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5화
85화. 연금술의 친구 (2)
“다시 묻겠다. 네놈들은 누구냐?”
맑고 투명한.
“적인가, 아군인가.”
그러나 아름답다기보단 날카로운 유리 조각 같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시문은 목소리의 주인인 후드인을 바라봤다.
‘시작 NPC, 데이나로군.’
데이나.
중독된 보급로의 시작을 알리는 인물로.
여기서 어떤 대답을 하냐에 따라 데이나의 도움을 받을 수도, 받지 못할 수도 있다.
웃긴 것은.
‘어느 길을 택하건 보상은 변함없었지?’
적과 아군.
어느 쪽을 택하건 클리어 보상엔 지장을 주지 않는다는 거다.
보상을 더 받으려면.
애당초 갤럭시 아레나 측에서 내건 조건인 ‘최대한 많이 생존’하는 것뿐이었고.
이런 조건 속에서 적이라는 선택지를 택하다간.
-설마 적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겠지?
-트롤러 있으면 쌉가능할 수도 ㅋㅋㅋ.
-그러면 개꿀잼이긴 하겠네. 레전드 찍을 듯 ㅋㅋ.
-근데 여기 골드 최상위권이라 그 짓은 하고 싶어도 못 할 듯.
-ㅇㅈ. 다 아는 얼굴이고 올라갈 놈들인데 아레나 길게 하려면 그 짓은 못 하지. 아! 전갈 새끼들이면 가능할 수도?
-전갈 길드 ㅋㅋㅋㅋ. PTSD 씨게 오네.
데이나마저 적으로 돌리게 된다.
데이나의 종족과 실력.
그리고 그간의 데이터를 살펴보면 적이라고 말하는 선택지는 결코 옳은 선택이 아니었다.
고로 99%의 플레이어들은 아군이라는 선택지를 택했다.
“우린 아군이다.”
세력도, 무력도 가장 강한 것일까?
최전방에 서 있던 근육질의 사내.
최진수가 답하자 후드를 눌러쓴 데이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다행이군.”
아군이라는 답에 후드를 벗은 데이나.
드러난 그녀의 얼굴에.
“오오!”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인데. 실물이 훨 나아.”
-응애! 눈나!
-볼 때마다 지리긴 한다.
-아레나에 있기 아까운 인재다.
매칭된 플레이어들과 시청자들은 일제히 감탄을 토했다.
“쓸데없이 피를 묻히는 건, 그리 달갑지 않거든.”
벗은 후드 아래로 비단같이 흘러내리는 은발.
다소 까무잡잡한 피부에 날렵하게 뻗은 코와 눈매, 귀까지.
그렇다.
“너희들의 차림새를 보아 하니 전사들 같은데…….”
다크엘프.
중독된 보급로의 시작을 알리는 데이나는 다름 아닌 다크엘프인 것이다.
본래 플래티넘 구간부터 본격적으로 이종족이 등장하고.
검문소 맵도 이 구간부터 등장하니 이상할 것도 없었다.
다만.
“쯧. 영 부실하군.”
다크엘프라서일까?
데이나의 성격은 썩 좋다고 보기 어려웠다.
“부실하다 못해 나약할 정도야. 이래서야 그 버러지들 하나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겠구나.”
그녀는 지닌 무력에 걸맞게.
자신보다 못한 플레이어들은 가차 없이 깔고 뭉개는 경우가 많았다.
이로 인해 적이라는 선택지로 돌아서는 플레이어들도 간혹 있었으나.
‘대부분 몰살당했지.’
전방에선 계속 몬스터들이 몰려오는데.
뛰어난 암살자이자 궁수인 데이나의 게릴라까지 겹치니 어찌 버텨 내겠는가?
그 탓에 더럽고 치사하더라도 데이나의 독설을 참으며 협조를 해야 했다.
거기에다.
“너희 같은 것들은 내게 감히 아군이라 칭할 자격조차 없다.”
아무리 골드 최상위권이라곤 하나.
상향 조정으로 플래티넘 구간에 온 골드들이 데이나의 눈에 차겠는가?
“그냥 꺼져라. 너희는 방해만 될 뿐이다.”
그녀는 싸늘한 눈으로 일갈하곤 몸을 돌려 버렸다.
-엌ㅋㅋㅋ 데이나 누님, 여전하시구만.
