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화
76화. 세계수 심드라실 (3)
철컥.
끼리릭.
쉴 새 없이 움직이는 팔과 연금술 도구들.
-오빠, 영약 쪽은 끝났어. 이제 숙성만 들어가면 돼. 치료제 샘플은?
“거의 다 됐어.”
그리고 최소한으로 오가는 대화까지.
‘참, 이렇게 보면 연금술사가 맞긴 한데 말이지.’
고말숙은 흥미로운 시선으로 플라스크 속의 눈알과 시문의 작업을 관람했다.
흡사 자동화된 현대 공장을 연상시키듯.
수십 개의 팔과 함께 작업하는 시문은 아레나에서 봐 오던 모습과는 새삼 달랐다.
‘남자는 무언가에 몰두할 때가 제일 멋있다고 하더니…… 할매 말이 틀린 게 없네.’
괜한 사심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끼릭.
재료부터 도구까지.
필요한 게 있으면 알아서 시문의 옆으로 척척 옮겨 주고, 보조하고, 정리한다.
무척이나 효율적인 움직임과 그 중심에서 모든 것을 컨트롤하는 시문.
이는 연금술이 아닌, 어느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이든 감탄할 만한 광경이었다.
한데.
‘어떻게 그런 괴물 같은 무력까지 지닌 거지?’
거기에다 변태 영감이 말하기론 분명 천마신공은 일인전승이라고 했는데.
연금술사인 김시문이 어떻게 천마신공까지 익힌 것일까?
의문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머리도 꽤 좋아 보였지.’
시문과의 첫 만남인 상록숲 던전.
당시의 시문을 떠올려 보면.
아레나 지식이나 상황 판단, 공략에 관해서도 무척이나 뛰어나 보였다.
‘쟨 대체 뭐 하는 놈일까?’
김시문에 대한 호기심이 점점 커져 갔지만.
‘뭐, 붙어 보면 알겠지.’
가볍게 생각을 정리한 고말숙은 얌전히 시문의 작업을 구경했다.
그렇게 얼마를 기다렸을까.
“자, 샘플은 이게 마지막이야.”
-웅~ 고생했어. 나머진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좀 쉬어.
기지개를 켜며 일어난 시문.
그는 푸른 액체가 담긴 플라스크를 웬 눈알에게 넘기고 다가왔다.
이내.
“천마한테 아주 제대로 전승받았나 보네.”
넝마가 된 옷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그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스스슷.
“뭐, 뭐야?”
넝마가 된 옷이 하얀빛에 휩싸이더니 순식간에 멀끔한 형태로 돌아왔다.
그에 깜짝 놀란 고말숙은 반짝이는 눈으로 시문을 바라봤다.
“야, 너 옷 장사하면 지리겠다? 옷을 그냥 복사해 버리네.”
“너다운 발상이다. 그리고 이건 복사가 아니라, 네 남은 옷에서 끌어온 거야. 연금술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게 아니거든.”
“어? 그러네? 천이 얇아졌잖아? 연금술 이거 순 사기 능력이었네.”
신기한 듯 이리저리 옷을 살피는 고말숙.
이내.
“참. 이럴 때가 아니지.”
고개를 세차게 저은 고말숙은 아까 못다 한 말을 이었다.
“야, 김시문. 나랑 한판 붙자.”
그 말에 고말숙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시문.
“왜. 천마한테 나랑 한판 붙어 보라는 퀘스트라도 받았냐?”
“그, 그걸 어떻게!”
그는 고말숙의 사정을 정확히 꿰뚫어 보았다.
피식 웃은 시문은 당황하는 고말숙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한판 붙자.”
“정말이지? 두말하기 없기야!”
“그래. 대신 여기 훈련장 말고 아래에 공용 훈련장으로 가자.”
“오냐! 빨랑 준비해서 오라고!”
안타깝게도.
시문의 수락에 신이 난 고말숙은.
“안 그래도 스탯을 한 번에 35나 얻은 건 처음이라, 연습이 좀 필요했거든.”
가장 중요한 뒷말을 듣지 못했다.
