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화
54화. 용족 (1)
갑작스러운 성좌들의 반응.
그에 시문은 다시 한번 보상 아이템의 정보를 훑었다.
[변질된 혈청]
등급 : F
억겁의 세월로 변해 버린 혈청.
여전히 볼품없는, 아주 흔한 F급 재료 아이템의 정보창.
그러나 성좌들의 반응까지 겪은 지금.
시문에 눈에는 한 가지 부분이 새롭게 보였다.
‘억겁의 세월?’
억겁.
흔히들 무한한 시간을 의미할 때 쓰는 단어.
그런 억겁의 세월을 거쳤는데도 고작 혈청의 형태다?
‘억겁의 세월을 겪기 전에는 뭔가 아주 대단했다는 뜻인데…….’
일반적인 피라면 억겁이란 세월에 아예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야 정상 아니던가?
거기에다.
“병도 굉장히 독특해.”
마치 뱀의 그것.
파충류의 비늘처럼 조각된 유리병은 전생에 수많은 재료들을 만져 온 시문으로서도 처음 보는 형태였다.
그리고 그 의문은.
-그건 용족의 물건이라서 그래.
가슴 정중앙에 위치한 동반자.
현자의 돌이 알려 주었다.
“용족의 물건?”
-응. 유리병이든 뭐든, 용족은 나름 귀하다고 여기는 물건엔 저런 방식으로 세공을 해 둬. 내가 보기엔 영 구린데 말이지.
“그렇구나.”
시문은 찬찬히 고개를 끄덕이며 비늘이 세공된 유리병.
변질된 혈청을 바라봤다.
‘용족의 물건을 왜 보상으로 준 걸까?’
그것도 고작 F급의 아이템을.
물론 현자의 돌의 말을 따져 보면 저 유리병 속에 든 혈청 자체가 무척이나 귀한 것.
정확히는 ‘귀했던 것’이지 않나?
“잠깐.”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시문은 황급히 인벤토리를 열어, 아이템을 하나 더 꺼냈다.
[용혈]
등급 : C
하급 용족의 피.
용족 이외의 종족에겐 독으로 작용한다.
매끈한 유리병이지만 F급인 [변질된 혈청]보다 높은 등급의 용혈.
‘이것도 마르넬과 연관 있는 아레나에서 얻었었지?’
첫 특수 아레나이자 마르넬과 처음 만났던 [열띤 광산의 악몽].
당시 갤럭시 아레나 측도 예상 못 한 클리어 방향에 용혈과 더불어 미스릴 바를 획득했었다.
그리고 용혈과 미스릴 바 모두 차후, 제작에 쓰기 위해 인벤토리에 고이 모셔 놨었지.
두 아이템을 보는 시문의 눈이 가늘어졌다.
‘뭔가 있어.’
보상은 나름 확실하게 챙겨 주는 곳이 갤럭시 아레나다.
그런 갤럭시 아레나에서 두 번 연속 용족 관련 아이템을 보상으로 주는 건.
분명 무언가 신호를 주는 것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게 뭘까?’
턱을 괸 그대로.
오랫동안 고민했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흐아! 머리 아프다. 일단 뭐라도 한잔 마시자.”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마구 헝클인 시문은 힘없는 걸음으로 터덜터덜 바를 향했다.
-오빠, 술은 안 돼.
“알아. 그냥 답답해서 시원한 거나 마시려는 거뿐이야.”
작게 투덜거리며 냉장고의 문을 여는 시문.
음료 칸엔 유제품을 비롯한 많은 탄산 계열의 음료수들이 즐비했다.
‘녀석들. 마냥 돈만 쓴 게 아니구나.’
자신이 톡 쏘는 탄산을 좋아한다는 걸 훤히 꿰뚫고 있는 두 동생.
새삼 두 동생들의 배려에 감사를 느끼며, 음료를 하나를 꺼내려던 순간.
“음?”
시문의 시선이 바로 위 칸의 우유에 고정되었다.
그곳엔.
[유통기한 02. 29. 22 : 30]
어느 우유에나 흔히 기입되어 있는 유통기한이 보였다.
‘왜 이걸 생각 못 했지?’
그걸 본 시문의 입꼬리가 자연스럽게 올라갔다.
“현자의 돌.”
-응?
“우리 연성 하나만 하자. 이렇게.”
시문은 즉시 방금 떠오른 생각을 그대로 현자의 돌에게 전달했다.
-호오. 우리 오빠, 아주 야무진 생각을 해냈네?
“어때? 가능하겠어?”
-등가교환만 성립한다면야 못할 것도 없는데…….
흔쾌히 승낙할 거라는 예상과 달리 말꼬리를 묘하게 흐리는 현자의 돌.
이내.
-오빠가 알진 모르겠지만, 사실 시간을 다루는 물건은 그리 많지 않거든.
“그렇겠지.”
시간에 영향을 끼치는 힘.
당연히 그 힘을 담은 물건들이 흔할 리 없었다.
-특히 시간을 거스르는 방식이 가장 어려워. 심지어 억겁을 거슬러? 아주 어마어마한 대가가 필요해. 오빠라면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 거야.
