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검제(劍帝) 킨카르논 (3)
“못 보던 얼굴도 있는 듯한데?”
킨카르논의 친위대, ‘검제위(劍帝衛)’의 검사들은 혈랑검사들을 따라온 이들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동안 이번 일을 진행하면서 가드너 가문과 여러 차례 대면을 가졌지만, 오늘 따라 인파가 훨씬 많았으니까.
푸른색 로브를 푹 눌러쓰고 있어 정체를 알아보기 힘든 이들.
다만, 잘 벼려진 칼날처럼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가 풍겼다.
“청랑검사라 합니다. 저희 가주…… 알곤 님께서 이번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성공하셔야 한다면서 붙여준 분들입니다.”
입을 여는 혈랑검사는 조금 긴장한 기색이 되었지만, 검제위 검사는 그걸 미처 눈치 채지 못했다.
오히려 이들이 알려진 것과 달리 알곤의 신임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비웃음을 억지로 참아야 했다.
얼마나 몰랐으면 추가 병력까지 파견한단 말인가?
“걱정이 많으신 모양이시로군.”
“그렇습니다.”
“이번 일이 끝나서 뵙거든 전해주십시오. 일이 생각보다 너무 싱겁게 끝나 당신들이 할 일은 생각보다 없었다고.”
“그렇게만 해주신다면야.”
“따라오시오.”
검제위 검사들이 앞장 서기 시작했다.
혈랑검사들은 슬쩍 ‘청랑검사’ 쪽을 보았다가, 끄트머리에 서 있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들은 남자가 살짝 고개를 끄덕인 뒤에야 발걸음을 옮겼다.
‘오만하군.’
남자, 브라켄 랑케는 검제위의 뒷모습을 보면서 헛웃음을 흘렸다.
저들이 항상 킨카르논을 따라 전장에서 승승장구하고, 4대 부대에 못지않은 실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약속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머릿수가 왔는데도 별로 경계하지 않는 모습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단순히 머릿수가 많아지면 좋다고 여긴 것일까?
그게 아니면 ‘너희들이 배신을 해도 별 걱정하지 않는다’는 자신감의 발로일까?
“모두 준비하시오.”
그때, 일행은 어느새 목적지인 목련궁에 도착할 수 있었다.
겉보기엔 다 쓰러져 가는 허름한 옛 궁의 터.
주변에 있는 인파들도 별로 그걸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이곳은 겉보기와 달리 내부에 이런저런 보안 장치가 많이 되어 있소.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니 절대 허투루 대하지 마시오. 그럼 먼저 가겠소.」
파앗!
선두에 있던 검사의 지시에 따라 검제위가 일제히 담벼락을 넘었다.
“흠! 확실히 이런 곳이면 남들 모르게 쓱삭! 하기에도 좋을 것 같은데?”
브라켄은 턱을 쓰다듬으면서 음흉하게 웃다가 제일 마지막으로 움직였다.
타닥!
* * *
킨카르논의 등장으로, 단상의 분위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저, 전부 한꺼번에 덤비라고?
-아무리 킨카르논 님이라고 하셔도 저건 너무 무모하신 거 아냐?
-그거야 모르지! 그만큼 자신감이 넘치시는 걸지도……!
반면에 관객들은 열광했다.
오만하고 패기 있는 모습은 북방인들이라면 누구나 바라마지 않을 이상이므로.
“아아,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요? 아직 르제 라그나르 님과 어나니머스 님의 대결이 끝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킨카르논 라그나르 님이 던지신 새로운 도전장-! 이걸 두 분은 어떻게 받아들일-”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큰오빠?”
르제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사회자의 안내를 도중에 툭 잘랐다.
불쾌한 듯 일그러진 인상.
하지만 킨카르논은 가볍게 코웃음을 칠뿐이었다.
“말한 그대로야. 시간만 날리는 것 같으니 빨리 끝내자고.”
“…….”
그림 리퍼를 쥐고 있던 르제의 손에 힘이 바짝 실렸다.
머릿속에서 뭔가가 뚝 하고 끊어질 것만 같았다.
그런데.
“테오에게 이목을 빼앗기니 애가 탔구낭?”
아모레가 툭 던진 말에 르제는 얼음물을 끼얹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킨카르논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하지만 르제는 그의 눈썹 끝이 살짝 떨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모르긴 뭘 몰랑. 말한 그대로징. 너 지금까지는 사람들이 너만 주목하고 있어서 기분 좋았잖앙. 그런데 지금은 다 뺏겨서 불쾌한 거궁. 아냥?”
