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7화. 또 다른 연성 (2)
좁은 자취방.
숨 막히는 적막감이 감돈다.
‘아무 말도 없네.’
이쯤 되면 먼저 입을 열어 볼 법도 하건만.
시문은 어떤 말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자신의 가슴 정중앙.
침묵을 지키는 현자의 돌을 묵묵히 바라보기만 했다.
‘하긴, 고민되겠지.’
현자의 돌과 한 몸이 된 건 불과 하루 정도.
하지만 그 짧은 기간에.
시문은 현자의 돌이 상당한 지성을 지니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고.
그렇기에 현자의 돌이 왜 이토록 긴 침묵을 유지하는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연금술에서 인체 연성은 금기에 해당하니까.’
연금술의 지식들이 수록되어 있는 에메랄드 태블릿.
대다수의 내용이 엘릭서와 현자의 돌의 연성을 위한 지식들이었지만.
번외로 일종의 금기를 경고하는 내용들도 수록되어있었다.
‘처음 에메랄드 태블릿을 얻었을 땐, 이런 경고문은 그저 우습기만 했지.’
세계가 정규 아레나로 들어선 초기에도.
목숨을 잃는다는 리스크만 생겼을 뿐.
대다수의 플레이어들이 여전히 갤럭시 아레나를 일종의 게임처럼 취급했었다.
시문 역시 그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고.
에메랄드 태블릿에서 경고하던 인체 연성 역시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라들이 하나둘씩 망해 갈 무렵엔, 엘릭서 제작에 몰두하느라 아예 잊고 살았지.
하지만.
‘이젠 아니야.’
인체 연성의 대표적인 결과물이 키메라라는 건 잘 안다.
그것들이 아레나에서 종종 몬스터로 등장했다는 것도.
아마 현자의 돌은 그런 부분을 경계해, 이렇게 침묵을 지키고 있는 거겠지.
하나.
‘그건 현대 과학도 같은 의미로 적용시킬 수 있어.’
과학을 오로지 살인 도구로만 생각해 보라.
이만큼이나 창의적으로 훌륭한 살인 도구는 없을 것이다.
인체 연성 역시 마찬가지다.
사용자인 자신이 이로운 쪽으로만 사용한다면?
과학이 21세기의 지구를 이만큼이나 발전시킨 것처럼.
얼마든지 이롭게 사용이 가능했다.
그런 시문의 마음을 읽은 것일까?
우웅.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현자의 돌이 의사를 전달해 왔다.
“정말 이롭게만 사용할 거냐고?”
그 물음에 시문은 묵묵히 답했다.
“그럴 생각이야. 어디까지나 내가 강해질 용도로 쓰려는 거니까. 하지만.”
뻔하고 달콤한 말만 해도 될 텐데.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온다면 나도 장담은 못 해. 내겐 해내야 할 목표가 있으니까.”
시문은 속내를 조금의 숨김도 없이 말했다.
어쭙잖은 양심의 가책 때문에?
아니면 현자의 돌이 자신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거 같아서?
둘 다 아니었다.
“현자의 돌, 넌 내 회귀를 아는 유일한 존재야.”
회귀가 마냥 사기적이고 행복한 것은 아니다.
아무리 현재에 없는 정보를 알고, 그에 걸맞은 경험이 있다곤 하나.
나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그걸 직접 해나가야 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니까.
“그런 의미에서 넌, 내가 힘들 때 기댈 수 있는 유일한 동료나 마찬가지야.”
그러니.
적어도 현자의 돌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너도 날 이해는 하리라 믿어. 우린 그 미래를 함께 겪었으니까.”
우웅.
현자의 돌의 이명이 불안정하게 흔들린다.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시문은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안된다고 하면 어쩔 수 없지. 방법이 인체 연성에만 있는 건 아니니까.’
어디까지나 빠른 성장을 위한 하나의 길일 뿐.
인체 연성이 없어도 힘민체를 커버하는 수련법쯤은 얼마든지 알고 있었다.
전생에 알려진 수련법들은 모두 꿰고 있으니 말이다.
길지 않은 침묵이 이어졌고.
웅.
마침내 기다리던 답이 찾아왔다.
시문은 가슴에서 전해져 오는 맑은 이명에 미소를 지었다.
“이해해 줘서 고맙다.”
우웅.
“알아. 인체 연성의 위험성은 이미 충분히 인지하고 있어.”
