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0화
90화. 스쿠아마 원 (4)
우두머리인 드라헬이 쓰러지자, 중독된 보급로의 상황은 빠르게 해결되었다.
레바테인의 악랄한 열기는 자욱하던 보급로의 독기는 물론.
키아아악!
끄르륵!
남은 용족들과 몬스터들에게까지 영향을 끼친 것이다.
“놈들이 약해졌다! 쓸어버려!”
“최대한 화상 입은 것들 먼저 처리해!”
덕분에 플레이어들은 화상 입은 몬스터들을 손쉽게 처리하고.
중독된 보급로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시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슬슬 끝나겠네.’
이번 아레나의 종목은 디펜스.
드라헬 무리가 중독된 보급로를 넘지 못하게 막는 것이 핵심이었기에.
남은 잔당만 소탕하고 나면 금세 클리어되리라.
“존귀하신 분이시여.”
그런 시문의 곁으로 어느새 회복을 끝낸 다크엘프.
데이나가 다가왔다.
“데이나, 몸은 좀 어때요?”
“덕분에 멀쩡해졌습니다. 그나저나…….”
그녀는 거뭇한 자국만 남은 드라헬의 흔적에 감탄을 숨기지 못했다.
“드라고닉인 드라헬을 이토록 쉽게 처리하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운이 좋았죠. 마침 딱 상성에 맞는 게 떠올라서.”
“스쿠아마 원을 운이 좋아서 처치했다고 말하는 자는 당신밖에 없을 겁니다.”
진심인지 한껏 진지해지는 데이나.
그에 시문은 아까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근데 데이나. 그 스쿠아마 원이라는 게 뭔가요?”
시스템 메시지로도 언급이 되던 스쿠아마 원.
그걸 잡았다는 업적이 있을 정도면 일반적인 것은 아닐 터였다.
본래 이런 업적은 레이드나 히든 보스에게나 붙는 거니까.
데이나는 곧장 답했다.
“존귀하신 분이시여. 드라고닉이 어떤 존재인지는 알고 계시겠지요?”
“물론이죠.”
드라고닉.
깨달음을 얻어 각성을 한 용족으로.
본디 엄격한 위계질서의 용족사회에서 타고난 신분을 각성으로 벗어난 용족을 일컫는 말이었다.
‘진화종이랑 좀 비슷한 느낌이지.’
물론 둘 사이엔 확실한 차이가 있었다.
진화종은 아예 ‘진화’라는 현상으로 새로운 종으로 초월한 용족이었고.
드라고닉은 ‘각성’이란 현상으로 해당 종에서 경지를 이룬 용족이니까.
어쨌거나 둘의 공통점은 명확했다.
“용족 중에서도 특별한 용족이잖아요. 특히나 무력 쪽으로.”
“정확합니다. 역시 알고 계셨군요.”
시문의 답에 고개를 끄덕인 데이나는 말을 이었다.
“스쿠아마 원은 그런 드라고닉들로만 이루어진, 일종의 비밀 결사대입니다.”
“비밀 결사대?”
“예. 오로지 용계와 용족을 위한 집단이죠. 뭐, 속은 제 잇속을 위한 파벌 싸움으로 가득하지만.”
슬쩍 비웃음을 머금는 데이나.
그녀는 드라헬의 검은 흔적을 힐끔하곤 말했다.
“여하튼 드라헬은 그런 스쿠아마 원의 일원입니다. 물론 별칭조차 받지 못한 일개 단원이지만요.”
“별칭이요?”
“예. 진짜 스쿠아마 원, 즉 간부급 드라고닉은 저마다의 별칭이 있죠. 당장 이 주변엔…….”
데이나의 시선이 돌아간다.
우중충한 하늘을 뚫을 듯 높이 솟은 산.
그 너머의 어딘가를 보는 듯한 데이나가 조금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불패의 사르가스가 있겠군요.”
“불패? 그게 별칭인가 보군요. 꽤 거창한데요?”
“예. 하지만 거짓은 아닙니다. 놈은 정말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으니까요.”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는 용족이라니.
불패라는 별칭값을 제대로 하는 놈이다.
‘확실히 범상치 않겠어.’
심지어 용족이 갤럭시 아레나에서 최상위 종족임을 따져 보면 상당히 무서운 별칭이었다.
하나 그뿐.
시문은 그다지 겁을 먹지는 않았다.
‘이번 전투에 내 모든 힘을 쓴 건 아니니까.’
용체화도 그렇고.
