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화
38화. 이게 여기서 왜 나와?
상록숲 중심부.
그곳에 들이닥친 갑작스러운 재앙에 잠시간이 침묵이 있었으나 그뿐.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와 X발! 방금 저거 뭐임?
-아니, 번쩍하더니 히든 보스 삭제됐어 ㅋㅋㅋㅋㅋ.
-형…… 나 이건 불가능해…….
이 말도 안 되는 광경을 시청하던 만 단위의 시청자들은.
-대체 무슨 마법이었죠?
-최소 플래티넘 이상급 마법일 듯.
-위력만 놓고 보면 플래티넘 상위권이랑도 비빌걸요. 발출 형태를 보면 광역 마법 같은데.
-광역 마법인데도 히든 보스를 흔적도 없어 지워 버리는 딜이 나오나?
-히든 보스가 마법계였잖아. 체력은 약하겠지.
-ㅇㅇ 실버 랭크라 그런지 보호 마법은 하나도 안 썼음.
일제히 저마다의 감정을 토해 냈다.
그러나 결국 간접적 관람인 방송으로 보는 이들이.
이 재앙과도 같은 현실을 ‘직관’해 버린 이와 같은 감정을 지닐 순 없으리라.
“미쳤다…….”
정말 이 한 마디 말고는 현 상황을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적어도 고말숙이 아는 표현법 안에선 그랬다.
하나 그뿐.
빠르게 정신을 차린 고말숙은 미세하게 몸을 떨며 숨을 헐떡이는 시문을 바라봤다.
‘아까 그 마법, 분명 메마른 껍질을 박살 냈던 때랑 느낌이 같았어.’
번개로 단조된 것 같은 하얀 막대를 휘두르긴 했지만.
결국 도구가 쥐어져 있었다는 것뿐이지.
방금 시문이 날린 일격은 메마른 껍질을 한 방에 박살 냈던 그 일격과 다름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잠깐. 그럼 방금 그게 마법이 아니라…….’
고말숙의 눈동자엔 희미한 붉은 기가 서렸다.
‘기, 기술이었던 거야?’
절로 활성화된 천살성이 귓가에 속삭인다.
그게 아니면 말이 안 된다고.
실제로 그녀가 본 현실도 그러했다.
저게 마법이었다면 준비 과정이나 전개 시간 같은 것이 필요했겠지만.
‘저 녀석은 손가락 하나 튕기는 거로 끝이었지.’
그마저도 마법이 아닌 뇌기의 집약체인 하얀 막대를 소환했을 뿐.
자신의 직감과 천살성의 빌어먹을 감각은 분명.
방금의 대규모 뇌속성 공격은 마법이 아닌 ‘기술’이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나도…… 따라 할 수 있을까?’
심해의 유명 트롤부터 실버의 미친년까지.
한국의 아레나에서 좋지 않은 낙인이 찍혔다는 건 스스로도 잘 안다.
그럼에도 랭크의 하락을 막고 실버에서 버틸 수 있었던 건 다름 아닌 카피였다.
자신보다 강한 플레이어.
즉, 위로 올라갈 실력자들의 기술부터 작은 행동, 호흡까지 하나하나 체크하고 외웠으며.
그것을 어떻게든 따라 해 냈다.
힘민체 모두 10이라는 우월한 초기 각성 스탯.
더불어 SSS급 특성인 천살성에 타고난 눈썰미는 충분히 그것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많은 실력자들을 카피해 온 그녀로서도.
‘아니, 저건 불가능해.’
방금 시문의 일격은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그녀가 마법과 같은 이능을 쓸 수 없어서는 아니었다.
그것을 논하기 이전에.
‘쫄몹 잡던 그 움직임도 따라 할 수 없었는데…….’
그보다 한층 더 차원이 높은 저 일격은 작은 느낌조차 오지 않았다.
그저 평범한 일격 하나에 무수히 많은 묘리가 섞여 있다는 짐작만 어렴풋이 잡힐 뿐.
그래.
마치 알파벳 하나 배운 적 없던 사람이 영어 서적을 보는 느낌이었다.