비록 겉핥기식으로 넘어갔을지언정.
인체 연성이 흑마법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쯤은 숙지해 놓은 상태다.
그러나.
“뭐? 그런 게 아니라고?”
현자의 돌이 경고하는 것은 전혀 다른 부분이었다.
우우웅.
“에메랄드 태블릿의 반대되는 물건? 그게 무슨 말이야?”
우웅.
“그러니까, 에메랄드 태블릿처럼 그쪽 지식이 집약된 물건이 있다고?”
웅.
긍정의 의사를 전하는 현자의 돌.
그에 시문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상할 것도 없지. 에메랄드 태블릿엔 인체 연성과 관련된 건 없었으니까.’
에메랄드 태블릿에는 그저 인체 연성에 관한 경고만 쓰여 있지 않았나?
시문은 턱을 괴었다.
‘처음 에메랄드 태블릿을 얻었을 당시, 자격시험을 받았었지.’
에메랄드 태블릿을 쥐자마자 떠오르던 메시지창.
[에메랄드 태블릿의 소유 자격을 시험합니다.]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고작 아이템이 소유 자격을 시험해서가 아니었다.
실제로 고등급 아이템의 경우.
대상자의 자격을 시험하는 경우가 꽤 많았으니까.
그럼에도 시문이 당시를 잊지 못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었다.
[자격 확인. 에메랄드 태블릿이 당신을 소유자로 인정합니다.]
정전기처럼 조금의 따끔함이 느껴졌을 뿐.
소유자가 된 이후로 에메랄드 태블릿은 어떤 현상도 일으키지 않고.
매끈한 표면 위로 소유자만이 볼 수 있는 엘릭서와 현자의 돌 제조법을 비춰 주었다.
‘덕분에 도난도 당하지 않았지.’
1레벨인 시문이 에메랄드 태블릿을 온전히 소유할 수 있었던 이유.
그것은 한국 최강의 플레이어인 김시혁이나 고말숙과의 인맥이 아닌.
시문 외에는 누구도 쓸 수 없는 귀속 여부와 도난자를 ‘태워’ 버리는 도난 방지 기능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소유 자격이 없는 자를 죽여 버리는 거였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다소 섬뜩한 일이다.
만약 재수가 없어 소유 자격이 미달이었다면.
시문 역시 도난자들처럼 새까맣게 타 죽었을 테니까.
그야말로 천운인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현자의 돌의 걱정거리도 감이 잡혔다.
“현자의 돌, 넌 내가 그 연성물에 자격이 없을 경우를 걱정하는 거구나.”
웅.
짧게 전해져 오는 긍정.
시문은 심각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하긴, 연금술에 대한 지식만 담고 있던 에메랄드 태블릿도 그런 기능이 있는데.’
인체 연성의 지식이 수록된 물건이 자격을 따지지 않을 리 없었다.
‘쓰읍. 그냥 걸러야 하나?’
굳이 타 스탯에 목숨을 걸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효율적인 수련법을 다소 알고 있으니.
저레벨인 지금부터 열심히 달린다면 충분히 갖출 수 있었다.
그때.
웅웅.
현자의 돌이 재차 말을 걸어왔다.
“뭐? 네가 자격 미달의 페널티를 어느 정도는 막을 수 있다고?”
현자의 돌에 그런 기능도 있었나?
‘하긴, 리바운드도 최소화하는 마당에 이상할 것도 없겠군.’
잠시 고민하던 시문은 입을 열었다.
“이것만 확실히 말해 줘. 죽음까지는 막을 수 있는 거지?”
웅.
“좋아.”
현자의 돌의 긍정 의사에 시문은 고개를 끄덕였다.
“난 이제 정식 플레이어니까, 죽지만 않는다면 어떻게든 회복할 수 있어.”
튜토리얼도 거쳤으니.
플레이어 전용 병원도 이용할 수 있었다.
그곳이라면 갓 튜토리얼을 끝낸 플레이어쯤은 얼마든지 회복시킬 수 있을 터.
‘정 안되면 시혁이 놈한테 부탁하지 뭐.’
자신은 비록 이런 자취방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3레벨의 연금술사지만.
이 시기의 동생 놈은 최상위권을 휩쓰는 능력자 아닌가?
거기에다 자신과 다르게 김씨 가문의 적통이니, 의료수준도 차원이 다를 것이다.
