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동부 (2)
킨카르논을 만나러 오기 직전.
테오는 일행이 가져온 <제왕의 홀>의 봉인을 해제했다.
[태고룡의 유물의 봉인을 해제하여 시련을 시작합니다.]
테오가 눈을 뜬 곳은 거대한 홀이었다.
화려하게 반짝이는 샹들리에 아래에서 궁중 악사들이 악기를 연주하고, 화려한 예복과 가면으로 치장한 남녀가 함께 춤추는 연회장.
그보다 몇 계단 위에 자리 잡은 왕좌에서 나른한 얼굴로 앉아있는 남자가 있었다.
테오도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비록 실제로 봤던 것보다 훨씬 젊은 얼굴이었지만, 풍기는 기도만큼은 테오를 압도하는 자.
『테오.』
‘예. 제가 맞이하겠습니다.’
로드브로크의 목소리마저 떨리게 만드는 자라면 이 세상에 딱 한 명밖에 없지 않나?
“시구르드.”
“오, 나를 단번에 알아보는군. 그동안 여러 후손들이 다녀갔지만, 이렇게 바로 알아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는데 말이야.”
따분함마저 느껴지던 눈가에 살짝 흥미가 감돌았다.
연주되는 음악과 주변의 춤은 이제 배경이 되어 두 사람의 인식에 별다른 영향도 주지 않았다.
“우연이나마 ‘진짜’인 당신을 뵌 적이 있었습니다.”
“진짜인 나라면. 오, 그럼 백탑을 열었던 모양이로군? 쉽지 않았을 텐데 대단해.”
이 자리에 있는 시구르드는 어디까지나 그가 남긴 껍질, 혹은 흔적에 불과할 뿐.
“그래. 그곳의 나는 어디 잘 지내고 있던가? 어디 속편하게 지내고 있다면 뒤통수 때리고 싶어질 것 같은데.”
“아주 열심히 외신들을 막고 계셨습니다.”
“뺑이 치고 있었단 말이지? 푸흐흐! 그래. 나만 여기서 고생 시키고 자기는 놀고 있다고? 말도 안 되지, 안 되고 말고!”
시구르드의 얼굴에 맺힌 나른함은 이제 점점 사라졌다.
“그나저나 아직도 그 지랄 중이라고? 내가 뭐 빠져라고 뛰어다녔던 게 언젠데, 하아……! 하여간 만신전 놈들, 주댕이만 아주 번지르르하지 실속이 없어요, 실속이.”
테오는 이제야 여기 있는 시구르드의 성격이 어떤지 조금 알 것 같았다.
“계속 여기서 이렇게 고생만 하셔야 하니까요?”
“그래! 이제 나 좀 쉴 때 되지 않았냐고! 이 좁은 곳에서 몇 년째 이 지랄하고 있는지 알고 있냐?”
그 뒤부터 이어지는 시구르드의 한탄은…… 참 사람의 귀를 아프게 만들었다.
자신이 여기에 얼마나 오랫동안 갇혀 있었는지, 간간이 만나는 선택자들을 상대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여기 같이 있는 주민들이 매번 같은 행동만 반복해서 얼마나 지루한지 등등.
만약 의무감만 아니었다면 진즉에 일이고 뭐고 간에 다 때려치웠을 거라고.
‘원래 이렇게 말 많은 성격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이 폐쇄적인 환경이 이 사람을 이렇게 만든 게 아닌가 싶었다.
“그렇게 됐단 말이지.”
“예. 그러시군요.”
“너, 내 말 하나도 안 듣고 있구나?”
“그럴 리가요. 시조님이 짊어지고 계신 책무에 깊은 공감과 연민을 갖고서 나중에 만신전에 계실 시조님을 뵙게 되면 어떻게 잘 말씀드릴까 고민하던 중이었습니다.”
“주둥이가 아주 잘 돌아가는 걸 보니 회귀 전에는 검술에 딱히 의미를 두지 않았던 모양이야?”
테오는 가만히 웃으면서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여기서 제가 해야 할 미션부터 말씀해주시죠. 가디언은 어디에 있습니까?”
시구르드는 뭐 이런 놈이 다 있냐는 얼굴로 테오를 바라봤지만, 가만히 웃기만 하는 테오의 모습에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그러다 살짝 장난기를 담아 말했다.
“가디언이야 지금 너와 가까이 있지 않나.”
테오는 그게 무슨 말이냐고 되물으려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어 [영안]을 활짝 열었다.
그러자 주변 풍경이 어그러지면서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광경들이 하나둘씩 눈에 들어왔다.
