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8화
168화. 일타쌍피 (1)
인천 국제공항 옆 무의도.
그곳으로 시커먼 차 한 대가 들어선다.
어둑해진 시간 때문일까?
아니면 세차게 내리는 빗발 때문일까?
수도권 해안 관광 명소인 이곳은 초여름임에도 인적이 한산했다.
그런 한적한 도로를 타고 해안가를 달리던 차는 한 해변에서 멈췄다.
“많이도 오는군.”
차에서 내리는 한 남자.
솨아아아.
세차게 내리는 빗물에 얼른 우산을 편 남자는 해안가로 걸음을 옮겼다.
마침 밀물 때라서일까?
세찬 비와 더불어 해안가엔 제법 거친 파도가 들이닥쳤지만.
위험하게도 남자는 망설임도 없이 그런 해안가로 다가갔다.
“분명 여기쯤일 텐데…….”
우산이 의미 없을 정도로 강한 빗방울 때문인지.
허리까지 젖어오는 바지에 남자가 인상을 찌푸릴 때쯤.
“최우석 박사님, 맞습니까?”
시끄러운 빗소리를 뚫고 한 남자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최우석은 얼른 고개를 들었다.
놀랍게도 어둑한 빗물과 파도만 있을 뿐.
사람으로 보이는 형태는 어디에도 없었다.
슥.
우산을 쥐지 않은 손이 자연스레 품속으로 파고든다.
“아아. 놀라지 마십시오. 전 강위항이라고 합니다. 창왕 님의 명을 받고 모시러 왔습니다.”
“대륙성의 인물이셨군. 반갑네.”
품속에서 손을 뺀 최우석은 빙긋 웃으며 인사를 던졌다.
하나.
“한데…… 어디에 있는 겐가?”
아직도 그의 시선엔 비바람 부는 광경밖에 보이질 않았기에.
최우석은 다시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죄송합니다. 비각성자를 모시는 건 오랜만이라.”
능글맞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와 함께.
스륵.
투명한 커튼을 쳐놨던 것처럼 정면의 공간이 걷혔다.
놀란 듯 잠시 눈이 커지는 최우석.
이내 정신을 차린 그는 눈앞에 열린 공간으로 걸음을 옮겼다.
흡사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이.
‘비가…… 안 내려?’
시끄러웠던 빗소리가 뚝 멎었다.
최우석은 의아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고.
“세상에…….”
입을 떡 벌렸다.
그럴 수밖에.
우산이 소용없을 정도로 세찼던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단지.
투두두둑.
투명한 막에 가로막혀, 주변으로 흘러내리고 있을 뿐.
그런 최우석의 반응이 마음에 든 것일까?
30대로 보이는 다소 마른 외형의 남자.
“워낙 귀한 분이라고 하셔서요. 불편함이 없으시도록 준비 좀 해 봤습니다.”
아마 강위항이로 추측되는 남자는 능글맞은 미소로 앞쪽을 향해 손짓했다.
그 능글맞은 미소 속에서.
‘쯧. 각성자들이란. 보아하니 제법 높은 랭크 같은데. 이리 힘자랑에 안달 나서야.’
멸시와 우월감이라는 감정을 읽어 낸 최우석은 속으로 혀를 찼으나 그뿐.
“역시 세계 최고 길드의 플레이어답군. 이런 광경은 살면서 본 적이 없다네.”
일그러진 속과 달리.
그의 얼굴은 여유로운 연장자의 그것을 가득 담고 있었다.
아직 어려서일까?
아니면 본래 성격이 그런 것일까?
“하핫! 과찬이십니다. 다이아급 마법계에게 이쯤이야, 식은 죽 먹기나 마찬가지니까요.”
강위항은 호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다이아’라는 단어에 은근한 힘을 준 것을 최우석은 놓치지 않았다.
오만함이 절절히 배어 있는 강위항.
덕분에 말로라도 금칠해 주는 것이 효과가 있었던 것일까?
“이런, 많이도 젖으셨군요.”
강위항은 잠시 안타까운 얼굴로 중얼거리더니, 최우석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귀하신 분이 감기라도 걸리면 곤란하지요.”
우웅.
강위항의 손끝에서 검푸른 기운이 일렁거린다.
이어 무언가를 털어 내듯.
그의 손이 옆으로 움직이자.
촤륵.
