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화
16화. 마기 (1)
“……이렇게 하는 거야. 이건 지식적인 부분이잖아. 안 그래?”
-오빠…… 진짜 잔머리 잘 굴린다.
시문의 설명에 얼이 빠진 현자의 돌의 목소리.
“녀석, 말을 해도. 그냥 똑똑하다고 그래라.”
그에 시문은 헛웃음을 흘리며 가슴의 정중앙.
현자의 돌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래서, 불가능하겠냐?”
-……아니, 충분히 가능해. 단언할 순 없지만, 아마 리바운드도 없을걸?
“정말?”
-응. 이건 옵시디언 태블릿이랑 같은 경우잖아. 능력을 사용하는 도구가 아니니까.
현자의 돌의 말에 시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번에 연성하려는 건 지식을 담은 책이지.’
인체 연성의 지식을 담은 [옵시디언 태블릿]처럼.
지금 연성하려는 ‘이것’ 역시 아스트라페처럼 즉시 능력을 발현하는 형태가 아닌.
엄연히 지식을 담은 책의 형태였다.
-하지만 옵시디언 태블릿과 마찬가지로 중후반부를 연성하려면, 요구 대가는 확 달라질 거야.
“그 말은 업적 포인트가 엄청 들 거라는 뜻?”
-오빠의 연성력만 받쳐 주면 그런 일이 없긴 하지.
“그게 그 소리잖아, 욘석아.”
장담컨대 지금 연성하려는 이건 분명 신화 등급의 물건일 터.
그걸 연성력만으로 감당하려면, 대체 연성력 스탯이 얼마나 높아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마 스탯을 전부 연성력에 올인해서 랭커 수준대의 레벨까지 찍어도 불가능하겠지.’
따지고 보면 당연했다.
신화급 무구는 성좌가 자신이 선택한 후원자에게만 조건부로 허락하는 아이템이다.
그런 걸 고스란히 베껴 만들어 내는데.
그 등가교환의 값을 일개 플레이어가 전부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럼 연성에 필요한 업적 포인트는 얼마 정도 될 거 같아?”
-으음…… 잠깐만. 계산 좀 해 보자.
만약 이번 연성의 요구 포인트가 9,000점을 넘으면, 마기 영약도 만들지 않을 생각이었다.
어차피 지금 상태로도 이 구간의 랭크대는 압살하고 다니니.
아레나를 좀 더 뛰어 요구량을 맞춰두고, 마기 영약을 제작하면 되니까.
‘업적 포인트를 금방 버는 편이기도 하고.’
성좌 제우스와 검은 염소의 태도를 보아, 앞으로도 계속 자신을 주시할 테고.
성좌들의 미션이나 아레나에서 좋은 성적을 내면, 업적 포인트는 알아서 벌릴 터였다.
-일단 완성도를 얼마나 두느냐에 따라 달라. 솔직히 저번 옵시디언 태블릿은 운이 좀 좋았거든.
“운이 좋았다고?”
시문이 고개를 갸웃하자, 현자의 돌은 긍정적인 이명을 냈다.
-응. 오빠가 연금술사라는 부분에서 보너스를 받기도 했고, 내가 또 좀 이뻐? 옵태가 나한테 홀딱 반해서 싸게 먹힌 거지.
“그…… 이쁘다는 게 현자의 돌이라는 연성물의 특수성을 말하는 거지?”
-아 씨! 그냥 좀 이쁘다고 하면 안 돼?
“어, 그래. 너 이쁘다.”
-아이! 그래도 그렇게 대놓고 말하면 나 빨개지잖앙~!
곧바로 간드러지는 현자의 돌을 무시한 채.
시문은 턱을 괴었다.
‘완성도라…….’
현자의 돌이 말하는 완성도는 필시 [등급 – 모조품(%)] 부분을 말하는 것일 터.
‘이걸 낮출수록 대가는 싸진다 이거지?’
하지만 무작정 낮출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스트라페와 같은 무구라면 괜찮을지 몰라도…….’
