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화
30화. 기미 (1)
“그럼 여러분들, 전 이만 방종하겠습니다!”
-앙대! 가지 망!
-오늘 방송 개알찼음!
-시문 님. 정보 너무 감사해요.
-시바~ 욕 아님. 작별 인사임.
수많은 채팅들을 뒤로하고.
“후아!”
고글을 벗은 김시문은 깊은 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시청자가 많으니까 하나하나 반응하는 게 힘들긴 하네.’
과거 시청자였던 입장이었기에.
저도 모르게 시청자들의 인사 하나하나 호응해 준 것이다.
‘왜 시청자가 많을수록 채팅창을 많이 신경 쓰지 않는지 알겠어.’
어그로나 분탕들쯤이야.
이미 산전수전을 다 겪은 시문에게 큰 타격을 주지 못했다.
하지만 이 많은 채팅을 하나하나 반응하는 건, 확실히 쉽지 않은 일이었다.
뭐, 어쩔 수 없었다.
‘최대 시청자 수가 18,000명이나 나올 줄 누가 알았겠냐고…….’
아레나를 클리어하고 시청자 수를 봤을 때 얼마나 놀랐던가?
아무리 특수 아레나라도 아직 심해 랭크의 방송이고.
[힘을 잃은 광산핵]의 정보도 후반부에나 풀린 걸 고려하면, 정말이지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하나.
‘오히려 채팅 하나하나에 반응해서 더 몰려드는 느낌인데…….’
이상과 현실은 늘 다르다.
아레나를 끝낸 후.
그렇게 많은 시청자들을 일일이 상대해 주는 건 상당히 버거운 일이었다.
고로.
‘아쉽지만 앞으로 좀 자중해야겠어. 방종 BGM이랑 배경도 빨리 준비하고.’
그렇게 다짐한 시문은 얼른 시야 한편에 밀어 놓은 시스템창을 열었다.
[특수 아레나 ‘열띤 광산의 악몽’을 상상치도 못한 형태로 클리어하셨습니다.]
[업적 ‘특수 아레나 최초 클리어’를 달성하셨습니다.]
[업적 포인트 1,000점을 획득합니다.]
[정해진 클리어가 아닌 새로운 형태로 클리어했기에, 그에 걸맞은 보상을 새로 조정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내용을 확인한 시문의 눈가가 슬쩍 처진다.
업적 클리어 보상을 제외하곤.
어떤 보상도 들어오지 않은 것이다.
그래도 보상을 안 주는 것도 아니기에.
‘상상치도 못한 형태라?’
시문은 차분히 시스템창을 살폈다.
‘저 말은 지력 엔진을 복구하는 걸 아예 예상하지 못했다는 말인데…….’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던 시문의 입가가 호선을 그린다.
‘역시, 마르넬을 살리는 건 제대로 된 선택지였나 보군.’
특수 아레나는 안배해 놓은 클리어 조건들을 달성할수록 보상이 커지는 구조다.
하지만 아무리 잘난 갤럭시 아레나라도.
실버 랭크가 이렇게 빠르게 드라칸들을 처리할지는 몰랐을 것이고.
당연히 마르넬이라는 드워프가 살아남는다는 시나리오는 예상하지 못했겠지.
‘애당초 마르넬이 살아나지 않았다면, 지력 엔진이 있다는 것 자체를 몰랐을 테니까.’
입장한 플레이어가 방금 죽은 따끈한 시체를 만나 충격을 받는 것.
그것이 갤럭시 아레나가 바랐던 그림이었으리라.
아니면.
‘특수 아레나는 일반 아레나처럼 자기들이 멋대로 조정할 수 없는 분야거나.’
상당히 신빙성이 있는 추측이었다.
왜냐하면 자신이 행했던 클리어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일반 아레나에서 가끔 행해 온 ‘개입’을 했었을 테니 말이다.
그런 시문의 마음을 느낀 것일까.
-참 나. 오빠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자각이 부족하단 말이지.
가슴에서 낭랑한 이명이 울렸다.
현자의 돌이었다.
“무슨 뜻이야?”
-생각해 봐. 이번 아레나에서 오빠는 정해진 결과가 아니라, 아예 새로운 클리어 결과를 도출해 버렸잖아.
“그런데?”
-어머! 이 오빠 봐라? 그런데라니! 오빠는 이번 클리어를 대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거야?
“그냥 뭐…… 창의적인 클리어다, 정도?”
