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4화
94화. 암시장 (4)
작은 소품부터 잔 하나까지.
모조리 아레나산으로 만들어진 고급스러운 방.
“프라이빗 룸이라니. 설마 신화 길드의 마스터가 암시장의 VVIP이실 줄은 몰랐어요.”
그곳에서 디저트를 우물거리며 말하는 이유정에.
“젊었을 때 꽤 자주 들락거렸거든.”
훤칠하고 날렵한 미중년.
고창진은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는 암시장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창밖을 봤다.
“알다시피 길드를 키우려면 돈이 필요하잖나? 그것도 아주 많은 돈이.”
“하긴…….”
이유정이 작게 고개를 주억거린다.
철혈의 고창진.
그가 유명한 이유는 도후, 철목왕과 마찬가지로 1세대 랭커 중에서 걸출한 실력도 있겠지만.
아무 기반도 없이 대한민국의 3대 길드인 신화 길드를 탄생시킨 업적 때문이기도 했다.
“늘 드리는 말씀이지만, 전 항상 길드 마스터님을 존경했어요.”
아무런 뒷배나 밑천도 없었던 고창진.
그는 순수한 실력과 노력만으로 신화 길드를 세웠고.
지난 플레이어로서의 모든 삶을 바쳐, 지금의 신화 길드를 이룩했다.
‘정말 대단한 분이셔.’
이유정은 존경스러운 눈으로 고창진을 바라봤다.
아무런 기반도 없이 한 나라를 대표하는 단체를 탄생시킨다는 것.
이는 플레이어뿐만이 아니라, 어떤 분야에서도 칭송받을 만큼 대단한 업적이었다.
이유정은 조용히 고창진을 바라봤다.
‘나였다면 가능했을까?’
고창진을 만날 때마다 늘 떠오르던 생각.
그리고 항상 따라붙는 같은 대답.
‘그럴 리가. 당연히 불가능하겠지.’
물론 그녀 역시 대한민국 최고의 길드인 성삼의 마스터였었지만.
‘그 자리는 나 혼자만의 힘으로 만들어진 자리가 아니니까.’
이는 길드 창설자인 어머니와 성삼이라는 뒷배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지.
그녀 스스로의 힘으로 키운 길드는 아니었다.
‘결국 성삼이란 배경이 없으면 난…….’
청아한 얼굴에 씁쓸함이 감돈다.
그것을 포착한 고창진은 무심히 말했다.
“나 역시 늘 하는 말이지만, 자네 같은 이가 내 길드에 있었다면 국내 최고의 길드는 우리 신화 길드가 되었을 거다.”
그 말의 이유정의 눈이 커진다.
이내.
“……참 이럴 때 보면 철혈이라는 별칭이 이해가 가질 않는다니까요. 이렇게 상냥하신 분인데.”
“그 말이 더 이해가 가지 않는군.”
무표정한 고창진의 얼굴에 어리는 미세한 쑥스러움.
그에 이유정의 입가가 스르륵 올라갔다.
‘아버지가 살아 계셨으면 이랬을까?’
생기를 되찾은 이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양치도 할 겸,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밖에서 오른쪽이다.”
이유정이 방을 나서자.
“…….”
“…….”
묵직한 침묵이 고급스러운 방 안을 짓누른다.
고창진은 자신의 눈매처럼 날렵한 눈매를 지닌 미녀를 바라봤다.
“그만 꼬라봐. 엿같으니까.”
그리고 대번에 튀어나오는 욕설에.
“잘 지냈느냐.”
고창진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를 아는 누구라도 지금의 모습을 보면 경악을 금치 못하리라.
“유정이는 어떻게 알게 된 것이냐? 암시장은 무슨 일이고.”
철혈의 고창진이 이렇게 부드럽고 다정한 미소를 지을 수 있다니?
그를 한 번이라도 겪어 본 이라면 몇 번이고 눈을 씻을 만큼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
그의 여성 팬들이 가슴을 쥐고 쓰러지는 것은 덤이었고.
하나.
이 귀한 미소가 아무렇지도 않은 걸까?
“지금 누굴 취조해? 내가 누구를 만나고 어딜 다니든, 당신이 무슨 상관인데?”
