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화
47화. 의외의 재회 (2)
‘하수도보다 깨끗해서 좋네.’
냄새나고 습했던 하수도와 달리 잘 닦여 있는 통로.
심플하게 건축된 것 같은데도 그 단조로움이 하나의 미를 자아냈다.
공기 역시 어딘가 환풍구가 있는 것인지, 지하 특유의 텁텁한 공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하나.
-와, 개미쳤네 진짜.
-ㅋㅋㅋㅋ. 이게 사람인가?
-사람 아니잖아.
-맞다, 그랬지.
시청자들은 통로 정중앙에서 벌어지는 일에만 열을 올릴 따름이었다.
당연했다.
애초에 시청하는 입장에서 이곳 환경의 디테일을 느낄 수도 없을뿐더러.
“대!”
빡.
“가!”
빠각.
“리!”
콰직.
마치 두더지 잡기 게임처럼.
한 마리당 하나씩 드라칸의 머리통을 박살 내 버리는 소녀의 학살극은 상당한 시선을 끌었으니까.
-갑자기 음소거라 말은 안 들리는데, 마르넬 근력은 진짜 미쳤네 ㅋㅋㅋ.
-드라칸은 골드 상위권에 등장하는 애들 아님? 그것도 힘이랑 몸빵 특화로.
-ㅇㅇ. 그나마 머리가 약점이긴 한데. 둔기로 저렇게 박살 내는 건 플래티넘 아니면 힘들지.
-그러니까 플래티넘 랭크부터 드워프가 나오잖아 ㅋㅋ.
마르넬의 활약에 한껏 들끓는 채팅창.
시문 역시 같은 마음이었다.
‘역시 드워프. 근력이 어마어마하구나.’
드워프 종족의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성별의 차이 없이 강력한 근력을 자랑한다는 것이다.
물론 겉만 보면 남성 드워프는 울퉁불퉁한 체격을.
여성 드워프들은 전체적으로 약간의 윤곽이 잡힐 정도일 뿐이었으나.
시문을 포함한 플래티넘 이상 급의 플레이어들은 알고 있었다.
‘저게 다 실압근이지.’
오크와 팔씨름을 해도 이기는 것이 여성 드워프들이라는 걸 말이다.
단지 한 가지 의아한 점이 있다면.
‘마르넬은 아직 어리지 않나? 저런 수준의 근력은 좀 과한 거 같은데.’
마르넬의 힘이 드워프치고도 너무나 세다는 것.
물론 어린 나이 때부터 괴력을 발휘하는 게 드워프라지만.
“콩콩콩!”
빠바박.
명색의 용족인 드라칸의 머리통을 저렇게 쉽게 박살 낸다는 건 납득이 되질 않았다.
뭐든 간에.
‘나도 놀고만 있을 순 없지.’
후웅.
시문은 자연스럽게 허리를 숙여 뒤에서 날아드는 도끼를 피한 뒤.
뻐억!
그대로 팔꿈치를 올려, 뒤를 노리던 드라칸의 명치에 쑤셔 박았다.
주르륵.
침을.
아니, 핏물을 질질 흘리며 쓰러지는 드라칸.
[오우거의 신체조직]과 [블랙팬서의 신체조직]의 급소 공격으로 인한 ‘즉사’였다.
시문의 움직임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따악.
몸을 뒤로 돌림과 동시에 튕겨지는 손가락.
그에 호응하듯.
드드드득.
“케에엑!”
“쿠루우욱!”
천장, 벽면, 그리고 바닥까지.
사방팔방에서 연성된 돌가시들이 뒤따라 달려들던 드라칸들의 몸을 무참히 꿰뚫었다.
단 3초.
그 짧은 시간에 10여 마리의 드라칸이 죽어 버린 것이다.
이건 마르넬의 학살과 또 다른 충격을 선사했다.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아니 ㅅㅂ. 저게 말이 되나? 드라칸을 한 방 컷 낸다고?
-ㄹㅇㅋㅋㅋ. 보는 내가 어이가 없네. 난 저거 잡는데 캐스팅 3번은 땡겨야 하는데…….
-왜케들 놀라세요. 애당초 시문 님이 스스로 마법계라고 하셨잖아요.
-그니까 놀라는 거임. 마법곈데 방금 그 격투술 못 봄?
