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화
26화. 특수 아레나 (1)
“흐흥!”
한껏 고취된 기분이 잔뜩 담긴 콧노래.
박진욱의 사무실에서 자취방으로 돌아올 때까지.
시문은 이 흥얼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그에 가슴 한가운데서 간지러운 이명이 울렸다.
-오빠, 그렇게 좋아?
“당연하지. 의외의 수확이 있었잖냐.”
단순히 천마의 퀘스트 [제자를 찾아라]를 해결하기 위해 박진욱을 찾아갔을 뿐인데.
박진욱의 회복을 앞당겨 동생 놈에게 힘을 실어 줌은 물론.
‘재료템을 꽁으로 수급하게 될 줄이야!’
어디 그뿐이랴?
마력경화증의 치료제를 구실로 밤사냥꾼 박진욱이 모아 온 재료들도 싹 받을 수 있을 테니.
‘한동안 영약 재료는 걱정도 없겠다!’
영약 섭취는 가장 빠른 스탯 증진법이었지만.
그만한 재료가 들어간다는 것이 유일한 단점이었다.
한데 그것이 해결되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하여간에 우리 오빠, 맹해 보여도 은근 약은 구석이 있다니까?
“칭찬으로 들을게.”
-칭찬 맞아. 그래서 걱정이야. 오빠랑 다르게 우리 잘생긴 도련님은 진짜 맹해 보이던데. 어디서 사기라도 당하면 어쩌냐?
김시혁의 실물을 영접한 이후로 줄곧 도련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현자의 돌.
시문은 그 행태를 지적하는 대신, 다른 부분을 꼬집었다.
“맹하긴 개뿔. 그놈이 얼마나 약삭빠른 놈인데.”
그러나.
-어머나? 오빠, 지금 질투하는 거야? 걱정 마, 난 오빠뿐이야. 이래 봬도 순정이 있는 애라고.
“됐다. 말을 말자.”
만만치 않은 현자의 돌의 반격에 시문은 대꾸를 포기했다.
뭐, 기본적으로 내 동생을 좋게 봐 주는 건 나쁜 게 아니기도 했고 말이다.
‘일단 영약은 그렇다 치고…….’
시문은 자취방 한쪽 구석.
다소 허름하지만 깔끔하게 마련된 연금술 도구들로 고개를 돌렸다.
‘마력경화증 치료제, 이거 잘 굴리면 큰돈이 될 텐데.’
밤사냥꾼 박진욱이 그렇듯.
아레나 질병은 랭크를 가리지 않기에, 고통받는 사람 역시 많았다.
특히나 박진욱과 같이 상위 랭크에 있는 플레이어일수록.
아레나 질병의 치유에 대한 갈망은 어마어마했다.
‘딱히 병자를 돈으로 보는 건 아니지만…….’
치료제가 돈이 될 수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연금술을 위한 연구실부터 앞으로의 활동에 쓰일 자금까지 고려한다면.
‘지속적인 돈벌이는 필수적이야.’
물론 잘나가는 플레이어들이 그렇듯.
방송만 잘 꾸려도 유수의 길드를 비롯한 각 기업들과 스폰서, 광고 등 쏟아지겠지만.
‘내 목적은 그런 게 아니니까.’
동생을 죽이고 지구를 멸망시키는 주역들.
종리추와 대륙성, 그리고 그 정체불명의 눈알이 목적이었다.
‘특히나 시혁이는 반드시 살아야 해.’
시문은 회귀 전 시스템이 보냈던 메시지를 떠올렸다.
[성좌의 자격 보유자 사망 확인.]
[더 이상 NO. 274 지구에서 아레나를 진행할 이유가 없습니다.]
[NO. 274 지구의 아레나를 완전히 종료합니다.]
[갤럭시 아레나 종료에 따라 NO. 274 지구의 보호권을 철회합니다.]
‘분명 시혁이 녀석의 그 특성과 관련 있겠지.’
그리고 그 특성이 아레나 종료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도 대충 감이 잡히지만.
‘아직 추측에 불과하니까.’
물론 섣부른 판단을 내릴 순 없었다.
고로 지금 가장 우선적으로 할 일은 하나.
특수 아레나를 대비한 스펙업이었다.
“현자의 돌? 연성 시작하자.”
-히히! 그 말만 기다렸다구!
경쾌한 목소리와 함께 가슴 정중앙에서 연성력이 노도처럼 쏟아진다.
그것은 곧장 시문의 오른팔을 타고 손가락 끝으로 몰려들었고.
[요구치에 맞는 연성을 이루기에는 연성력이 부족합니다.]
