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8화
68화. 파라켈수스의 플라스크 (2)
플라스크 속 붉은 기류 위에 덩그러니 떠 있는 외눈과 입.
큼직한 눈알에 죽 찢어진 입은 퍽이나 기괴했으나.
스윽.
뚜렷한 외관의 미청년은 무미건조한 얼굴로 둥근 플라스크를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너나 잠 좀 깨.”
마구잡이로 흔들어 버리는 미청년.
그에.
-으아아아! 그, 그만! 오빠! 그만!
음산한 웃음을 흘리던 붉은 기류의 외눈은 감옥에라도 갇힌 것처럼.
이리 콩! 저리 콩! 하며 탱탱볼처럼 플라스크 면에 박아 댔고.
-오빠! 내가 잘못했어! 안 할게! 안 한다구!
어느새 어린 목소리로 돌아온 현자의 돌이 처절하게 항복 의사를 밝히며 백기를 흔들었다.
그에 피식 웃은 시문은 조심히 플라스크를 내려놓았다.
-이씽! 좀 놀라게 해 보려 했더니!
붉은 기류의 외눈.
현자의 돌은 눈물을 글썽이며 시문을 노려봤다.
-어떻게 알아차린 거야?
보란 듯 가슴 정중앙을 가리키는 시문.
“네 본체의 존재감이 거기서도 그대로 느껴지는데, 퍽이나 속아 넘어가겠다.”
-맞다…… 호문쿨루스가 되어도. 어차피 오빠와의 귀속 관계는 달라지는 게 없지.
그에 플라스크 속의 외눈이 축 처졌다.
-씨잉! 모처럼 놀려 먹을 기회였는데!
“녀석.”
한껏 아쉬움을 토하는 현자의 돌.
녀석의 실없는 모습에 피식 웃음을 흘린 시문은 플라스크를 조심히 들었다.
“근데 현자의 돌. 호문쿨루스는 금기의 영역 아냐?”
-맞아.
언젠가 에메랄드 태블릿에서 보았던 연금술의 금기.
그중 호문쿨루스는 인체 연성과 함께 금기된 연금술 중 하나였다.
-뭐 어때? 금기한 신은 소멸해 버렸고, 우린 그 신의 물건으로 호문쿨루스를 재현했을 뿐인데.
“그렇긴 한데…….”
-그리고 이미 인체 연성도 익혔잖아. 하나 더 어긴다고 문제될 거 없어.
이미 인체 연성이라는 금기를 어긴 시문 아니던가?
거기에다 금기를 지키든 어기든 상벌할 존재는 이미 없는 상황.
그래서 검은 염소가 업적 포인트를 1,000점이나 후원했던 걸까?
시문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자, 현자의 돌은 말했다.
-이 상태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이 꽤 많거든.
“그래?”
-응! 대표적으로 이제 바빠질 우리 오빠를 아주 편하게 만들어 줄 수 있지!
한쪽 눈을 찡긋한 플라스크 속 현자의 돌은 말을 이었다.
-오빠. 플라스크 속의 나랑 본체의 내가 둘 다 느껴진다고 했지?
“어.”
-그럼 내가 둘인 거잖아?
“그…… 렇지?”
뭔가 탐탁지 않은 표정이 되어 버리는 시문.
-이씨! 얼굴이 왜 그래? 내가 둘이면 두 배로 좋아야 하는 거 아냐?!
“좋아서 그런 거야.”
-흐응…….
게슴츠레한 눈으로 시문을 훑던 현자의 돌은 이내 으쓱했다.
-뭐, 그렇다고 치자. 어쨌든, 그게 다야.
그 말에 고개를 갸웃하던 시문은 이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잠깐. 설마 다중 연성이 가능하단 거야?”
다중 연성.
본체를 지니고 있는 시문과 플라스크 속에 자리 잡은 일종의 분신.
하나 분신이라기엔 플라스크 속 현자의 돌이 본체처럼 느껴졌으니.
신화급 무기를 포함한 모든 연성이 동시에 2개씩 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제법 가깝긴 했는데, 틀렸어.
현자의 돌은 고개를 저었다.
-애당초 한 번에 여러 개 연성하는 건, 등가교환만 성립한다면 지금도 가능한 거잖아.
“에? 가능해?”
-몰랐어?
놀라는 시문에 역으로 더욱 놀라는 현자의 돌.
-오빠는 인체 연성도 동시에 해내잖아.
