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0화
140화. 검은 제련소 (3)
살얼음판을 걷듯.
어둡고 늘씬한 여성이 무척이나 조심스럽게 움직인다.
그녀가 다크엘프임을 고려해 보면, 이곳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새삼 느껴졌다.
실제로.
슥.
타앗.
어떨 땐 벽, 어떨 땐 천장, 그리고 또 어떨 땐 바닥을 기어서까지.
그녀는 블랙팬서와 같은 수인족을 연상시키듯.
무척이나 은밀하고 기민한 움직임으로 나아갔다.
그러면서도.
힐끔.
연신 뒤를 힐끔하는 다크엘프.
이만한 움직임과 은신으로 잘만 잠입했으면서.
뭐가 그리도 불안한지 그녀는 10초도 되지 않을 간격으로 매번 뒤를 힐끔거렸다.
그리고 그러한 태도는 결국.
“음? 거기 누구냐.”
은밀한 그녀의 움직임에 빈틈을 만들었다.
‘이런!’
그녀의 눈에 당혹감이 어린다.
하나 그런 눈과 달리.
슈아악.
단련된 그녀의 육체는 곧장 단검을 내지르고 있었다.
하지만.
까각.
정체 모를 시커먼 건틀렛에 막히는 단검.
“큭! 검기라니!”
단검을 잡은 큼직한 손에서 붉은 액체가 흘러나온다.
그녀의 단검에 일렁이는 검기를 보노라면.
저 시커먼 건틀렛의 방어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몸소 체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건틀렛과 이어지는 전신의 두꺼운 흑색 갑옷까지도.
다크엘프의 눈에 난색이 깃든다.
‘망했다!’
검기 섞인 일격을 고작 피를 조금 흘리는 선에서 막아 내다니.
물론 전력으로 싸운다면 이깟 방어구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놈이 소리치기 전에 끝장을 내야 하는데!’
눈앞의 상급 용족.
드락크가 내지를 외침, 혹은 비명은 막아 내지 못하리라.
그녀의 걱정대로.
“침입…….”
검은 갑주의 드락크의 목소리가 커지려는 순간.
우드득.
무언가 뒤틀리는 소리와 함께.
콰득!
섬뜩한 파육음이 드락크의 목소리를 틀어막는다.
정확히는.
“끄, 끄르……!”
목구멍을 틀어막고 있다고 해야겠지.
피와 거품이 끓는 드락크의 입이 몇 번이나 뻐끔거렸으나 그뿐.
흑색 투구와 갑옷 사이.
굵은 목을 꿰뚫린 드락크는 아무리 성대에 힘을 주어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자.
제 목을 꿰뚫은 원인을 노려봤다.
스으으으.
귀기, 혹은 망령.
그것들로 휘감긴 듯한 잿빛의 반투명한 손톱.
거기서 이어지는 반투명한 팔과 드문드문 자리한 금색 비늘까지.
‘드래고니안? 저분께서 대체 왜…….’
그 의문을 끝으로.
드락크는 간헐적인 떨림을 멈추었다.
철그럭.
둔탁한 쇠음을 내며 축 늘어지는 드락크.
“큰일 날 뻔했네요.”
3미터가 넘는 드락크를 한 손으로 꿰뚫은 채.
“데이나. 괜찮아요?”
잿빛의 귀기에 휩싸인 시문은 태연하게 물었다.
* * *
-상급 용족을 한 방에…….
-아깐 네임드급 드락크를 입으로만 조졌는데. 고작 일반 드락크 하나에 놀람?
-ㄹㅇㅋㅋ. 그것보단 저 은신이 말이 안 되는데.
-ㅇㅇ 대체 어떤 은신이길래, 용족들이 1도 눈치를 못 챔?
상급 용족을 한 방에 죽여 버린 것보다.
시문의 은신에 대해 더욱 관심을 쏟는 채팅창.
그도 그럴 것이.
-데이나 저거 은신은 다이아급 아님?
-맞음. 무력도 무력인데. 기본적으로 암살계 능력은 최소 다이아 초입임.
-여기까지 리딩하는 데도 온갖 쇼를 다했자너 ㅋㅋ
-나 데이나 저렇게 애쓰는 거 첨 봤음 ㅋㅋ
앞장서서 길을 안내하는 데이나.
그녀가 얼마나 주의를 기울이며 잠입해왔는지 실시간으로 본 것이다.
반면.