“후우. 끝났네.”
방금의 재앙과도 같은 일격을 실현한 인물이라곤 생각하기도 힘든 맑은 목소리.
히든 보스를 처치와 관련된 시스템창을 확인하는 것일까?
어느새 시문은 허공을 가볍게 터치하며 다가왔다.
그런 시문을 보며 고말숙은 아랫입술을 슬쩍 깨물었다.
‘뭐라고 해야 하지?’
캐리해 줘서 고맙다?
덕분에 버스 잘 탔다?
아니면 그 일격 어떻게 한 건지 좀 가르쳐 달라고?
뭐라 말할지 정할 틈도 없이.
“말숙아. 아깐 미안했어.”
맑고 뚜렷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좀 아팠지? 이거 마셔라.”
고말숙의 두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럴 수밖에.
‘미안하다고? 포션은 또 왜 주는데?’
고말숙이 아무 말 없이 내민 포션을 바라보기만 하자.
“어음…… 그거 아니면 방법이 없었어. 알잖아, 너 그 상태일 때 말이야.”
시문은 조금 곤란한 표정으로 볼을 긁었다.
“하…….”
그에 고말숙은 헛웃음을 흘렸다.
“너, 나한테 할 말이 그거뿐이냐?”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엿 같다느니, 미친년이라느니, 이럴 거면 그냥 아레나 돌지 말라느니! 그런 말 안 나오냐고!”
고말숙은 스스로를 잘 안다.
이곳에 오기 전.
그녀의 평판만으로 아레나 시작부터 불화를 일으켰고.
실제로 그녀 역시 자존심을 내세우며 물러서지 않았다.
그 탓에 5인으로 매칭된 팀은 깨졌고.
이곳으로 오는 와중에 천살성에 취해, 시문을 공격하기도 했었다.
천살성의 엿같은 단점이라고 변명해 봐도.
결국 자신이 공격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텐데.
히든 보스는커녕 기존 보스의 공략에도 기여한 바가 1도 없는데…….
대체 왜.
“뭐야, 그거 때문이었어? 네 특성 때문이었잖아. 어쩔 수 없었다는 거 잘 알아.”
왜 이 남자는 이토록 친근하게 자신을 대하는 것일까.
그것도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던 사이처럼 말이다.
더 기가 차는 건.
‘……그게 싫지가 않아.’
뚜렷하고 날렵한 눈매.
적당히 짙은 눈썹에 날카롭게 솟은 코와 턱선, 몸매까지.
전체적으로 날렵하고 뚜렷한 시문의 외형은 분명 그녀의 취향이긴 했으나.
그렇다고 처음 보는 남자가 이토록 친근하게 구는데, 마음이 편안했던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X. 내가 미친년이 맞긴 한가 보네.”
스스로가 생각해도 웃긴지.
헛웃음을 흘린 그녀는 시문이 내민 포션을 낚아챘다.
꿀꺽꿀꺽.
순식간에 원샷을 때리는 고말숙.
본래라면 다친 부위에도 어느 정도 부어야 했지만.
‘이쯤이야 금방 붙지.’
우월한 초기 스탯과 SSS급 특성인 천살성이 선사하는 회복력은 어마어마했다.
“후.”
고통이 좀 가신 것인지.
고말숙은 한결 나아진 얼굴로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리며 말했다.
“근데 있잖아. 하나만 물어보자.”
“뭔데?”
“너, 나 아냐?”
“어?”
“난 어디 가서 내 특성 말한 적이 없거든. 근데 아는 눈치길래.”
그 말에 시문은 눈을 끔벅였다.
‘얘가 이렇게 날카로운 질문을 할 줄은 몰랐는데…….’
말숙이에겐 정말 미안한 말이나.
설마 그녀가 이런 것을 물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내가 천살성에 대해 안다는 걸 눈치챘구나.’
실수라면 실수였다.
평범한 광폭화류 특성은 강렬한 타격이나 목숨의 위협을 받으면 더욱 광기에 불타오르지.
천살성처럼 중간중간 정신을 차리며, 사고할 틈을 주지 않는다.