-거봐. 오빠는 역시 자각이 부족해.
기가 차는 걸까.
현자의 돌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에 시문은 대번에 눈치를 챘다.
“현자의 돌, 너 이번 아레나에 관해서 뭔가 알고 있구나?”
-당연하지. 참고로 말해 주지는 못해.
“뭐? 왜?”
-그게 인과랑 관련돼서 좀 복잡한데…… 아잇! 그냥 쉽게 말하자면, 이걸 언급하는 순간 저쪽에서 이득을 보는 구조라 보면 돼.
참으로 어이없는 답.
하지만.
‘그러고 보니 성좌들도 인과를 거론했었지.’
아까 성좌들의 대화를 기억하고 있는 시문은 별다른 물음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아직 보상은 못 받았지?
“그래. 조정 중이란다.”
-있잖아. 오빠 생각보다 이번 클리어는 꽤 큰일이거든? 그래서 말인데…….
말끝을 흐리는 현자의 돌.
녀석은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빠가 먼저 보상을 요구해 보는 건 어때?
“내가 먼저?”
시문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럴 수밖에.
갤럭시 아레나 측에 보상을 먼저 요구해 본다는 발상은 아예 해 본 적이 없는 것이다.
아마 저~기 위에 노는 천상계 플레이어들도 마찬가지일 거다.
-응. 평소라면 불가능할지 몰라도, 지금은 이룬 게 있잖아?
“네 말을 듣고 보니…….”
꽤나 그럴싸한데?
갤럭시 아레나가 이렇게 요란 떠는 모습은 분명 전생에도 본 적이 없었다.
-일단 말이나 던져 봐. 아마 좋다고 달려들걸?
“그럴까?”
-그럼! 지금쯤이면 ‘이걸 주면 너무 적나? 이건 너무 과하나?’ 이러고 있을 게 뻔해. 보기보다 쫌생이 새끼들이거든.
현자의 돌의 말에 시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보상에 고민이 크다면 내가 요구한 걸 들어줄 수도 있겠네.’
새로운 시각에 눈을 뜬 시문은 당장이라도 갤럭시 아레나 측에 요구하고 싶었지만.
“으음…….”
턱을 괴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뭘 요구해야 하지?”
일단 특수 아레나의 본래 보상조차 알지 못하는 시문이다.
더불어 특수 아레나라곤 하나 결국 실버 랭크대의 아레나.
욕심을 부려도 얼마나, 어느 정도까지 부려야 할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때.
-고민할 거 없어. 그거 있잖아, 그거.
“그거?”
고개를 갸웃하는 시문.
이어.
-마침 광산이기도 하고, 원래 우리가 써야 했던 거 있잖아.
“아!”
현자의 돌의 설명에 무언가 떠오른 듯.
시문은 손뼉을 딱, 쳤다.
‘그러고 보니 그게 있었구나.’
고민할 필요도 없다.
연금술사의 입장에서 두루두루 쓸 수 있는 만능 아이템이니까.
시문은 즉시 눈앞의 시스템창을 보고 말했다.
“아직 보상이 정해지지 않았다면 따로 원하는 보상을 요구하고 싶습니다.”
[조정이 잠시 멈춥니다.]
기다렸다는 듯 반응하는 시스템창.
‘역시, 현자의 돌 말대로 어지간히 고민 중이었나 보군.’
그에 작은 미소를 머금은 시문은 곧바로 답했다.
“보상으로 미스릴을 원합니다. 마침 광산 맵이기도 하고, 입장 아이템이기도 했잖아요?”
잠깐의 침묵이 내려앉는다.
몇 초가 지났을까.
[플레이어 김시문의 요구를 받아들입니다.]
예상대로의 답변이 나왔다.
하나.
[이번 특수 아레나의 보상으로…….]
“단.”
시문은 그에 그치지 않았다.
“지급되는 미스릴은 광석이 아닌 제련된 형태로 주셨으면 합니다. 기왕이면 바의 형태가 좋겠네요.”
[요구를 받아들입니다.]
‘깔끔하네.’
사실 제련 미스릴의 요구는 약간 도박성이었다.
기본적으로 미스릴 광석과 같은 특수 광석의 제련 과정은 무척이나 까다롭다.
그 과정에서 순수 미스릴이 소모되는 일은 당연히 비일비재.
고로 안정적인 제련 과정을 거쳐야 했고, 그 비용은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뭐, 나한테야 그리 어렵지 않지만.’
