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15화. 갤럭시 아고라 (3)
“수제 회복 포션 팝니다! 중급부터 최하급까지 다양해요!”
“온갖 잡템 다 매입합니다. 최근 5일간 시세로 맞춰 드립니다!”
“각종 스크롤 팝니다. 생산계 협회에서 인증받은 플레이어들이 만들었어요!”
북적거리는 시장통이라 해도 믿을 광경.
갤럭시 아고라의 3층, 자유 광장의 한편에 벌어진 광경이었다.
본래라면 거래의 요충지인 4층에 있어야 할 광경이지만.
층수의 반절 이상을 차지하는 경매장과 각 세력의 상점에 밀려난 노점들이 3층까지 번진 것이었다.
그리고 노점들이 끝나는 출구엔.
“이제 됐다니까.”
“에이, 연금술사들은 늘 재료가 부족하잖아요. 조금 더 봐요.”
뚜렷한 이목구미의 미남과 청순한 여성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이만하면 충분해. 이것도 예상한 것보다 훨씬 많이 샀어.”
시문이 단호하게 고개를 젓자, 이유정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그럼 오라버니, 이거 하나만 더 챙겨 가세요.”
또 휘말려 시장을 더 돌아다니게 될까 봐.
“그만 됐다니까. 나 인벤토리 터지려고 그래.”
시문은 서둘러 손을 저었다.
다행히도.
“그러지 말고요. 제가 꼭 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요.”
쇼핑을 더 하는 것은 아니었는지.
인벤토리를 여는 이유정의 모습에 시문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타인과의 쇼핑이 이렇게 무서울 줄이야.’
같은 등급의 재료에도 크기나 색의 차이까지.
전투계면서 하나하나 꼼꼼하게 따지는 이유정은 보통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물론 연금술사라면 이유정처럼 세심하게 따져야 정상이겠지만.
‘난 등급만 맞으면 다른 부분은 상관없다고.’
1레벨로 전생의 지구에서 살아남은 연금술사.
더불어 이젠 현자의 돌과 신화급 무구까지 연성하는 시문에게는 그다지 의미 없는 부분이었다.
“자, 여기요.”
생각에 잠긴 시문의 앞으로 이유정이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건…….”
그걸 확인한 시문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3D 고글 형태의 기기.
“아레나 접속기기잖아?”
“맞아요. 성삼에서 만든 완전 최최!최신형! 접속기기예요. 아직 미출시이거든요. 헤헤.”
아레나 접속기기.
헬멧부터 캡슐, 눈앞의 고글까지 다양한 형태로 출시되는 접속기기들은.
놀랍게도 갤럭시 아레나가 직접 각국의 정부와 접촉해 만들어 낸 결과물이었다.
처음엔 강대국인 미국과 중국, 두 나라만 생산이 가능했지만.
당연하게 발생한 두 나라의 독점과 갑질에, 갤럭시 아레나가 직접 전 나라의 정부와 접촉한 것이다.
더불어 독점을 향한 갤럭시 아레나의 경고는 덤이었다.
방법은 간단했다.
‘중국과 미국, 두 나라의 플레이어들 전원의 자격을 박탈해 버린다고 했었지.’
뉴스로도 생중계되었던 그 사건은 아직도 두 강대국의 치욕으로 남아 있다.
물론 경고 조치였기에 치욕은 그때뿐.
지구 양대 강대국이라는 타이틀과 권세는 여전했다.
지구가 멸망하기 직전까지 말이다.
“미출시 접속기기라고? 이런 걸 나한테 줘도 되는 거야?”
“이미 저나 성삼 길드의 상위 플레이어들은 다들 사용하고 있어요. 그냥 상용화만 안 된 거죠.”
“아니 내 말은, 난 외부인인데 이런 걸 줘도 되냐는 거야.”
“뭐 어때요? 내가 주겠다는데.”
자기들이 뭐 어쩌려고요?
이유정은 밝은 미소를 걸치며, 어깨를 으쓱할 따름이었다.
“아! 혹여나 그런 이유로 성삼에서 찾아오면 저한테 꼭 말해 주셔야 해요.”
그렇게 말하는 이유정의 눈에 희미한 살기가 스쳤다.
“아셨죠, 오라버니?”
안타깝게도.
시문은 접속기기를 확인하느라, 그녀의 살기를 캐치하지 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냥 성삼 스토어에서 적당한 걸 내가 사는 게 좋지 않겠냐.”