화려한 샹들리에 너머에는 자글자글한 이빨이 가득하고, 바닥에 깔린 융탄자는 사실상 혓바닥이었다.
연회장. 홀 전체가 사실 어느 거대한 짐승의 아가리 속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후후후후후…….」
창밖 너머에서 무언가가 보석처럼 반짝이며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테오는 누군가가 자신을 보며 ‘웃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말도 안 되는 크기로군…….』
로드브로크의 침음성이 머릿속을 울렸다.
‘누군지 아실 것 같습니까?’
『칸헬(Canhel)인 것 같구나.』
‘칸헬?’
『용종 중에서도 형상에 구애를 받지 않는 영적인 존재라 할 수 있다. 평상시에는 주인의 그림자 속에 머물러 있되,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깃들어서 그것을 대체하곤 하지.』
아무래도 이 연회장이 마음에 들어 통째로 자신의 육체로 삼은 모양이었다.
“시험을 통과하면 연회장에서 무사히 빠져나갈 것이고, 통과하지 못한다면…… 끔찍하겠군요.”
“뭘 그렇게까지 잔인하게 말하나. 설마 그렇게 쉽게 가려고?”
시구르드는 옥좌의 팔걸이를 손으로 쓰다듬으면서 말을 이었다.
“오히려 이곳은 자격도 되지 않으면서 욕심만 많은 후손들을 응징하기 위해서, 혹은 의지와 야망은 충만하지만 재능은 깨우지 못한 후손을 위해 만들어진 곳일지니.”
다시 고개를 드는 시구르드의 눈빛이 흉흉하게 빛났다.
“이곳의 시험을 통과하는 자는 원하는 대로 <왕의 자격>을 얻게 될 것이다. 하지만 통과하지 못하는 자에겐 분에 넘치는 보물을 탐낸 죄로 처벌이 주어지게 될지니.”
이제야 알 것 같았다.
킨카르논이 쿠데타를 꾸미면서까지 제왕의 홀을 탐냈던 이유.
“라그나르라는 피를 타고 났다는 사실은 아주 중요하다. 그렇다면 기회 또한 그만큼 주어져야 하지 않겠는가?”
시구르드가 씩 웃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나’를 넘어서야겠지만.”
[퀘스트가 도착했습니다.]
+
[시나리오 퀘스트 #11]
라그나르의 혈통에 주어진 축복 중에는 회귀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 혈통에 각인된 재능일 뿐, 개화되지 못한 이는 꿈도 꿀 수조차 없습니다.
시조 시구르드는 후손 중에 재능은 있으나 혈통 능력을 깨우치지 못한 이들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인위적으로 재능을 깨울 수 있는 방법을 마련했습니다.
선택자의 자리란, 곧 제왕만이 앉을 수 있는 자리. 또한, 시조 시구르드의 뒤를 이을 수 있음을 증명할 수 있는 자리.
당신이 그 위치에 앉을 만한 능력자라는 것을 입증해 보이십시오.
· 난이도: SS
· 보상: 태고룡의 유물, ???
· 실패시: 사망
+
테오는 ‘???’로 표기된 항목을 가만히 바라봤다.
저것이 선택자로서 제왕의 홀을 손에 넣은 사람이 얻게 될 보상인 걸까.
“당신을 넘어서야 한다는 말씀은.”
“여기 있는 나를 꺾어야 한다는 뜻이지.”
시구르드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 연회장을 가득 채우던 음악이 멈추고, 춤을 추던 사람들이 좌우로 물러났다.
저벅, 저벅!
계단을 한 칸씩 내려올 때마다 시구르드의 얼굴이 조금씩 어려지기 시작했다.
“지금의 너는, 보자. 그렇군. 열여섯. 이제 곧 열일곱인가?”
키도 조금씩 작아지면서 융단 위에 선 시구르드는 젊다 못해 어려 보였다.
열일곱 살의 시구르드.
하지만 단언컨대, 테오는 기세만 보고도 그가 현재 킨카르논보다도 훨씬 강하다는 것을 몸소 알 수 있었다.
찌릿찌릿.
라그나르라는 대가문을 세운 이는 확실히 다른 걸까.
스르릉!
시구르드가 천천히 검을 뽑았다.
“왕의 자격을 운운하려면, 그래도 그 나이대의 나를 넘을 정도는 되어야겠지?”
그러면서 장난스럽게 웃는데…… 테오는 헛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제왕의 홀…… 왜 여태 가문 내에서도 알려지지 않았는지, 그리고 아버지는 왜 굳이 회수하시지 않았는지 이제야 알겠어.’