엘릭서의 재료 중 하나였던 터라.
1레벨의 마력불능이었던 전생에서 홀로 미스릴을 정제했던 시문이었다.
지금은 현자의 돌까지 있으니, 여차하면 업적 포인트까지 털면 되었다.
[특수 아레나 ‘열띤 광산의 악몽’의 보상을 지급합니다.]
[귀속된 특성 ‘현자의 돌’이 일정량의 경험치를 분배받습니다.]
[레벨이 10 올랐습니다.]
[현자의 돌 레벨이 8 상승했습니다.]
[클리어 보상으로 ‘미스릴 바’를 획득합니다.]
[클리어 보상으로 ‘용혈’을 획득합니다.]
주르륵 올라오는 메시지창들.
그걸 확인한 시문은 입을 떡 벌렸다.
‘내 레벨이 낮긴 해도 한 번에 10업이나 할 줄이야…….’
심지어 현자의 돌과 경험치를 나눈 것 아니던가?
‘일반적인 플레이어였으면 최소 18레벨, 거의 20렙업 가까이 했겠어.’
특수 아레나임을 고려하더라도 어마어마한 수치.
전생을 통틀어 이렇게 폭업을 한 플레이어는 정말 한 손에 꼽을 것이다.
거기에다.
‘용혈이라니!’
미스릴만큼은 아니더라도.
마력 전도율이 좋은 재료 아이템인 용혈까지 덤으로 얻을 줄이야.
“흐흐!”
만족스러운 보상에 흐뭇하게 웃는 시문.
그런 시문의 귓가로.
-오빠! 미스릴 바 언능 확인해야지! 이 새끼들 순도로 장난쳤을지 어떻게 알아? 응?!
현자의 돌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시문의 눈이 슬쩍 가늘어졌다.
“현자의 돌 너, 네가 쓰고 싶어서 미스릴 받으라고 한 거 아냐?”
-으, 응? 오호홋! 오빠도 참! 설마 내가 그러겠어?
“정말? 난 당장 미스릴을 쓸 일은 없는데.”
-아이참! 다 미래를 위해서지! 자자, 들어 봐.
현자의 돌은 알까?
-미스릴이 얼마나 범용성이 좋아? 연금술 보조부터 도구, 부스팅에 플래티넘부턴 골렘까지! 쓰려면 어디든 쓸 수 있다고!
시문의 가슴 속에 자리한 이상, 작은 떨림도 시문에게 전부 느껴진다는 걸.
고로 현자의 돌의 속내가 훤히 보였지만.
“하긴, 연금술에서 미스릴이 만능이긴 하지.”
-그, 그렇지? 그렇다니까! 두고 봐. 내 말 들은 걸 절대 후회할 일은 없을 거야.
“그래그래.”
시문은 별말 없이 넘어가 주기로 했다.
어차피 딱히 받을 만한 보상이 생각나지도 않았을뿐더러.
‘날 위해 준 거니까.’
미스릴에 대한 집착도, 결국 시문 자신을 위하는 일이지 않은가?
-오메! 이 때깔 좀 보소! 순도 100% 맞네, 100% 맞아!
라고.
-어후! 내가 혀만 있었어도 아주 그냥 마르고 닳을 때까지 핥…….
인벤토리에서 미스릴 바를 꺼낸 시문은 애써 마인드를 컨트롤했다.
* * *
“그게 무슨 말이냐? 갑자기 사라지다니?”
호랑이의 그것처럼.
듣는 것만으로도 근육이 경직되는 굵직한 목소리가 낮게 울린다.
그 목소리에는 위협이 가득한 분노가 서려 있었다.
-그것이…… 정말 저희도 원인을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작업하던 드워프들 중 절반이 증발…….
쾅.
거대한 구슬.
정확히는 이곳 하층인 제련소와의 통신구를 박살 내 버린 남성이 거친 숨을 내쉬었다.
후드득.
거구에 어울리는 거친 숨결에, 박살 난 통신구의 파편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성질 같아선 어디로든 주먹 몇 방을 더 갈겨야 했지만.
“어머나~ 사르가스, 성격은 여전하네.”
불쾌하게 끈적거리는 목소리에 사르가스는 주먹 대신 예를 취했다.
“……누추한 곳엔 어쩐 일이십니까, 데피나 님.”
말과 달리.
사르가스는 불편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데피나라 부른 여성을 바라봤다.
근육질의 거구에 험상궂은 얼굴을 고려한다면.