고창진을 똑 닮은 날렵한 눈매의 여성.
고말숙은 짜증이 어린 얼굴로 일관할 뿐이었다.
신화 길드의 마스터로선 무척이나 불쾌한 태도일 텐데.
“그래도 또래의 친구를 사귀니 마음이 놓이는구나. 유정이는 좋은 아이지.”
고창진은 그저 따스한 미소와 눈으로 답할 뿐이었다.
“돈이 부족하진 않느냐? 암시장은 사소한 것도 비싸지. 유정이가 쇼핑광이라는 건 유명한…….”
“아, 진짜!”
고창진의 말을 확 잘라 버리는 고말숙.
그녀는 도끼눈으로 고창진을 노려봤다.
“돈은 무슨 돈? X발 내가 거지로 보여? 당신이 주는 돈 따위 필요 없다고 몇 번을 말해!”
“말숙아.”
“X!”
쾅.
고말숙의 주먹이 널찍한 테이블에 내리꽂힌다.
방 수준에 어울리는 테이블인지.
“내 이름 부르지 말랬지?”
천살성이 활성화된 고말숙의 주먹에도, 테이블은 작은 금 하나 가지 않았다.
정작 금이 간 건.
“하도 아레나에 미쳐서 벌써부터 치매라도 왔나 본데, 잘 들어.”
고말숙의 얼굴이었다.
“당신이랑 나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 그러니 제발 관심 좀 꺼! 내 인생에서 아예 꺼지라고!”
분노로 쩍쩍 금이 가는 고말숙.
그간의 성장 때문일까?
그녀의 기세는 실버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위협적이었지만.
“말숙아.”
고창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고말숙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의 플레이어라서가 아니었다.
“난 지금껏 내 인생에서 그 어떤 것도 포기해 본 적이 없다. 너 역시 마찬가지야.”
세상에 어떤 부모가 제 자식을 두려워하겠는가?
고창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뭐? 포기해 본 적이 없어? 그런 인간이 엄마는!”
버럭 소리치는 고말숙.
그러나 그뿐.
한껏 격앙된 얼굴로 입술을 파르르 떨던 그녀는.
“X……!”
입을 앙다물며 주먹을 그러쥐었다.
그 모습에.
“……미안하구나.”
철혈이라는 이름이 무너진다.
“네겐 미안하단 말밖에는 할 말이 없다.”
죄책감이 가득한 그의 얼굴에 고말숙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내.
“……됐어.”
다시 눈을 뜬 그녀는 아까의 무표정했던 얼굴 그대로.
“어차피 다 끝난 일이야. 그 일도, 당신도.”
무미건조하게 답할 뿐이었다.
그렇게 다시 침묵이 찾아왔고.
달칵.
“여긴 화장실에도 아티팩트가 가득하네요. 몇 개는 저희 길드 하우스에도 들여야겠어요.”
이유정이 들어서고 나서야 무거운 침묵이 사라졌다.
“참. 조금 있으면 시혁이랑 진욱 선배도 올 텐데, 함께 식사라도 하실래요?”
“아니. 일이 있어서 난 이만 일어나겠다.”
“이런, 아쉽네요. 소개해 드리고 싶은 분도 있었는데.”
“다음에 자리를 한번 만들지.”
고창진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에 이유정 역시 따라 일어났다.
“VVIP룸에 이런 맛있는 디저트까지 대접해 주셨으니, 다음엔 제가 확실히 대접할게요.”
“기대하겠다. 아.”
고창진은 자리에 앉은 채, 아예 몸을 돌리고 있는 고말숙을 힐끔했다.
“사람은 많을수록 좋겠군.”
“아…….”
작게 탄식하는 이유정.
이내.
“물론이죠. 꽤 큰 곳으로 준비할게요. 사람은 많을수록 좋으니까.”
이어지는 눈치 빠른 이유정의 대답.
“부탁하지.”
그에 고창진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 주고는 방을 나섰다.
그를 배웅하고 이유정은 뒤를 힐끔했다.
‘말숙이가 좀 거침없는 성격이긴 해도 아무에게나 분노를 표출하는 애는 아닌데.’
철혈의 고창진.
