 좀 섞여들었군.]
소행성 크기의 붉은 눈을 무려 16개나 번뜩이며 내려보고 있었으니까.
누가 그러던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거대한 존재는 대면을 하는 순간.
사고 자체가 정지해버린다고.
이곳으로 소환된 이들이 딱 그러했다.
“…….”
“…….”
정신을 잠식해 오는 공허에 기겁할 여유조차 없다.
100여 명이 넘는 대륙성의 플레이어들은 다이아, 골드 할 것 없이 죄다 석상처럼 얼어붙었고.
최상급 용족들은 떨려오는 공포를 숨기지 못한 채.
“마, 말도 안 돼…….”
“이건 불가능한 일이야! 어찌 저편의 성좌가!”
“요, 용제시여…….”
수 미터에 달하는 체구를 애처롭게 떨어댈 따름이었다.
그들을 내려보던 16개의 붉은 눈이 꿈틀한다.
[과연 용족답구나. 내 영역에 들어와서도, 그 역겨운 도마뱀놈들을 찾다니.]
거대한 거미는 불쾌감이 가득한 눈으로 용족들을 노려봤다.
[아주 대담한 발언이었다. 이 오만한 버러지들아.]
그러자.
꾸드드득.
까득!
아레나의 참여 종족 중 최상위.
심지어 그들 중에서도 최상급에 달하는 용족의 신체가 자연스럽게 뒤틀린다.
저 셋 모두 현신을 이룬 상태임을 고려해 보자면.
지금의 뒤틀림은 용족 특유의, 현신의 현상이 아닌 말 그대로 ‘뒤틀림’이었고.
“끄, 끄르륵!”
“꾸아악!”
공기주입기를 꽂은 풍선처럼.
단단한 육체와 눈알이 터질 듯 부풀거나, 쪼그라들길 반복했다.
그 횟수가 늘어날수록.
뚜둑.
까가각.
섬뜩한 파육음과 함께 위엄 넘치던 최상급 용족의 육체는 기괴하게 뒤틀려갔다.
이내 일그러졌다고 표현할 수 있는 수준까지 도달하고 나서야.
[이젠 그 역겨운 몸뚱어리에 똑똑히 새겨졌으리라. 이곳에 너희의 신은 없다는 것을.]
무자비한 수축과 이완은 멈췄고.
“그에에…….”
“꺼, 꺼어……!”
최상급 용족이었던 비늘 덩어리는 산 자도, 죽은 자도 아닌 신음을 흘리며 가늘게 경련했다.
당연하게도.
주르륵.
함께 있던 대륙성의 플레이어들은 형체조차 남기지 못한 채.
피 곤죽이 되어 검은 공간을 둥둥 떠다녔다.
이곳으로 불려온 이들 중 단 2명만이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고.
그중 하나는.
“히, 히이이이!!”
겉모습만 유지했을 뿐.
정신은 저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미친 듯이 괴성을 질러댔다.
그에.
[쯧. 기껏 보호까지 해 줬더니. 고작 이따위에 미쳐버리는 건가? 인간은 참으로 나약하군.]
경계의 방직공은 불만족스럽게 읊조렸다.
이내.
[아! 귀빈이여. 그대를 두고 한 말은 결코 아니라네.]
멀쩡하게 서 있는 시문을 보곤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크기가 크기인지라.
휘이이!
한시적인 태풍처럼 거센 바람이 시문과 최우석을 덮쳐왔다.
하나 보호해 줬다는 말은 거짓이 아닌지.
머리칼과 옷자락만 거세게 펄럭일 뿐.
시문은 눈이 멀쩡함은 물론, 호흡까지 편안한 상태로 경계의 방직공을 바라봤다.
‘최상급 용족도 그렇고. 그저 시선을 마주하는 것만으로 뒤틀어 버리다니…….’
과연 성좌의 본체다 이건가?
그렇게 감탄한 시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딱히 틀린 말도 아닌걸요.”
실제로 갤럭시 아레나의 등장 종족 중 인간은 하위권.
특히나 특성이나 아이템 등의 요소를 제외하고 일반적인 스펙만 놓고 보자면.
말 그대로 최하위권에 가까웠다.