한데 그걸 아는 듯 말했으니.
아무리 둔한 말숙이라도 뭔가 낌새를 느낀 것이리라.
그렇다고 당황하지는 않았다.
시문에겐 상태창을 공개하지 않은 이상, 무적의 치트키가 있었으니까.
“어……. 내 특성이야.”
“특성? 상대방의 특성을 알아내는 것도 있어?”
“좀 비슷해. 다르긴 하지만.”
오묘한 시문의 대답.
그러나.
“X발. 어쩐지.”
우리의 고말숙 여사님은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래서 초반부터 그랬던 거구나. 내 천살성을 진작에…… 앗!”
황급히 제 입을 틀어막는 고말숙.
시문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 방송은 아까 종료했으니까.”
“아까? 아.”
아까 허공을 이리저리 터치하던 시문이 떠오르자.
고말숙은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X. 진작 말해 주지. 개쫄았잖아.”
남들이 보면 꼴랑 심해 플레이어의 특성이 뭐 그리 대수냐고 하겠지만.
현재 고말숙이라는 플레이어의 평판을 고려해 보면.
천살성이라는 특성은 최대한 알려지지 않는 편이 좋았다.
“근데 너 왜 아직 남아 있는 거냐? 아레나 끝났잖아. 얼른 보상 뜯으러 가야지.”
“그래야지. 근데 그 전에 할 일이 있어서.”
“할 일?”
고말숙이 고개를 갸웃하자, 시문은 허공에 무언가를 터치하더니 슥 밀었다.
[플레이어 김시문이 ‘친구 추가’를 보내셨습니다.]
눈앞으로 떠오르는 알림.
그에 고말숙은 말없이 시문을 바라봤고.
“너, 방금 내가 쓴 일격 알고 싶어 했잖아. 메마른 껍질을 잡을 때도 그렇고.”
“그, 그건!”
정곡을 찔린 것일까.
그녀의 눈이 이리저리 굴렀다.
이내.
“망할……. 어떻게 알았냐?”
붉어진 얼굴로 답했다.
“모르고 싶었다.”
“그럼 모르면 되잖아.”
“네가 알게 하잖아. 아레나 내도록 날 뚫어져라 보는데. 그걸 누가 모르겠냐?”
“이……!”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차마 대답도 못 하고 고개를 푹 숙이는 고말숙.
어지간히도 부끄러운 걸까?
허리 양쪽에 붙은 두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에 피식 웃은 시문이 말했다.
“친추 받아. 그럼 알려 줄 테니까.”
“저, 정말?”
홱 들리는 고말숙의 머리.
이미 시뻘게진 얼굴과 떨리는 몸은 어지간히도 불편해 보였지만.
힘을 갈구하는 눈빛은 전생의 천마 고말숙처럼 이글거렸다.
“지, 진짜지? 진짜 알려 주는 거지?”
“그래. 대신 내가 아닌 제대로 된 분이 알려 줄 거야.”
“뭐?! 갑자기 맘 바꾼 거냐!”
“뭐래. 내 스승이나 마찬가지인 분이 알려 줄 거니까, 걱정 말고 친추나 받아, 인마.”
“스, 스승? 알았어! 바로 받는다!”
얼굴이 확 밝아지는 고말숙.
‘참 알기 쉬운 녀석이라니까.’
그런 그녀의 모습에 피식 웃은 시문은 허공을 흘낏했다.
그러자.
[성좌 천마가 ‘아레나의 시스템으로는 불가. 본좌가 직접 만나야 한다네.’ 고개를 젓습니다.]
천마의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직접 만나야 한다고? 왜죠?’
시문이 고개를 갸웃하자.
[성좌 천마가 ‘이곳은 아직 정규 아레나가 아니라, 후원자에게 미리 접근하는 건 꽤 많은 대가를 소모하거든.’ 아쉬운 표정을 짓습니다.]
다시 천마의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호오? 그런 제약도 있었어?’
메시지를 확인한 시문의 눈이 반짝였다.
정규 아레나가 시작되지 않은 현시점에서도 성좌가 후원자가 된 플레이어들이 꽤 있는데.
