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동부 (5)
“옛 트로이반의 영역을 봉토로 하사한 소가주 테오 라그나르에게 트로이반의 잔당 토벌은 물론, 성마교 수색까지 명령한다.”
“분부 받듭니다.”
카일이 사절을 통해 지시한 명령은 테오가 앞으로 동부에서 활동하는 데 있어 아주 큰 힘이 되어줄 게 분명했다.
어떤 분쟁이 생기더라도 ‘잔당 토벌’이나 ‘성마교 수색’을 명분으로 내세운다면 아무도 함부로 범접할 수가 없을 테니.
그래서 떠나는 테오를 환송하는 윈터러의 주민들은 하나 같이 이전처럼 테오가 이번에도 성마교를 궁지로 몰아넣어 ‘끝장’을 내어줄 거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무리 성마교가 쥐새끼 같아도 소가주님이면 충분히 해내실 수 있지. 암, 그렇고말고!
-그럼! 불과 열여섯의 나이에 지금의 자리를 꿰찬 분이 아니신가?
-카일 님의 뒤를 이어 라그나르의 중흥기를 이끌어가실 재목이시지!
제국이 아무리 심혈을 기울여도 뿌리를 뽑을 수 없었던 성마교를 해치운다면 그보다 더 큰 공은 없을 터였다.
그렇게 모든 기대와 환호를 안고, 수많은 지원자들과 함께 동부로 이동을 개시했다.
-죄다 늠름하구만. 대체 저런 인재들을 어디서 발굴하신 거지?
-그 왜 있잖은가. 제4연무장의 괴짜들. 그 친구들이지 않은가?
-확실히 그네들의 실력이 많이 올라서 다들 놀라긴 했었지. 그런데 거긴 그렇다 쳐도…… 대체 저 뒤엔. 흠!
-소가주께서는 계획이 다 있으신 게지.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온통 소가주 행차의 마지막 부분에 쏠렸다.
아주 익숙한 얼굴이, 하지만 저 행렬에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은 사람이 같이 움직이고 있었으므로.
“…….”
본인 역시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지 입술을 꾹 다문 채 묵묵히 행렬을 따를 뿐이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죄인의 신분이었지만, 지금은 아무런 구속구도 착용하지 않은 자.
킨카르논이었다.
* * *
“큰형님.”
이전 감옥에서의 마지막 만남에서.
테오는 문을 닫고 떠나려다 말고 갑자기 돌아와서는 그렇게 킨카르논을 불렀다.
여태 실컷 죄인 취급 해놓고서는 갑자기 웬 존대?
알고 싶은 것도 다 알아냈으면서 또 무슨 일로 왔나 싶어 바라보는데-
“혹시 저와 함께 하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킨카르논은 빤히 테오를 바라봤다.
자신이 뭔가 잘못 듣기라도 했나 싶어서.
하지만 테오는 웃었다.
“아시다시피 저는 동부로 가야 합니다. 하지만 앞으로 성마교와 전쟁을 치르려면 옛 트로이반의 영역을 다스릴 짬이 나지 않습니다.”
“……설마 나 대신 동부를 다스리라는 건 아니겠지?”
“왜 아니겠습니까?”
“혹시 뭘 잘못 먹었나?”
“전 멀쩡합니다만.”
“그런데 너와 대적한…… 그것도 선택자의 자리마저 빼앗으려 한 나를 중용하겠다고?”
“확인된 인재를 두고 굳이 다른 사람을 뽑는 모험을 할 필요는 없잖습니까?”
킨카르논은 헛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차갑게 얼굴을 일그러뜨릴 뿐.
“날 희롱하고 싶은 것이라면 그만둬라. 라그나르의 뒤를 잇겠다는 놈이 그딴 그릇으로……!”
“단순히 희롱을 할 것이었다면 이것 말고도 다른 방법도 많겠죠.”
“…….”
“큰형님은 대답만 하시면 됩니다. 저를 따를 건지 말 건지.”
킨카르논은 빤히 테오를 노려봤다.
자신을 비웃고 있을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하지만…… 테오는 비웃고 있지 않았다.
그저 무덤덤한 눈빛만 하고 있을 뿐.
거기서 킨카르논은 깨달았다.
-아, 이놈은 날 더 이상 자신의 위험 상대로 생각지 않는구나.