“아.”
시문은 탄식과 함께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회귀했을 때를 말하는 거군.’
당시 자신의 회귀의 대가로 쓰였던 등가교환은 다름 아닌 현자의 돌 자신.
정확히는 현자의 돌의 메인 동력원이 되는 희대의 영약 [엘릭서]였다.
하지만.
‘당장 엘릭서를 만들기는 불가능한데.’
전생의 자신도 온갖 운에 운이 겹쳐서 겨우 만들 수 있었던 영약.
애당초 기본이 되는 재료들 하나하나가 정규 아레나가 열려야만 구할 수 있는 진귀한 것들이다.
현 시점에서 레시피만 안다고 제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시문의 마음을 읽은 것일까?
-걱정 마. 엘릭서까지 필요하지는 않으니까.
현자의 돌은 안도의 말을 건넸다.
-일단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베스트는 해당 물건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서 받는 거야.
“받아?”
연성이라고 답할 줄 알았던 예상과 완전히 빗나가는 답.
-응. 마침 오빠를 관심 깊게 보는 존재 중 하나가 요걸 딱 들고 있을 거거든.
그 말에 시문의 시선은 자연스레 천장을 향했고.
-안 그래? 제우스.
현자의 돌의 물음과 함께.
[성좌 제우스가 말없이 당신을 내려다봅니다.]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이어.
[성좌 제우스가 ‘크로노스의 모래시계는 내게 없다.’ 고개를 젓습니다.]
실망스러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엑?! 없다고?
[성좌 검은 염소가 ‘망할 난봉꾼아, 그게 왜 없어!’ 소리칩니다.]
[성좌 오딘이 ‘설마 잃어버리거나 도둑맞은 건 아니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뜹니다.]
[성좌 제우스가 ‘너희에게 말해 줄 의무는 없지.’ 단호하게 선을 긋습니다.]
물건 하나 없다는 게 뭐 그리 놀라운 일인 건지.
현자의 돌에 이어 성좌들이 줄줄이 경악을 토했다.
비교적 멀쩡한 시문은 어깨를 으쓱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뭐.”
-아니, 어쩔 수 없으면 안 돼! 그게 어떤 건데!
“없다잖아. 설마 성좌가 이런 걸로 거짓말이라도 하겠어?”
-그건 그런데. 아니…… 그게 없다고? 대체…….
횡설수설하는 현자의 돌.
시문은 차분한 어조로 녀석을 달랬다.
“어차피 방법이 두 가지라며?”
-그렇긴 하지. 직접 연성해버리면 되니까. 근데 오빠, 혹시 크로노스의 모래시계가 어떤 형태인지 알고 있어?
“아니, 전혀 몰라.”
-그치? 알다시피 대상의 구조를 잘 알수록 연성에 들어가는 대가가 줄어들잖아.
“결국 지금까지처럼 연성하면 된다는 거잖아?”
-맞긴 한데. 크로노스의 모래시계는 이야기가 좀 달라.
현자의 돌은 한숨을 푹 쉬고는 말을 이었다.
-그걸 연성하려면 업적 포인트가 최소 50만 이상은 필요하거든.
“뭐어?!”
놀란 토끼처럼 눈이 커져 버리는 시문.
그럴 수밖에.
“5만도 아니고, 50만이라고?”
연성 한번 하는 데 업적 포인트 500,000점이 든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그마저도 최소라니?
-어쩔 수 없어. 크로노스의 모래시계는 신들의 시간에도 영향을 끼친단 말이야.
‘신들의 시간에 영향을 끼친다고?’
말만 들어도 얼마나 대단한 물건인지 알 수 있는 부분.
그러나 시문의 눈은 한결 차분해졌다.
“하지만 우리가 되돌리려는 건 이 혈청이잖아.”
-그렇지.
“그럼 적당한 수준으로 줄여서 연성해 보면 안 돼?”
애당초 시문이 연성하는 신화급 무구들도 일종의 너프를 먹은 상태 아닌가?
크로노스의 모래시계도 별반 다르지 않을 터였다.
-그래도 대가가 너무 커. 애당초 시간을 건드린다는 근본적인 메커니즘 자체가 엄청난 대가를 요구하거든.
“그럼 일부분만 연성하는 건 어때?”
-일부분?
“그래. 어차피 무기로 쓸 것도 아니잖아? 아주 일부분, 예를 들어 모래시계의 모래 한두 알 정도면 되지 않을까?”
시문의 말이 끝나자마자.
[성좌 제우스가 헛웃음을 흘립니다.]
[성좌 오딘과 천마가 얼이 빠진 얼굴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성좌 검은 염소가 깔깔대며 웃습니다.]
성좌들의 반응이 줄지어 올라왔다.
‘뭐야. 다들 갑자기 왜 저래?’
그런 시문의 마음을 읽은 것인지.
-진짜…… 그런 식으로 연성할 생각을 하다니…….
“어…… 그렇게 이상한 생각이었어?”
-아니, 엄청 훌륭해. 단지 너무 상상 밖의 발상이라서, 쟤들도 그거 때문에 저러는 거야.