용족에게 특효약인 사안도 있지 않은가?
드라헬이 스쿠아마 원 중 일개 단원 수준이라고 해도.
시문 역시 드라헬과의 전투에서 전력을 다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놈은…… 정말이지 괴물입니다.”
사르가스를 거론하는 데이나의 얼굴은 한없이 어두워졌다.
‘왜 저렇게 굳어 있는 거지?’
대외적으로 알려진 이미지와 달리, 필요 이상으로 동요하고 있는 데이나.
그러나 시문은 굳은 그녀를 풀어주고자, 가벼운 농담도 할 수 없었다.
왜냐고?
어느새 제 양팔을 꽉 끌어안고 있는 데이나.
희미하게 떨리는 그녀의 품 사이론.
‘저건 흉터? 모양으로 보아 자상 같은데…….’
범상치 않은 흉터가 자리하고 있었으니까.
이내.
“존귀하신 분이시여.”
무언가를 결심한 듯.
두 주먹을 꽉 그러쥔 그녀는 진중한 얼굴로 시문을 돌아봤다.
“비천한 제가 감히 당신께 부탁 하나를 드려도 될는지요?”
진중한 그녀에 잠시 눈을 끔벅인 시문은.
“말해 보세요.”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했다.
데이나는 타이트한 가죽 갑옷 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차르륵.
‘쇠사슬?’
끊어진 사슬이었다.
데이나는 시문에게 그것을 내밀었다.
“존귀하신 분께서 플레이어라는 것은 진즉 눈치챘습니다. 사실 기다리고 있었지요. 당신과 같은 플레이어가 나타나기를.”
그런 데이나의 말에.
-나 방금 검열 풀려서 그러는데, 이건 또 뭔 상황이냐?
-여기 전부 다 방금 막 풀렸음. 근데 데이나가 저런 말을 했었음?
-ㄴㄴ. 그냥 ‘만나서 역겨웠고 다신 보지 말자, 약골들아!’ 하고 이별 엔딩이 보통인데?
-나도 저런 거 처음 봄.
이제 막 갤럭시 아레나의 검열이 풀린 시청자들은 격렬한 의문을 품었다.
당연히 시문 역시.
‘뭐지? 전생의 중독된 보급로엔 이런 루트가 전혀 없었는데.’
전생까지 통틀어 처음 보는 데이나의 행동에 눈이 동그래졌다.
“사실 제가 이곳에서 이렇게 용족을 기습하고 다니는 건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닙니다. 동족의 복수와 구원 때문이지요.”
그녀는 한결 뜨거워진 목소리로 시문을 바라봤다.
“존귀하신 분이시여, 부디 저를 도와주십시오.”
그녀의 말과 함께.
[다크엘프 데이나가 퀘스트를 의뢰합니다.]
시문의 눈앞으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시문은 빠르게 퀘스트창을 열었다.
[검은 제련소를 향하여] - 히든 퀘스트
-다크엘프 데이나는 용족의 악명 높은 군사 시설 중 하나인 검은 제련소를 노리고 있습니다.
그곳에 잡혀 있는 그녀의 동족들을 구출하십시오.
입장 제한 : 플래티넘 랭크 이상.
보상 : 다크엘프 종족의 우호도, 업적 포인트 10,000, 검은 제련소의 부품 (?)
퀘스트창을 확인한 시문의 입이 슬쩍 벌어진다.
그도 그럴 것이.
‘어, 업적 포인트를 1만 점이나 준다고?’
업적 포인트 1만 점.
이건 성좌들의 퀘스트에서나 나올 법한 보상이었다.
이를 뒤집어 보면.
‘난도가 어마어마한 퀘스트라는 뜻이기도 하지.’
당연했다.
애당초 다크엘프 데이나는 다이아 플레이어도 코웃음을 치는 인물.
그런 그녀가 이리 도움을 요청할 정도면 보통 쉬운 일은 아닐 터였다.
‘하긴, 히든 퀘스트니까 당연하겠지.’
히든 퀘스트.
퀘스트 중에서도 특히나 귀한 것들 아니던가.
대단한 보상만큼이나 난도가 높기로 유명해, 정규 아레나가 시작되면 다들 기피하는 퀘스트이기도 했다.
거기에다.
‘검은 제련소라…….’
검은 제련소.
이미 앞선 아레나로 계속 들어 왔던 곳 아니던가?
‘이건 받을 수밖에 없는 퀘스트군.’
성좌마저 언급하던 곳이니 그 호기심은 배가 되었다.