감히 그에게 소리칠 수 있는 사람이 국내에 몇이나 될까?
한데 고말숙은 소리를 쳤다.
남이 들어도 알 수 있을 만큼 울분에 찬 목소리로 말이다.
그리고 고창진은 사과를 내뱉었지.
이유정은 고창진이 나간 프라이빗 룸의 문을 천천히 닫으며 생각했다.
‘중간부터 들은 거라 무슨 일인지 감이 잘 안 오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말숙이랑 고창진님. 보통 관계는 아니야.’
고창진이 굳이 저런 말을 한 것부터가 그렇다.
그는 사람이 많은 걸 즐기는 성격이 아니었으니까.
‘잠깐. 그러고 보니 말숙이의 성이 고씨잖아?’
이유정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리고 생김새도…….’
특히나 날렵한 눈매는 꼭 빼다 박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아니, 뭐든 확신하지 말자.’
이유정은 섣부르게 판단을 내리지 않았다.
본디 이런 건 본인이 먼저 말하지 않는 이상, 알려고 하지 않는 게 예의다.
달칵.
그녀는 문을 완전히 닫은 채.
“말숙아, 너 아까 배고프다며. 왜 한 입도 안 먹었니? 이거 되게 맛있던데.”
평소처럼 고말숙에게 다가갔다.
* * *
암시장에서 돌아온 시문은 며칠 동안 연구실에 틀어박혔다.
파라켈수스의 플라스크로 인해 연구실의 자동화가 가능하다곤 하나.
-오빠, 마력경화증 치료제랑 이중순환 치료제는 끝났어.
“그래.”
아무리 자동화가 잘된 공장이라도 결국 사람의 손이 갈 수밖에 없는 법.
시문은 재료 관리부터 전체적인 생산 라인과 과정을 점검하며, 완성된 치료제들을 차곡차곡 챙겼다.
“후우.”
값비싼 케이스에 치료제들 담은 시문은 이마에 조금씩 맺히기 시작한 땀을 슥 닦았다.
‘체력 스탯이 구렸으면 고생 꽤나 했겠어.’
그동안 꾸준한 영약 섭취로 오른 체력 스탯.
암시장을 다녀온 후.
숙성이 끝난 영약을 일행들에게 나눠 주고 시문 역시 섭취한 덕에.
‘힘민체가 나란히 20이니 며칠의 강행군도 버틸 만하네.’
힘민체는 각각 20에 도달해 있었다.
거기에 칭호 ‘왕들의 픽’으로 +4를 더하면 24.
그간 모든 스탯을 주 스탯에 올인한 80레벨의 힘민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스탯이었다.
거기에다.
‘세계수의 영체 때문일까? 피로 회복력도 좋아진 느낌이야.’
특성 세계수.
그 효력은 단지 칭호 ‘세계수의 동반자’에만 국한되는 게 아닌 것인지.
플레이어도 피곤할 만한 며칠간의 철야를 거뜬히 보낼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물론 이렇게 체력이 뒷받침되어도.
-오빠, 마혈증 치료제도 나왔어. 다음 것도 곧 마무리될 거야.
호문쿨루스인 현자의 돌이 쏟아 내는 치료제를 전부 감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오냐.”
당연히 시문은 효율적인 제작 도우미를 준비해 둔 상태였다.
정확히는.
“너, 너. 가서 마혈증 치료제를 케이스에 담아.”
만들었다고 해야겠지.
그극.
시문의 명령에 매끄러운 백은색의 금속인간.
미스릴 골렘들이 곧장 치료제 생산 라인으로 움직였다.
녀석들은 광물로 이루어진 몸체와 달리.
달그락.
무척이나 섬세하고 정확한 움직임으로 치료제를 정리했다.
그리고.
그그그극.
철컥, 달그락.
그런 미스릴 골렘 10여 기가 연구실 곳곳에서 이러한 작업을 하고 있었다.
시문은 분주한 미스릴 골렘들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미스릴로 만들어서 그런가. 애들 지능이나 움직임부터 다르네.”
-그치?
천장에서 기다란 팔 같은 것이 내려온다.
끝엔 파라켈수스의 플라스크가 달려 있었다.