무구형은 비록 낮은 완성도라도 그에 해당하는 수준의 능력을 사용할 수는 있었지만.
‘지식은 다르지.’
지식은 아무리 대단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어도.
중간에 읽다 끊겨 버리면 아무 소용도 없으니까.
“잠깐.”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현자의 돌. 뭐 하나만 물어보자.”
-웅웅! 뭐가 궁금해?
시문은 옵시디언 태블릿 때를 떠올리며 말했다.
“너 옵시디언 태블릿이랑 융합했잖아.”
-정확히는 내게로 흡수된 거지. 제가 잘나봐야 결국 연성물이잖아?
녀석의 말에 시문은 눈을 반짝였다.
“그럼 연성물이라는 조건이면 지식도 흡수가 가능하다는 거지?”
-당연하지. 오빠, 나 엄청 지적인 여자야. 몰라?
현자의 돌의 자신감에 혹시나 했던 가정이 확신으로 변한다.
시문은 쾌재를 내지르며 연성력을 끌어올렸다.
“좋아. 현자의 돌? 그럼 바로 연성을 시작하자.”
그에 현자의 돌이 물었다.
-완성도는 얼마 정도로 잡게? 오빠, 알겠지만 지식이라는 게 무구랑은 좀 다르…….
“딱 10%. 그거면 충분해.”
-흐음. 보아하니 연성물의 구조를 아는 눈치네?
“대충은. 정확히는 들은 이야기지만.”
시문은 몇 안 되는 지인 중 하나인 고말숙의 넋두리를 떠올렸다.
‘야, 똑똑이. 이것 좀 봐 봐라. 넌 이 개소린지 뭔지 알아먹겠냐?’
아주 낡고 얇은 서책을 툭 던지며 신경질을 부리던 고말숙.
‘이 망할 무공은 대성인 10성에 맞춰, 딱 10장으로만 이루어져 있거든?’
‘근데 X발! 난 대가리가 나빠서 7성밖에 못 하겠더라.’
‘너 감정도 잘하잖냐. 혹시 이 구결 같은 거 해석 좀 못 하냐?’
전생의 그녀는 성좌 천마에게 받은 신화급 아이템.
[천마신공]의 해석을 의뢰한 적이 있었다.
물론 전승자만 읽을 수 있다는 조건 덕분에, 시문은 글자조차 못 봤으나.
‘천마신공이 총 10장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지.’
이를 상식적으로 나눠보면 1성당 10%
고로 천마신공의 완성도 10%에 해당하는 부분이 1성의 구결을 담고 있다는 것일 터.
‘본래라면 천마신공을 직접 읽고 해석할 생각이었는데 말이지.’
무려 7성만으로 고말숙이라는 하이랭커를 만들어 낸 천마신공이다.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간에.
시문은 어떻게든 천마신공을 해석하고, 직접 익혀 나갈 생각이었다.
나름의 자신도 있었다.
고말숙이 사용하던 기술이나 전투 방식도 어느 정도 봐 둔 상태였으니까.
하나.
‘현자의 돌이 연성물에 수록된 지식을 흡수할 수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옵시디언 태블릿에 있던 인체 연성의 지식처럼.
일종의 특성의 형식으로 자신에게 적용될 테니까.
그럼 힘들게 구결을 해석할 필요도 없이, 천마신공을 사용할 수 있는 몸만 준비하면 되었다.
‘그리고 몸은 인체 연성이면 충분해.’
생각을 정리한 시문은 물었다.
“현자의 돌, 10% 완성도로 연성하면 대가는 얼마나 들겠어?”
-완성도 10%면 그리 비싸지 않지. 음, 한 5,000점이면 되겠는데?
“5,000점? 싸네.”
-대신 뒷부분은 장난이 아닐걸. 신화급 지식이니까.
“뭐, 당장 1성은 익힐 수 있으니까. 그 정도면 충분해.”
시문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20%에 10,000점이 들던 옵시디언 태블릿의 절반 아닌가?
같은 신화급 등급임을 따져 보면 깔끔한 계산이었다.
“좋아. 바로 연성에 들어가자.”