한번 꺾어서 그런 걸까. 그래서 기고만장하는 걸까. 테오는 킨카르논이 다시 재기를 노린다고 해도 언제든 깨부술 수 있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리고.
킨카르논은 왜 테오가 그런 눈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바로 알 수 있었다.
-과거로 돌아가 새로운 기회를 붙잡길 바라던 자신과 다르게, 테오는 먼 미래를 응시하며 또 다른 기회를 잡으려 하고 있었다…….
그건 바로 자세의 차이였다.
과거를 보는 사람과 미래를 보는 사람.
앞으로 걷기만 할 후자가 제자리걸음이 고작일 전자를 두려워하지 않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닌가?
와지끈.
결국 킨카르논은 마음 한편에 자리 잡고 있던 마지막 남은 승부심까지 꺾이는 소리를 듣고 말았다.
싸움도. 자세도. 의식도. 모두 자신이 패배한 것이다.
“……마음대로 해라.”
여기서 킨카르논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모든 처분을 테오에게 맡기는 게 전부.
“그럼 다음에 밖에서 뵙겠습니다.”
테오는 그런 킨카르논의 항복을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6번조의 조원으로 밀어 넣었다.
당연히 이 날의 결정은 윈터러에 크나큰 파장을 나았다.
흑룡이나 매화궁주도 따로 테오를 찾아와 우려 의사를 표시할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라그나르의 법칙은 승자독식 아닙니까. 저는 승리했고 킨카르논은 패배했습니다. 그래서 거둔 거구요. 그러니 절차에 문제는 없습니다.”
“안다. 하지만-”
“게다가 현재 라그나르의 권좌 경쟁 체제엔 문제가 있습니다. 전 제 대에 그걸 뜯어고치고 싶습니다.”
“문제?”
“예. 권좌 경쟁은 크게 내전까지 겪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줄을 잘못 선 자들은 줄줄이 숙청되구요. 전 그 전력 손실이 너무 아깝다고 생각합니다.”
전력 손실이 심각하다.
그건 오랫동안 테오가 가슴에 품고 있던 의견이었다.
권좌 경쟁을 치르는 중에 줄줄이 죽어나가는 아까운 인재들은 어떤가.
그리고 줄을 잘못 섰다는 이유만으로 중용되지 못하고 내팽개쳐지는 고수들은 또 오죽 많은가.
승자와 패자.
그네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원한 관계도 라그나르의 단합에 방해만 될 뿐이다.
힐다, 광룡제, 카일, 풍존, 킨카르논에 이르기까지.
당장 거론되는 이들만 통합할 수 있어도 라그나르는 이렇게 생존의 위기까지 겪지 않았을 것이다.
테오는 그렇게 생각했다.
“골육상쟁은 더 이상 제 취미가 아닙니다.”
그게 설사 전통이라고 한들, 더 이상 잘못된 전통은 이어나가지 않을 것이다.
테오는 그렇게 선언했다.
그리고.
“-그래. 그게 네가 그리는 라그나르라면 우리가 이야기할 것은 아니겠지. 네 대에는 또 새로운 라그나르가 시작될 것이니.”
흑룡과 매화궁주는 굳이 테오의 결심을 막지 않았다.
비록 그들 의형제가 만든 라그나르와는 다른 방향일지라도. 설사 그들이 꿈꾸던 이상이 부정되는 것일지 몰라도. 그들은 테오를 존중했다.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막아서는 안 된다.
그건 그들이 광룡제의 압제에서 저항을 시도했을 때부터 항상 가슴에 품고 있던 생각이었다.
먼 과거의 광룡제는 그러지 못했지만. 그들만큼은 조금씩 양보하며 슬슬 물러날 준비를 해야 할 때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테오의 다짐 하에 6번조에 새롭게 밀어 넣어진 이들은 킨카르논만이 아니었다.
“……와, 이건 좀 아닌데. 이봐요, 소가주님? 저희가 소도 아니고 코 꿰여서 끌려오는 건 아니지 않아요? 대답 좀 해주시죠. 네? 네에?”
“인사이동 명령이라니……! 저 역시 르제 언니의 의견에 동의해요. 이런 횡포는 들어본 적도 없다구요!”
르제와 안시오도 같이 섞여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아직 권좌 경쟁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은 만큼 반발이 적잖았지만.