[현자의 돌이 부족한 등가교환을 성립시키기 위해, 업적 포인트 10,000점을 요구합니다.]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눈앞에 익숙한 시스템창을 띄웠다.
시문은 상태창을 띄워 보유 업적 포인트를 확인했다.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업적 포인트는 10,450점.’
지난 방송과 천마의 미션, 후원으로 만 포인트는 넘어선 상황.
‘본래라면 만일을 대비해 1,000점 정도의 여유분을 남길 생각이었지만…….’
이번 연성으로 오르는 옵시디언 태블릿의 성장치가 어마어마했다.
무려 20%.
지금도 20%의 완성도로 이만한 효율을 내는데.
그 두 배인 40%가 된다면 얼마나 강해지겠는가?
잔여 포인트를 따질 때가 아닌 것이다.
‘어디 보자. 만 포인트를 쓰면 450점이 남네.’
아스트라페를 연성하기 위해선 50점 부족한 점수이긴 해도.
‘진행하다 보면 50점 정도는 어떻게든 채울 수 있겠지.’
거기에다 옵시디언 태블릿으로 인한 인체 연성 능력이 2배로 향상되지 않는가?
‘설령 50점을 못 얻어도 큰 문제는 없어. 내 인체 연성 능력이 지금보다 약 두 배나 증가하니까.’
너프당했기는 했으나, 인체 연성만으로 무려 홉고블린을 쓰러뜨린 시문이다.
여기서 두 배면 애당초 보험 자체가 필요 없을 수준이 될 터.
시문은 망설임 없이 눈앞에 있는 메시지에서 ‘예’를 선택했고.
파츠측!
업적 포인트가 소모되며 연성 특유의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스아아아아.
익숙한 검보라색의 비석.
옵시디언 태블릿이 검은 연기를 풀풀 풍기며, 시문의 손 위로 내려앉았다.
[성좌 검은 염소가 기특함과 환호를 담은 시선을 보냅니다.]
[성좌 제우스와 천마가 입맛을 다십니다.]
[성좌 검은 염소가 업적 포인트 500점을 후원합니다.]
=봤지? 변태 영감들아. 얜 내 거얌. ㅎㅎ!
반가운 후원도 함께 말이다.
업적 포인트 50점을 계산한 것이 무색하게, 순식간에 500점을 벌어버린 시문.
그러나 업적 포인트보단 눈앞의 메시지에 더욱 눈길이 갔다.
‘성좌도 후원 메시지를 쓸 수 있었구나.’
생전 처음 보는 성좌의 후원 메시지에 시문은 헛웃음을 흘렸다.
* * *
[갤럭시 아레나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입장 아이템으로 인한 특수 아레나로, ‘열띤 광산의 악몽’으로 입장합니다.]
[아레나 입장 시, 입장 아이템 [도리아의 미스릴 광석]이 소모됩니다.]
[특수 아레나의 규정상, 대기 시간이 무제한으로 주어집니다.]
아무것도 없는 검은 공간.
평범한 사람이라면 자칫 공황장애를 일으킬 정도로 어두웠다.
그러나.
“호오. 특수 아레나는 대기 시간도 주네?”
이곳의 입장자인 뚜렷한 이목구비의 미청년.
김시문은 그저 눈을 반짝이며 주변을 살필 뿐이다.
이내.
“뭐, 딱히 별건 없네.”
시문의 눈은 순식간에 흥미를 잃었다.
그에.
-당연하지. 여긴 단발적인 아공간에 불과하잖아. 그나저나, 진짜 지금 특수 아레나에 입장할 거야? 급할 건 없잖아.
낭랑한 목소리가 가슴에서 울렸다.
현자의 돌이었다.
“그래. 애초부터 옵시디언 태블릿의 완성도를 40%로 맞추면 입장할 생각이었어.”
-하긴, 인체 연성이 두 배나 강해졌으니. 충분하긴 하겠네.
“거기에다 업적 포인트도 거진 두 배가 되었고.”
450점이던 업적 포인트는 검은 염소의 후원으로 인해 950점이 되었다.
현자의 돌의 페이백까지 계산하면 아스트라페 두 자루는 거뜬히 만들 점수였다.
‘이 정도면 실버 랭크대의 특수 아레나는 충분할 거야.’
사실 차고 넘치는 수준이지.
피식 웃은 시문은 허공으로 손을 뻗어, 기능을 하나 활성화했다.
아레니아, 즉 방송이었다.
‘으음. 이번엔 방제를 쓰는 게 좋으려나?’
실버 혹은 심해와 특수 아레나라는 키워드만 섞으면 어떻게든 어그로가 끌릴 터.