어지간한 여성은 겁을 집어먹을 상황이었지만.
“후후, 그다지 환영하는 눈치는 아니네? 하긴, 문제가 생겼으니 당연한 건가?”
데피나는 여유롭게 웃을 따름이었다.
“귀하신 분께서 신경 쓰실 일은 아닙니다.”
“어머나, 신경 쓸 일이 아니라니. 방금 그 보고, 검은 제련소의 일 아니었어?”
“데피나 님. 검은 제련소는 제 관할이고, 전 3용제님을 섬깁니다.”
“그리고 검은 제련소는 우리 니드호그 님의 소유지. 잊었니?”
그 말에 사르가스의 각진 턱이 꽉 다물렸다.
데피나는 검은 머리칼을 찰랑거리며 손을 저었다.
“너무 날 세우지 마. 나라고 좋아서 여기 왔겠어?”
사르가스의 강직한 눈매가 꿈틀한다.
그녀의 말대로.
‘저 요망한 년이 이유 없이 여길 찾아올 리 없지.’
데피나가 제 5용제 니드호그의 전령이라는 것을 떠올려 보면 더더욱 그렇다.
그녀가 드래곤이라는 고귀한 신분 이전에.
용제의 뜻을 전하는 전령은 결코 이유 없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으니까.
그렇다는 건.
“설마! 용제들께선 이미…….”
“그래. 검은 제련소의 문제를 다 알고 계시지.”
사르가스의 눈이 부릅떠진다.
아마 안대를 한 다른 한쪽 눈도 마찬가지이리라.
그럴 수밖에.
‘드워프들이 사라진 건 방금 보고받은 일인데…….’
어찌 용제들께선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전령을 보냈단 말인가?
“사르가스. 넌 스쿠아마 원(Squama One)이면서 아직도 그분들을 모르니?”
경악하는 사르가스의 얼굴을 즐기듯.
싱글거리던 데피나는 바닥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스스슥.
시간이 되감기는 것처럼.
가루가 되어 휘날리던 통신구의 파편들이 순식간에 본래의 모습을 이루었다.
“용제들께선 모르시는 것이 없다. 신의 영역에 도달하신 분들이니 당연한 이야기지.”
사르가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미래를 예지하고 있지 않다면.
검은 제련소의 주인인 니드호그의 전령이 이 타이밍에 도착할 리는 없을 테니까.
“용제들께선 현 상황을 불편해하신다. 특히나 니드호그 님께선 본인의 소유 영역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을 몹시도 불쾌해하시지.”
사르가스의 단단한 목울대가 꿀렁인다.
용제 니드호그의 성격을 안다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후후, 뭘 쫄고 그래? 이번 일에 너의 잘못은 조금도 없잖니.”
달리 듣자면.
앞으로 일어날 일에선 자신의 책임을 묻겠다는 말.
일그러지는 사르가스의 얼굴을 비웃으며.
데피나는 복구된 통신구를 사르가스의 앞으로 던졌다.
“너무 인상 쓰지 마. 이번 일의 근원은 다른 이가 처리하기로 했어. 너에겐 다행인 일이지.”
“다른 이?”
“그래. 그러니 관리소장인 넌, 비어 버린 드워프들을 다시 충당하기만 하면 돼.”
데피나는 품속에서 작은 구슬을 하나 꺼냈다.
구슬 속엔 축소해 놓은 듯한 지형이 가득했다.
“여기, 사라진 드워프들이 있을 만한 리스트야.”
사르가스는 작은 구슬을 살피며 인상을 찌푸렸다.
“생각보다 많군요.”
“어쩌겠어? 온갖 곳에다 도망칠 구멍을 파 놓는 게 땅꼬마들의 특징인 것을.”
“그래도 데피나 님께서 이렇게 집어 주신 이상,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그래야지. 추가 병력이 필요하면 따로 요구하도록.”
할 말을 다 전했는지.
데피나는 설렁설렁 손을 흔들며 몸을 돌렸다.
“데피나 님께선 함께 가시지 않는 겁니까?”
“왜, 헤어지기 아쉽니? 그래도 어쩔 수 없어. 너 말고도 만나야 할 자들이 더 있거든.”
“아까 말한 다른 이 말입니까?”
“그래. 이 사태의 근원이 마침 작업 중인 지구의 소속이더라고.”
데피나는 붉은 입술을 슬쩍 핥았다.
“졸지에 일이 아주 잘 풀리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