테오는 아주 간단하게 일축할 뿐이었다.
“두 분 다 꼬우면 덤비시던가.”
“…….”
“…….”
인사이동 명령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겨서 없던 것으로 만들면 된다는 아주 신박한 논리.
문제는 두 사람이 당장 테오와의 대련에서 이길 자신이 없다는 거였다.
사실 그게 아니더라도 두 사람이 처한 입장도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르제는 이제 갓 9룡의 자리에 오른 만큼 자신이 거기에 어울릴 만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입증해야만 했던 만큼, 사실 성마교 토벌만큼 거기에 좋은 자리도 없긴 했다.
반대로 안시오는 갑자기 패룡이 테오의 손을 들어주면서 사실상 테오에게 종속될 수밖에 없는 상태.
여기서 독립을 하려면 패룡과의 관계를 끊어야 했으나, 사실상 그건 자신의 기반을 모두 버린다는 뜻이기 때문에 역시나 불가능했다.
“흠흠! 잘 생각해보니까 소가주를 도와서 동부 정리에 큰 공을 세운다면 내 위업도 올라가는 거잖아? 대승적인 결단에 따라야지 뭐. 사신조도 적극적으로 도울 거야!”
“…저 역시 이번에도 동의해요. 스승님도 적극적으로 소가주를 돕겠다고 공언하셨고, 지금은 무엇보다 권력 다툼보다는 가문의 단합이 필요한 시기이기도 하니 저도 동참하겠어요.”
테오로서도 이들을 눈 밖에 둬서 언제 자신의 뒤를 찌를지 모르는 비수로 놔둘 바에는, 언제든 손에 닿을 수 있는 곳에 둬서 마음대로 써먹는 게 좋았다.
그들이 딴 생각을 품지 못하도록 어떻게 이용해 먹을 건지도 전부 생각해둔 상태이기도 했고.
『독한 놈……. 제 형제들의 골수까지 쥐어짜겠지.』
로드브로크는 곧 자신과 비슷한 신세가 된 채로 비명만 꽥꽥 질러댈 세 사람의 미래가 그려져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바라봤다.
* * *
휘이이……!
마도기관열차를 타고 이동한 지 나흘째.
일행은 목적지로 한 기차역에서 내리자마자 을씨년스런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여기가 원래 이렇게 한적했나?”
르제는 조금 난감하다는 얼굴로 역사(驛舍) 주변을 살폈다.
트로이반의 영역 중 주도(主都)라고 할 만한 페링턴 시는 원래 윈터러에 못지않은, 아니, 어떤 부분에서는 그보다 훨씬 많은 물동량과 유동 인구를 자랑하는 대도시로 알려져 있었다.
르제 역시 북방전쟁이 개시되기 전에 이곳을 방문한 적이 있었으므로, 패링턴 시가 얼마나 번화한 지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역사 주변에서 인파는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가게는 전부 문을 닫았고, 그 흔한 노점상 하나 없었다.
“패배자의 말로는 비참한 법이니까요.”
“그래도 명색이 새로운 영주가 이렇게 왔는데 맞아주는 사람도 없고……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아무리 도시의 경기가 죽었다고 하더라도, 당장 이 도시를 점거해서 대리 통치하고 있는 라그나르의 기구는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명색이 소가주가 왔는데 얼굴 코빼기조차 내비치지 않는다?
르제는 강제로 끌려온 입장이면서도, 감히 위계 질서가 흐트러지는 꼴은 보지 못했다.
“로멜.”
스르륵-
르제의 그림자가 출렁거리면서 복면인이 천천히 내려왔다.
“여기 책임자 데려와.”
“존명.”
복면인은 그림자에 녹은 채로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사신조가 움직였으니 곧 죄인들을 이곳으로 끌고 올 터였다.
저항한다면 모가지만 들고 돌아올 것이고.
‘뭔가 좀 이상한데.’
하지만 테오는 이 을씨년스런 분위기에서 뭔가를 감지한 상태였다.
어딘지 낯이 익은 듯한 기분.
특히 대기 중에 섞인 공기가 익숙했다…….
‘로디.’
『그래. 맞는 것 같다.』
로드브로크가 깊게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죽음의 냄새가 너무 짙게 나는구나. 이 도시…… 이미 성마교 놈들에 의해 점거된 듯하다.』
회귀검가의 서자가 사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