하지만.
‘아니다. 그냥 하던 대로 하자.’
시문은 방제를 따로 설정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전에 성좌 어그로가 너무 컸어.’
물론 성좌 코스프레가 아닌 진짜 성좌들이었지만.
진실이야 어쨌든, 해당 사건은 단순한 심해 방송의 어그로로 끝난 시점이다.
여기서 또 방송 어그로를 끌다간, 괜한 부스럼을 만들 가능성이 높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자신은 아직 저랭크에 무소속인 상황이니까.
‘뭐…… 어느 정도 시청자를 확보하기도 했고.’
저번 방종 때에 시청자 수가 5천여 명인 적도 있었지.
그 반의반만 와도 일단 천여 명 이상의 시청자는 확보된 셈이었다.
그런 시문의 예상이 적중하듯.
-오오! 방송 켰다!
-시문쨩. 기다렸다능!
-방금 아레나 끝냈는데. 치맥각이네 ㅋㅋ.
순식간에 들어차는 시청자들.
저번 성좌 코스프레 사건이 확실히 임팩트가 있긴 했던 것일까?
-성좌 코스프레 한다는 어그로가 이 사람임?
-다 해명했잖음. 유입 티를 내네 ㅋㅋ
-얘 버스 기사를 발랐다매? ㄹㅇ임?
-모르겠고. 성좌 코스프레 다시 해 주셈. 나 못 봄!
신규로 보이는 시청자들도 급속히 증가했다.
실시간으로 올라가는 시청자 수를 확인한 시문의 눈이 조금 커졌다.
‘1,500명이라? 여기까지는 생각 못 했는데.’
심지어 그 숫자는 계속 올라갔고.
2천여 명에 달하고 나서야 증가하는 속도가 확연하게 줄었다.
‘후. 방제 어그로는 안 끌어서 다행이야.’
자신의 현명한 처사에 안도를 표한 시문은.
-이봐, 방장! 빨리 문 열어!
-쾅쾅!
-얼른 열어! 여긴 너무 어둡다고.
-ㄹㅇ 암 것도 안 들림 ㅋㅋ. 마이크라도 켜!
-문 열어. ㅁㅇㅇ! ㅁㅇㅇ!
빨리 방송 대기화면과 BGM을 구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방송을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반갑습니다!”
고저 없이 편안하게 들리는 목소리.
그와 함께 검은 화면에 시문의 모습이 둥둥 떠올랐다.
-오! 왔다!
-얘임? 개쌉 기만자였네?
-앙! 가능!
기다렸다는 듯 우르르 쏟아지는 채팅들.
“하하! 죄송하지만 전 불가능합니다. 다들 어서 오세요.”
시문은 가볍게 웃으며 적당히 받아 주곤, 본론으로 들어갔다.
“자! 여러분들. 오늘은 일반 아레나가 아닌 특수 아레나를 진행할 겁니다.”
-에?
-뭐지. 내가 잘못 들었나?
-ㄹㅇ? 진짜 특수 아레나임?
-님 실버 아니에요?
-설마 저번 아레나의 블랙존에서 꼼지락거리던 게 그거였나?
무수하게 올라오는 의문들.
당연했다.
플레이어들도,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입장 아이템을 모르지 않는다.
또한 그 대부분이 고랭크에서만 등장한다는 것도.
시문은 따로 입장 아이템에 대한 설명을 하지는 않았다.
왜냐고?
“해서 아레나 도중 채팅을 못 보더라도 양해 부탁드리고 시작할게요.”
애초에 특수 아레나는 입장 아이템이 없다면 입장조차 불가하니까.
따라서.
“아레나를 시작한다.”
입장하는 모습을 그냥 보여 주면 되었다.
[지역은 ‘열띤 광산의 악몽’입니다.]
[광산의 악몽 속에서 살아남으세요.]
평온했던 호수에 돌을 던진 것처럼.
검었던 대기 장소가 일렁이며 순식간에 광산의 형태를 띤다.
눈 깜짝할 사이에 광산 속 어딘가로 이동해 버린 시문은 폐부로 파고드는 지하 특유의 공기를 마시며.
[아레나를 시작합니다.]
엄습하는 현실감에 곧바로 적응했다.
-오오! 따로 매칭 없이 바로 시작하네?
-ㅇㅇ. 1인용 입장 아이템인 듯.
-그럼 얘 망한 거 아님? 실버가 특수 아레나를 혼자 깨는 건 개에반데.
-돈킹 바른 사람이잖아. 실버 수준은 절대 아님.
역시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게 더 났다고.
의문과 묘한 불신을 표하던 채팅창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달라졌다.