-근데 이 형은 어떻게 데이나의 리딩을 따라간 거지?
-그러네? 이야기 들어보니까 은신까지 한 거 같던데.
-근데 이 형 은신 이펙트도 안보였잖아. 그럼 안 한 거 아님?
시문의 모습은 시청자들의 화면에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원래 방송 보는 사람들한테는 은신 이펙트 보여주지 않나?
-ㅇㅇ. 설정마다 다르긴 하던데. 이 형 방송고자라서 기본 설정일걸?
-기본 설정이면 은신 이펙트는 물결처럼 일렁거리는 거 아닌가?
-맞음.
방송하는 플레이어가 은신과 같은 능력을 펼칠 경우.
시청자들의 시청을 돕기 위해, 따로 이펙트가 있기 마련이었다.
아무리 은신이라도.
시청자 입장에선 방송하는 플레이어가 뭘 하는지는 보여야 했으니까.
-근데 난 은신 이펙트 전혀 못 봄.
-22 나도 그런 거 1도 없었음.
한데 시문의 은신은 그 누구도 보지 못했다.
이는 크게 2가지로 유추할 수 있었다.
하나는 방송 매체인 아레니아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설마…… 아니지?
-에이, 아레니아조차 감지 못하는 은신일 리가 없자너 ㅋㅋ
-아무리 이레귤러라도 그건 좀 에바지…….
그런 아레니아조차 잡아낼 수 없는 수준의 은신이라는 것.
하나 시청자들의 의견은 점차 후자로 향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아까 잠시 보였던 잿빛 기운은 사기의 일종 같던데?
-네가 맞다. 브로. 나는 사기 스탯이 있어서 킴이 사령술을 썼다는 걸 알 수 있다.
-과연 킴 상인가. 사령술로 은신을 펼치다니.
-같은 플래티넘 유망주인 리코와는 비교도 안 되는 닌자인걸? WWWW
시문의 현 시청자는 140만 명대.
그것도 다국적에다 수준 높은 플레이어들이 많은 만큼.
시문이 펼쳐내는 힘을 어느 정도 유추해내는 것이다.
물론.
[성좌 하데스가 당신의 기습을 무척이나 만족해합니다.]
이 은신이 성좌 하데스의 무구로 펼쳐졌다라곤 상상도 못할 테지만.
[당신을 주시 중인 네 명의 성좌가 하데스를 노려봅니다.]
[성좌 하데스가 성좌 제우스의 곁으로 슬쩍 붙습니다.]
[성좌 제우스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성좌 하데스를 슬쩍 밀어냅니다.]
[성좌 하데스가 충격받은 눈으로 성좌 제우스를 바라봅니다.]
눈앞으로 주르륵 올라가는 성좌들의 반응.
그에 시문은 헛웃음을 흘렸다.
‘상위 서열의 성좌 사이에도 급이 있나 보군. 하데스도 상위 서열의 성좌일 텐데.’
제우스와 함께 올림푸스의 세 왕으로 불리는 하데스다.
한데 그런 하데스가 눈치를 보다니?
‘최고 신인 제우스급이 아니면 저기에 못 비빈다는 건가? 하긴, 다들 급으로만 따지면 왕 중의 왕이긴 하지.’
천마는 잘 모르겠으나.
검은 염소를 비롯한 나머지 성좌들이 지도자 격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아무리 하데스가 올림푸스의 세 왕이라 해도.
저들에 비할 수는 없겠지.
애당초 저승, 죽음과 관련된 성좌가 하데스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그나저나.’
시문은 다소 굳은 시선으로 검은 제련소의 내부를 훑었다.
‘여기도 저승과 다를 바가 없군.’
하데스의 무구인 ‘퀴네에’를 쓰고 난 후.
시문은 검은 제련소의 지독한 열기와 갑갑한 공기에서는 벗어났지만.
또 다른 지독한 환경을 맞이했다.
다름 아닌.
‘이렇게 많은 영혼이라니…….’
수많은 영혼의 향연.
아니.
끼아아아악!
흐어어어!
원혼의 폭풍이라고 해야겠지.
‘하나같이 지독한 원념을 품고 있군.’
하데스의 무구인 퀴네에의 영향 때문일까?
시문은 단순히 은신만 가능한 것이 아닌,
-뜨거워! 아파! 뜨거워! 아파!
-죽이리라! 모두 죽이리라!!
