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3화
103화. 플래티넘 승급전 (3)
메탈웜.
작게는 수십 km부터 길게는 수백 km.
어쩌면 그 너머까지.
그 길이는 제대로 측정된 적이 없었다.
당연했다.
길이에 버금가는 육중한 무게와 성벽 같은 외골격은 존재 자체로 공성병기였고.
“키륵!”
“여길 봤어!”
“마, 막아!”
“막긴 뭘 막아!! 피하기나 하라고!”
외형에 걸맞은 포악한 성질은 감히 자신을 측정하게 두질 않았으니까.
“키에에에!”
괴상한 포효와 함께 플레이어들을 향해 내리찍히는 머리통.
땅속을 거니는 습성답게 사각으로 큼직하게 갈라진 주둥이는 펼치든, 오므리든 그 자체로도 흉기였다.
콰아아앙!
거대한 폭음.
놈의 머리에 직격당한 참가자들은 비명도 남기지 못한 채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미, 미친!”
“한 방 컷이라고……?”
그에 살아남은 이들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다들 정신 차려! 일단 남은 사람들끼리라도 뭉쳐야 해!”
“암살계들! 빨리 잔해에 묻힌 생존자들부터 챙겨!”
그래도 플래티넘 승급전이라고.
재빨리 정신을 차린 몇몇이 플레이어들을 독려하며 진형을 갖추었다.
하나.
“으, 으으!”
“다리가 부러진 거 같아!”
“나 좀 빼 줘…….”
거대한 싱크홀인 양.
주변 일대 전체가 뒤집히고 무너진 상황이다.
잔해 속에 파묻힌 생존자들을 구하는 덴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고.
“키에에!”
포악한 메탈웜이 기다려 줄 리가 만무했다.
탄성 좋은 고무줄처럼.
후웅!
다시 한번 쭉 늘어났다 아래로 내리꽂히는 메탈웜의 머리.
영악하게도 잔해 속에서 옴짝달싹도 못 하는 생존자들부터 노리렸다.
그런 놈의 머리가.
빠가아악.
강렬한 타격음과 함께 반대편으로 처박힌다.
놈의 타깃이 되어 새파랗게 질렸던 플레이어들이 구원자를 향한다.
뚜렷한 이목구비의 미남자.
“기, 김시문!”
“시문 님!”
김시문이었다.
메탈웜의 머리를 후려친 시문이 바닥으로 내려온다.
따악.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드드드득.
성경 속 모세의 기적처럼 잔해들이 갈라지며, 잔해에 파묻혔던 생존자들이 드러났다.
시문은 그 광경을 멍하니 보던 암살계들을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얼른 챙겨 가세요.”
“가, 감사합니다!”
연신 고개를 숙이는 암살계들.
그들은 서둘러 시문이 빼낸 생존자들을 챙겨 본대로 달아났다.
-참 나, 우리 오빠는 정말 착해 빠졌다니까.
뾰족한 목소리가 시문의 귓가로 파고든다.
현자의 돌이었다.
-대체 왜 구해 주는 거야? 저 새끼들이 한 짓 잊었어?
녀석의 불만에 시문은 슬쩍 웃으며 답했다.
‘나도 마냥 좋은 이유로 구해 준 건 아니야.’
-그럼?
‘당장 저들을 버리기엔, 리스크가 좀 크거든.’
-리스크?
현자의 돌의 반문에 시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부터 메탈웜이 등장하는 아레나야. 나중엔 어떻겠냐?’
메탈웜은 인섹티아에서도 제법 급이 있는 인섹터다.
거기에다.
‘이 정도 소란이면 필시 다른 인섹터들의 시선을 끌었을 거야.’
대다수의 인섹터가 지배자를 중심으로 군집 생활을 하지 않나?
앞으로의 습격들은 이미 예약된 바나 다름없었다.
-아아, 무슨 생각인지 알겠다. 미끼가 필요한 거구나?
‘비슷해. 더 정확히는 어그로를 분담할 사람이 필요한 거지.’
떼거리로 몰려드는 인섹터 무리들.
이는 곧 어마어마한 소모전을 의미한다.
물론 골드를 초월해 버린 시문의 스펙이라면 해볼 만도 하겠으나.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까.’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 손해 볼 것은 1도 없었다.
