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화
13화. 갤럭시 아고라 (1)
“수고하세요.”
탁.
택시의 문이 닫힌다.
차에서 내린 김시문의 고개가 쭉 하늘을 향해 올라갔다.
한 눈에 다 들어오지도 않는 크기와.
고개를 한참 들어야 끝이 보이는 높이까지.
“여긴 여전하네.”
전생에 한국이 멸망하기 전 그 모습 그대로인 건물.
시문은 약간의 아련함이 담긴 눈으로 거대한 건물을 바라봤다.
-호오~. 크긴 엄청 크네. 여기가 그 플레이어들의 성지라는 곳이야?
“응. 정확히는 갤럭시 아고라라고 하지.”
압구정의 한 백화점.
로데오 거리 위쪽에 위치해, 한강뷰까지 챙긴 이곳은 다름 아닌 플레이어들의 성지.
갤럭시 아고라였다.
-갤럭시 아고라? 이거 아레나 측에서 내준 건물이야?
“그건 아니야. 갤럭시 아레나에서 직접적으로 관리하는 건 방송 쪽이지.”
-하긴, 물리적인 개입은 거의 안 하니까. 그럼 이건 왜 갤럭시 이름을 달고 있는데?
“일종의 구색 갖추기지. 여기 말고도, 나라마다 갤럭시 아고라가 최소 하나씩은 있거든.”
-흐응~ 어떤 느낌인지 대충 알겠네.
현자의 돌은 흥미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여기서 아레나의 물건을 사고파는 거야?
“그래. 경매나 개인 상점부터 파티 구인까지. 온라인 커뮤니티가 있어도, 아고라를 많이 이용하는 편이야.”
요즘 시대에 오프라인이 웬 말이겠냐마는.
생각보다 오프라인을 이용하는 플레이어들은 많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뭐든 직접 봐야 안심이 되니까.’
기본적으로 가격대가 센 아이템의 특성상, 직접 보고 구매하는 것을 선호하는 것이다.
실제로 커뮤니티를 이용한 온라인 거래도 적지 않았으나.
그마저도 간단한 재료나 포션에 한해서다.
수백만 원대를 쉽게 넘는 장비류들은 배송으로 받기에는 꽤 많은 우려들이 있었다.
함께할 파티원을 구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아무래도 사람과 합을 맞추는 일이니까, 한 번은 만나 봐야지.’
일종의 면접이랄까?
아레나를 함께할 사이니, 직접 만나 판단하는 걸 선호하는 플레이어들이 상당수였다.
덕분에 갤럭시 아고라는 어느 나라에서나 핫플레이스였다.
그렇게 현자의 돌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사이.
“실례합니다. 각성자신가요?”
“예.”
시문은 어느새 입구에 도착했다.
그 앞을 가로막은 검은 정장 차림의 여성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잠시 확인 절차가 있겠습니다. 이걸 인벤토리에 넣었다 빼 주시겠어요?”
고개를 끄덕인 시문은 여성이 건넨 최하급 포션을 받았다.
“인벤토리.”
이어 인벤토리를 연 시문은 포션을 넣고.
2초 정도 기다린 후 다시 빼내었다.
아마 남들의 눈엔 쥐고 있던 포션이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모습이겠지.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여기 플레이어 워치입니다.”
여성은 심플하게 디자인된 팔찌를 내밀었다.
플레이어 워치.
개인 계좌나 거래 내역을 데이터로 남겨 주는 기능부터.
파티 구인이나 아고라 내부 지도 등, 다양한 기능들을 탑재해 놓은 일종의 첨단 아티팩트.
시문은 익숙하게 그것을 왼손에 착용했다.
그러자 가슴에서 작은 이명이 울렸다.
-오옹. 오빠, 이거 연성물이네?
‘맞아. 연금술사가 만든 거지.’
연금술로 태어난 존재답게.
현자의 돌은 플레이어 워치의 정체를 금방 눈치챘다.
