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화
62화. 왕의 눈 (2)
얼굴이 굳어 버린 시문.
그럴 수밖에.
탈골드급 스펙에 용체화, 오딘의 눈까지 지녔음에도.
자신을 쉽게 눌러 죽일 만큼, 눈앞의 나가는 압도적인 존재였으니까.
그런 시문의 경계를 눈치챈 것일까.
-후후. 너무 긴장하지 말거라. 난 그대와 손을 섞을 생각이 없으니.
나가는 시문을 안심시키려는 듯.
미형의 매끈한 입가를 찢으며, 부드럽게 몸짓했다.
물론.
입술 사이로 보이는 뾰족한 이빨과 날카롭게 번뜩이는 눈은 전혀 그런 느낌을 주지 않았지만 말이다.
하나.
‘진심…… 이군.’
시문은 신기하게도 저 나가의 말이 진심이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마치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아온 동반자처럼.
눈빛만 봐도 거짓이 아니라는 것이 절로 느껴지는 것이다.
그런 시문을 바라보던 나가의 미소가 한결 짙어졌다.
-놀랄 것 없다. 그대가 본녀의 진심을 알아차리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니.
‘당연한 일?’
고개를 갸웃하는 시문.
이내 눈앞의 나가가 말하는 ‘왕의 눈’이 어떤 것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설마 사안 때문인가?’
용신 티아메트의 피를 흡수한 이후.
오딘의 눈에 추가된 사안.
앞선 나가들이 갑작스러운 마비 증세를 보였던 것도.
돌이켜 보면 전부 자신의 눈과, 정확히는 사안과 눈을 마주친 순간부터였다.
‘어떻게 쓰는지 전혀 감이 잡히질 않았는데…… 이런 식으로 쓰일 줄이야.’
고작 2개의 팔로 나가 중 가장 하위급이라곤 하나, 나가는 엄연한 최상급 용족이다.
다이아도 아닌 시문이 그런 최상급 용족을 마비시키게 만든다?
이는 사안이 어마어마한 급의 능력이라는 말이 된다.
하나.
‘저 나가한테는 안 통하는 느낌이야.’
어째서인지 저 나가에겐.
마비 능력이 통하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런 시문의 속내를 읽은 것일까?
-후후, 당돌한지고. 아무리 왕의 눈을 지녔다곤 하나 완벽하지 않을진대, 감히 본녀를 넘보다니.
말하는 내용만 보면 불쾌감을 느껴야 할 텐데.
겉으로나 속으로나.
눈앞의 나가는 순수한 호의만을 내보였다.
시문은 조금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당신도 내 속을 읽을 수 있는 건가?”
-정확히는 공감이라고 해야겠지. 아무리 본녀라도 왕의 눈을 지닌 자를 들여다볼 수 없으니.
그 말은 즉.
‘내가 원하면 저 공감을 차단할 수도 있는 걸까?’
듣자 하니 이 사안이 용족에 한해서 ‘어떤 우위’를 지니고 있는 것 같으니 말이다.
‘한번 해 보자.’
속으로 그런 마음을 품고.
왼쪽 눈에 집중시키며 의지를 보내자.
-놀라운지고.
눈앞의 나가는 놀라운 얼굴로 시문을 바라봤다.
-그 잠깐의 말로 거기까지 깨달을 줄이야.
그에 시문은 직감했다.
상대가 자신의 감정에 공감하는 걸 성공적으로 차단했다고 말이다.
나가의 날카로운 시선이 시문의 주변과 그 위를 향했다.
-과연. 어째서 그대가 왕의 눈을 지니고도, 올림포스의 힘을 다루는지 알겠어.
‘어…… 그건 좀 다른 이윤데.’
굳이 순서를 따지자면 아스트라페가 먼저, 사안이 나중이었지만.
시문은 굳이 나가의 생각을 정정해 주진 않았다.
-이런.
허공을 보던 나가의 눈매가 슬쩍 찌푸려진다.
-그렇군. 이곳은 아레나였나? 그렇다면 그대는 플레이어겠구나.
시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갤럭시 아레나 측에서 뭐라고 했나 봐?”
-눈치도 빠르노라. 그렇다. 혹여 본녀가 무슨 말이라도 잘못할까 봐 똥마려운 땅개처럼 벌벌거리는구나.
