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검제(劍帝) 킨카르논 (2)
테오가 중앙기무국 측에서 별도로 마련한 좌석에 앉기 시작한 뒤.
항룡전의 분위기는 금세 달아올랐다.
-우와, 진짜 숨 막혀 죽는 줄 알았네!
-두 분 신경전 벌이신 거지, 지금? 테오 님은 여기에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으실 것 같더니…….
-테오 님도 그럴 수가 없으셨던 거겠지. 두 분 다 권좌에 진심이신 분들이니까.
-킨카르논 님 입장에서는 이번 항룡전을 어떻게든 승리하셔야겠어.
관객들은 모두 입조심을 하면서도, 테오와 킨카르논의 경쟁에 누가 웃을지 아주 궁금했다.
테오의 승리를 점치는 사람들은 소가주 자리가 가진 무게를,
킨카르논의 승리를 바라는 사람들은 그가 쌓은 업적의 무게를 말했다.
그러나 누구의 편을 들더라도 한 가지만큼은 확실했다.
-항룡전에서 승기를 거머쥔 사람이 우위를 갖출 것이다.
그 때문에 사람들의 이목이 전부 그쪽으로 쏠렸다.
그리고,
‘또 시작이야.’
르제는 그런 상황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테오에겐 곧 올라갈 테니 기다리라고 큰소리를 치긴 했다지만.
그 어느 누구도 그녀에게 깊은 관심을 보여주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친위대인 사신조마저도.
모두가 불안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조금 전 안시오 라그나르 님이 항복 의사를 표시하였습니다. 다시 알려드리겠습니다. 조금 전 안시오 라그나르 님이 항복 의사를 표시하였습니다. 자신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 항룡의 자리에 앉아야 한다는 전언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아무리 주변의 눈치를 보지 않고 그동안 꿋꿋이 자신의 길을 걸었던 그녀였지만.
이렇게나 주변의 기대가 사라진 데에야 마음이 싱숭생숭하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만큼 그동안 그녀가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는 뜻일 테니.
“-르제 라그나르 님과 어나니머스(무명無名이라는 뜻) 님의 대결이 이뤄지겠습니다. 두 분은 스테이지 위에 올라와 주시기 바라겠습니다.”
이럴 때 딱 그림 리퍼가 자신을 격려라도 해준다면 좋을 텐데.
너는 정말 괜찮다고.
어떻게든 해낼 수 있을 거라고.
‘그럴 일 따윈 없겠지만.’
“다시 알려드립니다. 르제 라그나르 님과 어나니머스 님은 모두 스테이지 위에 올라와 주시기 바라겠습니다.”
르제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그림 리퍼는 이제 너무 조용했다.
“르제 라그나르 님, 스테이지 위에 올라와 주시기 바라겠습니다. 이 이상 늦어지신다면 항복 의사로 간주하겠습니다. 르제 라그나르 님-”
그림 리퍼의 손잡이를 손끝으로 만지고 있으면 어린 시절의 추억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당시에는 자신의 어깨 위에 걸린 무게를 전혀 모르고, 하고 싶은 대로만 하면서 살았다.
그리고 모든 것을 쟁취했다.
지금도 그때처럼 뒤를 생각하지 말고 달리는 정신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르제 라그나르 님, 경기까지 30초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카운트를 시작하겠습니다.”
그렇게 생각이 많던 중이었다.
「르제 님!」
「주군! 왜 그러십니까! 혹시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르제는 뒤늦게 자신의 귓가를 왱왱 울리는 수많은 전음을 들을 수 있었다.
관객들도, 사신조의 조원들도, 모두 이쪽을 보면서 뭐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르제는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뭐라고 하는 거야?
손짓 발짓을 하면서 무슨 말을 하는데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 모든 것들이 소음처럼 들리는데, 알아 듣질 못하니 답답했다.
그래서 입을 떼려는데,
『르제.』
여러 소음들 사이로 목소리 하나가 선명하게 르제의 귓가로 꽂혔다.
그리고,
웅웅! 우우우웅!
그림 리퍼가 떨리기 시작했다.
테오와 부딪치고 침묵한 뒤, 처음으로.
그런데 무슨 말을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우우우우웅!
어서 일어나라고.
대체 뭘 하고 있냐고.
‘아.’
르제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소음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그제야 구분되기 시작했다.
“르제 라그나르 님, 이제 항복으로 간주할-”
대결 종료 멘트가 흘러나오려던 그때였다.
파앗!
르제가 몸을 날려 스테이지 위에 가뿐하게 섰다.
맞은편에 서 있던 체구 작은 가면인-본인은 어나니머스라고 바득바득 우겼지만,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아모레 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이 가볍게 웃었다.
“에잇, 아쉽당. 좀 쉽게 결승 올라가나 했는뎅.”