갤럭시 아레나가 없던 지구에서도, 맨몸의 인간은 어지간한 짐승들을 이기지 못했으니까.
하나.
[귀, 귀빈이여. 난 그대를 진심으로 대단히 여긴다네!]
시문의 긍정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것일까?
경계의 방직공은 흡사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그분과 대모님의 시선을 받는다는 것은 나조차 해낼 수 없는 일일세! 거기다 저 간악한 인간놈도 이리 빨리 잡아 오지 않았나?]
어쩔 줄 몰라 하며 말까지 줄줄이 이어갔다.
‘괜찮다는데. 자꾸 왜 저래?’
이해할 수 없는 경계의 방직공의 태도에 고개를 갸웃하는 시문은.
“전 정말 괜찮아요. 객관적으로도 맞는 말이고, 별로 신경을 안 씁니다.”
다시 한번 긍정을 표했다.
그리고 나서야.
시문은 경계의 방직공이 왜 저런 반응을 보였는지 알 수 있었다.
[그, 그럼 대모님께 말씀을…… 드리진 않겠지? 내가 저편의 귀빈을 깎아내리려는 의도는 결코 아니라는 걸 말일세.]
저편의 대모인 검은 염소.
경계의 방직공은 혹여나 자신을 비하했다는 말이 검은 염소의 귀에 들어갈까 봐.
저렇게 노심초사를 한 거였다.
시문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안심하셔도 됩니다. 그럴 생각도 못 했는걸요.”
[으하핫! 과연 저편의 귀빈일세. 참으로 화통하군.]
이제야 안심이 되는지 대소를 터뜨리는 경계의 방직공.
이내.
[그럼 내 영역을 쓰레기통으로 만든 이 버러지를. 내 어찌 요리해야 할까?]
저편의 성좌에 걸맞은 살벌한 눈빛으로 최우석을 쏘아보는 경계의 방직공.
정신이 나갔어도 그 시선은 느껴지는 것일까?
“히, 히이이익!!”
최우석은 백치처럼 제대로 된 말도 뱉지 못하고.
그저 무중력의 공간을 허우적거릴 따름이었다.
잠시 그 모습을 보던 시문이 입을 열었다
“잠시,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만.”
[이야기? 누구와 말인가?]
경계의 방직공이 고개를 갸웃한다.
시문은 그를 보며 재차 말을 이었다.
“경계의 방직공과 최우석. 두 분 모두요.”
[으음. 좋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가?]
“최우석을 벌하는 건, 이 영역을 쓰레기통으로 사용해서가 맞죠?”
[당연하네. 감히 나의 영역을 그따위로 쓰는 자를 내 어찌 가만두겠나!]
어지간히도 자존심이 상하는 걸까?
말을 하면서도 경계의 방직공은 노기를 숨기지 않았다.
그에 시문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만약 최우석을 처리하고도, 그러한 일이 계속 일어난다면요?”
[……지금 뭐라고 했는가?]
경계의 방직공의 노기가 한층 더 짙어진다.
16개에 달하는 붉은 눈이 일제히 시문을 향했다.
“말 그대로입니다. 최우석이 한 일이 또 벌어진다면요?”
[최우석을 잡았는데. 어찌 그러한 일이 또 벌어진단…….]
되묻던 말이 점차 흐려진다.
그럴수록 16개의 붉은 눈알은 점차 붉게 타올랐다.
[설마 귀빈은 이 일의 배후가 따로 있다고 말하는 것인가?]
“맞아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시문은 절로 그려지려는 미소를 애써 숨긴 채, 입을 움직였다.
“제가 사는 세상은 아직 정규 아레나가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플레이어도 아닌 민간인이, 어떻게 이곳으로 이동시키는 방법을 알겠어요?”
[확실히 이상하군. 정규 아레나가 시작되었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세상에서 저편으로 향하는 길을 안다는 것은 말이 되질 않아.]
경계의 방직공은 거대한 머리를 주억거렸다.
[애당초 정규 아레나가 시작된 세상에서도, 이곳으로 오는 방법을 모르는 이들이 수두룩할 텐데 말일세.]
“바로 그겁니다.”