시문은 데이나가 내민 사슬을 받았다.
“도울게요, 데이나.”
[입장 아이템 ‘검은 제련소의 노예 사슬’을 획득하였습니다.]
[업적 ‘첫 히든 퀘스트 받기’를 클리어하였습니다.]
[업적 포인트 2,000을 획득합니다.]
떠오르는 메시지와 함께.
“아아!”
데이나는 짧은 탄식을 하며 털썩 주저앉았다.
혹여나 시문이 거절이라도 할까 노심초사했던 것이다.
-오메…… 저 데이나가 주저앉아?
-오늘 귀한 구경 많이 한다 진짜ㅋㅋ.
-사장님 없습니까? 이런 귀한 장면 보셨으면 후원 좀 크게 쏴 주시죠!
-미친 ㅋㅋ. AP 맡겨 놨냐곸ㅋㅋ.
-네가 쏴 새꺄!
전례 없던 상황에 후끈해지는 채팅창.
이어.
[아레나 ‘중독된 보급로’를 성공적으로 클리어하셨습니다.]
[아레나가 종료됩니다.]
잔당이 모두 소탕되었는지.
아레나의 종료 소식과 함께 플레이어들의 몸이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감정을 추스른 데이나는 본래의 차가운 얼굴로 돌아와 그런 시문을 바라봤다.
물론 그녀의 눈빛은 이전과 달리 무척이나 부드러웠다.
“그럼 존귀하신 분이시여, 부디 다시 뵙는 그날까지 강녕하소서.”
데이나의 작별과 함께.
파앗.
시문의 몸은 빛무리에 감겨 사라졌다.
* * *
방으로 돌아온 시문.
[아레나 ‘중독된 보급로’를 압도적으로 클리어하셨습니다.]
[앞선 공지와 활약, 전원 생존으로 클리어 보상이 크게 증가합니다.]
[귀속된 특성 ‘현자의 돌’이 일정량의 경험치를 분배받습니다.]
[레벨이 18 올랐습니다.]
[현자의 돌 레벨이 12 상승했습니다.]
[클리어 보상으로 ‘드라고니움 꾸러미’을 획득합니다.]
무수한 시스템 메시지가 그런 시문을 반겼다.
가장 시선을 끈 것은 당연히 레벨 부분.
“미친! 18업이라고?”
특정한 욕이 절로 튀어나올 정도의 숫자.
한 번에 18레벨업이라는 건 그만큼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심지어.
‘현자의 돌이 12업이나 했는데, 내가 18업을 한단 말이야?’
이는 자신에게 귀속된 현자의 돌과 경험치를 나눈 결과 아니던가.
‘일반적인 플레이어였으면 이거 한 방에 30렙업을 한 거잖아.’
헛웃음이 절로 나오는 경험치량.
특수 아레나의 보상으로나 어울리는 경험치량이었다.
물론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었다.
“상향 매칭으로 40% 증가에 아레나 내에서의 기여도, 그리고 20인 전원 생존이 합쳐진 거니까.”
이런 조건들이 합쳐지면 이만한 경험치는 납득이 갔다.
시문은 당연하게도 상태창의 잔여 스탯 18을 전부 연성력에 투자했다.
주 스탯이 이제 막 100대를 돌입해서일까?
‘101을 넘었을 때처럼은 아니지만, 그래도 좀 강해진 느낌이 드는데?’
101을 넘었을 때만큼은 아니라도.
회로에 감도는 연성력의 순환부터 달라진 것이 확 느껴졌다.
상태창을 닫으려던 시문은 최상단의 레벨을 보고 미소를 머금었다.
“레벨이 딱 80이네.”
기본이 62였던 레벨은 18이 더해져 80이 된 상황.
‘다음 아레나도 이런 식이면 100레벨은 순식간이겠어.’
그럼 아마 금방 승급전을 치르고, 플래티넘 데뷔전까지 이어지겠지.
‘골드 데뷔전을 치른 지 얼마나 됐다고. 이거 빨리 플래티넘으로 가 버리라는 느낌인데.’
갤럭시 아레나의 뜻을 제대로 간파한 시문은 즐거운 얼굴로 인벤토리를 열었다.
그러곤 이번에 아레나의 보상을 꺼냈다.
“읏! 꽤 무겁잖아?”
분명 드라고니움 꾸러미라고 되어 있는데.
꾸러미는 무슨, 포대 자루가 튀어나왔다.
일반인이었다면 곧장 바닥으로 쓰러지는 불상사가 생겼으리라.