“그렇지?”
-그럼 신화급 무구의 연성 같은 것도 당연히 동시에 여러 개가 가능하겠지?
“어, 그러네?”
-아이고! 이 오빠야!
손이 있다면 제 이마를 부여잡았겠지.
한숨을 푹 쉬며 도리도리 고개를 젓는 플라스크 속 현자의 돌.
-내가 정말 못 살아! 오빠는 스스로의 재능에 대해 자각할 필요가 있어. 어차피 연성의 근본이 같은…….
열심히 열을 올리며 설명까지 해 나가는 그 모습이 퍽이나 귀여웠지만.
‘그대로 말하다간 오늘 능력에 대해선 듣지도 못하겠지.’
진지하게 말하는데 그게 무슨 소리냐며, 길길이 날뛸 현자의 돌이 예상된 시문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여하튼 2개를 동시에 한다는 발상은 좋았어. 아예 틀린 말도 아니거든.
플라스크 속 현자의 돌이 한쪽 방향으로 슬쩍 기운다.
이동하자는 의사 표시임을 눈치챈 시문은 현자의 돌의 인도대로 걸음을 옮겼다.
녀석이 향한 곳은 연구실로 사용하기로 한 널찍한 방.
그동안 두 동생들이 준 재료 아이템으로 꾸준히 도구 제작에 몰두한 덕분에.
널찍한 방은 제법 연구실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연금술 도구들로 채워져 있었다.
현자의 돌은 그중 가장 큰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여기에 놔 줘.
포션과 영약 조제대에 자리를 잡았다.
포션 거치대 위에 자리한 녀석은 이모님의 치료제를 제작했던 병들을 바라봤다.
-오빠, 연성력 좀 쓸게.
그 말과 함께 미세하게 진동하는 가슴 속의 본체.
진동만큼이나 미세한 연성력이 플라스크 속 현자의 돌로 전해지는 게 느껴졌고.
A급 재료인 앤트의 껍질로 만들었던 조제대 위로.
츠츠측.
조제대와 같은 재질의 목재 팔이 솟아올랐다.
이내.
-섞고~ 섞고~ 돌리고, 섞고!
그것들은 누군가의 팔처럼.
주변의 빈 병들을 쥐고 이리저리 흔들어 댔다.
“세상에…….”
그 모습에 시문의 입이 떡 벌어진다.
그럴 수밖에.
플라스크 속 현자의 돌은 자신의 연성력을 빌려, 독자적인 연금술을 펼쳤고.
이는 바꿔 말해.
“대, 대리 제조?!”
치료제의 대량 생산에 들어갈 노동력을 아낄 수 있다는 뜻 아닌가?
그것도 아주 획기적으로.
-엣헴! 어때? 이 몸의 대리 연금술이! 개지리지?
어느새 플라스크 표면까지 연성한 녀석은 작은 팔을 허리에 척하니 걸치며 으스댔고.
개지린다는 말은 대체 어디서 배웠냐고 따질 틈도 없이.
“아유! 이 복덩아!!”
-헤으응~ 존잘 가슴 근육에 끼여서 가버려…… 가 아니라! 오, 오빠 진정해! 그러다 깨진다고!!
시문은 그런 플라스크 속 현자의 돌을 꽉 껴안았다.
* * *
랭크팰리스.
한국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싼 건물.
턱을 끝까지 들어 그 높은 고층을 슥 훑은 여성은 나지막이 읊조렸다.
“여긴가…….”
붉고 고운 입술에서 허연 김이 흘러나온다.
이제 2월에 들어선 서울답게 싸늘한 기온.
캡 모자에 검은 후드까지 눌러쓴 여성은 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곤 입구를 향했다.
“잠깐.”
자연스럽게 앞을 가로막는 남자.
경비원이었다.
“이봐, 아가씨. 무슨 용무야?”
“용무? 아아, 만날 사람이 있어서요.”
“만날 사람?”
고개를 갸웃한 경비원이 그녀를 위아래로 훑는다.
“미안하지만 아가씨, 여기에 그쪽을 만나실 만한 분은 안 계시는데?”
“뭐요?”
한 톤 올라가는 여성의 목소리.
제법 위협적인 목소리였지만, 경비원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목소리 깐다고 통하는 곳이 아니야. 얼른 돌아가.”
“저기요, 아저씨. 여기 경비원 아냐?”