-정말이지, 괜히 연금술사가 아니라니까? 아주 무섭도록 철저해.
‘칭찬으로 들으마.’
-칭찬 맞거덩~. 난 이렇게 세심한 남자가 좋더라!
‘녀석.’
현자의 돌의 너스레에 피식 웃는 시문은.
“키, 키에에…….”
몸을 꿈틀거리며 신음하는 메탈웜을 제법 놀란 얼굴로 바라봤다.
“패황쇄를 정통으로 맞았는데 움직여?”
천마신공 격의 초식 패황쇄.
그것도 머리통을 제대로 직격했는데도 몸을 일으키다니?
‘맷집도 그렇고, 이거 보통 메탈웜이 아니라는 건데…….’
전생에 봐 왔던 메탈웜들과 비교해 봐도 제법 굵직한 녀석이긴 했다.
그럼 몸통의 길이도 상당히 길다는 말이 되는데…….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잠깐. 설마?!’
시문의 눈이 부릅떠진다.
따악.
곧장 손가락을 튕기는 시문.
전신에 다중 인체 연성을 한 시문은 곧장 잔해들을 디딤돌 삼아.
타탓.
순식간에 허공으로 도약했다.
“키에에…….”
어느새 몸을 완전히 일으킨 메탈웜.
패황쇄의 타격이 상당했는지.
놈은 거칠게 머리를 흔들며 신음을 흘렸다.
이어.
“키에에엑!”
짜증과 함께 목에 해당하는 부분부터 일대를 휘감고 바닥 깊이 박힌 본체까지.
꿀렁꿀렁.
쉬지 않고 연동 운동을 시작하는 메탈웜.
“역시…….”
어느새 놈의 머리 위까지 솟아오른 시문.
그는 머리 쪽 외골격이 박살 난 채, 연동 운동을 시작하는 메탈웜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이럴 줄 알았지.’
패황쇄를 정통으로 맞고도 한 방에 쓰러지지 않는 체력.
거기에다 통상적인 메탈웜들보다 더 거대한 체구까지.
이런 대형 메탈웜을 겪어 보지 못한 이들이라면 모를까.
한 번이라도 겪어 본 이들은 잘 알고 있었다.
대형 메탈웜의 진짜 무서움은 저 체구에서 나오는 포악스러운 폭력이 아니라.
꿀렁.
저 꿀렁이는 연동 운동이라는 걸 말이다.
“키, 키엑!”
시문이 자신의 머리 위에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일까.
메탈웜은 당황스러운 움직임으로 얼른 아가리를 시문을 향해 벌렸지만.
“늦었어.”
이미 시커먼 마기의 응축체를 쥐고 있는 시문은 기다렸다는 듯.
놈의 아가리로 준비한 선물을 선사해 주었다.
천마신공(天魔神功).
파(波) 섬멸포(殲滅砲).
피잉.
일직선으로 뻗어 나가는 검은 광선.
그것은 경로를 일그러뜨리며 곧장 거대한 아가리 속으로 파고들었다.
“키…….”
연동 운동을 하던 몸통이 일시적으로 경직된다.
이어 거목이 쓰러지듯.
메탈웜의 거체는 서서히 지상으로 넘어갔다.
쿠우우웅.
일대를 울리는 거대한 진동.
“세상에…….”
“주, 죽은 거지?”
허무하게 쓰러진 메탈웜에 참가자들이 입을 떡 벌린다.
“음…….”
하나 정작 놈을 일격에 보내 버린 당사자인 시문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못했다.
오히려.
키이잉.
왼쪽 눈에 황금색 마법진들이 펼쳐지며 놈의 전신을 훑었다.
그러곤.
‘늦은 건 내 쪽이었나.’
수려한 미간을 찌푸렸다.
그럴 수밖에.
활성화된 오딘의 눈에 비치는 건 죽어 버린 메탈웜의 거체만이 아니었으니까.
콰직.
꾸드득.
널브러진 메탈웜의 거체에서 정체 모를 파육음이 들려온다.
그것은 점차 크고 격렬해지기 시작하더니.
쩌걱.
마침내 단단했던 메탈웜의 외골격이 갈라지고.
“키르르르르!”