-흐엥! 눈나, 나도 밟아 줘!
-여전히 싸가지는 없네. 애들 개빡칠 듯 ㅋㅋ.
-근데 얘네 이제 어쩜? 다 골드잖아. 데이나 도움 없으면 여기 진짜 지옥일 텐데.
싸늘한 데이나의 반응에 시문의 채팅창이 활발하게 돌아갔다.
물론 대상이 된 플레이어들 역시도.
“저, 저!”
“망할! 누군 여기 오고 싶어서 왔나!”
“퉤다! 이년아!”
분을 감추지 못했다.
당연했다.
대다수가 내로라하는 길드의 유망주들.
혹은 그만한 실력을 지닌 루키들인데 면전에서 멸시당하니 기분이 나쁠 수밖에.
“야야, 진정해라.”
“목소리 좀 줄여! 데이나가 들으면 어쩌려고? 아쉬운 건 우리야.”
“이제 어쩌죠? 데이나의 도움 없으면 클리어가 불가능할 텐데…….”
그나마 이성을 붙잡고 있던 플레이어들은 흥분한 이들을 만류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시문은 차분한 눈으로 등을 돌린 데이나를 바라봤다.
‘데이나가 없어도 문제는 안 돼. 나 혼자서도 클리어는 할 수 있으니까.’
오만이 아니다.
이성적으로 철저히 분석해 봤을 때.
아무리 중독된 다리가 플래티넘에서 악명이 높다곤 해도, 시문에겐 어려움이 없었다.
‘어차피 골드 매칭이라 난도도 줄었을 테고, 메인인 중독도 내겐 큰 의미가 없으니까.’
그러나.
‘데이나의 도움이 없다면 팀원들의 생존은 장담할 수 없겠지.’
함께 매칭된 다른 플레이어들까지 고려한다면 말이 달라졌다.
결국 이번 아레나의 최대 보상은 ‘최대한 많은 인원의 생존’이 아닌가?
‘아무리 나라도 20명을 전부 케어하며 끌고 가긴 어려워.’
고로 네임드급 몬스터 위주로 게릴라를 펼치는 데이나의 조력은 필수적이었다.
‘설득할 수밖에 없겠네.’
다행히 아예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현자의 돌, 다크엘프들은 무력을 중요시하지?’
-응. 중요시가 아니라 사실상 마족이나 마찬가지야. 괜히 다크라고 붙었겠어?
‘그럼 무력만 증명해 주면 다시 돕겠다고 하겠네.’
-당연하지. 저것들은 마족과 같은 강자존을 선호하니까.
‘좋아.’
현자의 돌로 확인까지 한 시문은 곧장 데이나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근데 오빠가 굳이 그런 수고를 할 필요는 없을걸?
‘응? 그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야. 애당초 오빠는…….
“네놈은 뭐냐?”
현자의 돌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날아드는 날카로운 목소리.
시문이 가까워지자, 데이나가 먼저 말을 꺼낸 것이다.
그녀는 약자와 마주하는 것조차 용납할 수 없다는 듯.
“답해라, 쓰레기. 용건이 뭐지?”
고개만 슬쩍 돌린 상태였다.
시문은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데이나. 다크엘프는 힘을 중요시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지. 그렇기에 너희 쓰레기들과는 상종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이토록 수준이 낮은 놈들은 처음이거든.”
신랄하게 날아드는 독설.
그에 시문은 꿈쩍도 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저희가 당신이 무시할 수준은 아니라는 걸 증명하겠습니다.”
“호오? 이건 좀 흥미로운 이야기로군.”
옆모습이 다 보일 정도로 몸을 반쯤 더 트는 데이나.
돌아보는 그녀의 은색 눈동자는 흥미가 더해져 한결 더 반짝였다.
“이 몸과 한번 붙어 보겠다, 그 말인가?”
“그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니까요.”
“패기 하나는 마음에 드는군. 좋다.”
마음이 동한 것일까.
데이나는 몸을 아예 돌려, 품평하는 눈으로 앞에선 시문을 훑었다.
“목숨 정도는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난 봐주는 성격이―.”
그러곤.
“…….”
뚝 하고 멈춰 버리는 데이나.
그녀의 시선은 다름 아닌 시문의 가슴, 정중앙에 위치해 있었다.