-근데 연금술이 메인이긴 해도 꽤 여러 방면에서 합작했네? 이거 누가 만든 거야?
‘음, 거기까진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아마 협회나 유명 길드 쪽 연금술사가 아닐까?’
덩치 좀 있는 세력이라면 제작과 연관된 플레이어들이 다수 소속해 있으니까.
아마 국가 소속인 협회나 납품 의뢰를 받은 유명 길드 쪽의 작품일 가능성이 높았다.
“혹시 갤럭시 아고라엔 처음이신지요? 워치 사용의 설명이 필요하시면…….”
“괜찮습니다. 사용해 봤거든요.”
“알겠습니다. 그럼 좋은 시간 보내시길.”
각성자임을 확인해서일까.
여성은 한결 부드러워진 눈으로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문을 통과한 시문은 플레이어 워치를 이리저리 매만졌다.
워치 위로는 작은 홀로그램들이 떠올랐는데.
꼭 갤럭시 아레나의 시스템창과 닮아 있었다.
‘참 볼 때마다 신경 많이 쓴 게 느껴진다니까.’
간단한 개인정보로 워치 동기화를 끝낸 시문은 곧바로 걸음을 옮겼다.
외부에서 봤던 어마어마한 크기가 무색할 만큼.
“들었냐? 어제 전갈 길드가 저랭크 길드원들 싹 정리했다더라.”
“또 미국에서 누가 성좌의 선택을 받았다던데. 으아! 존X 부럽다!”
“이거 보여? 무려 S급이라고 S급! 상대팀이 삽질해 줘서 아주 보상 날로 먹었지. 크핫!”
“제길. 저번 아레나에서 분란 좀 있었다고 시청자가 반 토막 났어. 나 어쩌냐…….”
수많은 인파가 꽉 들어차 내부의 활기를 더했다.
-히야, 사람 더럽게 많네. 이 사람들이 전부 플레이어인 거야?
“그래. 그냥 각성만 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일단 인벤토리가 없으면 출입 자체가 안 되니까.”
현자의 돌과 조곤조곤 대화하며, 시문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층수는 4층.
플레이어 전용 경매장이 있는 곳이었다.
몇몇 사람들이 더 타자,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혔다.
이어.
“이번 각성 아카데미 기수들 미쳤다면서?”
“역대급이라더라. 특히 김시혁이랑 이유정이 투톱이라던데.”
“걔네들 진즉 다이아 뚫고 랭커 먹었잖냐.”
흘려듣기 힘든 이야기가 들려왔다.
“랭커라고? 언제?”
“꽤 됐어, 인마. 몰랐냐? 데뷔한 지 4년 만에 다이아 뚫은 애들이잖아. 한국에선 역대급이라고.”
“미쳤다 진짜! 누군 골드에서 4년째 이 X랄인데.”
고정 파티라도 되는 것일까.
함께 탄 4명의 플레이어들은 쉴 틈 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수저 차이지. 나도 협회의 독남이고, 성삼 독녀면 랭커 뚫었어.”
“X랄하네. 아카데미에 아무나 못 들어가는 거 모르냐? 걍 그 둘이 괴물인 거야.”
“그래. 철저하게 각성 스탯이랑 특성으로 받잖아. 듣기론 둘 다 특성도 2개라던데?”
“나도 그 이야기 들었어. 뭐 특성이 생기는 아이템이라도 있는 거 아니냐?”
띵.
알림음이 울리며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시문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응? 오빠, 왜 웃어?
“그냥, 재밌어서.”
각성하며 얻어지는 스탯과 특성은 현실의 배경과는 어떤 관련도 없다.
아무리 한 나라에서 날고 기는 권세가나 부자라 해도.
반대로 비루하다 못해 당장 끼니를 굶으며 살아가는 이라 해도.
각성 후 주어지는 특성, 스탯 앞에선 모두가 평등하다.
그렇기에 아직 각성하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각성을 염원하는 것 아니겠는가?