그런 채팅창을 뒤로하고, 시문은 주변을 살피며 걸음을 옮겼다.
‘광산의 악몽 속에서 살아남으라니. 생존 종목이라 보기엔 좀 애매한데…… 역시 특수 아레난가?’
특수 아레나, 달리 스토리형 아레나라 불리는 것들의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이거다.
바로 뚜렷한 목적을 주지 않는다는 것.
추상적인 힌트만을 줄 뿐.
결코 적을 섬멸해라, 또는 무언가를 지켜라! 와 같이 클리어 조건을 콕 집어 주지 않았다.
그러나 단점만 있는 건 아니었다.
‘딱히 몰라도 상관은 없지만, 조건을 잘 알아내면 클리어 보상도 커지니까.’
당연히 이런 난도에 걸맞게.
아레나의 내용을 잘 이해하고 그에 어울리는 공략을 할수록, 클리어 보상도 덩달아 커졌다.
그러니 다들 입장 아이템에 그토록 목을 매는 것이다.
뚜벅.
시문은 조각처럼 잘 다듬어진 광산의 벽면을 슥 쓸며 걸어 나갔다.
마력에 민감한 마법계 특유의 감각이 벽면을 쓸며 내부를 훑어 나갔다.
‘일단 벽면이나 공기 중엔 어떤 마력도 느껴지지 않아.’
그렇다면 ‘광산의 악몽’은 아레나에서 흔히 악몽 키워드로 비유되는 환영이나 속임수와 같은 부류는 아닐 터.
‘아마 악몽과도 같은 일이 이 광산에서 벌어졌다, 뭐 그런 뜻 같은데…….’
광산에서 벌어질 악몽 같은 일이 뭐가 있을까?
‘광산이 와르르 무너지는 거?’
신빙성 있는 가설이다.
하나 그렇다고 하기엔.
“광산이 너무 튼튼한데?”
바닥, 천장, 벽면까지.
광산이라 부르기 미안할 정도로, 이곳은 매우 정교한 건축술로 다듬어져 있었다.
어지간한 폭발이나 지진 따위는 걱정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그럼 악몽을 일으킬 만한 어떤 존재가 있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을 곱씹으며 통로의 코너를 돈 순간.
“쿠룩.”
인간이나 짐승의 것도 아닌 울음소리와 함께 비린내 섞인 악취가 콧잔등을 때렸다.
따악.
시문은 상대를 확인하지도 않고, 손가락을 튕기며 바닥을 박찼다.
판단은 현명했다.
쿠웅!
묵직한 충격음이 방금 서 있던 자리로 처박혔으니까.
하나 [블랙팬서의 신체조직]으로 이미 천장까지 도달한 시문.
그는 박쥐처럼 침착히 천장을 디디며 기습자의 모습을 확인했다.
‘역시, 악몽은 특정 존재를 의미하는 거였나.’
3미터가 넘는 거구.
괴랄하게 큰 상체와 달리, 빈약하다 부를 수 있을 만큼 짧은 하반신까지.
‘드라칸이라니.’
골드 상위권에서나 간간이 등장하는 최하위 용족 드라칸이라면.
실버 구간인 이곳에선 가히 악몽이라 불릴 만했다.
-미친! 실화임? 드라칸? 아무리 특수 아레나라지만 이건 선 넘는데.
-이분 실버라고 안 했음? 근데 용족이 왜 나와?
-ㅅㅂ! ㅋㅋㅋㅋㅋ. 갤럭시 아레나가 드디어 미쳤나 보네.
-갤아야, 이거 맞아? 맞냐고!
기습자의 정체를 알아본 채팅창은 뜨겁게 달아올랐지만.
시문의 눈길을 끄는 건 다른 부분이었다.
[성좌 천마가 눈살을 찌푸립니다.]
[성좌 제우스가 불쾌감을 표합니다.]
[성좌 검은 염소가 이를 으득 갈며 짜증을 냅니다.]
바로 시문에게 관심을 두던 성좌들.
한둘도 아니고 셋 모두가 부정적인 반응을 내비친 탓이었다.
‘뭐 때문인지는 모르겠다만…….’
시문이 취해야 할 행동은 명확했다.
“쿠룩, 인간!”
후웅.
빈약한 하반신을 돕는 두툼한 꼬리가 득달같이 날아든다.
그에 시문은 몸을 끌어당기는 중력에 안기듯, 디딘 천장을 힘껏 박차며.
팔 근육 사이로 순식간에 차오르는 오우거의 거력을 그대로 담아.
콰직!
제 몸통만 한 드라칸의 꼬리를 내려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