-웅!
고말숙이 건넸던 낡고 얇은 서책 [천마신공]
그 외형을 펼쳤을 때 아무 글자도 보이지 않던 내부를 떠올리며 연성을 시도하자.
[요구치에 맞는 연성을 이루기에는 연성력이 부족합니다.]
익숙한 메시지창이 눈앞으로 떠올랐다.
[현자의 돌이 부족한 등가교환을 성립시키기 위해, 업적 포인트 5,000점을 요구합니다.]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망설임 없이 예를 터치한 시문은 업적 포인트 5,000점이 소모되자마자 손가락을 튕겼고.
따악.
파츠츠측!
손가락 끝에서 얽히고설키는 연성 특유의 빛이 아주 얇게 저며지더니.
한 장의 낡은 종이가 되었다.
팔랑.
바람도 불지 않는데.
낡은 종이 한 장이 힘없이 허공을 나풀거린다.
그것을 본 시문의 얼굴은 밝아졌다.
이유는 간단했다.
‘보인다!’
과거 고말숙에게 건네받았었던 [천마신공]
그저 백지로만 보였던 낡은 종이 위로, 빼곡히 들어찬 정체 모를 글자들이 보이는 것이다.
시문은 조심스레 그것을 받아 정보를 확인했다.
[천마신공]
등급 – 모조품 (10%)
성좌 천마의 무공.
익힐 수는 있지만, 어째서인지 제힘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한다.
“됐다!!”
시문은 저도 모르게 폴짝 뛰며 환호를 질렀다.
연금술이 좀 까탈스러운가?
아무리 구조를 알고 있다지만, 말 그대로 구조뿐.
혹여나 초반부의 지식의 질이 어쩌고 하면서 추가 연성을 요구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헌데 10성으로 이루어진 천마신공에서 1성만 쏙 빼서 연성했으니, 어찌 기쁘지 않으랴?
“자, 현자의 돌? 어서 흡수하자.”
-웅! 근데 오빠, 방방 뛰는 거 너무 귀엽다! 토끼 귀 연성해서 다시 뛰…….
“빨리.”
음흉함이 가득한 녀석의 말을 칼같이 자른 시문은 얼른 천마신공을 가슴에 가져다 댔다.
-우움! 성좌 거라 그런지 맛은 있넹.
우물거리는 듯한 현자의 돌의 목소리.
그와 함께 천천히 가슴 중앙으로 스며드는 천마신공을 보며 시문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나저나, 이번엔 성좌가 반응을 안 하네?’
솔직히 나름 긴장했었다.
아스트라페 때는 올림푸스의 성좌들 전부가.
옵시디언 태블릿 때에는 검은 염소가 직접 관심을 보였으니까.
‘다행이라고 봐야겠지.’
모든 성좌가 자신에게 호의적이리란 법은 없다.
당연했다.
자신의 것을 멋대로 모방, 창조해 버리는데 좋게 보기도 쉽지 않겠지.
실제로 검은 염소의 경우가 그렇지 않은가?
‘칭호 [저편의 시선을 받는 자]가 아니었다면. 아마 검은 염소와 마찰을 겪었을 거야.’
진노했다는 메시지도 그렇고.
제우스와 다투던 성격을 보아, 좋은 꼴은 보기 힘들었을 거다.
-오빠! 흡수 다 했어.
“그래?”
현자의 돌의 말에 시문의 눈이 반짝였다.
그때.
-웅! 근데 이거 더럽게 난해하다. 무슨 개념이 뜬구름 잡는 것처럼…….
현자의 돌의 말이 흐릿해진다.
그뿐만이 아니다.
늘 이어져 있던 녀석과의 존재감마저 느껴지지 않았고.
종례엔 모든 감각이 흐릿해졌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이미 한 차례 겪어 본 적이 있었다.
‘이건 회귀 전의…….’
그 생각을 끝으로.
시문의 정신이 끊어졌다.
* * *
“으음…….”
시문의 고운 미간이 찌푸려진다.
‘여기는?’
