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동부 (3)
“그럼 광룡제가 어디로 연결되어 있는지가 중요한데. 어딜까?”
테오가 두 눈을 가늘게 좁혔다.
“가드너 가주인가?”
킨카르논은 두 눈을 세게 감았다.
태고룡의 유물에는 도무지 현상을 이해할 수 없는 여러 신비가 가득하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진위 여부를 가릴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거면 충분해.”
테오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로써 다음 타깃이 정해진 것이다.
쿵!
테오가 떠난 자리. 감옥의 문이 다시 닫히면서 어둠이 내려앉았다.
킨카르논은 제자리에서 꿈쩍도 할 수 없었다.
그 어둠과 적막이 모든 걸 잃고 추락한 그의 인생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였다.
* * *
백갑용기대 전체에 명령이 떨어졌다.
-이번 쿠데타에 가드너 가문이 적극 가담한 것은 물론, 트로이반의 잔당과 엮여 있는 것으로 판단. 그들을 공적으로 지정하고 토벌을 명령한다.
토벌(討伐).
그 단어가 북방에서 가지는 무게는 절대 작지 않았다.
관련자들을 풀 한 포기조차 남기지 않고 모조리 처분한다는 의미이므로.
때에 따라서는 가드너라는 이름을 6설가에서 완전히 축출할 수도 있음을 의미하기에 다들 정신 없이 바빠졌다.
캬아아악!
“가자!!”
갑주를 차려입은 비룡들이 괴성을 지르면서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아모레가 앞장 서고, 그 뒤를 다른 대원들이 대열을 갖춘 채 비상하는 장면은 장관이 따로 없었으니.
-에그머니나! 이게 무슨 일이람!
-킨카르논 님이 쿠데타의 주범이었다잖아. 그 혐의가 가드너에게서도 발견되었대.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트로이반과 전쟁이 끝난 게 대체 언제라고…….
하늘을 빼곡 물들인 백여 마리의 비룡들을 보면서 사람들이 더 이상 아무 일도 없기를 간절히 바라는 동안.
따앙! 따앙!
테오는 토벌대에 합류하지 않은 채 바스크 공방에 와 있었다.
“……이건 또 뭐냐?”
키르손은 곰방대를 입에 물다 말고 테오가 슬그머니 내미는 대검을 보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보시는 그대롭니다.”
“내가 이걸 만드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
키르손은 뒷머리를 꽉 부여잡으면서 끓어오르는 분기를 어떻게든 눌러야만 했다.
“저 위에 날아다니는 놈들과 같은 이유냐?”
쿠데타 때문에 벌어진 일이냐는 뜻.
테오는 계면쩍은 얼굴로 볼을 긁적였다.
“예. 그러니 화풀이는 곧 잡아올 놈들에게다 쏟아내시는 게 어떠시겠습니까?”
“하여간 주댕이는……!”
키르손은 두 동강 난 드레이크의 날붙이를 건네받아 이리저리 만지더니 인상을 더 크게 구겼다.
“이 미친놈이. 이래서는 더 만지기가 어렵잖아! 이건 못 써! 아무리 이리저리 붙여보려고 해도 절대 이전과 같은 기능이 안 나온다고!”
드레이크의 날붙이는 단순히 레서 드레이크의 재료만 들어간 게 아니었다.
그녀가 갖고 있던 여러 귀중한 재료들까지 같이 들어갔기 때문에 수리는 불가능했다.
차라리 녹여서 새롭게 만들면 모를까.
당연한 말이지만, 그래서야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는 격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있어도 수리가 힘들까요?”
“또 뭘 갖고 왔…… 허어억! 이, 이것은!”
키르손은 화를 내다 말고 두 눈이 휘둥그래져서는 테오가 내미는 재료에 찰싹 달라붙었다.
마치 소중한 보물이라도 만지는 것처럼. 혹여 상처라도 날까 봐 떨리는 손길로 겉면을 조심스럽게 쓰다듬기까지 했다.
이 자태, 이 느낌, 이 단단함을 보라지!
아아! 이 세상에 이렇게 완벽한 재료가 또 어디 있단 말인가!
“헤헤헤헤헤. 츄릅!”
키르손은 자기도 모르게 군침을 질질 흘리기까지 했다.
『……저 엘프더러 더러워 죽겠으니 좀 떨어지라고 하여라.』
“헤헤헤헤헤.”
『당장! 어서!!』
군침이 닿으려 하자 로드브로크가 기겁해서는 테오를 어떻게든 키르손 근처로 밀어 넣으려고 했다.
키르손이 품에 잔뜩 끌어안아 변태처럼 쓰다듬고 있는 것.
