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7화
167화. 전조 (2)
쨍그랑.
값비싼 글라스 잔이 산산조각 난다.
하나 그따위 것에는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지금 뭐라고 했나?”
이순철 회장은 이까지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보고드린 대로입니다. 광주과 창원을 기점으로 다른 시설들까지. 전부 협회 측 사람이 붙었습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냔 말일세!”
이순철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무리도 아니었다.
“갑자기 다섯 시설 다 협회가 붙다니? 애당초 협회가 시설의 존재를 안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지금까지 아무런 이상도 없었던 연구소들이다.
한데 갑자기 사람이 붙다니?
-그것이…… 아무래도 보고드렸던 침입자들이 살아나간 모양입니다.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
최우석 박사는 진심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목소리였다.
-참 신기합니다. 공허는 다이아 플레이어에게도 치명적인 기운일 텐데.
하지만.
-일정량을 살포한 것도 아니고, 아예 저편으로 보내버렸음에도 어찌 살아 돌아 왔는지 원.
그 속엔 어떻게 빠져나왔는지에 대한 과학자 특유의 호기심을 가득 담겨 있었고.
“지금 그딴 게 중요한가!”
그것을 눈치챈 이순철의 눈매는 사나워졌다.
“애당초 침입자가 발생한 것부터가 문젤세! 대체 어디서 정보가 샜단 말인가!”
-저도 알아보는 중입니다만,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미 중요 자료는 모두 폐기해 둔 상태니까요.
“최 박사. 난 정보가 어디서 샜는지를 물었네.”
-……사실 짐작 가는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만.
잠시 망설이는 전화 속 목소리.
이내.
-아마 성삼 내부에서 새지 않았나 싶습니다.
“개소리!”
대번에 소리를 지르는 이순철.
“성삼에서 이 실험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나밖에 모르네.”
최우석 박사의 실험이 이루어지는 연구소는 총 6곳.
그리고 그곳들 서류상, 모두 아레나 제작 관련 시설이라고 등록되어 있었다.
인체 실험을 하는 연구소라고 눈치챌 건더기가 없단 말이다.
-이영희가 눈치챈 것 같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건 그런 의미의 말이 아니었네.”
이순철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얼마 전 영희와 이야기를 나눴네. 연구실이 뭐 하는 곳인지도 모르는 눈치였어.”
얼마 전 자신을 찾아와, 연구실이 어디 있냐며 소리를 꽥꽥 지르지 않았던가?
만약 암사자 같은 딸이 연구실이 어딘지 알았더라면.
자신을 찾아오는 일 따윈 없었을 것이다.
본인이 직접 그곳으로 찾아갔을 테니까.
하지만.
-하지만 회장님. 눈치채지 못한 척한 것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나름 잔뼈 굵은 1세대 랭커인데.
최우석의 의심은 여전했고.
“모르는 소리 말게나.”
이순철은 코웃음을 쳤다.
“그 아이가 시설을 눈치챘다면. 장담컨대 자네는 폐기 작업도 제대로 하지 못했을 것이야.”
-도후께서 대단하다는 건 익히 알고 있습니다만, 비약이 아닐지요? 아직 온전한 상태도 아니지 않습니까? 듣기로는 아직 골드급이라고 들었습니다만.
최우석이 끝까지 의심을 놓지 않자.
“자네는 정말 그 아이를 모르는군.”
넌더리가 나는지.
이순철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영희의 저력이 단순히 플레이어로서의 무력밖에 없을 것 같나?”
-물론 성삼의 후계자로 엘리트 코스를 밟아 오셨겠지만…….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닐세.”
최우석의 말을 잘라낸 이순철은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말하는 건 1세대 랭커로서 쌓아온 인맥이야. 그건 돈으로도 환산할 수 없는 것이니.”
-그 말씀은 타 1세대 플레이어들도 움직였을 거라는 겁니까?
“그 이상일세. 그들이 키워온 플레이어들과 세력, 그 모두가 움직였을 걸세. 그럼…….”
성삼이 비밀리에 인체 실험까지 자행했다는 소문이 일파만파로 퍼져나가겠지.
거기까지 가버리면 이순철 자신은 고사하고, 그룹의 존속 자체가 위험할 수도 있었다.