“서, 설마!”
점차 커지는 눈동자와 떨리는 목소리.
동시에.
-내가 이걸 이야기해 주려고 했지.
그것과 상반되는 명랑한 목소리가 울렸다.
-세계수는 모든 엘프의 어버이지. 암만 다크엘프라고 해도 엘프라는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거든.
“이건 말도 안 돼! 어찌 인간에게!”
경악하는 데이나.
그런 그녀를 향해.
-알아봤으면 그만 놀라고 빨랑 꿇어, 이것아!
현자의 돌의 호통이 꽂혔다.
* * *
“뭐, 뭐야.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알면 우리가 이러고 있겠냐.”
“저거 김시문 아냐? 아는 사인가?”
“보아하니 그냥 아는 사이는 아닌 거 같은데…….”
매칭된 플레이어들부터.
-??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저거 데이나 맞음? 다른 애 아냐?
-나 데이나 저러는 거 처음 봄.
-ㄹㅇㅋㅋ. 쟨 다이아를 만나도 저렇게 안 하던데.
-미친 ㅋㅋㅋ 어이가 없어서 웃음밖에 안 나오네.
시문의 화면을 시청 중인 시청자들까지.
모두가 경악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저 데이나가…… 무릎을 꿇다니…….
-알고 보니 데이나, 얼빠인 거 아냐?
-엘프라서 그동안 인간들 얼굴은 눈에 차지도 않았던 걸…… 지도?
-응, 얼굴이 최고야. 존잘티비~.
-인간이라 미안해 ㅠㅠ.
-인간이라서가 미안한 게 아니라 존모ㅅ…….
-그만! 다들 키보드에서 손 떼!
악명 높은 다크엘프 데이나.
다이아 플레이어가 와도 코웃음을 치던 그녀가.
“제가 감히 씻지 못할 무례를 범했나이다.”
상전을 대하듯.
무척이나 정중한 자세로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다름 아닌 골드의 플레이어에게.
“입에 담지도 못할 존귀한 분에게 이런 무례를…….”
스릉.
허리춤에서 뽑혀 나온 칼날.
초승달처럼 길게 휜 검을 역으로 잡은 데이나는.
“비루한 제 목숨으로 값을 치르겠나이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제 목을 향해 칼날을 쑤셔 넣었다.
당연히.
“잠깐!”
따악.
손가락을 튕겨 인체 연성을 한 시문은 얼른 데이나의 칼날을 잡았다.
“조, 존귀하신 분이시여…….”
데이나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검을 막은 시문을 올려다봤다.
단순히 시문이 그녀를 살리려 해서가 아니었다.
‘육체를 보아 단련된 전사는 아니실 텐데…… 어찌 나의 검을 잡으신 거지?’
일반적인 엘프처럼 자연의 흐름을 읽지는 못하지만.
그만큼 상대를 보는 눈은 뛰어나다.
그런 데이나의 입장에서.
전사도 아닌 시문이 자신의 검을 잡았다는 건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하나.
‘역시 어버이의 동반자는 뭔가 달라도 다르신 건가.’
세계수의 동반자라는 타이틀은 그녀의 모든 사고방식을 시문에 대해서라면 무조건 납득하도록 만들었다.
그런 데이나의 귓속으로.
“데이나, 그만두세요.”
검을 붙잡은 시문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예. 존귀하신 분이시여.”
데이나는 곧바로 검을 거두었다.
주륵.
작게 한숨을 쉰 시문 역시 피가 뚝뚝 흐르는 손을 거두었다.
‘와, 이거 장난 아니네.’
고작 검을 쥐고 찌르는 행위였을 뿐인데.
방금 데이나의 움직임은 근력, 속도 할 것 없이 상당한 수준이었다.
‘연성력이 100을 넘지 않았으면 반응조차 못 했겠어.’
이젠 완성도가 50%대에 육박하는 인체 연성이다.
옵시디언 태블릿을 더 연성하지 않고서야, 더는 성장조차 할 수 없는 수준이란 말이다.
한데도 아슬아슬하게 검을 잡아 내다니?
‘데이나. 어쩌면 일반적인 다크엘프가 아닐지도 모르겠군.’
아무리 상위 종족 중 하나인 엘프라도 이건 도를 넘었다.
그때.