가장 빠른 인생 역전의 기회였으니까.
그러나 저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었다.
‘결국 각성 후 주어지는 스탯이나 특성도, 일종의 수저나 마찬가지인데 말이지.’
플레이어도 결국 각성할 때 얻는 것들에 따라, 미래가 결정지어진다.
물론 개인의 노력으로 주어진 특성과 스탯의 한계를 넘는 경우도 많았지만 말이다.
‘뭐, 이해 못 할 것도 없지.’
그래도 시문은 저들의 심정은 나름 이해가 갔다.
‘나도 한땐 저랬으니까.’
오히려 더 억울해했지.
그때 김시혁과 이유정.
만약 그 두 사람을 위해 자신이…….
짝!
‘아니! 김시문,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자.’
시문은 고개를 휘휘 저으며 제 볼을 두들겼다.
이미 지나간 일이고 그때의 일은 후회해서도 안 된다.
결국 전생의 경험을 돌이켜 보면.
그때의 선택은 분명 옳은 선택이었으니까.
결정적으로.
‘난 이미 용서했어.’
속으로 그렇게 말하면서도 시문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사실 용서라는 단어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그건 엄연한 사고였고.
다시 그때로 돌아가더라도, 자신은 똑같은 선택을 했을 테니까.
그때.
-저기 오빠?
가슴 중앙에서 작은 이명이 울렸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얼굴은 손대지 마. 나 진지해.
“……오냐.”
시문은 조용히 볼에 붙은 손을 내렸다.
* * *
시문이 향한 곳은 4층 중앙을 통째로 사용하는 경매장의 외각.
일종의 상점가였다.
그중에서도 개인 상점이 아닌, 길드 상점들이 즐비한 곳.
‘아무래도 경매로 팔기엔 조금 애매하니까.’
시문은 인벤토리에 있는 [홉고블린의 전투 도끼]를 힐끗했다.
도끼를 사용하는 전투계의 교복 무기로 분류되고 옵션까지 최고치인 힘 +5.
분명 좋은 아이템이었으나.
‘교복’이라는 카테고리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이미 경매를 내기란 힘들었다.
대부분 적정가가 형성되어 버린 상태니까.
잠시 외곽의 상점들을 둘러보던 시문에게, 유난히 큰 상점이 눈에 들어왔다.
익숙한 푸른색의 로고.
‘성삼이군.’
갤럭시 아레나가 등장한 이후에도.
한국은 물론 세계적인 기업의 위치를 유지 중인 성삼.
그 위명답게 4층의 길드 상점가에서도 가장 거대한 평수를 자랑하고 있었다.
‘아고라 건설에 투자를 좀 했나 보네.’
아무리 갤럭시 아고라가 국가의 관리 구역이라 해도.
대기업들의 손이 닿지 않았을 리 없다.
뭐.
플레이어 길드로서도 손꼽히는 성삼이니 더더욱 그렇겠지.
잠시 주변을 살핀 시문은 곧장 성삼의 상점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유는 별거 아니었다.
‘큰 길드일수록 거래가 빠르고 깔끔하니까.’
스르륵.
“어서 오십시오.”
성삼이란 이름답게.
자동문만큼이나 깔끔하고 세련된 인테리어가 눈에 들어온다.
아이템들 역시 하나같이 C등급 이상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방향에 따라 더욱 높은 등급과 낮은 등급으로 이어지는 매장의 구조까지.
‘역시 대기업은 대기업이네.’
매장 내를 둘러보던 시문은 곧장 계산대로 다가갔다.
아이템을 닦고 있던 중년의 남성이 시문을 위아래로 슥 훑더니.
빙긋 웃으며 물었다.
“찾으시는 물건이 없으십니까?”
“구매는 아니고, 판매를 하러 왔습니다.”
“아아, 판매라…….”
중년인의 미소가 한결 짙어졌다.
“판매를 목적으로 방문하신 분은 오랜만이군요. 이쪽으로 오시지요.”