현자의 돌은 허탈한 목소리로 답했다.
이내.
-좋아. 모래알 단위로 연성하면 대가가 줄어들긴 하겠다. 거기다 혈청이니까, 모래알로도 효과가 있겠지.
계산이 끝난 것인지 답을 내리는 현자의 돌.
그에 시문은 망설임 없이 손을 들어 올렸다.
[요구치에 맞는 연성을 이루기에는 연성력이 부족합니다.]
[현자의 돌이 부족한 등가교환을 성립시키기 위해, 업적 포인트 5,000점을 요구합니다.]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5천이라. 꽤 세네.’
모래알 단위로 나누었는데도 5천이라니.
그래도 50만 점에 비하면 양반이니 시문은 망설임 없이 ‘예’를 선택했고.
웅.
부족한 등가를 채운 기운이 시문의 몸을 타고 손가락으로 모여들었다.
그것을 머금은 손가락을 튕기는 순간.
사륵.
곱다 못해 밀가루를 연상시킬 정도로 미세한 황금색의 입자가 시문의 손에 내려앉았다.
[크로노스의 모래]
등급 : 신화
소멸해 버린 시간의 신 크로노스의 모래시계의 핵심이 되는 시간의 모래.
사용할 수는 있지만, 어째서인지 힘이 실시간으로 소실되고 있다.
한 줌은커녕 눈에 보이지도 않는 수준의 모래.
특히나 모래시계가 아닌 모래만 연성해서 그런 걸까?
-오빠! 그거 빨리 안 쓰면 사라져!
크로노스의 모래는 실시간으로 그 힘을 잃고 있었다.
시문은 서둘러 변질된 혈청의 마개를 열고 크로노스의 모래를 흘려 넣었다.
그러자.
사아아아!
기이한 소리와 함께 진동하기 시작하는 변질된 혈청.
거무튀튀했던 색이 점차 맑아지기 시작했고.
응고되어 고체였던 형태는 끓는 물처럼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액체로 변했다.
[지켜보던 성좌들이 일제히 탄식을 흘립니다.]
조용히 올라오는 메시지창.
그와 함께 혈청에 일어난 변화들이 차츰 가라앉았고, 시문은 혈청의 정보를 확인했다.
[티아메트의 피]
등급 : 신화
용신 티아메트의 피.
불완전한 시간 역행으로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으나, 곧 원상태로 돌아간다.
-제한 시간 59초.
“이럴 수가!”
경악이 절로 나온다.
그 보잘것없던 혈청이 용신의 피라는 것도 그렇지만.
“59초라고?!”
이젠 57초라고 해야겠지.
실시간으로 힘이 소실되던 크로노스의 모래 때문일까?
기껏 살려 놓은 변질된 혈청.
아니, 티아메트의 피 역시 시간이 제한되어 있었다.
‘어쩌지?’
일단 되돌리긴 했는데.
이런 시간제한 시간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가뜩이나 피 형태의 재료 아이템 같은데 이걸 당장 어디에 쓴단 말인가?
그때.
출렁.
병 속에 있던 짙은 선홍색의 피가 출렁거리더니.
“어어!”
입구로 주르륵 흘러나왔다.
시문은 얼른 손을 받쳐 들려 했으나.
탱클.
일종의 슬라임처럼 탱탱하게 뭉쳐지는 티아메트의 피.
그중 머리로 추정되는 윗부분이 죽 늘어나더니, 무언가를 찾듯 휙휙 돌려가며 주변을 둘러봤고.
시문을 보곤 뚝 멈췄다.
이어.
츄아악.
갑자기 쭈욱 늘어나며 시문의 가슴팍으로 파고들었다.
“이런!”
시문은 서둘러 가슴을 더듬었지만.
젖은 느낌이나 탱탱한 질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내.
쿠웅!
“컥!”
어마어마한 격통과 열기가 시문의 전신을 두드렸다.
[‘티아메트의 피’가 동화를 시작합니다.]
눈앞으로 떠오르는 한줄기의 메시지.
“크으읍!”
그러나 어마어마한 격통과 열기에 시문은 제대로 된 신음도 내지 못하고.
땀을 뻘뻘 흘리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뜨, 뜨거워……!’
마치 온몸의 핏물이 고온으로 들끓는 느낌.
특히나 가슴 정중앙에 위치한 현자의 돌은 당장 터지기 직전까지 가동되는 엔진처럼 쉬지 않고 박동했다.
그렇게 얼마가 지난 것일까.
[특성 ‘성흔’이 ‘티아메트의 피’에 반응합니다.]
[조건이 만족하지 하지 않아, 특성 ‘성흔’이 비활성화됩니다.]
[‘티아메트의 피’가 다른 방향을 모색합니다.]
한줄기의 메시지가 고통에 깜깜해진 눈앞으로 떠올랐고.
-어우 씨! 갑자기 덤벼서 깜짝 놀랐네. 누가 티아메트 아니랄까 봐 피까지 지X이야! 야! 너 이리 와봐!
앙칼진 현자의 돌의 목소리와 함께.
시문의 시야가 암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