최우석의 옷을 적셨던 빗물이 바닥으로 털려 나왔다.
“허허…….”
거의 다 말라버린 옷의 촉감에 최우석이 어이없는 웃음을 흘린다.
“그럼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반응이 만족스러운지.
강위항은 한결 더 짙어진 미소로 최우석을 안내했다.
걸음을 옮길수록.
투두두둑.
굵직한 빗물이 투명한 막을 두드리는 소리가 점차 커진다.
강위항을 따라 해안가를 걷는 최우석의 눈은 쉬지 않고 주변을 훑었다.
‘밖엔 저런 투명한 막이 없었던 것을 보아…… 이곳은 아마도 결계 속이겠군.’
같은 공간에 또 다른 공간을 만드는 것.
그 원리는 과학적으로 설명이 어려웠으나.
결계 관련 특성 정도는 알고 있는 최우석이었다.
‘그뿐만 아니야.’
최우석의 시선이 저 앞의 섬까지 이어지는 모랫길을 향한다.
‘아까는 분명 밀물이 들어와 실미도로 가는 길이 보이지 않았어.’
이곳으로 들어오기 전의 해안가.
결계 밖의 해수면은 분명 만조 수준이었다.
당연히 실미도로 향하는 모랫길도 바닷물에 잠겨 있었고.
비바람을 동반한 파도까지 세차게 일고 있었다.
한데 이곳에는 실미도로 향하는 모랫길이 있다고?
‘결계 내부의 환경을 조작한다라…… SS급 이상의 결계 능력자도 있나 보군.’
본디 결계를 펼친 지역의 환경을 조작하려면.
결계 관련 특성이 SS급 이상이어야 했다.
최우석은 헛웃음을 흘렸다.
‘다이아급 마법계에 SS급 결계 능력자를 고작 비각성자 하나 마중하는데 보내다니?’
그뿐만 아니었다.
‘주변의 저 로브인들도, 하나같이 기도가 범상치 않아.’
강위항을 따라 걷는 모랫길.
그 중간중간마다 로브를 깊게 쓴 인원들이 경호하듯.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무의도의 해안가에서 실미도를 향하는 길은 그리 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가까운 거리도 아니다.
‘이제 반을 지났는데 벌써 50명이 넘다니…….’
모랫길에 들어선 순간부터 사람 수를 세던 최우석은 세는 것을 멈추었다.
인원이 배치된 간격은 거의 일정했으니.
아마 목적지인 실미도에 도달할 때쯤엔 100명 정도가 될 터.
‘어마어마하군. 과연 대륙성이다 이건가?’
아메리칸드림과 함께 세계 최강으로 뽑히는 대륙성.
그 아성에 참으로 걸맞은 호위였다.
그런 최우석의 상념을.
“어떻습니까? 최박사 님.”
강위항 목소리가 일깨운다.
최우석은 고개를 들어, 걸음을 옮기며 자신을 바라보는 강위항과 시선을 맞췄다.
“뭐가 말인가?”
“이 호위 말입니다.”
강위항은 걸음을 멈추지 않으면서, 양팔을 활짝 벌렸다.
“꼭 일국의 왕이라도 되신 것 같지 않습니까?”
“왕?”
갑자기 무슨 말인가 하며 고개를 갸웃하는 최우석.
그런 그의 시야에 작은 움직임이 잡힌다.
방금 옆을 지났던 이의 로브 자락이었다.
최우석의 시선은 자연스레 그것을 따라 뒤를 향했고.
“…….”
얼굴을 굳혔다.
굳을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 언제 이렇게!’
아까 자신이 지나쳤던 로브인들.
근 60여 명에 달하는 이들이 일정한 대형을 갖추며, 소리소문없이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으니까.
‘아무리 자신이 비각성자라지만. 이 정도 수가 따라붙는데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다니!’
무려 60여 명이거늘.
저만한 인원이 뒤를 따르는데 어떻게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단 말인가?
이는 단순한 각성자와 비각성자의 차이가 아니었다.
‘제대로 된 플레이어를 나누는 랭크대가 골드라고 했으니…….’
자신의 감각을 완벽히 속이고 뒤를 따르는 60여 명.
그리고 앞으로 남은 30여 명을 더해, 근 100여 명의 인원이 모두 골드라는 뜻일 터.
거기까지 생각이 닿고 나서야.