어젯밤 로드브로크가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면서 뽑아 준 늑골의 일부였다.
『저걸 뽑느라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솔직히 늑골의 겉면을 긁어낸 것에 불과하시지 않습니까.’
『그런다고 아픈 게 사라지냐! 난 진짜 아팠다고! 게다가 반려, 그대가 보강 마법에 강화수까지 확실하게 바르라고 날 들들 볶았던 걸 그새 잊은 것이냐!』
그냥 늑골 조각만 주어서는 그냥 질 좋은 무기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니 당신이 알고 있는 최고의 마법을 죄다 걸어서 아예 아티팩트로 만들어달라.
이것이 테오의 주문이었고, 로드브로크는 제 손으로 늑골을 뽑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걸 며칠 내내 둥지 안쪽에 틀어박혀 만질 생각에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았다.
하지만 못하겠다고 저항할 때마다 ‘그럼 제가 좀 다치고 말죠, 뭐’라거나 ‘로드의 치료도 그만큼 늦어지겠네요’ 따위로 협박을 일삼는데…… 울화통이 터져 죽을 것 같았다!
‘인생. 아니, 용생이 다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그댈 만나고 더 그런 것 같다만!』
분명히 처음에는 이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가면 갈수록 테오의 능글맞은 모습에 자꾸만 더 많이 말려드는 것 같았다.
“이거 대체 어디서 구한 게냐?”
키르손은 한참 동안 로드브로크의 늑골을 끌어안고 헤실대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두 눈은 여전히 ‘$_$’ 모양으로 돌아가고 있는 걸 보니 새로운 돈 냄새를 또 기가 막히게 맡은 것 같았다.
“자세히는 말씀드리기 어렵고, 소가주에게만 주어지는 특별한 루트가 있다고만 알아두시면 됩니다.”
“양은? 이런 게 얼마나 되지?”
“음.”
『없어! 이제 더 이상은 없다고!』
“뭐, 필요하실 만큼은?”
『이놈이!!』
“오오오오!”
“기대하시는 것만큼 그렇게 많은 건 아닙니다. 그래도 다른 재료도 있긴 합니다만.”
“으잉? 이게 끝이 아니라고오?”
“손톱, 발톱, 비늘, 머리카락, 고대룡의 재료는 웬만하면 다 구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야!』
테오는 영체의 모습을 한 채 미쳤냐는 투로 두 눈을 부라리는 로드브로크에게 히죽 웃어 보였다.
“그, 그렇단 말이지? 그, 그, 그럼 호, 혹시 그, 그걸, 내, 내가 좀 보, 볼 수 이, 있을까?”
어디 수전증이라도 걸린 것처럼 로드브로크의 손발이 달달 떨렸다.
“수리부터 해주셔야죠.”
“그, 그래야지!”
“언제 오면 되겠습니까?”
“일주일! 일주일 뒤에 와!”
“좀 더 빨리는 안 될까요?”
“이놈이! 그건 나더러 밤 새서 일만 하면서 고생하라는……!”
키르손은 버럭 소리를 지르려다가 싱글싱글 웃는 테오의 낯을 보고 뒤늦게 억지 웃음을 지었다.
“-거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해야지! 암! 우리 소가주님이야말로 공사가 다망하신 데 내가 어떻게든 도와드려야지! 암! 도와드려야 하고말고!”
“며칠이면 될까요?”
“닷새!”
“사흘 안에 부탁드리겠습니다.”
“…하, 하하하! 당연하고 말고!”
“아, 용활검도 같이요.”
“……일이 두 배로 늘었구나! 하하하하!”
테오는 웃었다.
‘역시 키르손 님은 이야기가 잘 통해서 좋아.’
『협박은 아니고?』
로드브로크가 옆에서 툴툴대는 소리가 들렸지만.
당연한 말이지만, 그냥 무시했다.
* * *
용활검과 드레이크의 날붙이가 멀쩡해진 모습으로 돌아온 것은 정확하게 사흘 뒤.
가드너의 토벌을 마치고 백갑용기대가 돌아왔을 때쯤이었다.
가드너의 가주, 알곤의 머리는 길쭉한 장대에 꽂힌 채 윈터러의 입구에 걸렸다.
마치 라그나르의 적들에게 경고라도 하듯이.
그리고 새로운 발표도 줄줄이 따랐다.
-이적 행위로 가드너 가주 알곤을 비롯한 휘하 봉신들을 사형에 처한다.
-새로운 가주로 셀퍼드 가드너를 임명한다.
-징계로 가드너에 약속된 이권을 절반으로 축소한다.
-또 다른 징계로 가드너의 서열을 6설가 중 6위로 지정한다. 그리고 약 한 달간 서열 쟁탈전을 허한다.