시커먼 물결이 쏟아져 나왔다.
“저, 저것들은 또 뭐야!”
“개미! 개미다!”
“미친! 엔츠잖아!”
엔츠.
일명 거대 개미종으로 불리는 인섹터가 초당 수십 마리씩 메탈웜의 사체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으아아아! X나 많아!”
“이봐! 진형 지키라고!”
“미쳤어? 저거에 어떻게 맞붙겠다는 거야?”
“맞아. 당장 도망가야 한다고!”
대번에 혼란에 빠지는 본대.
그런 본대의 귓가로.
따악.
맑고 경쾌한 소리가 들려온다.
그와 함께.
드드드드.
본대 앞 대지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키르르?”
“키륵?”
쏟아지는 개미들 위로 어둑한 그림자가 진다.
정체는 다름이 아니라.
쿠그그그.
거대한 해일과 같은 대지의 파도였다.
그것들은 플레이어를 제외한 일대 전체를 뒤덮었고.
쿠아아아앙!
무자비한 쓰나미처럼.
수백 마리의 거대 개미 떼와, 그것들이 쏟아져 나오는 메탈웜의 사체를 그대로 파묻어 버렸다.
순식간에 거대한 흙봉우리가 되어 버린 일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따악.
또 한 번의 맑은 소리가 울리자.
콰득.
섬뜩한 파열음과 함께.
개미 떼와 메탈웜을 집어삼켰던 대지에서 뾰족한 가시들이 우후죽순으로 솟아올랐다.
가시들 사이에 드문드문 묻어 있는 진득한 체액까지 고려해 본다면.
저 흙봉우리 아래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으리라.
“허…….”
“…….”
시간이라도 정지된 듯.
도망가려던 이들과 자리를 지키려던 이들 모두 제 자리에 얼어붙는다.
그나마 시문의 방송을 봤던 이들만이.
‘역시 김시문…… 이런 사람한테 언성을 높였다니…….’
‘진짜 개지린다…….’
‘이, 이게 나랑 같은 골드라고?’
꿀꺽.
간신히 마른침을 삼키며, 눈을 끔뻑일 뿐이었다.
놀란 건 이들만이 아니었다.
-와…… X발! 미쳤다 진짜! 저 가시들 무슨 묘비 같아!
-이 형은 볼 때마다 스케일이 미쳤는데?
-그 번개창이나 화염검은 쓰지도 않았는데 이런 파괴력을 보여 준다고?
-심지어 무영창으로 한 거잖아. 이분 마력이 무한인가요?
-그 전에 난 성체 메탈웜을 후려친 것부터가 납득이 안 감. 마법계라며!
이 광경을 지켜보던 시청자들 역시 일제히 경악을 토했다.
하나.
“쯧.”
이 거대한 무덤의 창조자인 시문은 불만족스러운 얼굴로 혀를 찰 뿐이었다.
‘이미 메탈웜이 길을 터 버렸으니, 어쩔 수 없나.’
쏟아져 나온 개미들과 쏟아져 나올 예정인 개미들.
그것들을 모두 죽여 버리긴 했으나.
‘더럽게 많네.’
오딘의 눈에 비치는 저 아래 지하엔, 수천 마리의 엔츠 떼가 득시글거리고 있었다.
‘이래서 메탈웜을 더 빨리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본디 메탈웜은 크면 클수록 타 인섹터의 무리에 속하는 습성이 있었다.
왜 그러한지는 누구도 밝혀내지 못한 인섹티아의 비밀이지만.
무리를 이룬 메탈웜은 그 거대한 몸을 일종의 통로로 이용해, 타 인섹터들의 이동 수단이 되어 주었다.
놈이 죽기 직전에 했던 연동 운동이 바로 그 전조였다.
‘전생부터 인섹터의 주된 기습 수단이었지.’
정식 아레나가 시작되고 빈번하게 일어났던 아웃브레이크.
그곳에서 인섹터들이 나올 때면 꼭 등장하던 것이 바로 저 메탈웜을 이용한 기습이었다.
깊은 땅속에서 갑작스레 튀어나오는 메탈웜.
그리고 그 거대한 아가리에서 쏟아 내는 인섹터 물량은 방어선이라는 개념이 아예 통하지 않았다.