‘그럼 지금까지 성좌를 만난 플레이어들은 전부 성좌가 피해를 감수했다는 말이잖아?’
뭐, 납득은 갔다.
기본적으로 성좌들은 실력이나 가능성이 뛰어난 플레이어들을 선호했고.
정규 아레나가 시작되면 성좌들끼리도 후원자 쟁취를 위한 경쟁을 펼쳐야 할 터.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미리 침 발라 두는 건, 그리 나쁜 장사가 아닐 거였다.
[플레이어 고말숙이 ‘친구 추가’를 받아들였습니다.]
“야, 받았다.”
고말숙의 목소리와 함께 알림이 눈앞으로 떠오른다.
고개를 끄덕인 시문은 몸을 돌렸다.
“확인. 그럼 나중에 연락처 보낼 테니 찾아와라.”
“에? 찾아오라고?”
“어. 이건 직접 만나야 알려 줄 수 있는 거거든.”
그 말에 고말숙은 코웃음을 쳤다.
“새끼. 너도 결국 남자다 이거구나?”
“뭐?”
“미안하지만, 이 누나는 그리 쉬운 사람 아니다.”
씨익 입꼬리를 끌어 올리는 고말숙.
“하아, 말숙아 미안한데.”
그런 그녀를 잠시간 보던 시문은 짧은 한숨을 쉬곤 돌아섰다.
“넌 내 취향 아니야.”
파앗.
그 말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지는 시문
당연히.
“이…… 이 X새끼가!”
고말숙의 눈엔 불똥이 튀었다.
* * *
[고말숙 - 야 이 개X끼야! 뭐? 내 취향이 아니야? 에라이! 야! 나도 아니거든?!]
[고말숙 – 와! 생각할수록 빡치네. 너 X! 진짜 만나기만 해라!]
[고말숙 – 그 망할 마법 같은 거 쓰기도 전에 내가 그 손가락을 @!#[email protected]…….]
[고말숙 – 야! 대답 안 해?!]
우수수 올라오는 분노의 메시지들.
[김시문 – 그러든가. ㅋ]
그에 답장을 보낸 시문은 곧장 수신 거부와 함께 메시지창들을 한쪽으로 치워 버렸다.
그러자.
[아레나 ‘상록숲’을 성공적으로 클리어하셨습니다.]
[5인 협력 조건에서 홀로 보스 메마른 껍질을 처치하였습니다.]
[활약에 따라 클리어 보상이 증가합니다.]
이번 아레나의 보상들이 줄줄 올라왔다.
[귀속된 특성 ‘현자의 돌’이 일정량의 경험치를 분배받습니다.]
[레벨이 8 올랐습니다.]
[현자의 돌 레벨이 6 상승했습니다.]
[클리어 보상으로 ‘상록숲 중심부의 샘물’을 획득합니다.]
[히든 보스 미쳐 버린 초목지기 뮤리에를 혼자 처치하였습니다.]
[보상으로 ‘오염된 씨앗 조각’이 지급됩니다.]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주르륵 올라오는 보상들.
‘상록숲 중심부의 샘물은 아는 거고. 오염된 씨앗 조각은 뭐지?’
히든 보스를 잡고 나온 아이템이거늘.
저번에 얻었던 [홉고블린의 전투 도끼]와 달리.
회귀의 경험이 있는 시문도 처음 보는 아이템이었다.
“뭐, 확인해 보면 되니까.”
시문이 보상 [오염된 씨앗 조각]을 확인해 보려던 찰나.
[공지대로, 그간 갤럭시 아레나에서 논의해 온 플레이어 김시문에 대한 결과가 전달됩니다.]
[특성 ‘성흔’을 획득합니다.]
또 다른 시스템창이 올라왔다.
“이, 이건!”
시문의 두 눈이 찢어질 기세로 커졌다.
그도 그럴 것이.
갤럭시 아레나가 전달한 특성은.
“시혁이의 세 번째 특성이잖아?”
훗날 최강의 플레이어가 되는 동생 김시혁의 특성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