* * *
랭커팰리스.
한국에서 가장 핫하고 아직도 성장 중에 있다는 두 랭커.
김시혁과 이유정이 거주하는 곳.
고수준의 플레이어 거주를 목적으로 건설된 곳인 만큼.
당연히 내부 시설도 플레이어 위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중에 훈련장은 내부 시설 중에서도 굉장히 공들여 만든 곳으로.
“우와…… X나 넓네.”
스타디움 경기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넓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무슨 경기장도 아니고, 뭐가 왜 이렇게 넓냐?”
“이 정도는 돼야 주변에 피해가 안 생기거든.”
거주 주민들이 하나같이 잘나가는 플레이어이지 않은가?
잘나간다는 말은 곧 플레이어 중에서도 강력한 이들이라는 말이 된다.
당연히 넓은 부지는 기본이요.
고위 방어 마법을 필두로 온갖 방어 시설들이 촘촘히 갖추어져 있어야 했다.
시문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규모 좀 있는 길드라면 이런 훈련장 정도는 다들 있잖아.”
“그렇긴 한데…….”
이만한 크기의 훈련장을 지닌 길드는 거의 없지 않냐?
그렇게 속으로 읊조린 고말숙은 헛웃음을 흘리곤 시문을 따라 대련장에 올랐다.
“어디 보자. 무슨 버튼만 누르면 됐던 거 같은데.”
시문은 한쪽에 배치된 기기를 이리저리 살폈다.
이내.
삑.
-방어 시설이 작동합니다.
기계음과 함께 대련장 주변으로 여러 겹의 방어막이 겹쳐지고.
바닥 역시 보호 파장이 퍼지며 한결 더 단단해졌다.
“됐네. 그럼 바로 시작할까?”
“엉. 이 꽉 깨물어라.”
시문이 맞은편으로 자리를 잡자.
“진심 펀치로 갈 거니까!”
고말숙은 두 눈을 시뻘겋게 물들이며, 곧장 바닥을 박찼다.
그에 시문의 눈이 슬쩍 커졌다.
‘저번보다 빠른데?’
성좌 천마를 만났으니 SSS급 특성 천살성의 온전한 개화는 물론.
천마신공으로 전반적인 전투 능력이 상승했다 해도 상당한 속도였다.
‘하지만 뻔해.’
시문의 고개가 슬쩍 꺾인다.
그러자 그곳으로 들이닥치는 고말숙의 주먹.
‘제법…… 음?’
감탄하려던 시문의 눈매가 날카로워진다.
마치 방금의 일격이 빗나갈 것이라고 예상이라도 한 듯.
스윽.
주먹을 뻗은 고말숙의 몸이 어느새 자연스럽게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허초였나?’
허초.
실제로 공격할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럴 의도가 전혀 없이, 도리어 상대를 현혹시키는 일종의 속임수.
본디 플래티넘급부터나 제대로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 정설인데.
천마를 만난 고말숙은 벌써부터 허초를 이렇게 실전에서 활용하고 있었다.
‘실버면서 벌써 허초라니. 역시 말숙이. 시혁이 녀석에 버금가는 천재라니까.’
괜히 세계 3대 미친년이자 하이랭커로 불린 게 아니다.
속으로 감탄을 한 시문의 몸이 한 걸음 나아간다.
정확히는.
스륵.
고말숙이 몸이 회전하는 방향으로 같이 움직였다고 해야겠지.
그리하여.
“무슨!”
이어 실초로 돌려차기를 가하던 고말숙의 눈이 부릅떠진다.
해당 지점에 시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내.
“허초라니. 좀 놀랐다, 말숙아.”
뒤편에서 들려오는 시문의 목소리와 함께.
빠각.
등에 꽂히는 시문의 일격에 허공으로 날아가 버리는 고말숙의 몸.
그러나 날렵하게 공중제비를 돈 그녀는 침착하게 착지해, 시문과 거리를 벌렸다.
그 모습에 시문은 또 한 번 감탄을 터뜨렸다.
“흘리기까지 한다고?”