“맞지.”
“근데 왜 그따구로 말해요? 입구컷 할 거면 내가 누구 만나러 왔는지는 알아보고 해야 하는 거 아냐?”
“푸하핫!”
빵 터지는 경비원.
그는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이봐, 아가씨. 그쪽 차림새만 봐도 내가 감을 잡지 않겠어?”
“차림새? 내가 뭐 어때서?”
“늘어진 후드에 얼굴 반은 가리는 모자, 거기에다 허름한 청바지까지. 전부 보세로 둘둘 감고 있잖아.”
“X발, 어이가 없어서. 요즘 누가 메이커 따진다고. 그러는 아저씨도 메이커는 없어 보이는데?”
“하이고! 요즘 조용하나 했더니…….”
마주 훑는 여성에 귀찮음을 팍팍 표출하는 경비원.
이내.
“아아, 그런 거였어?”
경비원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올라갔다.
그에 여성의 언성이 한결 더 높아졌다.
“뭐야? 그 기분 더러운 반응은.”
“하여간에 있는 것들이 더해요. 가서 즐기면 될 걸 뭐 하러 여기까지 불러서는…….”
“잠깐. 아저씨 지금 더러운 생각하고 있는 거 아니지?”
“이상한 건 아가씨겠지. 더러운 것도 마찬가지고.”
“이 아재가 미쳤나!”
분노와 함께 후드가 절로 벗겨질 정도로 터져 나오는 기세.
“헉! 가, 각성자였…….”
그에 경비병이 바짝 얼어붙던 찰나.
“무슨 일입니까?”
입구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이 절로 떠지는 청량한 미청년은 한국 사람이라면 모를 수 없는 남자였다.
“거, 검성님!”
얼어붙었던 안색이 눈에 띄게 밝아지는 경비원.
그는 구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김시혁의 곁으로 후다닥 움직였고.
“각성자가 일반인을 위협하는 거 범죕니다. 모르세요?”
김시혁은 평소와 달리 가라앉은 목소리로 여성을 바라봤다.
그때.
“어? 당신은…….”
기세에 후드가 벗겨진 여성.
아직 캡 모자를 쓰고 있긴 했으나.
그 아래로 보이는 뽀얗고 날렵한 얼굴에 고양이처럼 올라간 눈매는 상당한 미녀임을 알려 주었다.
하나 김시혁이 놀란 것은 그녀의 미모 때문이 아니었다.
“고말숙 씨, 맞죠?”
김시혁의 물음에 고말숙의 한쪽 미간이 슬쩍 올라갔다.
“하이고! 대단하신 검성께서 내 이름은 어떻게 아나 몰라?”
“방송에서 봤거든요. 전투 센스가 엄청나시던데요.”
“방송? 누구 방송?”
“그거야 혀어…….”
옆의 경비원을 힐끔하는 김시혁.
이내.
“그러니까 아는 사람 방송에서요.”
자연스럽게 말을 얼버무린 그는 청량한 미소를 지으며.
“만날 사람이 있나 보군요. 들어오세요.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입구를 손수 열어 주었다.
“……고마워요.”
고말숙은 작게 감사를 표하며 입구를 향했다.
물론.
“어이, 경비 아재. 누가 이상하고 더럽다고?”
“예? 아, 아니 그게…….”
“남 깔보기 전에 너나 잘하세요, 개자식아. X발! 누굴 뭐로 보는 거야.”
가기 전에 한번 들이박아 주는 것도 참지 않았다.
그녀가 들어가고 입구의 문이 닫히자.
“김 경비님, 저게 무슨 말일까요?”
청량한 미소를 그대로 유지한 채, 경비원을 돌아보는 김시혁.
“아. 저…… 그것이…….”
경비원은 말을 더듬으며 연신 눈치만을 볼 뿐이었다.
그에 김시혁의 미소는 한결 짙어졌다.
“이거 참, 협회에서 그렇게 푸시하길래 마지못해 뽑아 드렸더니, 방문객께 큰 실례를 저지르셨네요?”
“오, 오해! 오해입니다! 제가 다 설명을!”
“물론 하셔야죠. 근데, 방금 들어가신 분에게도 따로 설명을 들을 거거든요.”
그 말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버리는 경비원.
마치 이런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나중에 협회에서 봅시다?”
김시혁은 얼어붙은 경비원을 보며 싱글거렸다.
* * *
끼릭. 끼리릭.