그 속에 큼직하고 귀여운 외눈이 데구루루 구르며 골렘들을 훑었다.
-골렘이라는 게 결국 재료빨이잖아. 미스릴만 한 게 없다고.
“하긴. 손재주부터 일반 골렘과는 차원이 다르지.”
-웅웅! 저번에 미스릴을 왕창 얻어 둬서 다행이야. 10여 기나 연성하고도 남는 거 보고 나 깜짝 놀랐잖아.
“그러게나 말이다.”
지난 특수 아레나 보상으로 얻었던 도리아산 미스릴.
꽤 다량으로 받아 둔 덕에.
무려 10여 기가 넘는 미스릴 골렘을 고작 잡부로 쓰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보안에 관련해서도 걱정할 일 없고, 아주 좋아.’
절대적인 충성에 연성력만 주입해 주면 쉬지 않고 일하기까지 하니.
현 시점에서 미스릴 골렘은 한 줄기 빛과 같은 존재였다.
“그럼 여기는 더 손댈 게 없겠고.”
시문은 부지런히 작업하는 골렘들에게서 시선을 돌려, 연구실 한쪽 구석으로 다가갔다.
따악.
손가락을 튕기자.
드드드드.
벽이 열리며 작은 공간이 나타났다.
그곳엔 미스릴 뼈대가 특유의 광택을 뽐내고 있었다.
-흐응~ 잘 익었네?
“보통 이런 걸 익었다고 표현하진 않지 않나?”
-뭐 어때? 찰지잖아.
현자의 돌의 너스레에 피식 웃은 시문은 미스릴 뼈대를 쓸었다.
“아직 머리는 만들지 않았지만, 다행히 기본 뼈대는 잘 조형된 거 같네. 나머진 재료가 수급되면 시작해야겠어.”
-우리 천재 오빠가 며칠이고 밤을 새워 가며 작업한 건데. 문제가 있을 리 없지.
“녀석. 아무리 그래도 내가 천재까진 아니다.”
-농담이지? 골드 랭크가 미스릴 골렘을 10여 개씩이나 컨트롤하는 것부터가 이미 천재야.
플라스크 속 외눈에 어이없음이 물씬 묻어 나온다.
근본적으로 골렘은 그저 재료만 좋다고 개나 소나 연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겉모습부터 관절, 내부의 구성까지.
골렘 연성은 신화급 무구들처럼 형태와 구성에 대한 구체적인 이미지가 필수적이었다.
그걸 10여 개나 연성하려면?
10여 개의 골렘의 이미지를 머릿속에서 동시에 떠올려야 한다.
하물며.
-이 제작 골렘도 그래. 애당초 제작 골렘은 아레나 기준으론 다이아나 되어야 할 수 있는 거라고!
제작 골렘의 난이도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마저도 시문 혼자서 미스릴을 제련, 정제해 제작 골렘의 뼈대를 만들어 낸 것 아니던가?
-여하튼 이건 천재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야.
“그런가?”
-그런가가 아니라! 아, 혈압! 오빠? 내가 늘 말하지만, 오빠는 오빠 스스로를 너무 몰라.
그저 머리를 긁적이고 마는 시문에 열을 올리는 현자의 돌.
시문으로서는 마력불능을 회복하기 위해 1레벨로 혼자 엘릭서까지 만들어 냈던 터라.
사실 일반적인 연금술사의 기준을 잘 모르고 있었다.
그렇게.
-으휴! 하여튼 간에! 내가 또 설명해 줘야겠네! 잘 들어, 오빠는 말이지…….
현자의 돌의 ‘우리 오빠가 얼마나 난놈인지에 대하여’ 강의가 이어지려던 찰나.
-아씨! 저 떡대는 왜 이렇게 자주 찾아와?
시문의 구원자가 등장했다.
“시문 님, 저 왔습니다!”
“진욱 씨, 어서 오십쇼.”
시문은 얼른 구원자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밤사냥꾼 박진욱이었다.
그리고 들어선 박진욱은.
“이번 달 치료제의 판매 보고를…… 헉!”
말도 제대로 끝맺지 못한 채.
“시, 시문 님? 이게 다 뭐죠?”
연구실 곳곳에서 광택을 뽐내는 골렘들에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