“아이참! 기기 없이 아레나 뛰면 몸이 상할 수도 있다고요!”
이유정의 볼이 불만으로 조금 퉁퉁해졌다.
“정 신경 쓰이시면 아까 지점장이 굴었던 무례에 대한 보답이라 생각해주세요.”
“뭐,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슬쩍 깨물리는 그녀의 아랫입술까지 확인한 시문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정이 아랫입술을 깨문다는 건, 고집을 부리려 할 때 나오는 습관.
괜히 요 녀석의 황소고집과 맞설 필요는 없었다.
특히나.
‘잘됐다. 안 그래도 접속기기도 하나 구하려고 했는데.’
슬슬 아레나 방송을 고려 중이던 시문에겐 더더욱 말이다.
고글을 인벤토리에 넣으며, 플레이어 워치의 시간을 확인한 시문은 말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유정아, 나 이제 가 봐야겠다.”
“네! 마침 저도 엄마 병문안 갈 시간이네요.”
접속기기를 챙기는 시문에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는 이유정.
그에 잠시 멈칫하는 시문.
‘그러고 보니 이모님도 아레나 관련 질병이셨지.’
갤럭시 아레나가 열리고, 자신이 앓았던 마력불능처럼.
상태창의 특성 칸에 뜨는 상태이상들이 두루 존재했다.
각성자들에게만 나타나는 일명 ‘아레나 질병’이었다.
‘이모님의 병명이 뭐였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한때 성좌의 선택까지 받았던 플레이어였으니.
어느 정도는 버티시겠지.
‘빨리 성장해서 치료제 제작을 시작해야겠어.’
현자의 돌과 인체 연성까지 지니고 있는 자신이다.
성장은 시간문제고, 치료제 제작 역시 문제되지 않으리라.
‘이모님껜 빚진 것도 있으니까.’
어린 시절.
사생아인 자신을 늘 상냥하게 챙겨 주셨던 유정의 어머니를 떠올린 시문은 몸을 돌렸다.
“그럼 유정아. 난 간다. 조심해서 들어가라.”
“네. 아 참! 오라버니.”
시문의 소매를 붙잡은 이유정.
“왜?”
그녀는 시선을 내리깔며 잠시 머뭇거리더니,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 저한테도 답장…… 하셔야 해요?”
“답장?”
그 말에 고개를 갸웃하는 김시문.
이내.
“아. 메시지?”
무언가 떠오르는 게 있는지, 시문은 작게 탄성을 흘렸다.
그에 이유정의 입이 조금이지만 삐쭉 튀어나왔다.
“치. 오라버니께서 답장 보내셨다고 시혁이 그게 얼마나 자랑을 했다고요.”
“자랑? 아니, 할 게 없어서 그런 걸로 자랑을 하냐?”
“그러니까요! 엄청 짜증 나더라고요!”
그렇다면서 넌 또 왜 짜증이나?
그전에 너희 나이가 몇인지는 알고 하는 소리냐?
라는 말이 목까지 치솟았으나, 굳이 입 밖으로 내뱉진 않았다.
“그래. 도착하면 메시지 보낼게.”
“힛! 진짜죠?! 약속한 거예요?”
어린 시절 그때처럼 밝게 웃는 이유정.
그에.
“녀석.”
슥슥.
“……?”
시문은 본능적으로 유정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당연히 이유정은 순식간에 얼어붙었고.
‘아차! 그러고 보니 여자애들은 머리 만지는 거 엄청 싫어하지.’
지금의 이유정은 그 시절의 이유정이 아니거늘.
어릴 적이 떠올라 습관적으로 머리를 매만진 시문은 얼른 손을 뗐다.
물론 그녀의 머리는 어느 정도 헝클어진 뒤였지만.
“흠! 그, 그럼 조심해서 들어가라.”
혹여나 난감한 일이 벌어질까.
시문은 얼른 걸음을 옮겨 사라졌고.
계속 그대로 얼어 있는 이유정의 곁으로 H형 스커트의 여성.
“참 매너 없는 남자네요.”
강다영이 다가왔다.
“아무리 아는 사이라도 세팅한 머릴 그냥 손으로 뭉…… 응?”
익숙한 손놀림으로 이유정의 머리를 복구하던 강다영이 눈을 깜빡인다.
‘얘가 왜 꼼짝을 안 해. 설마 빡친 건가?’
평소엔 선머슴처럼 외모는 신경 쓰지 않더니.
그래도 여자라 이건가?