“실력으로는 안 될 것 같으니 이딴 식으로 격장지계를 쓰려는 건가? 그렇다면 좋은 시도라고 칭찬해……!”
“뭐래. 관종 새끼가.”
“…….”
“지금 네가 하는 짓, 다섯 살 애기들이나 하는 짓이양. 관심 가져주세요, 뿌에엥!”
아모레는 과장되게 우스꽝스러운 모습까지 보였다.
가면을 쓰고 있어 얼굴 표정을 읽을 수는 없지만, 비웃음을 잔뜩 머금고 있을 거라는 걸 눈치 채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쩌걱!
킨카르논의 얼음장 같았던 얼굴에 처음으로 균열이 갔다.
르제의 귀에도 마치 그런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그랭. 이렇게 된 거 나도 승부 두 번 치르기는 귀찮았는데 잘 됐네.”
여태 장난기 섞였던 목소리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작은 체구에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무지막지한 패기.
고오오오!
무대를 장악하던 킨카르논의 기세가 단번에 뒤집혔다.
“패기 좋게 나섰다가 땅바닥에다 얼굴부터 처박으면 참 볼만하겠지?”
그 말과 함께 아모레의 신형이 움푹 꺼지고,
킨카르논은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되돌아와 검을 허공에다 뿌렸다.
콰르르릉!
막강한 돌풍을 실은 검기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콰콰쾅!
그것이.
바로 신호탄이었다.
* * *
“아아, 갑자기 시작된 결승전-! 항룡전의 행방은-”
‘시작되었나.’
테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레 같은 함성에 가려져 있어서 그렇지, 그의 귓가에는 아주 선명하게 들리고 있었다.
-여긴 청원각! 여긴 청원각! 갑자기 정체를 알 수 없는 무리가 기습을 벌여왔……!
-이곳은 베드 타운, 갑작스러운 분란으로 인파 통제에 어려움이……!
-중앙기무국 쪽으로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다급히 움직이고 있다. 증원을 요청……!
마법 통신구에서 들리는 다급한 목소리들.
각지에 숨어있던 킨카르논의 추종자들이 움직였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스킬: 드레이크 피어’와 ‘스킬: 해츨링 싱크로’를 동시 발동하여 인지 영역을 넓게 확장시킵니다.]
관객석 사이로 보이는 바쁜 움직임도 발견할 수 있었다.
“6번조.”
테오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그동안 뒤에 서서 대기하고 있던 조원들이 모두 눈을 차갑게 번뜩였다.
“지금부터 분란을 일으키는 이들을 반란자로 규정한다. 모두 제압하도록.”
“존명!”
“존명!”
“존명!”
조원들이 일제히 빛살이 되어 허공으로 떠올랐다.
파라라락!
그들 모두 테오의 지시에 따라 미리미리 객석을 살피고 있었기에 수상자들의 움직임은 모두 미리 파악하고 있었으니.
츠팟!
검기가 객석으로 쏟아졌다.
-꺄아아악!
-이, 이게 뭐야?
-소, 소가주님이 대체 왜!
혼란이 극심해지던 중에 테오가 마력을 가득 담아 크게 소리쳤다.
“감히-! 항룡전에서 쿠데타를 획책하려는 불민스러운 움직임이 있다는 첩보가 입수되었나니-! 나, 테오 라그나르가 소가주의 자격으로- 그 책임을 묻겠다-!”
그가 던진 돌멩이는 거친 파문을 일으켰다.
-쿠, 쿠데타?
-미친 거 아냐?
-대체 누가……!
-가주님도, 소가주님도 계신 윈터러에서 어떤 미친 놈이!
-트로이반인가?
쿠데타!
관객들의 얼굴에 혼란이 가득 퍼졌다.
강자존의 법칙 때문에 한 세대에 반드시 한두 번씩은 내전을 겪는 게 다반사인 라그나르라지만.
그래도 카일이 집권을 하고 난 지난 수십 년 동안에는 벌어지지 않은 일이었기에 다들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하물며 트로이반과의 전쟁도 끝나지 않은지 얼마 되지 않지 않았던가?
하지만.
저벅!
테오가 첫 걸음을 옮긴 순간, 혼란은 거짓말처럼 그치기 시작했다.
드레이크 피어가 동요하는 분위기를 가라앉힌 것도 있지만, 테오가 걸음을 옮기는 위치가 전혀 뜻밖이었으니까.
테오가 허공에다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쿠르르릉!
낙뢰가 한 줄기 떨어지면서 킨카르논과 르제, 아모레를 뒤로 널찍이 떨어뜨렸다.
-뭐야? 왜 저기로 가시는 거지?
-설마 저 셋 중에 쿠데타를 일으킨 범인이 있다는 거야?