갤럭시 아레나를 대차게 까는 나가.
잔혹한 입꼬리를 더욱 끌어 올린 그녀는 작게 웃고는 시문을 바라봤다.
-왕의 눈을 지닌 자여. 본녀가 그대의 이름을 물어도 되겠는가?
“김시문.”
-김시문? 아아, 그렇군. 바로 그대로구나.
이름을 들은 나가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 콧대 높은 용제들을 두 번이나 물 먹인 것이.
‘두 번이나 물을 먹여?’
나가의 말에 고개를 갸웃하는 시문.
이내.
‘설마 마르넬의 일을 말하는 건가?’
그녀가 무엇을 말하는지 눈치챈 시문은 담담히 나가를 바라봤다.
-보아하니 그대도 아는 모양이군. 그래, 드워프의 운명선을 뒤틀어 버린 일이지. 그 일로 검은 제련소가 상당한 타격을 받았느니라.
‘운명선? 검은 제련소?’
알 수 없는 단어들이 줄줄 나왔으나.
시문은 나가의 말을 끊지 않았다.
-혹여 우리도 일찍이 그대를 만났더라면 달라졌을까? 하는 생각이 든 일이었지. 어찌 그만한 세월이 흘렀음에도 본녀는 아직도…….
감미로운 목소리에 원인 모를 회환과 후회가 묻어난다.
한동안 진지한 얼굴로 침묵에 빠지던 그녀는.
-뭐, 이미 쏟아진 물 아니던가.
가벼운 헛웃음과 함께 고개를 들었다.
-그대가 벌인 일 덕분에 5용제가 움직였다. 그의 전령인 데피나라는 드래곤이 나섰지.
“드, 드래곤이라고?”
용제라는 말보다 드래곤이라는 말이 더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그럴 수밖에.
용제를 제외하면.
최악으로 꼽히는 용족이 드래곤이라는 걸, 전생을 겪은 시문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니까.
‘드래곤이 떴다 하면 도시 하나는 그냥 날아갔지.’
그것도 플레이어들이 득실거리는 도시가 말이다.
자연스레 인상이 찌푸려지는 시문.
그런 시문을 다른 쪽으로 오해한 것일까?
-반응을 보니, 이미 그년의 수작에 당한 모양이구나. 그럼에도 이렇게 멀쩡하다니…… 하긴, 괜히 왕의 눈을 지닌 것이 아닌 게지.
나가는 멋대로 해석을 해 버렸고.
그 말에 시문은 한 가지 확신을 얻었다.
‘중국 놈들, 용족과 손을 잡은 게 확실하네.’
대충 짐작만 하고 있었던 중국과 용족의 관계.
비록 자신이 지닌 성흔을 알아차리고, 암살자를 보낸 건 아닌 것 같다만.
‘용족의 입김으로 중국이 데스페라도에게 의뢰한 건 확실해.’
결국 이유가 다를 뿐.
그 의도와 과정은 자신의 예상과 같았다.
-하나 방심하진 말거라. 데피나는 본녀도 인정하는 드래곤. 아무리 그대라도 상대하기 어려울 게다.
“그렇겠지.”
시문은 당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드래곤을 상대하려면 기본적으로 다이아급 파티가 나서야 한다.
한데 눈앞의 나가가 인정할 정도면.
최소 랭커급 파티가 나서야 할 수준이겠지.
거기다 암계 역시 뛰어날 터.
이렇게 타 차원에 개입해 암살 시도를 해 온다는 것부터가 그 증거 아니던가?
-으음. 의회의 간섭이 점점 심해지는군.
치직.
눈살을 찌푸리는 나가.
동시에 정체 모를 스파크가 그녀의 전신에서 튀어 올랐다.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만…… 이만해야겠구나. 어서 꺼지라고 이리도 발광을 하니.
그녀는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시문에게 다가갔다.
거대한 육체를 떠나.
다가오는 존재감만으로도 몸이 절로 경직될 법했으나.
사안의 능력 덕분인지 시문은 평온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나가는 시문의 왼쪽 손등 위로 입을 맞추었다.
[나가 공주 아샤즈가 나가 왕족의 인자를 부여합니다.]
[용체화의 수중 능력이 강화됩니다.]
[나가에게 끼치는 사안의 영향력이 증가합니다.]
주르륵 떠오르는 메시지창.