‘나도 참 많이 변했구나.’
사람은 죽을 위기를 거치면 변한다더니.
예전 같았으면 꿈도 꾸지 않았을 동생 놈의 도움을 떠올리고 있다.
시문은 장롱 옆에 있는 다소 얼룩진 거울을 바라봤다.
‘지금 와서 보면 참 어리석었네.’
가끔은 가족에게 기대어도 되었을 텐데.
그런 게 가족 아니던가?
한데 왜 그렇게 혼자서 이를 악물고 살았을까.
21세기에 사생아라는 희귀 태생이라서?
아니면 하락선만 타던 나보다 상승선만 타던 동생 놈이 보기 힘들어서?
‘아마 전부 다……겠지.’
사실 마흔을 바라보던 전생에서야,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던 것이지.
지금 이 시기.
28세의 자신에겐 떠올리는 것조차 괴로운 것들이다.
하나.
“이젠 아니니까.”
그때는 그때일 뿐.
이미 지나간 일일뿐더러, 젊은 시기라면 누구나 겪을 만한 고뇌일 뿐이다.
시문은 피식 웃으며 감정을 정리하곤, 상태창을 열었다.
“어디 보자. 우선 잔여 스탯을 전부 연성력에 투자하고…….”
조금이라도 연성력이 높아야 연성에서 이득을 볼 테지.
시문은 11이었던 연성력을 13으로 만들곤 상태창을 닫았다.
그러곤 물었다.
“현자의 돌, 연성물의 대략적인 이미지 좀 알려 줄 수 있어?”
우웅.
“에메랄드 태블릿에서 색깔만 다르다고? 알았어.”
시문은 곧장 연녹색의 비석을 떠올렸다.
마치 최신식의 폰 화면처럼.
비석을 액정 삼아 원하는 지식을 편리하게 열람할 수 있었던 에메랄드 태블릿.
그 익숙한 이미지와 구조를 떠올리고.
‘색깔은 연녹색 대신 검보라색.’
현자의 돌이 알려 준 색깔로 세부적으로 구상한다.
이어 가슴 정중앙에서 흘러나오는 연성력을 끌어올려 손가락을 튕기면.
따악.
[요구치에 맞는 연성을 이루기에는 연성력이 부족합니다.]
기다렸다는 듯 올라오는 메시지창.
하지만.
‘이미 예상하고 있었어.’
이미 에메랄드 태블릿과 동급이상인 것을 알고 있던 시문은 차분히 다음 메시지를 기다렸다.
[현자의 돌이 부족한 등가교환을 성립시키기 위해, 업적 포인트 10,000점을 요구합니다.]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아스트라페를 연성했던 것처럼.
현자의 돌이 자연스럽게 등가교환을 위한 업적 포인트를 요구했다.
자신 있게 ‘예’를 향해 손을 뻗던 시문은 움찔했다.
“잠깐. 만 점이라고?”
시문은 눈을 몇 번 깜빡거리더니 세게 비비기까지 했다.
하지만 메시지창은 여전했다.
“만 점? 현자의 돌, 이거 진짜 만 점이나 들어?”
웅.
“이것도 싼 거라고?”
아스트라페는 500점인데?
현자의 돌의 긍정에 시문은 헛웃음을 흘렸다.
기껏 12,300점으로 만들어 뒀더니, 거하게 출혈하게 생겼다.
“후. 어쩔 수 없지.”
리스크 없인 얻는 것도 없으니까.
애당초 안정성을 고려했다면.
인체 연성이라는 방향 자체를 바라보지 않았을 것이다.
마음을 결정한 시문은 ‘예’를 선택했다.
[업적 포인트 10,000점이 차감됩니다.]
업적 포인트가 차감되고.
부족한 연성력을 대체하는 익숙한 기운이 손끝에 모여든다.
그 기운 그대로 손가락을 튕기자.
스아아아.
어디선가 나타난 검보랏빛 기운이 시문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그것은 똬리를 틀듯.
스산한 움직임으로 시문의 손을 휘감았고.
꾸드득.
살점, 혹은 그에 준하는 무언가가 으스러지는 소리를 자아냈다.
그 괴이한 소리는 점점 커지더니, 마침내 하나의 네모난 형태로 변했다.
“이거…….”
색을 제외하면.
에메랄드 태블릿과 조금도 다름없는 형태의 비석.