강다영의 눈이 바쁘게 주변을 훑었다.
‘여기서 X랄하면 곤란한데…….’
보는 눈이 너무 많다.
특히 모두가 플레이어인 만큼, 아무리 성삼의 이름을 빌려도 입막음이 어려우리라.
강다영은 서둘러 꼼짝도 하지 않는 유정을 달랬다.
“아, 아가씨.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제가 금방 손질해…….”
그러곤 뚝 움직임을 멈췄다.
“어라?”
이유정의 얼굴을 본 강다영의 두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러나 그뿐.
“언니, 방금 건 못 본 걸로 해 줘요.”
“으, 응? 아! 네.”
마른세수와 함께 순식간에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이유정.
그에 강다영은 얼른 허리를 빳빳하게 세웠다.
그렇게 한동안 김시문이 사라진 방향을 물끄러미 보던 이유정은.
“그나저나 언니, 그 건은 어떻게 됐어요?”
어느새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언니, 둘밖에 없잖아요. 편하게 말해요.”
“그 건이라니? 무슨 건을 말하는데? 아아! 그거?”
손뼉을 치는 강다영.
그녀는 서둘러 핸드폰을 꺼내, 바쁘게 터치했다.
그러곤.
“10년 전 그 사건 말하는 거라면…… 놀랍게도 아직 파악된 게 단 하나도 없어.”
자신감 있게 답했다.
“언니, 보고 내용에 전혀 어울리는 목소리가 아니라는 거 알아요?”
“파악된 부분은 있으니까.”
“이젠 방금 한 보고와도 안 어울리는 소릴 하네요.”
이유정의 너스레에 강다영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내 주변을 힐끗거리곤, 이유정의 귓가에 속삭였다.
“말 그대로야. 파악된 게 정말 ‘단 하나도’ 없어.”
유난히 한 부분을 강조하는 강다영에 이유정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그 말은…….”
“그래. 마치 누가 지워 버린 것처럼 말이지.”
강다영은 주변을 힐끔거리며 말을 이었다.
“이상하지 않니? 너뿐만 아니라 한국의 상류층이 테러를 당했는데 이렇게 정보가 없다는 게.”
당시 화두가 되긴 했으나 그뿐.
그때의 열기는 거짓말처럼 식어 버렸고.
지금은 아예 일어나지도 않은 일처럼 조용하다.
무려 상류층들이 습격받은 사건인데 말이다.
웃기지 않은가?
“작은 스캔들 하나에도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언론이 그 뒤로 쭉 침묵이라는 거죠?”
“기가 차지? 얼마 전에 ST그룹 아들이 개인 방송에서 트롤했다고, 언론이 아주 개X랄을 했잖아.”
고작 골드 따리에 불과한 재벌 3세인데도.
고작 트롤 한 번에 나라가 뒤집힐 듯 들끓었던 것에 비하면, 확실히 비현실적이었다.
“꼭 누군가 의도적으로 덮고 있다는 것처럼 들리네요. 그것도 꽤 힘 있는 사람이.”
“역시 똑똑한 것들은 같이 일하기 편하다니까. 그래서, 어쩔 거야?”
강다영은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느낌 딱 오잖아? 여기서 더 들어가면 뭐든 분명히 문제가 생길 거야.”
이유정은 입꼬리를 비죽 끌어 올렸다.
“왜, 무서워요?”
“계집애가 언닐 뭐로 보고! 너 괜찮은지 묻는 거야, 요것아. 넌 나랑 다르게 잃을 게 많잖니.”
성삼의 독녀라는 배경부터 이미지까지.
비단 그것뿐만이 아니다.
플레이어로서도.
이유정은 김시혁과 함께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별생각이 없는지.
“언니, 저도 더 잃은 건 없어요.”
무미건조하게 답할 뿐이었다.
이내.
“아니.”
시문이 사라진 방향을 다시 한번 힐끔거렸다.
“방금 생기긴 했네요. 그래서 더욱 알아야겠어요.”
“그래그래, 어련하시겠니.”
그 모습에 고개를 젓는 강다영.
그녀는 누군가의 번호를 찍고는 통화 버튼에 손가락을 올렸다.
“그럼 작업에 들어간다? 이거 착수하면 못 되돌려.”
“네, 착수하세요. 자료가 있다면 가져오고, 각성자가 연관되어 있다면…….”
고개를 끄덕이는 이유정의 눈빛은.
“목이라도 썰어서 가져오세요. 최근에 꽤 재밌는 아이템을 주웠거든요.”