시문의 눈이 휘둥그레지자, 나가의 눈매가 부드럽게 찢어졌다.
-미래의 왕께 바치는 본녀 아샤즈의 성의이니라. 고로 다음에는 그대의 진실된 이름을 알았으면 하는구나.
“이름이라면 아까…….”
-내가 말하는 건 그대의 진명이니라. 고위 용족은 비로소 진명으로 완성되는 존재이니.
그 진명이 무엇이냐고 물을 틈은 없었다.
치지직.
스파크가 점점 강해지며 나가 공주 아샤즈의 육체가 점점 흐릿해지는 탓이었다.
꼭 특수 아레나를 끝낸 시문이 역소환될 때와 같은 모습이었다.
-아. 한 가지 꼭 기억했으면 하는 것이 있다.
이젠 그 곱던 목소리마저 희미해질 때쯤.
-그대의 사안을 목도한 용족은 단 하나도 살려 두지 말거라.
아샤즈는 섬뜩한 살기가 담긴 목소리를 남기곤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와 함께.
[특수 상황이 종료됩니다.]
[골드 랭크 데뷔전이 마무리됩니다.]
시문 역시 빛무리에 감겨 모습을 감추었다.
* * *
한때의 계절별 올림픽만큼이나 핫한 골드 랭크 데뷔전.
갤럭시 아레나가 등장하고 스포츠의 관심이 줄어든 것까지 고려하면.
사실상 각성자, 비각성자 할 것 없이 대한민국 모두가 관심을 보인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실제로도 그랬다.
[대망의 골드 랭크 데뷔전! 그 결과는?]
[충격! 골드 랭크 데뷔전 우승자는 사실 솔로 플레이어?]
[떠오른 군도 최초의 이벤트와 다이아급 몬스터의 등장까지!]
[강력한 차기 랭커 후보의 등장. 어쩌면 별의 세대를 뛰어넘을지도?!]
[갓 승급한 골드가 다이아를 잡다? 상위 유저들의 경악!]
[다음 플래티넘의 데뷔전이…….]
쉬지 않고 쏟아지는 자극적인 헤드라인의 기사들.
인터넷과 TV뉴스, 갤럭시 아레나 관련 프로그램까지.
골드 데뷔전이 끝난 후.
수많은 플랫폼에서 이번 골드 랭크 데뷔전의 내용을 다루었다.
당연히 국민들의 관심은 시간이 지날수록 뜨거워졌고.
이는 국내 최대 길드인 성삼 역시 다르지 않았다.
“아가씨, 정말 이대로 두실 겁니까?”
성삼 길드의 인사 과장 박민철.
담당하는 업무들을 보면 사실상 부길드 마스터나 마찬가지인 그는 대담하게도.
탕!
“뭐라 말이라도 해 주십쇼!”
길드 마스터의 책상을 치며 언성을 높이는 용기를 보였다.
“김시문 플레이어 건은 전적으로 아가씨께서 알아서 처리한다 하시지 않았습니까?”
하나 그런 박민철 과장의 태도에도.
“…….”
청순함이 물씬 묻어나는 미녀.
이유정은 그저 멍한 눈으로 앞에 놓인 모니터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단지 미약하게 까딱거리는 검지만이 그녀가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다는 신호를 주었고.
그것이 깊은 생각이 빠질 때 나오는 습관이라는 걸 잘 아는 박민철은 한 걸음 물러나 침묵을 지켰다.
이유정은 초점 없는 눈으로 실시간 업로드되는 기사들을 바라봤다.
‘오라버니가 강하신 줄은 알고 있었지만…….’
갤럭시 아고라에서 시문을 만난 이후.
그의 방송을 빠짐없이 챙겨 본 이유정이었다.
랭커인 만큼.
시문이 이미 실버 때부터 플래티넘급의 플레이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김시혁 역시 같은 입장이었다.
둘이서 만나면 가장 먼저 하는 이야기가 바로 시문의 방송이었으니까.
하나.
‘설마 이 정도로 강하실 줄이야.’
이건 과해도 너무 과했다.
이번 골드 데뷔전의 우승자는 정해져 있었다.
애당초 데뷔전이라는 것이 그랬다.
거대 길드의 온갖 지원을 다 받는 유망주들.
당연히 승자는 시작하기도 전에 정해져 있기 마련이었고.