‘방송으로만 봐서 잠시 깜빡했어.’
머리를 긁적인 시문은 바글거리는 지하를 힐끔하곤.
‘뭐, 좀 귀찮아지긴 했지만……다 쓸어버리는 수밖에.’
그곳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내 그것을 튕기려던 순간.
‘음?’
오딘의 눈이 활성화된 시문의 왼쪽 눈이 꿈틀거렸다.
* * *
흙으로 이어진 지하.
그곳엔 화려한 문양이 가득한 엔츠가 바쁘게 다리를 놀리고 있었다.
쿠르르르.
거친 진동과 함께 화려한 엔츠의 머리 위로 흙 부스러기가 떨어진다.
잠시 질주를 멈춘 화려한 엔츠는 뒤를 힐끔했다.
[놈들이 벌써 우리의 땅굴에 당도했는가?]
이명으로 울리는 목소리.
그에 뒤따르던 호위 엔츠 둘이 고개를 슬쩍 숙였다.
[예. 하나 이미 메탈웜과 다수의 병력을 보내 두었습니다.]
[아마 땅굴에 진입한다 해도, 곧장 이곳에 당도하진 못할 겁니다.]
[그런가…….]
말끝을 흐리는 화려한 엔츠.
그는 품에 안은 작고 하얀 구슬을 바라봤다.
‘이미 베스파 놈들에게 두 명의 여왕을 빼앗겼지.’
인섹터의 미래를 좌우하는 여왕의 알.
그간 유지되었던 균형을 깨고.
베스파는 두 명의 여왕을 더 탄생시킨 상태다.
[이것마저 빼앗기면, 인섹티아는 베스파의 차지가 되겠지…….]
[그게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화려한 엔츠의 읊조림에 호위 엔츠 하나가 성을 토했다.
[다른 인섹터들도 그걸 모르지 않을 텐데, 어찌 우리를 돕지 않는단 말입니까!]
[맞습니다. 아무리 같은 종이 아니라곤 하나, 인섹티아의 균형이 무너지는 일이지 않습니까?]
노성을 토하는 호위 개미들.
그에 화려한 개미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놈들의 기습이 빨랐을 뿐. 이미 전투의 여파는 타 인섹터들도 느꼈을 것이다.]
[그 말씀은…….]
[그래. 아마 우리를 도우러 움직이고 있을 게다.]
여기서 자신들이 죽고 이 알마저 넘어간다면.
더 이상 베스파를 막을 수 없다는 걸 다른 종들도 잘 알고 있을 테니까.
‘꼭 그래야 할 텐데…….’
왕자 엔츠의 미간이 우려로 일그러지던 그때.
쿠르르르!
엔츠들이 있는 땅굴 전체가 거칠게 뒤흔들렸다.
[이, 이런! 베스파 놈들이 벌써!]
[왕자님, 어서 피하십쇼! 여긴 저희가 막겠습니다!]
호위 엔츠 둘이 왕자라 불린 화려한 엔츠의 앞으로 나선다.
그런 수하의 열성에도.
왕자 엔츠는 걸음을 떼지 않았다.
그는 굳은 목소리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건 베스파가 아니다.]
[그러고 보니…… 뭔가 이상하긴 합니다.]
[베스파 놈들이라면 이토록 빠른 속도로 땅굴을 팔 수가…….]
호위 엔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콰르륵.
땅굴 천장을 뚫고.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는 원뿔 형태의 조형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어.
“후. 더럽게 깊네.”
인섹터의 이명과는 전혀 다른 육성이 들려온다.
[저자는……!]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한 왕자 엔츠의 몸이 슬쩍 떨린다.
“호오. 이거 가까이서 보니 더 흥미로운데?”
또 한 번 들려오는 육성.
그 주인의 황금빛 눈이 왕자 엔츠를 향했다.
더 정확히는 왕자 엔츠가 품고 있는 하얀 구슬이었다.
왕자 엔츠 역시 그 시선을 느꼈는지 몸을 움찔했으나 그뿐.
“뭔진 몰라도 졸지에 수확을…….”
갑자기 나타난 인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받으시오, 존귀한 분이시여.]
[와, 왕자님?!]
왕자 엔츠는 귀하게 품고 있던 하얀 구슬을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