일순 타격 부위를 움직여 피해를 최소화하는 고급 기술 ‘흘리기’.
플래티넘 이상의 전투계라면 대부분 사용이 가능한 기술이었지만.
‘방금 건 등 뒤에서 친 기습인데, 그걸 흘리네?’
등 뒤에서 날아드는 기습을 눈치채고 흘린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윽! 흘리기는 무슨! 다 못 흘렸거든?”
아직 천마신공을 익힌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실버라는 스펙 덕분에 완벽한 흘리기를 성공시키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시문은 현 고말숙의 상태를 대번에 파악했다.
‘스펙이 본인의 재능을 못 따라오는군.’
아무리 장인은 장비 탓을 하지 않는다지만.
플레이어에게는 완벽히 관통하는 말이 아니었다.
지금까지야 어떤 영약 섭취나 장비도 없이 SSS급 특성 천살성만으로 실버 랭크를 유지했다지만.
그 이면엔 천살성만이 아니라 타고난 재능까지 더해졌기에 가능했던 일.
그리고 성좌 천마를 만난 지금.
‘성장 속도만 받쳐 준다면 다이아도 노려 볼 수 있겠어.’
고말숙은 비행기를 넘어 제트기 수준으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다만 그 속도가 너무 빨라, 본인이 유체이탈이 될 정도라는 게 문제지만 말이다.
“하압!”
시문은 금세 몸을 추스르고.
또다시 파고드는 고말숙을 바라봤다.
‘또 근접전인가.’
딱히 대련의 룰을 정하진 않았으니.
말숙이의 입장에선 연금술을 사용할 틈을 주지 않으려고 다급히 몰아붙이는 듯했다.
‘딱히 연금술을 사용할 생각은 없는데 말이지.’
천마가 굳이 자신과 붙어 보라고 한 이유야 뻔하지 않겠는가?
고말숙이 천마신공을 얼마나 잘 익혔는지.
같은 천마신공의 전승자인 자신에게 검증받으라는 거겠지.
‘그럼 최대한 기본기로 상대해 줘야겠네.’
시문이 여유롭게 마기를 끌어올리던 순간.
파측!
고말숙의 주먹에서 심상치 않은 이명이 들려왔다.
그리고 주먹을 펼친 순간.
“이런!”
그녀의 손아귀에 응집된 마기를 확인한 시문은 급히 몸을 틀었다.
피잉.
순식간에 귀 옆을 스치고 지나가는 묵빛 섬광.
시문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섬광이 지나간 자리를 바라봤다.
“섬멸포?”
섬멸포.
천마신공의 두 초식 중 파에 위치한 초식으로.
기본적으로 2성에 도달해야 사용이 가능한 초식이었다.
이 말은 곧.
‘벌써 천마신공 2성에 도달한 거야?’
자신처럼 업적 포인트로 인한 연성도 아닌.
고작 천마를 한번 만나 천마신공을 전수받은 것만으로?
이 어이없는 현상에 혀를 찰 틈도 없이.
거리를 좁힌 고말숙이 곧장 마기가 넘실거리는 주먹을 내질렀다.
“어딜 봐? 아직 안 끝났거든!”
격의 초식 패황쇄였다.
그에.
‘이거 가볍게 해서는 안 되겠는데.’
가볍게 응했던 마음을 철회한 시문이 즉시 주먹을 내지른다.
가슴 정중앙.
단전의 역할을 하는 현자의 돌에선 최대치로 활성화된 마기가 흘러나와 시문의 주먹을 휘감았다.
상위 플레이어를 가르는 척도.
기의 형상화로 인한 권기였다.
파아앙!
강렬한 파공음을 자아내는 두 주먹.
같은 무공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마기이기 때문일까?
끼기긱!
고말숙의 패황쇄와 시문의 권기는 서로를 들이박은 채, 힘겨루기를 이어 갔다.
“이익!”
이를 악물고 마기를 더하는 고말숙.
그러나 그런 겉모습과 달리.
‘괴물 같은 놈!’
속은 경악으로 가득했다.
‘어떻게 주먹을 내지르면서 권기를 바로 쓰는 거야!’