그렇게 말한 중년인이 매장 끝 쪽으로 움직였다.
그곳엔 감정 스크롤부터 시작해, 다양한 아티팩트들이 깔끔히 정리되어 있었다.
“판매하실 물건은 이쪽에 올려 주시면 됩니다.”
중년인이 저울대처럼 보이는 선반을 가리킨다.
인벤토리에서 [홉고블린의 전투 도끼]를 꺼내는 시문.
“호?”
그것을 본 중년인의 눈이 반짝였다.
시문이 도끼를 선반 위에 올리자.
“이건…….”
아티팩트로 보이는 외알 안경을 낀 중년인은 곧장 아이템을 훑었고.
“홉고블린의 전투 도끼로군요? 그것도 최상급 옵션으로 말이죠.”
“예. 바로 처분이 가능할까요?”
“당연하지요.”
그도 플레이어인 걸까.
중년인은 시문의 것보다 조금 더 복잡한 플레이어 워치를 이리저리 눌렀다.
이내.
“여기, 최근 갤럭시 아고라에서 거래된 홉고블린의 전투 도끼의 시세와 내역입니다.”
질서 정연하게 정리된 숫자와 그래프들을 내미는 중년인.
그것을 확인한 시문의 눈동자가 조금 커졌다.
“4,200만 원?”
아무리 교복이라곤 하나 고작 B급 아이템이다.
한데 4,200만 원이나 하다니?
이내.
“예. 어제 기준으로 3,800만 원에 팔렸습니다만…… 그건 힘 스탯이 +4였거든요.”
중년인이 짚어 주는 거래 내역을 보며 시문은 깨달았다.
‘맞아. 여긴 11년 전이었지.’
정규 아레나와 지구의 멸망 직전까지 갔었던 전생.
그때의 B급 아이템의 가치와 지금 B급 아이템의 가치는 아예 달랐던 것이다.
‘다이아 랭크가 엄청 많던 시기는 아니니까.’
당연히 다이아 랭크 초입까지 쓸 수 있는 홉고블린의 전투 도끼는 비쌀 수밖에.
‘이거 생각지도 못한 수입이 되겠네.’
전생의 시세로 대충 천만 원대를 생각했던 걸 떠올려 보면 두 배가 넘는 가격.
‘만들려던 영약의 급을 좀 올려도 되겠어.’
흐뭇한 미소를 지은 시문이 거래를 받아들이려던 찰나.
“그런데…….”
중년인이 다소 차가워진 눈초리로 시문을 바라봤다.
“혹시 이 아이템을 어떻게 얻으신 건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그는 다시 한번 시문의 위아래를 슥 훑었다.
“제가 생산계 플레이어이긴 합니다만, 고객님께서 딱히 고레벨로는 느껴지지 않아서 말이지요.”
“아.”
시문은 왜 중년인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깨달았다.
‘의심하고 있구나.’
무리도 아니었다.
생산계 플레이어로 아고라에서 일을 하고 있다지만.
성삼에 소속된 이상 적은 레벨은 아닐 터.
그런 중년인의 시선엔 시문이 [홉고블린의 전투 도끼]를 얻을 수준으로 보이지 않는 것이다.
“혹시 레벨을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7레벨입니다.”
“7레벨이라…….”
헛웃음을 흘린 중년인은 재차 물었다.
“금액은 AP없이 전부 현금으로 받으려고 하셨을 테고?”
“예.”
“하, 이거 참.”
외알 안경을 벗은 중년인은 깍지를 끼며 말했다.
“손님, 여긴 성삼입니다. 아니, 성삼이 아닌 어느 매장을 가시더라도 문제 있는 아이템은 거래하실 수 없습니다.”
이미 단정 짓는 듯한 중년인의 모습에.
“잠시만요. 뭔가 오해가 있으신 거 같은데.”
시문은 서둘러 답했다.
“이건 순수하게 제가 아레나를 뛰어서 얻은 겁니다.”