시문은 묵직한 자루를 조심히 바닥에 놓았다.
“그나저나 드라고니움이라?”
전생에서도 들어 본 적 없는 아이템 이름.
시문은 얼른 꾸러미를 열어, 드라고니움의 정보를 살폈다.
[드라고니움]
등급 : S
고수준의 용력으로 이루어진 광석.
단출한 정보창.
하지만 시문은 실망하지 않았다.
‘용력? 용력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키잉.
시문은 즉시 오딘의 눈을 활성화했다.
자연스레 오딘의 눈 특성인 사안 역시 개안되었고.
[드라고니움의 정보가 갱신되었습니다.]
[지구에서 처음으로 ‘드라고니움’을 감정해 내었습니다.]
[업적 포인트 2,000점을 획득합니다.]
알림과 함께 드라고니움의 정보창이 달라졌다.
[드라고니움]
등급 : S
고수준의 용력으로 이루어진 광석.
경도와 강도, 에너지 전도율 모두 뛰어나며, 용력을 지닌 자만이 다룰 수 있다.
정보창을 확인하자.
-어머머. 이것 봐라?
잠잠하던 현자의 돌이 입을 열었다.
-이것들, 아주 재밌는 걸 만들고 있었네?
“말투를 보니, 너도 모르는 눈치다?”
-맞아. 여러 차원을 통틀어 내가 모르는 광석은 없거든? 근데 이런 건 처음 봐.
현자의 돌도 모르는 광석이라.
정보창의 내용까지 고려해 봤을 때, 답은 하나였다.
“용족이 만든 광석이로군. 그것도 비밀리에.”
-그런 거 같아. 오빠, 그것 좀 만져 봐.
현자의 돌의 요구대로.
시문이 드라고니움을 한 덩이 짚자, 녀석은 감탄을 터뜨렸다.
-캬하! 용력을 이런 식으로……. 아니, 이게 가능한 일인가?
한동안 드라고니움을 살피던 녀석은 말했다.
-이 정도면 스펙상 미스릴이랑도 충분히 비벼 보겠는데?
“그래.”
시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설명이나 등급으로 미스릴급의 광석이라는 건 느낌이 왔어.”
미스릴 광석 역시 비슷한 정보창에 S등급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시문의 얼굴은 한층 진지해졌다.
“그리고 이걸 이번 아레나 보상으로 주었다는 건…….”
-그 더럽게 못생긴 드라그 새끼들이 옮기던 게 이 드라고니움이라는 소리겠지.
보통 아레나 보상은 아레나 내용과 관련 있는 것들로 주니까.
현자의 돌의 말에 시문은 턱을 괴었다.
‘여기에 데이나의 이야기까지 더해 보면, 이건 검은 제련소에서 쓰이는 재료겠군.’
더불어.
드라고니움의 정보창에 ‘용력을 지닌 자만이 다룰 수 있다’라는 문구.
이는 드라고니움으로 만들어진 물건을 다룰 자격을 뜻하기도 했지만.
‘오직 용력을 지닌 이만이 가공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
여기까지 생각해 보면.
‘왜 전생의 드워프들이 그렇게 용족스러웠는지도 대충 짐작이 가는군.’
왜 전생의 드워프들이 유독 용족과 닮은 모습이었는지도 느낌이 왔다.
‘드라고니움을 다룰 수 있게 용족에게 무슨 짓을 당한 거야.’
용족과 드워프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이미 앞선 특수 아레나들로 알지 않는가?
그때.
“음?”
자잘한 진동이 시문의 감각에 잡혔다.
시문은 진동의 원인인 거실의 테이블을 향했다.
그곳엔.
우우우웅.
덩그러니 놓여 있는 폰이 열심히 진동하고 있었다.
화면을 확인한 시문은 폰을 귀에 가져다 대었다.
-시문 님.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만, 급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혹시 통화 가능하실는지요?
굵직하게 들려오는 목소리.
“예, 진욱 씨. 말씀하세요.”
밤사냥꾼 박진욱이었다.
-시문 님과 만남을 꼭 원하시는 분이 계셔서, 긴히 연락을 드렸습니다.
“저랑요?”
어지간해선 박진욱 선에서 컷이 될 텐데.
그러라고 협업하는 관계이기도 하지 않은가?
그런 박진욱이 굳이 이렇게 연락할 정도면 보통 인물은 아닐 터였고.
“누군데요?”
-암시장의 주인입니다.
시문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