이순철은 뒷말을 애써 삼켰으나, 최우석은 다 듣기라도 한 것처럼.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습니까? 본인도 성삼의 부회장인데.
설마 하는 목소리를 내었지만.
이순철은 단호하게 못을 박았다.
“그러고도 남을 아이네. 내 한평생을 일궈놓은 성삼보다, 제 소신을 더 중요시하는 아이니까.”
-참…… 훌륭한 따님을 두셨군요.
묘한 감탄을 표하는 최우석.
하나 칭찬이 아님을 알기에.
“그러게나 말일세.”
이순철은 씁쓸한 얼굴로 까끌한 수염을 쓸었다.
“후…….”
한숨이 절로 흘러나온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딸과 부딪칠 때마다 매번 떠오르는 생각.
자식들이 으레 그렇듯.
이영희도 처음부터 저렇게 아비에게 대드는 아이가 아니었다.
아들을 바라긴 했으나, 그녀가 보여 준 뛰어난 오성에 딸이라고 차별하지 않았다.
오히려 딸이라는 요소가 단점이 되지 않도록 더 성심성의껏.
그리고 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부어 키웠다.
또한 딸 아이가 성삼의 꼭대기에 앉는 그 날.
어떤 문제도 생기지 않게, 성삼 내부의 인사까지도 친히 정리해주었다.
심지어 소신과 강단이 있는 그 성격에 맞춰.
고르고 골라 순종적인 신랑감까지 준비해줬거늘.
‘그깟 근본도 없는 천한 놈을 집안에 들여선!!’
웬 듣도 보도 못한 놈을 신랑감이라고 데려와, 제 아비의 뒤통수를 거하게 때려버렸다.
‘정 그놈을 못 잊겠으면 결혼 후에 애인으로 만나도 되는 일 아닌가!’
재벌들에겐 흔한 일이고 흠잡힐 것도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먼 과거 때부터.
상류층의 결혼이란, 기득권의 유지를 위한 도구에 불과했으니까.
한데.
‘그놈의 연정이 뭐라고. 배은망덕한 것!’
근본도 없는 놈을 데려오다 못해, 감히 제 아비에게 맞서다니?
자신이 저를 어떻게 키워냈거늘.
대체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이란 말인가!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그래. 그때부터였어.’
자랑스러웠던 딸과 어긋난 시점이 파악되었다.
“그 천한 놈 하나에 단단히 미쳐 버린 게야!”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쳤던 아비를 저버리다 못해.
이젠 이빨까지 들이미는 상황이 된 것이다.
쾅!
감정이 주체되지 않는지.
거칠게 책상을 내리치는 이순철.
‘이래서 딸자식은 키워 봐야 소용이 없어!’
아들이었다면 이렇게까진 되지 않았을 텐데.
하필 사사로운 감정에 약한 딸로 태어나서는 모든 것이 꼬여버렸다.
소리를 들은 것일까?
-회장님? 괜찮으십니까?
전화 너머에서 최우석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미안하네. 잠시 흥분을 했군.”
이순철 회장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래서, 연구의 증거가 남지 않는 건 확실하겠지?”
-물론입니다. 앞으로 10분 후면 저들이 시설에 진입하더라도,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없을 겁니다.
“믿겠네. 한데 자네는 어찌할 텐가? 김무열이는 보통 집요한 놈이 아닐 텐데.”
-당분간 중국으로 가 있을까 합니다.
“중국이라…….”
잠시 침음성을 흘리는 이순철.
이내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편이 안전하겠지. 배편은 준비했나?”
-이미 연락해 두었습니다. 그쪽에서 아예 이동시켜 줄 사람을 보낸다더군요.
“사람? 순간이동이라도 시켜 줄 모양이군.”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참 놀랍지 않습니까? 현대의 과학도 해내지 못하는 것을 마법으로 해낸다는 게.
“그래봐야 죽음을 거스르진 못하잖나.”
빈정거림에 가까운 말투.
그에 최우석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요즘 건강은 좀 어떠십니까?
“그대로일세. 가끔 통증이 오고, 각혈하는 정도지.”
-원하신다면 샘플을 보내드릴 수도 있습니다.
“샘플?”
이순철의 한쪽 눈썹이 삐쭉 올라간다.
“아직 미완성이라 하지 않았나?”
-그렇긴 하지만…… 극소량에 정제를 거쳐 놓았으니, 효과를 많이 보실 겁니다.