-으이구! 이 오빠야! 피 나잖아!
현자의 돌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아이, 정말! 칼을 맨손으로 잡는 사람이 어디 있어. 잘리면 어쩌려고! 언능 포션 꺼내!
‘녀석. 알았다.’
걱정이 가득한 잔소리에 피식 웃은 시문은 미리 만들어 두었던 포션을 꺼내 베인 손을 적셨다.
“아…….”
그 모습에 무릎을 꿇고 있던 데이나가 움찔한다.
자신의 검이 잡혔다는 사실에 빠져.
“이 무슨 무례를!”
하늘같은 어버이의 동반자.
시문에게 상처를 입혔다는 사실을 깜빡 잊은 것이다.
그녀의 은색 눈은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시문은 차분한 웃음으로 데이나를 진정시켰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보다, 아군이 될 자격이 있는지 증명부터 하죠.”
“아뇨! 증명 따위는 필요도 없습니다.”
시문의 말에 벌떡 일어선 그녀는 냉철하던 본래의 이미지를 잃고.
“당신께 감히 어찌 제가 자격을 논하겠습니까? 부디 말씀을 거두어 주십시오.”
한결 격앙된 어조로 고개를 푹 숙였다.
달라진 그녀의 모습에 눈을 끔뻑이던 시문은 작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럼 이제 우린 아군인 거죠?”
“아군이 아니라 제가 모셔야 할 분입니다! 그 전에, 부디 말씀을 낮춰 주시지요. 제겐 당신의 존대를 받을 자격조차 없습니다.”
* * *
다행히 적들이 몰려오기 전에.
“존귀하신 분이시여. 곧 놈들이 몰려올 것입니다.”
다크엘프 데이나의 적극적인 협조로 플레이어들은 한층 가벼워진 마음으로 아레나를 진행할 수 있었다.
물론.
“이봐, 쓰레기. 대체 거기엔 왜 서 있는 거지?”
“전투는 선수가 생명이다. 그것도 너희 같은 버러지들에겐 필수 소양이지. 한데 이 진형은 뭐란 말이냐?”
“멍청하긴. 탱커라면 무작정 앞에서 맞아야 하나? 맞는 걸 즐긴다면 이 몸이 직접 두들겨 주지.”
그녀의 협조는 세계수의 동반자인 김시문.
오로지 한 사람에 한해서만이었다.
결국.
“빌어먹을! 차별도 정도껏 해야지!”
“엘프도 다 똑같아! 결국 얼굴이 다라니까?”
“나쁜 년!”
타 플레이어들만 데이나의 독설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고.
-데이나가 저렇게 적극적으로 참여하다니? 이 형은 대체…….
-시문 님에겐 뭔가 남다른 게 있는 거 같아요. 데이나가 게릴라 안 펼치고 합류하는 건 처음 봅니다.
-ㄹㅇ. 일반적인 플레이어가 아닌 거 같음. 볼 때마다 막 새로운 게 나와.
-그래서 보는 재미가 있는 거자너 ㅋㅋ.
-맞말추! 난 다른 방송 안 보고 시문 님 것만 봄!
-저 데이나를 함락하다니……. 내 여왕님을!
채팅창 역시 온갖 의문으로 점철되었으나 그뿐.
아레나에 집중하는 시문은 채팅창을 자주 보지 않기에.
시청자들은 저들끼리 추측만 나눌 뿐이었다.
그렇게 데이나를 중심으로 진형이 형성되는.
갤럭시 아레나 역사상 처음 있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얼마 가지 않아.
“존귀하신 분이시여, 놈들을 포착했습니다. 곧 이곳에 당도할 겁니다.”
다크엘프의 시야는 뭔가 남다른 것인지.
데이나는 다소 굳은 얼굴로 정면의 다리를 노려봤다.
이내.
“한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녀는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시문을 돌아봤다.
“하나같이 독을 품은 놈들이라 혹여나 귀하신 옥체에…….”
“전 괜찮습니다. 대충 전략을 세워 뒀거든요.”
데이나의 우려를 미소로 안심시키는 시문.
그는 곧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고.
드드드득.
그그극!
시문 주변의 바닥들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점차 크기를 키우며 특정한 모양으로 연성되는 돌무더기들.
“이건…….”
그것의 정체를 알아본 데이나의 눈은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골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