점차 감각이 돌아오는 것을 느끼며, 눈을 뜬 시문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탁 트인 자연 풍경.
기암괴석부터 장엄한 폭포까지.
흡사 무릉도원을 연상시키는 이곳은 어느 유명 동양화 한 폭을 실사화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바로 뒤에서.
“허허. 일어났는가?”
현숙하면서도 묘하게 패기가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어찌, 몸은 괜찮은지 모르겠구먼.”
수수한 정자에 한 노인이 앉아 있었다.
“아. 괜찮습니다.”
시문은 얼른 몸을 일으켰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만큼, 과도한 노인 공경은 아니더라도.
그에 대한 예우가 배어 있는 것이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든 것일까?
“허헛! 요즘 젊은이들답지 않군. 앉게나.”
노인은 한층 커진 웃음과 함께 옆자리로 손짓했고.
시문이 뭐라 답할 틈도 없이.
스륵.
미끄러지듯 노인의 앞자리로 이동되었다.
‘세상에…….’
그에 시문의 눈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어떻게 단순히 권한 것만으로 사람의 위치를 이렇게 바꾸어 버린단 말인가?
이내.
‘그렇군.’
시문은 깨달았다.
이곳은 무릉도원 같은 곳도 아니었고.
눈앞의 존재는 그저 외형만 인자할 뿐.
“이렇게 성좌를 직접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요.”
“호오. 마치 본좌를 아는 듯한 말투로구먼?”
“모를 수 없죠. 이곳으로 오기 전 연성한 것이 천마신공인걸요.”
제우스와 함께 상위 서열 꼽히는 성좌.
‘천마’라는 것을 말이다.
그것을 증명하듯.
“허헛! 그렇겠군. 내 괜한 것을 물었어. 자네 말이 맞네. 본좌가 바로 성좌 천마일세.”
[지구인 최초로 성좌를 직접 대면하셨습니다.]
[업적 포인트 5,000점을 획득합니다.]
시스템은 업적 포인트를 무려 5,000점을 건네주었다.
이어.
[성좌 천마는 매우 위험한 존재입니다.]
[저희 측에서 최선을 다해 플레이어의 안전을 위해 노력하겠지만, 그를 향한 섣부른 자극은 자제를 당부드립니다.]
[돌발 상황 발생 시, 플레이어 김시문은 즉시 지구로 역소환됩니다.]
긴장이 절로 들게 만드는 문구들이 줄지어 이어졌다.
‘시스템이 경고를 할 수준이라…….’
시문은 살짝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오! 이 망할 영감탱이가 또!’
‘X! 쉬운 미션 좀 주면 어디 덧나냐? 앙!’
‘이 미친 변태 영감이 진짜!’
이미 고말숙을 통해 성좌 천마란 존재가 어떤 자인지 어렴풋이 알고 있었으니까.
메시지를 받은 건 시문만이 아니었던 걸까?
“쯧쯧. 어지간히들 X랄이군.”
인자한 인상과 달리, 너무나 자연스레 배어 나오는 욕설.
천마는 귀찮음이 가득한 손짓으로 허공을 휘휘 저었다.
아마 시스템 측에서 한창 경고를 날리는 모양이었다.
‘그 스승의 그 제자구나.’
순간 고말숙의 모습이 겹쳐 보인 시문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절 부른 이유는 천마신공 때문이겠군요.”
“허헛. 단도직입적인 친구로군.”
천마가 당돌하고 단도직입적인 걸 선호하는 건, 이미 전생의 고말숙에게 들은 상태.
역시나 잘 먹힌 것인지.
“답답하지 않아서 좋군. 그래, 젊은이라면 무릇 패기가 있어야 하지. 하나 잘못 짚었네.”
천마는 만족스러운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인전승이 원칙이긴 하나, 천마신공은 큰 문제가 아니라네. 내 관심은 다른 부분에 있지.”
부드럽고 인자한 얼굴로 말을 이어 가는 천마.
하나 그 인자함 사이로 비치는 눈빛은.
“자네, 대체 정체가 뭔가?”
혼이 시릴 정도로 섬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