천마신공은 기본적으로 패도다.
그에 따른 강력한 위력이 보장되지만.
마땅한 준비 과정이 없다면 역으로 반작용이 생길뿐더러.
애당초 반작용이 생길 여부인 ‘억지로라도 사용한다’라는 개념 자체가 쉽게 통용되는 무공이 아니란 말이다.
한데 눈앞의 이 괴물은 보란 듯이 해냈다.
어느새 천살성 특유의 시뻘건 눈이 된 고말숙은 이 기적을 만들어 낸 괴물을 노려봤다.
그러나 그뿐.
츠측.
“크으……!”
패황쇄를 머금은 그녀의 주먹이 고작 권기를 휘감은 시문의 주먹에 점차 밀려나고 있었다.
고말숙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대로는 안 돼.’
자신의 패황쇄가 밀리는 그때가 패배의 순간이 될 거라고.
그렇다면.
‘내 쪽에서 먼저 지른다!’
까득.
이를 꽉 깨문 고말숙이 한 걸음 더 파고든다.
동시에 패황쇄를 담은 주먹을 옆으로 흘려 버렸다.
“음?”
설마 힘겨루기를 포기하고 역으로 파고들지는 몰랐던 것일까?
아니면 잘못된 판단을 했다고 실망한 것일까?
시문은 한결 가라앉는 눈으로 곧장 무릎을 쳐올렸다.
이대로 가면 고말숙의 복부에 무릎이 틀어박히고.
이어지는 연속기에 그대로 녹다운 당하겠지.
하지만.
함께 무릎을 마주 올리는 고말숙.
이내 그녀 다리가 힘껏 바닥을 디디자.
“엇?”
무릎을 쳐올리던 시문의 몸이 휘청거렸다.
단순히 흐트러진 것만이 아니다.
쿠우웅!
무거운 물체가 등에 엎어진 것처럼.
시문의 전신은 무형의 기운에 짓눌리고 있었다.
“설마…… 천마군림보?!”
경악에 물드는 시문의 두 눈.
그런 그의 앞으로.
“내가 이겼다! 인마!”
마기를 한껏 머금은 고말숙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하나.
쩌적.
시문의 주변으로 무언가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착각이 아니었다.
쩌저적!
실제로 시문을 짓누르던 무형의 기운.
천마군림보의 억제력에 금이 가고 있었으니까.
이어.
터억.
시문을 향해 날아들던 고말숙의 주먹이 손쉽게 붙들린다.
“이!”
그에 고말숙은 서둘러 왼 주먹을 내질렀으나, 그 역시 허무하게 잡혀 버렸다.
아니, 잡히다 못해.
“크, 크윽! 마법계 주제에 무슨 힘이!”
성인과 어린아이의 팔씨름처럼.
고말숙의 두 주먹은 점차 짓눌려 갔다.
그녀는 어렵지 않게 이 원인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미친! 연금술사 주제에 무슨 마기량이 이렇게 많아!’
압도적인 마기량.
마기 효율이 뛰어난 천살성조차 비비지 못할 정도의 강대한 마기로 두 주먹을 짓누르고.
천마군림보 특유의 억제력까지 밀어내는 것이었다.
“말숙아.”
천근의 바위처럼 양팔을 짓누르던 시문이 입을 열었다.
“순수하게 기본기로만 겨뤄 보려고 했는데…….”
그는 어느새 마기가 넘실거리는 눈동자로 고말숙을 내려다봤다.
영화 속에서 흔히 등장하는 악마를 연상시키는 모습이었으나.
“설마 이렇게까지 강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고말숙은 그 위험한 모습이 가슴 깊은 곳을 뜨겁게 두드리는 걸 느꼈다.
이윽고.
쨍!
천마군림보의 억제력이 완전히 파쇄되는 순간.
“인정할 수밖에 없네. 말숙아, 넌 진짜…….”
화아아아아!
자신을 집어삼킬 듯.
덮쳐 오는 이 매력적인 악마를 끝으로.
“최고다.”
고말숙의 의식은 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