서릿발처럼 차가웠다.
* * *
“후, 피곤하네.”
오랜만의 외출이라서일까?
밀려오는 피로감에 시문은 외투를 벗어 던지곤 침대로 몸을 던졌다.
“역시 내 집이 최고라니까.”
좁은 평수에 싸구려 침대 하나였으나.
그 위에서 늘어져 있으면 심신이 절로 안정되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잠시간 휴식을 취하던 시문의 가슴 중앙이 울렸다.
-오빠. 근데 아까 그 애, 친한 애야?
“아까? 아, 유정이 말이야?”
눈을 끔뻑이던 시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친하지. 최근에 텀이 있긴 했지만, 5살 때부터 만나서 같이 컸으니까.”
-흐응…… 그래?
어딘가 묘한 현자의 돌을 비음.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니. 그냥, 뭐랄까.
겉과 속이 다른 어마어마한 애 같아서.
라는 뒷말을 현자의 돌은 애써 삼켰다.
‘어렸을 때부터 친했으면 내가 말해 봐야 먹힐 리도 없으니…….’
정말 낚이려 할 때만 도와주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한 현자의 돌은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얼른 영약 제조하자. 만드는 거야 금방이니, 그거 먹는 게 피로 회복에도 빠를걸?
“그렇겠네. 읏차! 그럼 세팅 좀 해 볼까.”
인벤토리를 연 시문.
그곳에서 각종 플라스크를 포함한 여러 물건이 잡혀 나왔다.
갤럭시 아고라에서 구한 연금술 도구들이었다.
시문은 그것들을 대충 침대에 넣어 놓고 자취방의 한쪽 구석을 바라봤다.
좁은 방이긴 했으나, 컴퓨터와 옷걸이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놓여 있지 않았다.
“이 정도면 대충 사이즈는 맞겠네.”
인벤토리에서 두툼한 원목을 꺼낸 시문.
한 손으로 들기엔 제법 무게가 있었지만.
팔에 [오우거의 신체조직]을 연성하자, 어린아이의 장난감처럼 가볍게 느껴졌다.
원목을 든 시문은 손가락을 튕겼고.
따악.
파츠측.
연성력에 휘감긴 원목은 넓은 직사각형으로 펼쳐졌다.
그것은 자취방 구석에 딱 알맞은 사이즈가 될 때까지 펼쳐지더니.
아래로는 4개의 다리를 만들어갔다.
시문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딱 맞췄네.”
-그러게.
순식간에 원목 테이블을 만들어 낸 시문.
비록 전생에서 허름한 판잣집에 살았어도.
있을 건 다 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연금술의 몇 안 되는 장점이지.’
필요한 가구나 도구 등을 즉석에서 연성해 내는 것.
물론 영약 조제 도구와 같은 특수한 처리가 필요한 것들은 무리였지만.
테이블을 만드는 것 정도는 주성분이 되는 원목만 있다면 얼마든지 가능했다.
-오빠, 이왕 하는 거 이 방에 있는 가구들도 좀 바꾸면 안 돼? 나 좀 연금술사의 방다운 광경을 보고 싶은데.
“뭐, 못 할 건 없지만…….”
현자의 돌의 말에 주변을 슥 둘러보는 시문.
이내.
“당장 불편한 것도 없고, 여기 오래 있을 것도 아니니까 굳이 힘 안 쓸래.”
-히잉! 그게 언제가 될지 모르잖아.
“얼마 안 걸릴 거야. 근데 불편해도 내가 불편하지, 네가 불편할 게 뭐가 있냐?”
-시각적으로 불편하다 이거지. 내가 얼마나 섬세한 연성물인데.
“그렇구나.”
건성으로 답한 시문은 매끄럽게 도구들을 세팅했다.
전생부터 연금술사였던 만큼, 대략적으로 선호하는 작업 환경이 잡혀 있는 것이다.
“일단 영약 관련을 제일 가운데로 두고, 포션은 급한 게 아니니까 저쪽으로…….”
순식간에 조제 도구들로 세팅되는 테이블.
일반적인 연금술사의 작업 환경을 고려해 보면 무척이나 소박했지만.
당장 필요한 것부터 차차 늘려 가면 되었기에.
시문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세팅된 테이블을 바라봤다.
-흐응. 뭐, 연금술 도구 수준은 괜찮네.
“말했잖아. 여기 생활계 플레이어들 수준은 무시 못 한다고.”