“어떻게, 마음에 드시는지요?”
최우석은 능글맞게 웃고 있는 강위항의 말뜻을 깨달았다.
100여 명에 달하는 골드급 플레이어의 호위.
그리고 다이아급 마법계와 SS급 결계 능력자까지.
“허허! 어디 왕뿐인가? 황제라도 된 기분일세.”
비각성자에겐 황제도 부럽지 않을 호강이었다.
그런 최우석의 반응이 즐거운 것인지.
“고작 이 정도로 황제라니요. 좁은 곳에 사셔서 그런지, 황제를 너무 쉽게 언급하십니다. 하핫!”
대도시에 갓 상경한 촌놈을 보듯 비꼬는 것인지.
미묘한 어투로 까 내리는 강위항.
하나 그런 말투와 달리.
“이런. 조심하셔야지요.”
툭.
특성까지 써가며 돌부리 하나조차 친히 치워주는 행동을 보고야 최우석은 깨달았다.
비각성자라고 무시하는 태도는 둘째치고.
왜 강위항이 아까부터 살짝살짝 긁으면서도, 묘하게 우대하는 태도를 취했는지 말이다.
‘그렇군. 날 회유하려는 건가?’
이상할 것도 없었다.
‘대륙성에도 비슷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긴 해도, 내가 하는 연구와는 방향이 다르니까.’
용족의 인자를 이용한다는 방향성은 같았지만.
목표로 하는 결과 자체는 다른 연구.
‘난 줄기세포를 대용하기 위한 의료 목적으로 용족을 연구하지만…….’
자신은 용족의 우월한 신체 능력을 어떻게 인간에게 이식할 수 있냐를 중점으로 연구한다.
더불어 육체의 변화에도 최대한 정신이 온전할 수 있는 방향으로 말이다.
근본적으로 인류의 더 나은 미래를 바라보는 연구였으니까.
그렇기에 민간인은 일절 건드리지 않고, 빌런으로 확정된 각성자들로만 실험을 한 것이다.
하나.
‘저들은 무력을 위해서 연구를 하지.’
대륙성은 다르다.
정확히는 대륙성을 양분하는 창왕 종리추의 연구라고 해야겠지.
종리추는 강자존을 무척이나 신봉하는 인물인 만큼.
강해지기 위해선 어떤 수단도 가리지 않았다.
‘그러니 민간인을 강제로 각성시키려는 연구를 하는 걸 테고.’
사실 말이 민간인 각성이지.
‘전부 용족화시켜서, 전투 가능 인원을 늘리려는 목적이겠지.’
일종의 사병을 늘리기 위한 실험에 지나지 않았다.
실제로 뒤탈 없을 민간인은 죄다 잡아넣고 실험을 하지 않았던가?
그랬기에 지난 몇 년간.
수두룩하게 날아왔던 종리추의 러브콜과 막대한 조건들도 거절했던 최우석이었다.
하지만.
‘이젠 선택의 여지가 없겠어.’
이대로 대륙성의 도움을 받아, 중국으로 넘어가게 되면 단 하나의 선택만을 해야 할 것이다.
처음엔 어르고 달래겠지만.
계속해서 거절하면 저쪽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테니.
결국 좋게 대우해줄 때, 저들의 요청을 받는 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이 될 터.
물론 안 좋게만 볼 일은 아니었다.
‘뭐, 나도 연구가 막히던 참이니까. 분야도 비슷하니, 내 연구에도 많은 도움이 되겠지.’
규모의 차이도 있겠으나.
가끔 저들과 연구 지식을 교류할 때마다, 얼마나 대단한 발전을 이룩하고 있는지를 확인했으니까.
그렇게 모랫길을 따라 실미도에 다다르자.
“강위항! 여기야!”
모랫길에 배치된 인원 말고도.
10여 명에 달하는 인원이 강위항을 반겼다.
그에 최우석은 깨달았다.
‘저들 모두…… 최소 플래티넘급 이상이겠군.’
오는 길에 배치되지 않은 것도 그렇고.
“사람 하나 데려오는데 왜 이렇게 늦어?”
“목 빠지는 줄 알았다고.”
“마법계들이 다 그렇지 뭐. 더럽게 느긋하잖아.”
다이아급 마법계인 강위항을 시니컬하게 받아들이는 모습만 봐도 뻔했다.