[그렇다면 이 짓거리를 한 배후가 있는 건 확실하군. 그대는 그게 누군지 알고 있는 눈치고.]
“맞아요. 사실 경계의 방직공께서도 반쯤은 알고 있습니다.”
시문의 시선이 옆을 힐끔한다.
경계의 방직공의 시선 역시 옆을 향했고 볼 수 있었다.
둥둥 떠다니며, 간헐적으로 꿈틀거리는 비늘 덩어리를.
이어.
쿠그그그그그그!!!
광활한 공간이 통째로 뒤흔들린다.
[이 빌어처먹을 도마뱀놈들이 감히!!]
지금까지 봐왔던 분노 중 가장 격한 분노를 터뜨리는 경계의 방직공.
시문은 그의 진노에 따라.
‘공허가 사방으로 날뛰고 있어.’
공간에 가득한 공허들이 미친 듯이 날뛰는 걸을 느낄 수 있었다.
당장.
콰직!
둥둥 떠다니던 최상급 용족들의 육체가 으깨지는 것이 그 증거였다.
‘아마 저편과 관련이 없었다면. 내 몸도 저렇게 으깨졌겠어.’
하지만 이 괴랄한 현상에 두려움이 일지는 않았다.
오히려 기뻤다.
‘일단 공허와 관련된 것은 내게 호재로 적용할 테니까.’
모든 이들이 가장 꺼려 하는 기운이.
자신에겐 더없이 호의적이라는 사실에 말이다.
차원을 뒤흔들던 떨림이 멎는다.
진정이 된 건지.
[귀빈이여. 그럼 그대가 저 최우석이라는 놈과 할 말이 있다는 것은, 배후의 용족과 관련된 것이겠구나?]
경계의 방직공은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물었고.
“맞아요. 최우석과 거래해서 배후의 정보를 알아낼 생각입니다.”
[하지만 배후가 있다 한들, 저 인간이 저지른 불경은 변하지 않네. 난 저 인간을 살려둘 생각이 없어.]
“괜찮아요. 저도 살려둘 생각은 없거든요.”
자신이 공허와 밀접한 관계가 있어서 그렇지.
일반적인 인간이었다면 최우석 박사의 폐기에 실제로 처분되었을 것이다.
저렇게 시체조차 제대로 남기지 못한 형태로 말이다.
결정적으로.
‘살려놔 봐야, 또 인체 실험을 할 게 뻔하니까.’
살려봐야 비인륜적인 실험만 되풀이될 뿐이었다.
그런 시문의 마음을 알아차린 걸까?
[좋네. 그렇다면야 망설일 것도 없지.]
경계의 방직공은 만족스러운 미소로 최우석을 바라봤다.
우웅.
그의 눈동자들과 같은 붉은 빛이 최우석의 머리를 간질였다.
그러자.
“흐으.…… 으? 아?”
정처 없이 떠돌기만 하던 최우석이 눈동자가 본래대로 돌아온다.
두어 번 눈을 깜빡이던 그는.
“자, 자네! 자네가 날 죽여주게!”
얼른 시문에게 다가가, 옷자락을 붙잡고 애원했다.
“제발! 자네가 죽여주게나! 저 거미에게 날 넘기지 마! 시, 시키는 건 뭐든지 할 테니 제발!!”
그런 최우석을 가만 내려보던 시문은 경계의 방직공을 힐끔했으나.
그는 잔혹한 미소를 지을 따름이었다.
시문은 그제야, 최우석이 왜 이러는지 깨달았다.
‘최우석 박사의 정신만 되돌리고, 미쳤을 때의 기억은 그대로 유지시킨 건가.’
안 그래도 정신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는 것이 공허다.
정신쇠약인 상태에서 최상급 용족들과 대륙성의 정예들이 어떻게 죽어 나갔는지 봤을 테니.
또 경계의 방직공이 저를 얼마나 증오하는지도 똑똑히 봤을 테니.
이렇게 자신의 손으로 죽여달라고 애원하는 거겠지.
어쨌거나.
“좋아요, 하지만 조건이 있습니다.”
시문는 그저 이득만이 남는 거래였다.
“뭐, 뭐든! 뭐든 말하게나! 뭐든!!”