서열 쟁탈전.
6설가라는 위치는 단순히 ‘라그나르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봉양하는’ 가문들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라그나르의 인정을 받은 지정 군주로서 북방의 이권 중 일부를 허가받고 세금을 거둘 수 있는 대표 기수 가문을 의미했다.
당연히 그 자리를 탐내는 곳은 아주 많은 편이었고.
만약 쟁탈전에서 밀려나게 되면 6설가의 자리는 다른 곳으로 대체될 터였다.
즉, 지금 떨어진 발표의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
-네 아비가 싸지른 똥은 자식인 셀퍼드, 네가 치워라.
한평생 알곤을 아버지라고 생각도 하지 않았던 셀퍼드로서는 당장 다 때려치우고 싶었지만.
“이거 받앙.”
“이게 뭡니까?”
“뭐긴 뭐양. 앞으로 네 주군 되실 분의 편지징.”
셀퍼드는 아모레가 건넨 편지를 받고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지금 당장은 힘드시겠지만, 최대한 버텨주십시오.
명령이라면 첫 번째 지령이 될 명령서.
어떻게든 자신의 힘이 되어달라는 뜻인 것이다.
“백갑용기대의 도움을 바라기는 힘들겠죠?”
“서열 쟁탈전은 대가문의 개입이 불가능하니깡. 알면서 왜 그랭.”
“그렇죠……. 답답해서 여쭤봤습니다.”
현재 가드너는 주축 인사들이 죄다 모가지가 잘린 상태.
중간 간부들도 4할 가까이가 날아간 탓에 하위 가솔들의 동요가 만만치 않았다.
그나마 셀퍼드가 그동안 가솔들에게 심은 인상이 좋고, 테오의 오른팔이라는 소문이 돌아서 그렇지, 그런 것이라도 없었더라면 진즉에 가문은 결딴이 났을 터였다.
하지만 과연 이 전력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테오의 배려로 ‘일 년’이 아닌 ‘한 달’로 쟁탈전 기간이 적게 주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연달아 도전해올 기수 가문들을 떠올려 보면 벌써 가슴이 갑갑해졌다.
“그래도 네 주군이 되실 분이 선물을 남겨 놨으니깡. 걱정 말라궁.”
“……?”
셀퍼드는 테오의 ‘선물’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아모레는 아리송한 미소만 남기고 백갑용기대와 함께 자리를 떴다.
다행히 그 선물이 무엇인지는 이튿날 알게 되었다.
“여길 직접 방문하는 것도 오랜만이군. 10년 만인가?”
갑자기 나타나 가드너의 장원 앞에 군영을 갖춘 수백 명의 검사들.
벌써 쟁탈전이 벌어진 건가 싶어 가솔들이 잔뜩 긴장한 가운데, 군영 위로 나부끼는 깃발을 알아본 몇몇이 비명을 질렀다.
-랑케다!
-랑케의 가주가 복수를 하려고 찾아왔다아!
그동안 알곤 가드너와 앙숙 관계였던 브라켄 랑케의 등장을 호의적으로 여길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기다렸다는 듯이 곧이어 나타난 또 다른 가문이었다.
-바커스! 바커스도 나타났다!
-나반 바커스가 출정을 하다니……!
-바커스도 이전 일 때문에 이권을 꽤 많이 빼앗겼었다고 들었는데. 혹시 본가의 이권을 가져가려고……?
역시나 6설가에 해당하는 바커스 가문.
랑케와 바커스. 두 곳의 가주는 처음 보는 사이임에도 반갑게 인사를 나눴고.
끼이익!
곧이어 셀퍼드도 장원의 문을 열고 나가 그들을 맞았다.
-어, 어떡하면 좋지?
가드너의 가솔들은 행여나 브라켄과 나반이 자신들의 가주에게 해코지를 하는 게 아닐까 싶어 발을 동동굴렸다.
한편으로는 전혀 주눅 든 기색 하나 없이 그들을 맞이하는 셀퍼드의 당당한 태도에 놀라기도 했다.
그리고.
곧 이어진 광경에 모두가 놀라고 말았으니.
“테오의 선물이 바로 이것이었군요. 가드너를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후후. 여기서 또 보니 반갑군. 정식으로 인사하지. 랑케의 브라켄일세.”
“처음 뵙겠소. 바커스의 나반이오. 망할 주인의 명령에 먼 길을 급하게 와서 다들 지친 상태요. 혹 휴식을 취할 수 있겠소?”
“물론이고 말고요.”
셀퍼드는 그들과 악수를 나눴다.
훗날, ‘테오 동맹’이라 불릴 이들의 첫 공식 자리였다.
회귀검가의 서자가 사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