마르넬의 학살 때보다 다 격하게 반응하는 시청자들.
-이 형은 저번 특수 아레나 때도 이랬는데. 유입이 많긴 해.
-다 가졌다, 다 가졌어. 잠깐. 그러고 보니 이 형 얼굴도…….
-그만! 다들 키보드에서 손 떼!
[가능충 님이 AP 300을 후원하셨습니다.]
=형…… 압도적으로 가능해!
드문드문 후원 메시지도 이어졌으나, 시문은 거기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쐐애액.
공기를 가르는 섬뜩한 소리가 포착된 것이다.
“음.”
가볍게 몸을 비트는 시문.
그런 시문의 옆으로 기다란 무언가가 빠른 속도로 스쳐 지나갔다.
화살이었다.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확인한 시문은 조금 놀랐다.
“드라코? 드라코도 있었어?”
드라코.
드라칸과 마찬가지로 골드 상위권부터 등장하는 최하급 용족.
드라칸과 정반대로 날씬한 체형을 지닌 드라코는 드라칸보다 근력과 체력이 밀리지만.
날렵한 몸놀림에 원거리와 암습을 즐겨, 드라칸보다 더 귀찮은 녀석이었다.
“케르르! 쏴라!”
피핑.
일제히 날아드는 대여섯 발의 화살들.
최하급이라도 명색의 용족인 만큼, 드라코들이 쏘는 화살은 단창 수준으로 굵직했다.
시문은 즉시 오딘의 눈을 활성화했다.
‘일제 사격이라…… 현명하네. 근데 방향이 좀 미묘한데?’
아니나 다를까.
드라코들의 화살은 시문이 아닌, 마르넬을 타깃으로 하고 있었다.
아마 상대적으로 약한 마르넬부터 먼저 처리하자는 판단을 내린 거겠지.
‘이래서 지능이 높은 것들은 귀찮다니까.’
영악한 드라코의 판단에 혀를 찬 시문은 곧장 마르넬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따악.
쿠르르.
작은 진동이 일며 마르넬의 사방으로 솟아오르는 벽.
벽의 구성을 무작정 단단하게가 아닌, 진흙과 같이 질척하게 만들어 혹여나 뚫릴 불상사를 완전히 차단했다.
이어.
우웅.
시문의 왼눈이 황금색으로 물든다.
‘여섯이 아니라 아홉이었군.’
대여섯 발의 화살로 계산했던 드라코의 숫자는 총 여섯.
계산 자체는 틀리지 않았으나, 그 주변으로 단검을 쥔 드라코가 세 마리 더 잠복하고 있었다.
아마 궁수 여섯을 미끼로 덤벼드는 상대의 허를 찌르려는 거겠지.
‘하여간에 아주 교활해요.’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시문은 그곳을 향해 손가락을 내밀었다.
“케륵! 마법이다!”
“쏴라! 캐스팅 못 하게 막아!”
멍청하게 달려들기만 했던 드라칸과 달리.
시문의 연성 자세를 캐치한 드라코들은 서둘러 화살을 갈겨 댔다.
하나.
‘다 보여.’
활성화된 오딘의 눈은 무질서하게 난사되는 화살의 궤적을 완벽하게 읽어 주고 있었다.
시문은 튕기려던 손가락을 멈추고.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그것들을 피해 내며 드라코들을 향해 나아갔다.
원래라면 아까 드라칸 때처럼 주변 환경을 연성해 싹 쓸어버리려 했지만.
‘오딘의 눈 가동률을 좀 줄였는데도…… 연성력 소모가 너무 커.’
오딘의 눈과 동시 인체 연성, 그리고 드라칸 몰살에 마르넬을 위한 보호벽까지.
제아무리 압도적인 스펙과 회복 속도를 지닌 시문이라도.
연성력의 소모가 상당한 것이다.
다행히도.
빠각.
“케르! 어, 어떻게 알았지?!”
“무슨 힘이!”
“케륵! 빠르다!”
아예 방책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이럴 때를 대비한 것이 인체 연성과 천마신공 아닌가?
시문은 매복한 세 드라코의 급소를 깔끔하게 두들겼다.
드라칸도 버티지 못한 시문의 권각을 어찌 드라코가 버티겠나.
순식간에 세 드라코를 쓸어버린 시문은 곧장 남아 있는 궁수진을 향해 파고들었고.