웅성거림이 커지는 가운데.
“소가주께서는 소란을 너무 크게 키우고 계시는 게 아니신지-?”
갑자기 하늘에서 메아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적이 출현합니다!]
그리고 테오 앞에 내리꽂히는 유성우 하나.
콰아앙!
그것은 거친 먼지구름을 일으키면서 정체를 드러냈다.
-패룡! 패룡이시다!
-단테 님이 갑자기 왜?
브라켄마저도 작게 보일 만큼 거친 체구.
무지막지한 위압감을 자랑하는 인상의 패룡이 활짝 웃으며 테오의 앞길을 막았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패룡? 저는 분명히 반란자를 추포하는 중이라고 말했을 텐데요? 방해하시는 겁니까?”
“설마요. 이 단테가? 내가 가주님께 얼마나 충성하는지는 이 세상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것을.”
“그럼 지금 이걸 제가 어떻게 받아들이면 되겠습니까?”
패룡의 등장.
사실 이것은 테오도 미처 생각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킨카르논과 안시오의 연합은 전생에서도 없었던 일이니.
하지만 놀랄 일은 아니었다.
‘어차피 기샤르가 죽고 난 뒤에는 어떻게든 패룡과 한 번쯤은 부딪칠 수밖에 없었어.’
어차피 패룡은 자신이 어떤 스탠드를 가지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찔러보는’ 것에 지나지 않을 터였다.
철저한 강약약강.
패룡에게 빈틈을 보여주어서는 안 되었다.
패룡이 씩 웃었다.
“그건.”
“패룡께서 뭘 원하시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순간, 테오의 두 눈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헌데, 내 앞길을 막아도 된다고 누가 말했지?”
“……!!”
순간, 패룡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자존심이 상했던 것이다.
그가 하려는 일은 단 하나.
킨카르논의 수하들이 제왕의 홀을 손에 넣을 때까지 테오의 발목을 묶는 것.
그리고 그는 그게 별반 어렵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동안 테오의 뒤를 밟으면서 느꼈던 건, ‘차기 가주가 되면 라그나르를 잘 이끌 수 있겠다’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직 나이가 어려 경험이 부족한 면도 강하다’는 생각도 갖고 있었다.
그래서 패룡은 자신의 이권을 크게 키울 생각으로 킨카르논에게도 힘을 실어주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테오와 킨카르논의 대립이 커지면 커질수록 자신의 몸값도 한껏 올라가게 될 테니.
‘동부 정도는 내가 가질 수 있어야 밑지지 않는 장사가 되지.’
패룡이 원하는 것은 딱 하나였다.
왕좌.
어차피 라그나르를 이길 수 있을 거란 생각 따윈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아래. 라그나르의 손길이 미처 닿지 않는 곳에서 호가호위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게 그의 생각이었으니.
그래서 패룡은 킨카르논을 도와주는 척하면서 테오에게 동부에 대한 이권만 약속받고 킨카르논의 뒤통수를 칠 생각이었건만.
테오는 정작 그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렇게 기회를 주는 것도 부유군도에서 날 구해줬기에 배려하는 것이다. 이 이상의 월권은 용납하지 못한다.”
하지만 테오도 테오대로 생각이 있었으니.
패룡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봤자 계속 물어뜯기기만 할 뿐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오만하구려. 그 대가는 온전히 스스로 지게 되는 법일진대.”
“내 미래는 내가 알아서 하도록 하지. 그대는 결정하라. 나를 도와 지금의 입지를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킨카르논의 편에 서서 같이 숙청될 것인가?”
“그건-”
아주 잠깐 동안, 패룡은 빠르게 주판을 두들겼다.
테오의 강경한 태도로 보건대, 이 일에 킨카르논의 편을 조금이라도 들어주었다간 같이 독박을 뒤집어쓸 것 같았다.
그런데도 위험을 무릅쓰고 테오의 위세를 꺾어 원하는 것을 얻을 것인가?
아니면 테오의 편을 들어 후일을 기약할 것인가?
전자는 도박이어서 잃으면 크게 잃고 얻는다면 크게 얻을 수 있되, 후자는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아주 적은 안전한 패였다.
하지만 고민은 잠시.
그가 결정을 내리고 무슨 말을 하려던 그때였다.
「안 됩니다, 스승님! 테오 라그나르의 편에 서시면 위험합니다!」
안시오가 다급하게 전음을 보내왔다.
순간, 그의 머릿속으로 좋은 생각이 스쳤다.
‘제3의 선택지가 있긴 있군.’
패룡이 차갑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회귀검가의 서자가 사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