“부작용은 어디까지 보고 있겠나?”
-확답은 드리지 못하나, 일단 생겨도 최소한일 테고. 운이 좋으면 겪지 않으실 수도 있지요.
“최소한이라…….”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는 이순철.
그러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최소한의 부작용.
거기다 작용 효과가 더 크다면야, 예비용으로 두는 것도 나쁘진 않을 터.
“좋네. 혹시 모르니 몇 개 보내두게.”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자네가 봤다는 침입자 말일세. 김시문과 강다영이 확실하겠지?”
-물론입니다.
“그렇단 말이지…….”
잠시 침묵하는 이순철.
미간을 찌푸리며 무언가를 고민하던 그는.
“알겠네. 그럼 중국에 도착하거든 연락하게나.”
-예.
작별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김시문…….”
어째 랭커인 손녀보다.
사생아에 불과한 그놈이 더 신경이 쓰이는 것일까?
이순철의 눈가 주름이 한결 더 깊어진다.
‘좋지 않아.’
눈에 보이지 않으나.
정체 모를 균열이 스멀스멀 가슴속으로 번져가는 듯한 이 불쾌한 기분.
이순철은 이게 어떤 느낌이지 경험한 적이 있었다.
‘뭔가 조금씩 어긋나고 있어.’
과거 자랑스러웠던 딸이 제 뜻을 저버리기 시작했던 그때.
그래.
딱 그때와 같은 느낌이었다.
* * *
싱그러운 연둣빛.
자연을 그대로 옮겨 담은 듯한 작은 조각이 환한 빛을 뿜어낸다.
시문은 그것을 그대로 가슴 정중앙으로 가져다 대었다.
스륵.
물에 녹는 가루처럼.
흔적도 없이 시문의 몸속으로 녹아드는 조각.
이내.
[세계수의 씨앗 조각을 획득하였습니다.]
[칭호 ‘세계수의 동반자’의 옵션이 성장합니다.]
[칭호 ‘세계수의 동반자’의 성장에 따라, 소속 길드의 버프가 향상됩니다.]
눈앞으로 주르륵 떠오르는 메시지들.
시문은 메시지들을 확인하곤, 칭호창을 열었다.
[세계수의 동반자] - 성장형
세계수의 동반자에게 주어지는 칭호.
-소속 길드원의 경험치 40% 증가.
-소속 길드원의 스탯 성장률 90% 증가.
“예상대로 제대로 올랐네.”
절로 지어지는 미소.
‘저번에 버프가 성장했을 땐 경험치는 10%, 스탯 성장률은 20%씩 올랐었지.’
경험치는 20%에서 30%로.
스탯 성장률은 50%에서 70%로 올랐었다.
해서.
‘요구 업적 포인트가 여전히 만점이라, 버프 성장치라도 내려갈 줄 알았는데.’
걱정과 달리 성장 버프는 경험치 10%, 스탯 성장률 20%로 이전과 똑같은 성장치를 보여주었다.
시문과 같은 마음인지.
-히히. 달달하지?
어느새 다가온 플라스크 속 현자의 돌 역시 밝은 목소리로 시시덕거렸다.
-그리고 오빠, 연금술의 선구자 칭호도 성장한 거 알지?
“물론이지.”
시문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스 마그나를 얻고 나서, 20이라는 연성력과 함께 칭호 ‘연금술의 선구자’ 역시 성장했었다.
“이참에 확인이나 해 볼까.”
시문은 다시 칭호란을 살폈다.
[연금술의 선구자] - 성장형
연금술의 신화적인 산물을 모두 연성한 연금술사에게 주어지는 칭호.
-연성 관련에 조금 큰 보너스를 받는다.
-연성에 소모되는 연성력이 35% 감소한다.
-연성의 위력이 25% 증가한다.
“호오. 옵션이 전부 성장했네?”
-응. 연성 보너스도 ‘보통’에서 ‘조금 큰’으로 증가하고, 소모 값이랑 위력도 각각 10%씩 올랐었어. 그동안 체감 못 했어?
고개를 갸웃하는 현자의 돌에 시문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어…… 솔직히 몰랐어.”
-하긴, 사르가스 이후 그나마 세다는 녀석이 그 말리난가? 뭔가 하는 미친X 하나니까.