이번 데뷔전의 승자는 전갈 길드의 유씨 남매나 신화 길드의 최진수로 확정 나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달랐다.
모두가 3인 풀 파티로 참여하는 데뷔전에서 홀로 참가해 1등.
대한민국에서 역대급 재능러라는 그녀와 김시혁조차, 저 시절에 2인 듀오를 맺어 우승을 하지 않았던가?
더군다나.
‘골드가 나가를 그렇게 쉽게 잡다니, 말이 안 돼.’
그냥 골드도 아니고 갓 승급한 골드다.
골드 랭크의 아레나를 치른 적도 없으니, 따지자면 실버나 마찬가지.
한데 플래티넘도 아니고 다이아에서나 등장하는 최상급 용족.
나가를 잡아내다니?
‘오라버니의 스펙이 아무리 높아도 이건…… 아니면 데뷔전 전에 뭔가 성장을 하신 건가?’
시문과의 관계를 싹 빼고, 딱 객관적으로 바라봤을 때.
그녀가 지금껏 방송으로만 봐 왔던 수준으로 나가를 상대하는 건 불가능이었다.
갤럭시 아레나의 상태창과 스탯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이미 기본 스탯부터 압도적으로 깔리고 들어가는데.
아무리 좋은 특성이나 직업이라도, 그 격차를 좁힐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시문은 해냈다.
‘물론 나가들의 움직임도 좀 이상하긴 했어.’
분명 골드 수준에 맞게 너프를 당한 움직임은 아니었다.
그녀가 아레나를 돌리면 만나는 팔 2개의 나가와 같은 움직임이었으니까.
이유정이 집중하는 건 시문과 나가가 격돌하던 때였다.
‘분명 순간적으로 움직임이 멈췄었지?’
워낙 찰나이긴 해도.
랭커쯤 되는 플레이어들은 모두 알아차렸을 것이다.
시문과 격돌하기 전.
무슨 마비독이라도 당한 듯, 멈춰 버리던 나가들의 움직임을 말이다.
‘거기에다 그 뇌속성 마법도 볼 때마다 범상치 않고.’
아무리 팔이 2개긴 해도.
전사 계열 나가를 한 방에 절명시켜 버리다니?
갓 골드로 승급한 플레이어가 내기엔 과해도 너무 과한 공격력이었다.
또 해일을 일으키던 기다란 포크 같은 것도 눈앞에 아른거리니.
‘으아아! 궁금해 미치겠네! 진짜!’
강렬한 호기심이 그녀의 손발을 간지럽혔다.
아마 시문의 성격상.
그녀가 물어보면 가르쳐 줄 것이다.
하지만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함부로 능력을 묻는 건, 실례되는 행동이기도 하니 그건 또 싫었다.
‘알고 싶다…… 오라버니에 대한 건 전부 다.’
더 가까워지고 싶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도 있었고.
아레나 질병인 마력불능이 회복된 작은 단서라도 잡고 싶은 것도 있었다.
어쩌면 어머니의 치료에 진전이라도 생길지 모르니까.
이유정은 답지 않게 머리를 쥐며 도리도리 고개를 흔들다가, 고개를 홱 돌려 폰을 내려다봤다.
‘맞아! 그러고 보니 진욱 선배가 오라버니를 만나러 간다고 했었지?’
분명 사업적인 이야기라고 했었다.
‘그럼 김시혁 그 녀석도 따라올 거고.’
반드시 따라붙을 거다.
자신처럼 이번 데뷔전을 챙겨 봤을 테니 말이다.
‘거기서 이리저리 이야기 나누다 보면, 진욱 선배가 먼저 오라버니에게 이야기를 꺼낼 수도 있어.’
밤사냥꾼이라는 차가운 별칭과 달리.
박진욱이란 사람은 호기심을 잘 참는 스타일이 아니었으니까.
이유정은 즉시 폰 화면을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김시문 플레이어는 제가 직접 만나 볼 테니, 박 과장님은 걱정하지 말고 다른 업무 보세요.”
“예? 하지만…… 후, 알겠습니다.”
오랜 침묵 끝에 튀어나온 답에 잠시 놀란 박민철 과장.
이내 고개를 숙인 그는 조용히 물러났고.
이유정은 박진욱의 답장을 확인한 즉시 외투를 챙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