달그락.
천장과 벽면, 그리고 바닥까지.
연구실 곳곳에 위치한 정체 모를 팔들이 쉬지 않고 움직인다.
“이, 이게 대체…….”
기이한 광경에 고말숙은 멍하니 눈을 끔뻑였고.
“놀랍죠? 저도 처음 봤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시문의 펜트하우스.
내부의 연구실까지 안내한 김시혁은 맑게 웃으며 말했다.
그 웃음엔 왠지 모를 뿌듯함이 섞여 있었으나.
“노, 놀랍기는 하네요.”
고말숙은 연신 자동화가 진행되고 있는 연구실을 살펴보기 바빴다.
“아마 들어오는 소리를 들어서, 곧 형이…….”
“시혁아, 연락도 없이 갑자기 왜 왔냐.”
김시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와 닮았지만, 보다 더 뚜렷한 이목구비를 지닌 남자가 연구실로 들어왔다.
“형.”
시문이었다.
“형 손님이 오신 거 같아서 모셔 왔어.”
“내 손님?”
동생의 말에 눈을 끔뻑이는 시문.
이내.
“그래, 인마. 이 누님 오셨다.”
연구실을 정신없이 훑던 고말숙은 캡 모자를 벗으며 건들건들 다가왔다.
“고말숙? 너 연락도 없이 웬일이냐?”
“야, 네가 시간 날 때 오라며!”
그 말에 잠시 눈을 끔뻑이던 시문은 작게 탄식했다.
“아! 그랬었지 참. 요즘 바빠서 생각을 못 하고 있었네.”
“바쁘긴 무슨. 보니까 저 팔들이 다 알아서 하는구만.”
“저 팔들을 누가 만들었겠냐? 어떤 자동화 공장도 초반 설비는 다 들어가.”
“얼씨구, 고생하셨어요~.”
“오냐, 고맙다.”
“아씨! 칭찬 아니거든!”
원하는 반응이 나오지 않자 열을 올리는 고말숙.
그러나 전생부터 꾸준히 그녀를 겪고 다뤄 온 시문에게는 어림도 없었고.
“칭찬이 아니면 뭔데? 설마…… 욕이라도 박으려고 했어? 오자마자 갑자기?”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날 뭐로 보고! 난 그냥 이런 거 처음 봐서 신기하고 또…….”
당연히 초반부터 주도권을 쥐려던 고말숙을 능숙하게 몰아붙였다.
그렇게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보던 김시혁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걸쳐진다.
“하긴, 형 정도 되는 사람이 없는 게 신기하지. 이거, 유정이 녀석 빡 좀 치겠는데?”
“어? 시혁아, 너 뭐랬냐?”
“아무것도. 난 이제 가 본다고.”
김시혁은 의미심장한 미소 그대로 연구실을 나섰다.
“그럼 처리할 일이 있어서 먼저 가 보겠습니다. 두 분, 좋은 시간 보내세요!”
동생 녀석이 남긴 말에 뭔가 오해가 섞여 있다고 느꼈다면 착각일까?
시문은 당장이라도 동생 놈을 잡아서 제대로 짚고 싶었으나.
“야, 그 기술 후딱 알려줘. 나 몇 시간이나 걸려서 올라왔으니까.”
먼 곳에서 올라온 친우.
더불어.
[성좌 천마가 ‘허허! 이제 보니 천살성까지? 완벽하구나!’ 반짝이는 눈으로 이곳을 주시합니다.]
[성좌 검은 염소가 이곳을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봅니다.]
천마의 퀘스트까지 깨야 했기에.
“따라와. 바로 가르쳐 줄게.”
시문은 일단 훈련실로 고말숙을 안내했다.
시문을 따라 연구실을 나서던 고말숙은 아까의 복수라도 하려는 듯.
“야, 혹시 막 이상한 짓 하려고 각 잡는 건 아니지? 나 쉬운 여자 아니다? 적어도 비싼 양주 정돈 까고…….”
묘한 뉘앙스로 주저리주저리 말을 놓았다.
그에.
쿵.
“어?”
갑자기 고말숙을 벽으로 몰아붙이는 시문.
그는 두 팔에 고말숙을 가두며 지그시 내려다보았고.
“말숙아…….”
“야, 야! 무슨!”
갑작스러운 상황에 시뻘게진 그녀의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대고.
부드럽게 속삭였다.
“지X 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