천국이 약속된 사람처럼 환하게 미소 짓는 최우석.
시문은 품속에서 휴대폰을 꺼내, 그를 향해 겨누었다.
“지금부터 제가 묻는 말에 답만 해주시면 됩니다.”
“물론이지! 뭐부터 말할까? 응?”
최우석은 미친 사람처럼 마구 고개를 끄덕이며.
“내 연구? 성삼의 인체 실험? 내게 연구 자료를 보내 준 용족?”
친절하게 시문이 묻고 싶었던 것들을 나불거렸다.
“진정하시고. 하나씩 답하면 됩니다.”
시문이 싱긋 웃으며, 그의 질문을 정리하려던 그때.
“아니면 10년 전의 사건? 뭐든 말만 하게나!!”
마지막으로 내뱉는 최우석의 말에.
“……방금 뭐라고 했죠?”
시문의 미소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 * *
인천 국제공항 옆 무의도.
쏟아지는 빗줄기들을 뚫고, 그곳으로 시커먼 차들이 줄줄이 들어선다.
몇몇 이들은.
휘이이.
허공을 날거나 날개를 펄럭이며, 세찬 빗물을 가르고 나아갔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한 해안가.
조수석에서 내린 2미터의 남자가 급히 우산을 펼치며 뒷좌석을 열었다.
하나.
“되었다.”
차에서 내린 서늘한 중년인은 가볍게 손을 저었다.
2미터의 남자는 위쪽을 힐끔하곤, 그의 명령대로 우산을 접었다.
어느새 자라난 정체 모를 거대 잎사귀가 쏟아지는 빗물을 완벽히 차단하고 있는 것이다.
한 가지 신기한 것은.
중년인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꾸드득.
거대 잎사귀의 크기 역시 실시간으로 자라나고 있다는 것.
그렇게 해안가로 다가간 중년인은 주변을 훑었다.
“이곳인가?”
“예, 협회장님. 김시문이 알려 준 위치가 이곳에서 끊어졌습니다.”
김무열의 물음에 최창욱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솨아아아.
“한데…… 날씨가 이래서야, 그냥 찾기는 어렵겠군요.”
구두를 노리는 위협스러운 파도에 다소 곤란한 표정을 짓는 최창욱.
“우선 정령사 같은 수속성 마법계들로 수색 작업에 들어가겠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 없다.”
김무열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에 최창욱은 의아한 얼굴로 김무열을 바라봤으나.
“놈은 바다로 들어간 게 아니다. 저 섬, 실미도로 간 것이지.”
“실미도 말씀이십니까? 하지만 저곳에선 어떤 기척도…… 아!”
이어지는 김무열의 말에 작게 탄식을 흘렸다.
“결계로군요.”
“그래. 그것도 꽤 수준급의 결계다. 종리추가 어지간히도 신경을 쓰는 모양이야.”
고개를 주억거린 김무열은 뒤로 턱짓을 했다.
“다들 물러나도록.”
“예. 다들 거리를 물려라!”
최창욱은 얼른 거리를 벌리며 소리쳤다.
꾸드드득.
분명 해안가이거늘.
당최 어디서 자라났는지 모를 굵직한 나무뿌리가 솟아난다.
수 미터에 달하는 뿌리들은 역설적이게도, 금속처럼 날카로운 예기를 번들거렸다.
김무열이 그것들을 정면으로 쏘아 보내려던 찰나.
쩌적.
허공에 금이 갔다.
정확히는.
쩌저적.
비바람이 몰아치고 세찬 파도가 들치는 해안가라고 해야겠지.
이내.
쩌정!
투명한 파편이 되어 깨져버리는 해안가.
이어.
오싹.
‘뭐지?’
1세대 랭커이자 철목왕이라 불리는 그가 오싹할 만한 살기가 들이친다.
주변에 자라난 날카로운 나무뿌리들은 긴장한 야수처럼 절로 몸을 움츠렸고.
그에 반응하듯.
“하……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뚜렷한 미성.
그러나 평소와 달리 진득한 살기를 담은 목소리가.
“숙부. 그거 치워요. 죽여 버리기 전에.”
김무열의 귓가로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