물론 최우석의 놀람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저자인가?”
분명 육성이긴 하나, 인간의 것으로는 들리지 않는 목소리.
근 3미터에 달하는 신장에 침대보 같은 로브를 휘감은 이는 척 보기에도 심상치 않았으니까.
심지어.
“예. 늦어서 죄송합니다. 최박사님께선 비각성자이신지라, 정중히 모신다고 다소 시간이 지체되었습니다.”
강위항이 허리를 90도로 꺾어가며, 저리 깍듯이 인사하지 않는가?
“되었다. 플레이어인 너희도 부실한데, 비각성자라면 어떻겠나.”
강위항의 그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오만함을 내비치는 로브의 덩치.
그리고 그런 존재가.
“우린 이해하노라. 종의 한계는 어쩔 수 없으니.”
“흐흐! 얼른 연구가 완성되길 빌어라.”
둘이나 더 있다.
강위항의 보고를 받던 가장 선두의 로브 덩치가 최우석을 바라본다.
고작 시선을 받은 것뿐인데도.
오싹.
‘무, 무슨!’
무슨 야수라도 눈앞에 둔 것처럼.
머리칼이 절로 바짝 서는 최우석.
다행히도 적대감은 없는 것인지.
“최우석이라 했나? 이리로 와라.”
로브의 덩치는 옆의 모래사장으로 턱짓했다.
최우석은 고개를 끄덕이곤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박.
거리가 가까워지자.
그들 옆, 모래사장 위로 기이한 문양들과 진이 보였다.
최우석은 그것의 존재를 단박에 알아차렸다.
‘순간이동 마법진인가 보군.’
저걸 이용하면 곧바로 중국으로 이동되겠지.
그렇게 마법진 안으로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잠깐.”
머리 위로 야수의 으르렁거림과 같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최우석이 움직임을 멈추자.
“강위항. 이 자는 비각성자라고 하지 않았나?”
로브의 덩치는 한결 낮아진 목소리로 물었고.
“예? 아 예! 맞습니다! 최박사님은 분명 비각성자이십니다.”
뒤편에선 강위항의 당황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근데 왜 죽음의 냄새가 나는 거지?”
로브의 덩치는 악취를 맡은 짐승같이 킁킁대며 불쾌함을 토했다.
그에.
“뭐야? 정말이잖아?”
“최우석. 자네 설마 언데드였나?”
뒤에 있던 두 로브의 덩치들 역시 킁킁대며 한걸음 다가왔다.
당연히.
“무, 무슨 소린지 모르겠소만!”
인간 같지도 않은 이들의 접근에 최우석은 당황스러운 얼굴로 한걸음 물러났다.
“아니면 사령술과 관련된 아티팩트를 지니고 있다던가.”
“호, 호신용 아티팩트가 있긴 하오만! 그건 사령술과 아무 관계도 없소!”
최우석은 얼른 품속을 뒤적거려, 막대 형태의 아티팩트를 꺼냈다.
“보시오!”
“으음…….”
그것을 유심히 살피는 로브의 덩치들.
“확실히. 사기는 느껴지지 않는군.”
“스피어계열의 마법이 단발성으로 담겨 있어. 딱 호신용 아티팩트다.”
그들은 최우석의 아티팩트를 살피며 저들끼리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그렇군.”
가장 선두에 있던 로브의 덩치가 최우석을 바라본다.
정확히는.
“최우석. 너에게서 나는 냄새가 아니었어.”
최우석의 뒤편인 넓은 모래사장이었다.
그때.
“잘도 알아차리네.”
뚜렷한 미성과 함께.
로브의 덩치가 주시하던 공간이 일렁거린다.
그리곤.
스아아아.
사령술 특유의 잿빛이 흘러나오며.
“용족일 텐데. 냄새를 개보다 잘 맡을 줄은 몰랐어.”
기묘한 형태의 왕관을 벗고 있는 미남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흡사 유령처럼 반투명한 잿빛으로 일렁거리는 미남자.
“저, 저놈은!”
“김시문! 김시문이다!!”
시문을 얼굴을 확인한 대륙성이 플레이어들이 곧장 무기를 뽑아 달려들었다.
시문은 그런 대륙성의 플레이어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따악.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쿠르릉!
세찬 비를 막아 주던 투명한 벽을 뚫고 거센 뇌성이 내리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