퍼퍽!
“케르르!”
“마, 막…….”
천마신공의 묘리를 담은 움직임으로 드라코들의 숨통을 모조리 끊어 버렸다.
‘쉽네.’
용족을 상대로 한 실버 입에서 나올 소리는 아니었지만.
정말로 쉽게 전투를 끝낸 시문은 가볍게 손목을 털었다.
그때.
“읏.”
왼쪽 눈에 작게 흐르는 경련.
이미 특성이 된 오딘의 눈이기에.
시문은 그것이 단순한 경련이 아님을 깨닫고, 곧장 몸을 옆으로 던졌다.
후우우웅!
옆을 스치는 강렬한 파공음.
그것은 처음부터 네가 목적이 아니었다는 듯, 곧장 마르넬이 있는 곳까지 날아갔다.
“마르넬!”
“에?”
마침 마지막 드라칸을 처리하고 몸을 돌리던 마르넬.
영리하게도.
“읏차!”
시문이 세워 두었던 보호벽 뒤로 재빨리 몸을 숨긴 뒤.
“하아아압!”
콰앙!
보호벽으로 한결 약해진 투사체를 그대로 쳐 내 버리는 마르넬.
덕분에 거대한 투사체는 힘을 잃고 허공을 날았다.
정확히는.
날아왔던 곳으로 되돌아간다고 봐야겠지.
단순히 마르넬의 센스와 괴력만으로 일어난 일은 아니었다.
‘뭔가가 도끼를 끌어당기고 있어.’
정체불명의 희미한 기운이 저 길쭉한 날의 투사체, 도끼라 불러야 할 것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그리고 도끼가 제 주인의 손에 쥐어지자.
“세상에…….”
시문과 마르넬의 눈은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오메…… 저게 뭐임?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개크네 ㄷㄷ…….
어림잡아도 6미터.
어쩌면 그 이상으로도 보이는 거구의 드라칸이 통로를 꽉 채우고 서 있었으니까.
체형에 어울리는 살벌한 눈빛이 작은 소녀를 향한다.
“너로구나. 사르가스 님께서 친히 언급한 아레나의 참가자가.”
‘뭐?’
마르넬을 향해 홱 돌아가는 시문의 고개.
그도 그럴 것이.
‘아레나 참가자라고?’
특수 아레나에 잠깐 등장했던 드워프인 줄만 알았는데.
아레나 참가자라니?
이내 시문의 눈이 차분해졌다.
‘그렇군. 그래서 저렇게 강한 거였어.’
마르넬 역시 자신처럼 상태창을 지닌 플레이어라면.
아직 성년이 아님에도 드라칸을 학살하던 마르넬의 무력 역시 납득이 갔으니까.
‘그래서 그런 알림이 떴던 거구나.’
이곳에 입장하기 전 보았던 시스템창.
[아레나 ‘북쪽 하수 시설’로 이동합니다.]
[특별 상황으로 방송으로 나가는 모든 대화는 음소거됩니다.]
그 내용을 떠올린 시문은 피식 웃음이 흘렀다.
‘지구는 아직 정규 아레나가 아니니까. 방송 송출을 막은 거야.’
정확히는 대화 내용일 뿐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굳이 시스템이 이곳을 ‘북쪽 하수 시설’이라고 맵처럼 언급한 이유는.
‘이곳은 마르넬의 아레나였나 보군.’
지구의 아레나에서 드워프의 아레나로 접촉.
그것 때문에 시스템이 결계를 쳐두고도 경고문을 보내왔던 것이다.
‘이거 참…… 아귀가 맞아도 이렇게 맞게 되네.’
만약 지난 특수 아레나에서 도리아의 미스릴괴를 요구하지 않았다면?
혹은 팔아 버리거나 모두 사용해 버렸다면?
이렇게 드워프의 아레나까지 넘어와, 마르넬을 만나게 될 일은 없었겠지.
그야말로 운에 운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뭐, 어떻든 간에.
‘일단 저놈부터 처리해야겠지.’
느낌상 보스 격으로 보이는 저 드라칸만 처리한다면 이 아레나는 끝이 나리라.
‘보아하니 드라칸 쪽의 변이종 같은데. 연성력 분배만 잘해 두면…….’
그렇게 생각한 시문이 걸음을 내딛는 순간.