-이제 그만!! 풀어줘!! 제발 좀 죽여 줘!!!
검은 제련소 내부를 가득 채우는 수많은 원혼들의 원념까지 들려왔다.
시문의 시선이 그런 원혼들의 흐름을 따라 천장을 향한다.
‘전부 다 한 방향을 향하고 있어.’
격랑이 찾아온 바다처럼.
드높은 천장엔 원혼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소용돌이가 요동치고 있었다.
‘보아하니 검은 제련소에 끌려온 이종족들의 영혼 같은데…… 왜 영혼이 검은 제련소 밖으로 나가질 못하는 거지?’
따로 사령술을 익히거나 사기 스탯을 지니고 있지는 않았지만.
퀴네에를 장착한 시문은 죽음의 대략적인 구조를 알고 있었다.
본디 영혼을 지닌 이가 죽음을 맞이하면.
해당 영혼은 그 육신을 떠나 저승으로 향하게 된다.
어떤 원리로 저승으로 향하는지는 몰라도, 이게 영혼 순환의 기본 개념이었다.
그리고 사령술과 사기 스탯은 이러한 과정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수단이지.
한데 이곳은 어떤가?
‘어떤 사령술이나 사기도 느껴지지 않는데…….’
죽음과 관련된 어떠한 요소도 보이지 않는데.
이 거대한 곳을 가득 채울 정도로 많은 영혼들이 끝없이 천장의 소용돌이로 빨려들고 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아래에서부터 영혼이 끝도 없이 나타나고 있어.’
검은 제련소에 발을 들인 후 지금까지.
이 영혼의 소용돌이가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대체 얼마나 많은 생명이 죽어야,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죽여 줘! 제발!!
-아아악!!
두 개의 비명이 시문의 귓가를 스친다.
마모된 물건처럼.
닳다 못해 서로 뒤엉켜버린 원념의 덩어리에 시문의 얼굴은 더욱 차갑게 굳었다.
‘영혼의 변형까지…… 대체 뭘 어떻게 해야 저럴 수가 있는 거지?’
퀴네에를 쓰기 전까진 단순한 용족의 제련소라고만 생각했지만.
이렇게 죽음의 힘을 빌려 바라보니, 검은 제련소는 보통 수상한 곳이 아니었다.
그때.
오싹.
서늘하다 못해, 절로 거부감이 이는 한기가 시문을 아우른다.
슬쩍 몸을 떠는 시문의 눈앞으로.
[죽음의 성좌들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뜬금없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이내.
[성좌 하데스가 굳은 얼굴로 그들과 무언가를 논의합니다.]
[성좌 하데스가 죽음의 성좌들의 대표로 당신에게 미션을 겁니다.]
하데스가 미션을 걸었고.
시문은 즉시 미션창을 열어, 하데스의 미션을 확인했다.
[미션]
-죽음의 성좌들은 영혼의 순환에 굉장히 민감합니다. 하여 검은 제련소에서 발생한 현상을 매우 불쾌히 여깁니다.
검은 제련소에서 갇힌 영혼들을 최대한 해방시키십시오.
보상 : 사기(死氣) 스탯, 죽음의 성좌들의 선물
P.S – 성좌들의 선물은 해방된 영혼의 수에 따라 달라집니다.
‘조건부 보상까지 붙었어?’
조건부 보상.
미션창에 적힌 문구대로 얼마나 해내냐에 따라 수준이 달라지는 보상.
‘사기 스탯이야 그렇다 치지만, 죽음의 성좌들의 선물이라…….’
심지어 후원이나 대여도 아닌 ‘선물’이다.
어찌 보면 성좌에게 받을 수 있는 가장 고수준의 종류란 말이다.
그것도 하데스 하나만이 아닌.
죽음의 성좌들이 주는 것이라면 가히 심상치 않은 것이겠지.
시문의 시선은 미션창에 명시된 ‘갇힌 영혼들’과 ‘해방’을 향했다.
‘그렇군. 영혼들이 이곳에 갇힌 거구나. 그럼 이 방대한 영혼들도 납득이 가.’
마치 물의 재사용이 이루어지는 분수처럼.
영혼들이 순리대로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계속 검은 제련소만을 맴도는 것이다.
그러니 이 끝없는 영혼의 흐름이 지속될 수 있는 거겠지.
미션창을 닫은 시문의 시선이 블랙홀처럼 뻥 뚫려, 끝없이 영혼을 집어삼키는 천장을 향했다.