떨떠름한 현자의 돌의 목소리에 시문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유는 다름 아니었다.
‘오빠, 차라리 내가 만드는 게 낫다니까? 업적 포인트만 딱 바쳐! 내가 고급지게 싹 세팅해 준다!’
얼굴도 모르는 인간들이 만든 연금술 도구보다.
자신이 직접 연성한 도구가 뛰어날 거라는 현자의 돌의 말 때문이었다.
물론 시문 역시 녀석의 말에 동의했다.
현자의 돌의 연성 능력은 몸소 체감하고 있으니까.
단지.
‘그런 데 쓰기엔 업적 포인트가 너무 아까워.’
최소 1,000점.
제대로 각 잡으면 포션이나 영약 등, 테마별로 10,000점 가까이 들 거라던 현자의 돌.
그 점수면 [옵시디언 태블릿]을 한 번 더 연성할 수 있지 않은가?
‘당장은 내 성장이 먼저니까.’
연금술사로서.
그리고 연금술의 장점인 생산 능력을 제대로 이용하려면 분명 투자해야 하는 부분은 맞다.
하나 어지간한 연성은 당장 손가락만으로 해결할 수 있으니.
시문은 도구를 연성하는 대신 구매를 택한 거였다.
-뭐, 이 정도면 재료의 효력을 까먹을 일은 없겠어.
“그렇지?”
시문은 아고라에서 사 온 재료들을 꺼내, 테이블의 빈자리에 올려 두었다.
-근데 오빠, 영약의 능력은 어떤 방향으로 잡을 거야?
“본래라면 원료의 효능을 극대화하는 쪽이겠지만…….”
-겠지만?
[잠식된 홉고블린의 혈청]을 꺼내 든 시문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이번엔 방향을 좀 바꾸려고.”
-어떻게?
“고블린 관련 재료들은 보통 마비 쪽과 관련이 있잖아?”
-그렇지. 고블린이 쓰는 마비독은 전부 자기들의 피로 만들어 내니까. 뭐, 일단은 잠식한 마기부터 정화를…… 잠깐.
뭔가 짐작 가는 것이 있는 걸까.
현자의 돌의 목소리는 빠르게 가라앉았다.
-오빠, 설마! 마비 독성 관련의 보너스를 받으려는 게 아니라…….
“그래. ‘잠식된’ 난 이 부분에 초점을 둘 거야. 어차피 영약으로서의 스탯 증가는 비슷할 테니까.”
-…….
잠시간 이어지는 침묵.
이내.
-오빠아아! 미쳤어?!
가슴 중앙에서 강렬한 이명이 울렸다.
-세상에! 마기를 가지겠다고? 오빠는 마족도 아니고, 초급 흑마법조차 모르잖아!
한껏 격앙된 현자의 돌.
그러나 녀석의 목소리에 담긴 건 분노가 아닌.
-마기는 워낙 난폭한 기운이라 품고만 있어도 육체를 망가뜨리잖아!
걱정이었다.
“알고 있어.”
-아, 알고 있다고?
애당초 정규 아레나부터 출현하는 마족들이나 사용하는 기운.
흑마법과 같은 특별한 접점이 없다면.
마기는 스탯으로 보유할 시 마력불능에 버금가는 페널티를 가지게 된다.
오로지 페널티만 말이다.
하지만.
-그걸 아는 사람이 이래? 자칫하다간 마력불능 때로 돌아갈 수도 있어!
“걱정하지 마. 다 방법이 있으니까.”
‘마기를 다룰 수 있는 기술’만 있다면.
마기 스탯은 고유 스탯에 준하는 아주 강력한 스탯이 된다.
실제로 마기 관련 직업을 지닌 플레이어들은 하나같이 굉장한 파괴력을 뽐내지 않는가?
그리고 시문은 그런 플레이어들 중.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마기를 아주 기막히게 쓰는 녀석이 있거든.”
마기의 본주인인 마족들까지 두들겨 패는 괴물을 하나 알고 있었다.
-그게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람이 다를 줄 아는 거지 오빠가 다룰 수 있는 건 아니잖아.
“정확히 짚었어. 그래서 말인데.”
시문은 상태창을 띄워 업적 포인트를 바라봤다.
만 점이 코앞인 9,350점.
[옵시디언 태블릿]의 업그레이드를 위해 모아 두었던 업적 포인트의 사용처를.
“현자의 돌? 우리 연성 하나만 하자.”
시문은 잠시 바꾸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