타탁.
작은 발소리와 함께 시문의 앞으로 양 갈래의 머리칼이 팔랑거렸다.
어느새 변이종 드라칸의 눈앞까지 달려 나간 마르넬.
그녀는 제 몸보다 더 큰 해머를 불끈 쥔 채, 허공에서 몸을 한 바퀴 돌렸다.
이어.
“히아아압!”
두우우웅!
묵직하게 울리는 진동.
이곳으로 진입하기 전.
하수도 벽면에서 느꼈던 그 진동과 똑같은 형태였다.
‘강렬한 진동이라…… 마르넬의 특성인가?’
시문은 강렬한 진동에 바닥을 나뒹구는 변이종 드라칸을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봤다.
‘변이종 드라칸을 한 방에 나뒹굴게 만들 정도면 최소 S급 이상이겠군.’
드라코들의 기습이 문제였지.
드라칸들을 학살하던 아까의 모습도 그렇고.
굳이 마르넬의 전투에 나설 필요는 없어 보였다.
……라고 생각했다.
키잉!
“읏!”
오딘의 눈이 다시 한번 경고성 자극을 보내오기 전까진 말이다.
이번엔 이명까지 보내오는 오딘의 눈에, 시문은 급히 전신의 연성력을 끌어올리며.
“마르넬! 숙여!”
따악.
일갈과 함께 손가락을 튕겼다.
드드드득.
천장과 바닥, 양쪽 벽면 등 사방에서 우수수 연성되는 벽.
그것은 해머와 함께 재빨리 몸을 숙이는 마르넬의 전방을 가로막았다.
쩌저적!
순식간에 허연 성에로 뒤덮이는 벽.
이어.
쩡!
유리처럼 깨져 버린 벽 사이로 시퍼런 창 하나가 파고들었다.
놀랍게도.
그것은 정확히 몸을 숙인 마르넬의 등을 스쳐 바닥에 처박혔다.
“앗, 차거!”
바닥과 부딪쳐 부서지긴 했으나, 품은 냉기는 여전했던 걸까.
엉덩이와 허리를 부여잡은 마르넬은 폴짝 뛰며 시문의 곁으로 물러났다.
“와…… 은인 아니었으면 저 냉동 꼬치가 됐겠어요. 헤헤!”
방금 죽음의 기로에 섰음에도.
조금의 두려움도 없이 여전하게 헤실거리는 마르넬.
본래라면 그 당돌한 너스레에 헛웃음이라도 흘려줘야 했으나.
“조심해.”
시문은 굳은 표정으로 정면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특수 조건 만족으로 히든 보스 ‘하프 드래고니안 사르쿠’가 등장합니다.]
-세상에! 또 히든 보스임?
-이분 히든 보스 자석인 듯 ㅋㅋㅋㅋ.
-실버에서 히든 보스를 보는 것도 놀라운데, 2연속 히든 보스라니…….
-대체 무슨 아레난데 맵 이동에 히든 보스까지 나오냐!
‘히든 보스라…….’
무슨 조건을 만족했다고 갑자기 히든 보스가 등장한단 말인가?
의외로 그 의문은 히든 보스가 직접 풀어 주었다.
“땅꼬마들이 언제부터 이런 수준의 연금술을 사용하나 했더니…….”
전신에 드문드문 푸른 비늘이 섞인 남성.
하프 드래고니안 사르쿠는 파충류 특유의 꼬리를 살랑거리며 변이종 드라칸의 앞으로 걸어 나왔다.
“설마 인간이라니. 상상도 못 했구나.”
“못난 모습을 보였습니다. 생각보다 드워프의 힘이 강했던지라…….”
“아아, 알고 있다. 저건 플레이어이니 너에겐 버거울 수도 있지.”
“버겁지는 않습니다.”
그냥 바닥을 나뒹굴었을 뿐인 걸까.
벌떡 일어난 변이종 드라칸은 아무렇지 않게 해머가 꽂힌 턱을 슥 닦고는 목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저 암컷 드워프는 제가 확실히 처리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난…….”
말끝을 흐린 하프 드래고니안 사르쿠의 시선이 시문을 향했다.
“이 정체불명의 침입자를 살펴봐야겠구나.”
사르쿠의 말이 끝나자마자.
파츠츠츠.
시퍼런 서릿발이 시문을 엄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