“미친X이라니…….”
세계 최대의 빌런 조직인 데스페라도.
그곳의 구성원이자, 일찍부터 오빠인 말리크와 악명으로 묶여 불리는 말리나를 저런 식으로 표현할 줄이야.
특히나 전생의 말리나를 아는 시문으로선 헛웃음이 나오는 순간이었다.
현자의 돌의 눈이 샐쭉해졌다.
-내가 뭐 틀린 말 했나? 나글파르가 없었어도, 그 정도 네크로맨서는 오빠가 아주 발라 버렸을걸?
“뭐, 부정은 못 하겠네.”
죽음의 성좌 헬의 창조물인 나글파르.
신화급답게 네크로맨서와의 상성은 최고였지만.
사실 일신의 무력만으로도 말리나 정도는 충분히 제압이 가능한 시문이었다.
애당초 말리나를 만나기 이전부터 다이아급들을 상대로 승리를 해온 데다가.
사기 스탯까지 보유해, 사령술엔 나름 내성도 있는 상태였으니까.
피식 웃은 시문이 곁에 둔 휴대폰을 살핀다.
그에 현자의 돌이 빼꼼 눈을 내밀었다.
-뭘 그렇게 봐?
“최우석 박사 때문에.”
-에이~ 난 또, 야동이라도 보는 줄 알았…… 컥!
곧장 플라스크 위로 내리찍히는 시문의 수도.
현자의 돌은 눈물을 글썽이며, 연성된 팔로 이마를 부여잡았다.
-이씽! 좀 보면 어때! 오빠 취향도 궁금하다고!
헛소리를 아주 당당하게 말하는 현자의 돌.
그에 시문은 작게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협회가 움직였잖아. 아마 지금쯤이면 저쪽도 눈치를 채고 움직이고 있겠지.”
-아아, 그래서 연락 기다리는구나? 오빠가 위치까지 짚어줬으니까.
“그래. 특히 이런 분야에서 난, 숙부의 능력을 전적으로 믿거든.”
시문은 자연스레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봤다.
“결국 최우석 박사가 잡히는 건 시간문제일 거야. 연구는커녕 잠잘 거처조차 구할 수 없을 테니까.”
-감이 좀 잡히네. 국내에선 잡히는 것 말곤 방법이 없으니, 최우석은 해외로 도주할 것이다?
“그렇지.”
도주할 해외는 당연히 종리추가 있는 중국일 것이고.
“중국 땅이 넓은 건 둘째치고. 거기라면 해오던 연구를 계속할 수 있을 테니까.”
-잠깐. 그럼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최우석이 해외로 나가버리면 어쩌…… 아!
무언가를 깨달은 것일까.
작게 탄식한 현자의 돌은 어이없는 눈으로 시문을 바라봤다.
-오빠는 최우석이 도주하길 기다리고 있는 거구나?
“맞아.”
시문이 고개를 끄덕이자, 현자의 돌은 말을 이었다.
-국내에 있으면 언젠가 잡히긴 할 테지만, 그때까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니까?
“우리 현아, 똑똑하네.”
시문은 미소를 머금으며, 둥둥 떠다니는 플라스크의 윗면을 쓸어주었다.
“아마 최대한 빨리 밀항을 하려고 들 거야. 대륙성쪽에서 마중을 나올 확률도 높고.”
-하긴, 용족화 연구에 중요한 인물일 테니까. 근데 밀항이면 놓칠 수도 있지 않아?
“말했잖아. 이런 쪽은 전적으로 숙부의 능력을 믿는다고. 협회장직에 앉아 있지만, 그런 쪽으로 빠삭한 사람이거든.”
협회장직에 오르기 전, 과거만 봐도 그렇고.
당장 최근도 대륙성의 암살단을 밀항시킨 경력이 있지 않은가?
“아마 최우석이 움직이는 즉시, 숙부의 정보망에 걸려들 거야.”
시문의 말이 끝나자마자.
드르륵.
진동 소리가 들려온다.
옆에 올려둔 핸드폰에서 나는 진동이었다.
진동하는 화면 위론 ‘김무열’이라는 글자가 반짝였다.
‘내 말 맞지?’
그런 미소를 지은 시문은 전화를 받았고.
-김시문. 놈을 찾았다.
휴대폰 너머에선 기다리던 답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