“7레벨이? 플래티넘 랭크의 상위에서나 드롭되는 아이템을 획득하셨다?”
점점 어이가 없어지는 중년인의 목소리에 시문은 머리가 아파 옴을 느꼈다.
‘하. 이거 복잡하게 꼬이네.’
재료 아이템의 특성상, AP보단 현금 거래가 주로 이루어진다.
주 구매층인 생산계들에게는 AP의 중요도가 그리 크지 않으니까.
한데 하필이면.
저렙이 고렙의 아이템을 가져와 현금으로만 받아가려한다?
‘당연히 의심이 가겠지.’
누가 7레벨이 아레나를 뛰어 플래티넘에서나 드롭되는 아이템을 얻었다고 생각하겠는가?
시문 스스로가 생각해도 믿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사실인 것을.
증명하기가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당장 함께 아레나를 진행했던 김민형만 해도 성삼 길드 출신 아니던가?
“이야기가 좀 길어질 것 같네요. 그게 말이죠…….”
그렇게 시문이 말을 이으려던 찰나.
“이보게. 자네.”
중년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가 부른 것은 시문이 아닌, 시문의 뒤에 자리하고 있던 여직원이었다.
“저쪽에 고객님 오셨다네.”
“네, 지점장님.”
손님은커녕 쥐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거늘.
여직원은 군말 없이 자리를 물러났고.
그녀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서야, 중년인은 입을 열었다.
“고객님, 길게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는 바로 옆에 설치된 붉은 버튼을 턱짓했다.
“저 벨을 누르면 아고라의 경비들이 몰려올 테고. 자연스레 도난 물품의 주인도 찾을 수 있겠죠.”
“저기요. 믿기지 않는 건 이해합니다만, 아무 증거도 없이 사람을 이렇게 범죄자 취급하는…….”
“하지만.”
중년인은 시문의 말을 자르고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그쪽 같은 사람들은 늘 딱한 사정이 있기 마련이니, 내가 좀 도울 수도 있겠군.”
플레이어 워치를 조작하는 중년인.
“현금 천만 원.”
그는 천만 원이 입력된 송금 화면을 띄워 시문에게 내밀었다.
“이 가격에 넘기면, 난 저 벨을 누르지 않겠네. 물론 자네에 대해서도 확실히 함구해주지.”
어느새 비릿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중년인.
“자, 선택하게나.”
절대적인 갑의 위치라 여기는지 어느새 말까지 놓아 버리는 중년인.
버튼을 누르고 아고라 관리자들이 오면 상황은 분명 복잡해지겠지만.
어차피 성삼의 김민형부터 자신에게 당한 전갈 길드의 3인방까지.
무죄를 증명해 줄 사람은 넘쳐났다.
하나 그 이전에.
‘하! 이 아저씨가 듣자듣자 하니까, 진짜.’
명색이 대기업.
그것도 지점장으로 보이는 자가 심증만으로 고객을 범죄자 취급하다니?
“저기요, 지금 저랑 장난하…….”
시문이 냉담해진 눈빛으로 반박을 하려던 찰나.
“참 재밌는 이야길 나누고 계시네요, 김 점장님.”
맑고 청아한.
그리고 익숙한 목소리가 시문의 귓가로 흘러들었다.
시문은 홀린 듯.
목소리가 들려온 뒤편으로 고개를 돌렸고.
“압구정 지점장 되시더니, 아주 배짱도 좋아지셨어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청순.
그 한 단어로 모든 걸 표현할 수 있는 아름다운 여성을.
“성삼의 매장에서 대낮부터 부정을 다 저지르시고. 혹시 미치셨나요?”
“아, 아가씨?! 여긴 어떻게!”
청순한 외모에 맞지 않는 차가운 미소.
이내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는 시문을 보고선, 거짓말처럼 따스한 미소를 지어 오는 여성.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앞으로 9년 후.
“이유정…….”
무너져 가는 대한민국을 완전한 멸망으로 밀어 넣는 장본인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