애당초 제왕의 홀이 주는 시련을 통과한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후손 중 그 어느 누구도 시구르드의 아성을 넘은 자는 없었을지니.
카일도 그걸 알고 유물을 회수하지 않은 것이다.
한편으로, 테오는 강한 호승심이 들었다.
만신전에서 봤던 시구르드는 그야말로 전신(戰神), 그 자체였으니.
과연 그가 얼마나 강할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물론, 그 과정에서 패배하게 된다면 칸헬의 한 입 거리로 전락하고 말겠지만.
‘글쎄?’
라그나르를 통째로 뜯어고치겠다고 마음먹은 테오에게는 오히려 당연하다면 당연한 시련이었다.
“이 시련을 통과한 사람이 있긴 합니까?”
테오는 반동강 난 드레이크의 날붙이 대신에 네 자루의 검을 허공에다 띄웠다.
“있지.”
시구르드가 송곳니가 훤히 드러나도록 웃었다.
“카일.”
“……!”
* * *
열일곱 살의 시구르드와의 대련은 대련의 수준을 넘어 ‘전투’ 혹은 ‘생사결’이라는 단어가 어울릴 정도로 거칠었다.
시구르드는 후손이라고 해서, 선택자라고 해서 봐주는 법이 없었으니.
괜히 퀘스트 난이도가 SS로 분류되었던 게 아닌 것이다.
하지만 결국 승부는 테오의 승리로 끝났다.
이미 여러 번의 퀘스트와 레벨업으로 다져진 테오의 성장세는 당대의 시구르드도 뛰어넘을 정도였다.
“다음에 또 기회가 되어 만날 수 있으면 재미나겠군.”
다음?
퀘스트가 종료되기 직전에 시구르드가 던진 말은 테오에게 의문을 가져다주었지만, 시구르드는 별다른 설명 없이 웃기만 했다.
나중이 되면 다 알게 될 거라는 듯이.
그렇게 테오는 보상과 함께 현실로 돌아오게 되었고.
제왕의 홀은 푸른빛을 띠며 그의 손에 자리 잡았다.
처음 테오에게 왔을 때의 홀(笏)의 형태가 아닌 팔찌의 형태로 손목에 감겨 있었다.
+
[제왕의 홀]
제왕의 위엄을 더한다.
· 종류: 액세서리
· 효과: 모든 스킬 효과 1.5배 증폭
· 착용 조건: 해당 퀘스트 통과자
+
스킬 효과의 증폭.
테오에게는 당장 전력 상승에 이보다 더 효과적이고 확실한 건 없었으니.
[‘스킬: 드레이크 피어’가 상대를 압박합니다.]
쿠쿵!
킨카르논의 어깨가 강제로 짓눌리는 것이 보였다.
가뜩이나 마력 구속구로 인해 마력을 쓸 수 없는 몸으로 패기에까지 짓눌리니, 킨카르논은 말을 하기가 버겁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안색이 창백해졌다.
하지만 그는 침음성 한번 흘리지 않을 만큼 대단한 정신력을 자랑했다.
그는 대답 대신 테오의 오른쪽 손목에 감긴 팔찌에 집중했다.
“제왕의 홀. 얻었군.”
입가에 쓴웃음이 번졌다.
“결국 물건의 주인은 무엇이든 정해져 있는 건가.”
“어디서 얻은 건지 말해줄 생각이 없는 거로군. 그럼 광룡제인가?”
킨카르논은 다시 지그시 눈을 감았다.
테오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활짝 열린 [영안]의 시야 속.
킨카르논을 중심으로 흰색 빛이 은은하게 퍼져 나오고 있었다.
“광룡제가 맞군.”
너무나도 확고한 말투.
킨카르논의 시선이 황급히 테오에게 향했다.
눈가 아래 살짝 당혹한 기색이 흐르고 있었다.
“내가 그냥 떠보는 건지, 아니면 확신을 가지는 건지 파악하기 힘들고. 그렇지?”
역시나 하얀 빛이 강해졌다.
그 순간, 킨카르논은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자신이 거짓을 말하든, 혹은 진실을 말하든 간에 지금 깊게 가라앉은 테오의 시선을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진위 여부를 가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스킬 효과 상승으로 마력에 깃든 영성이 강화되었습니다.]
[이제부터 영안(靈眼)으로 상대의 진실 여부를 구별할 수 있습니다.]
[흑색은 거짓을 뜻합니다.]
[백색은 참을 뜻합니다.]
테오는 이것으로 킨카르논에 닿은 광룡제의 끄나풀을 끄집어올릴 생각이었다.
회귀검가의 서자가 사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