‘영혼들은 계속 천장의 소용돌이로만 빨려들고 있어. 그렇다는 건…….’
그리고 자연스럽게.
계속 영혼이 흘러나오는 바닥을 향했다.
‘흐름의 시작은 이 아래라는 것이겠지.’
그런 시문의 상념을.
“존귀하신 분이시여? 주변에 계십니까?”
데이나의 목소리가 일깨운다.
시문은 퀴네에의 은신을 잠시 풀었다.
“아, 미안해요. 잠시 생각 좀 하느라.”
잿빛의 귀기로 반투명하게 드러나는 시문.
그런 시문을 보고 흠칫한 데이나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한곳을 가리켰다.
다행히도.
“동족들이 갇힌 곳은 이 아랩니다. 우선 저 계단을 이용하시지요.”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은 아래층을 향하는 계단이었다.
* * *
“어서 움직여라. 미천한 놈!”
굵직하고 사나운 목소리.
그와 함께.
짜악.
“아악!”
이어지는 마찰음에 고통 어린 비명이 터져 나온다.
앙상하게 마른 등 뒤로 붉게 퍼지는 자국.
비참하다 못해 처참하다 부를 수 있는 몰골이었으나, 채찍을 휘두르는 거구의 용족.
“당장 일어나지 못해?!”
드락크의 눈에는 그렇지 않은지.
“안 그래도 보급의 차질로 바쁘거늘! 어디서 엄살이냐!”
드락크는 일련의 망설임도 없이 돌기가 돋아난 채찍을 재차 휘둘렀다.
짜악.
비명을 지른 힘조차 없는 것일까?
또다시 채찍을 얻어맞은 다크엘프는 소리 없이 바닥으로 널브러졌다.
“쯧! 엘프는 이래서 문제야. 난쟁이들처럼 손재주도 없으면서, 육체마저 약해빠졌으니!”
신경질적으로 외치는 드락크.
그에 동족의 비극을 지켜보던 다크엘프들은 몸을 흠칫 떨 뿐.
“여봐라. 저건 발전기에 던져버려라!”
“예, 발크마 님.”
발크마라 불린 드락크의 짜증에 서둘러 노역을 재개했다.
그 모습을 게슴츠레한 눈으로 보던 발크마는 혀를 찼다.
“이깟 저능한 종족은 죄다 연료행이어야 하거늘. 사르가스 님께선 대체 무슨 생각이신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발크마가 몸을 돌리던 순간.
“음?”
그의 사나운 눈매가 꿈틀거렸다.
퍼석!
벽면과 천장 등.
곳곳에 설치된 감시구들이 일제히 터져나간다.
이어.
콰드득.
섬뜩한 파육음.
그와 함께 쓰러진 다크엘프를 짐짝처럼 옮기던 용족의 목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만이 아니었다.
피잉.
작고 가는 선.
실선이라 불러도 손색없을 만큼 가느다란 흑색의 광선이 그물처럼 뻗어나가며.
“케, 케륵!”
“끅!”
일대에서 감독 중이던 용족들의 머리를 모조리 꿰뚫었다.
그나마.
까앙!
노예 감독관이라는 직책은 그냥 얻은 것이 아니었는지.
미간을 향해 매섭게 쏘아진 흑색 광선을 쳐낸 발크마는 황급히 거리를 물렸다.
그러나.
“이!”
광선을 쳐낸 것만으로도 벅찬 것일까?
발크마는 얼얼한 손목과 망가진 채찍을 힐끔거리고는.
‘강하다!’
얼른 숨을 들이켰다.
‘내가 처리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혼자선 무리지만, 지원 병력이 있다면 이야기는 또 달라질 테니까.
“침입…….”
그리고 그 숨과 함께 언성을 내뱉으려던 순간.
“닥쳐.”
쿠우웅!
뚜렷한 미성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육중한 힘이 입과 전신을 짓누른다.
‘어, 어떻게……!’
감히 상급 용족 드락크 출신의 드라고닉을 말 한마디로 짓누르다니?
‘저, 저 눈은?!’
발크마는 금세 그 이유를 깨달았으나 거기까지.
저벅.
쿠웅!
한 남자의 발걸음과 함께 또 다른 기운이 그의 거구를 바닥으로 처박았고.
피잉.
어느새 남자의 하얀 손끝에 맺힌 흑광이 점멸함으로써.
발크마의 정신도 점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