아니, 다른 게 딱 하나 있긴 했다.
“살아 있잖아?”
생물의 핏줄, 혹은 그 심장처럼 연신 꿈틀거리는 비석.
형태만 비석일 뿐.
눈앞의 연성물은 살아 있는 생명이라 해도 이상할 것이 아니었다.
그때.
[등록되지 않은 신화적인 산물을 제작하였습니다.]
[업적 포인트 5,000을 획득합니다.]
[칭호 ‘연금술의 선구자’의 옵션이 성장합니다.]
[칭호 ‘연금술의 선구자’에 새로운 옵션이 추가됩니다.]
일련의 메시지창들이 시문의 시야에 떠올랐다.
‘칭호가 성장했다고?’
15킬에 점령 포인트 100%.
그 압도적인 성적에도 꼼짝하지 않던 연금술의 선구자가 성장하다니.
시문은 즉시 칭호창을 열어 ‘연금술의 선구자’를 확인했다.
[연금술의 선구자] - 성장형
연금술의 신화적인 산물을 모두 연성한 연금술사에게 주어지는 칭호.
-연성 관련에 아주 작은 보너스를 받는다.
-연성에 소모되는 연성력이 5% 감소한다.
“호오.”
탄성이 절로 나온다.
연성력 5% 감소.
한 자리 숫자라 작아 보일 수 있겠으나.
고레벨로 갈수록 퍼센티지의 효율이 높아지는 것은 물론이요.
앞으로 칭호가 성장한다면 저 수치도 점점 상승할 터.
결국 ‘연성력 소모도 감소’라는 옵션을 얻은 것에 중점을 두면 명백한 사기 옵션이었다.
‘말숙이가 괜히 성장형 칭호를 언급한 게 아니었어.’
흐뭇하게 웃는 시문.
그의 앞으로.
[창조한 적 없던 신물의 탄생에 저편의 성좌 검은 염소가 크게 노합니다.]
[성좌 검은 염소가 당신에게 묻은 흔적에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성좌 검은 염소가 진노 대신 짙은 관심을 표합니다.]
갑작스러운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검은 염소? 처음 듣는 성좐데.’
성좌 검은 염소.
정규 아레나가 시작되었던 전생에서도 들어 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그나마 이해를 해 보자면.
‘저편의 성좌라…… 설마 그 칭호 때문인가.’
자신도 모르게 얻었던 칭호 ‘저편의 시선을 받는 자’.
올림푸스의 성좌들이 보인 반응도 그렇고.
칭호에 따로 옵션은 없었으나, 마냥 아무 능력 없는 칭호는 아닌 듯했다.
‘어찌 됐든 다행이야. 성좌의 분노는 꽤 위험하니까.’
아직 정규 아레나가 아니라 큰 피해는 없겠지만.
시문은 성좌가 신에 버금가는 이들인 걸 안다.
그렇기에 굳이 성좌와 척을 질 필요는 없었다.
[갤럭시 아레나에 등록되지 않은 성좌, 검은 염소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연달아 이어지는 믿을 수 없는 업적에 갤럭시 아레나에서 플레이어 김시문에 대한 논의가 들어갑니다.]
이어지는 메시지창에 시문의 눈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연달아라…… 그 말은 내가 이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는 건데?’
아스트라페는 아닐 것이다.
당시 올림푸스의 성좌들이 관심은 표했으나, 이러한 문구는 뜨지 않았으니까.
‘그럼 전생에 마지막으로 연성했던 연성물 때문이겠군.’
회귀와 마력불능의 회복.
두 가지 요구 조건에 맞춰, 자신의 감각까지 뺏어 가며 현자의 돌이 연성했던 그것.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연성의 여파로 감각을 잃은 게 아닌 거 같아.’
바로 자신의 목숨.
애당초 현자의 돌은 본래 힘과 더불어, 자신의 목숨마저 연성의 등가교환에 사용한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업적 포인트를 100만 점이나 받을 정도로 대단한 것이겠지.
하나.
“지금 중요한 건 이거지.”
그간의 의문이 풀리긴 했으나 결국 지나간 일.
시문은 눈앞에서 연신 꿈틀거리는 검보라색 비석을 바라봤다.
그러자 눈앞으로 비석의 정보가 떠올랐고.
“이건…….”
정보를 확인한 시문의 두 눈은 휘둥그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