“잠시 딴 생각에 빠져있느라 미처 듣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생각 정리는 끝났엉?”
“예. 덕분에.”
키득!
가면 너머에서 들리는 웃음소리가 더 커졌다.
르제가 귀여워 죽겠다는 듯.
“비록 지각하셨지만, 르제 라그나르 님이 무사히 스테이지에 올라오셨으니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사회자의 멘트와 함께 두 번째 준결승전이 시작되었다.
여기서 이긴 사람이 킨카르논과 마지막 경기를 치르게 되는 것이다.
르제는 그림 리퍼를 꽉 쥐었다.
어떻게 말로 표현하지 못할 자신감이 부쩍 가슴을 채웠다.
* * *
‘고생했어.’
『나야말로 고마울 따름이지.』
마가라의 목소리가 테오의 머릿속을 왱왱 울렸다.
어딘지 모르게 씁쓸함이 담긴 목소리.
오랜만에 르제를 격려할 수 있어 기뻤지만, 정작 그 곁에는 있을 수 없단 사실 때문에 생긴 씁쓸함이었다.
르제에 대한 애정은 여전했던 모양이었다.
테오는 르제가 조금씩 의욕을 잃어가는 것을 깨닫고, 마가라의 힘을 빌려준 거였다.
『그보다 왜 우릴 도와준 거지?』
‘뭘?’
『사실 따지고 보면 그대로서는 아군이라 할 수 있는 저 가면 여자에게 힘을 실어주는 게 맞잖나.』
무슨 말을 하려나 했더니.
핏.
테오는 헛웃음을 흘렸다.
‘너야말로 착각하고 있나 본데. 난 절대 손해 보는 짓은 안 해.’
『착각? 내가?』
‘그래. 내가 왜 아모레만 품는다고 생각하는 거지?’
『……!』
‘르제 누이 역시 내가 품어야 할 사람이지. 그래서 도와준 것일 뿐.’
『그런…… 가.』
마가라는 그제야 자신이 그동안 테오를 잘못 보고 있었단 사실을 깨달았다.
테오가 가진 그릇은 애당초 자신 따위가 비빌 만한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아모레도, 르제도 굳이 내가 포기할 이유 따윈 없지.’
테오는 영묘에서 르제가 보였던 태도를 잊지 않고 있었다.
자신과 충분히 대립각을 세울 수 있을 텐데도 불구하고 호탕하게 자신의 패배를 인정할 줄 알던 모습.
전력적 열세에 놓였으면서도 절대 굴복하지 않는 자세.
그동안 수많은 형제와 누이들을 만났지만, 단언컨대 그들 중에 르제만큼 승부에 깔끔한 사람은 없었다.
뒤를 맡기기에 충분한 존재라는 뜻.
무엇보다.
‘마가라가 이토록 간절하게 생각할 정도라면 더욱더 믿을 만하단 뜻이야.’
그동안 테오가 용종들을 겪으면서 든 생각은, 그들은 모두 감정에 아주 솔직하다는 것이었다.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고 자신의 진심을 쏟아내는 이들의 환심을 샀다는 것만으로도 르제를 높이 살만 했으니.
언젠가 율리우스가 테오를 보며 들었던 인재 욕심이, 처음으로 테오의 내면에서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대의 사람이 될 사람이라면…… 내가 그만큼 도와줘도 된다는 뜻이겠지?』
마가라는 테오의 생각을 읽었던지 조심스럽게 그런 질문을 던졌고.
테오는 당연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 주인이여.』
마가라가 환하게 웃었다.
그 순간,
파아아앗!
르제가 쥐고 있던 그림 리퍼가 격렬하게 떨리면서 빛의 기둥이 치솟았다.
르제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화들짝 놀랐지만, 곧 안색을 되찾으며 몸 안에 흘러넘치는 힘을 갈무리했다.
“어? 뭐야? 이건 반칙이자낭!”
아모레가 황급히 테오 쪽을 홱 하고 돌아보면서 항의했다.
테오가 씩 웃었다.
「한참 어린 후배한테 지시면, 바로 그 자리에서 가면 벗기고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버립니다?」
“……이 새끼가?”
그동안 귀여운 척 하느라 혀 짧던 목소리가 처음으로 욕지기가 어렸다.
가면 너머의 얼굴도 살짝 눈살을 찌푸리는 것 같았다.
“하여간 하는 짓은 누구랑 쏙 빼닮아가지고!”
아모레가 정체를 숨기고(?) 항룡전에 참가한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율리우스의 머리통을 한 대만 갈겨보자.
평상시 1번조를 죽기 직전까지 굴리던 게 너무 얄미워서 그랬던 거였으니.
트로이반과의 전쟁에서도 그 때문에 너무 고생하고 난 뒤에 항의를 했을 때, 돌아온 대답이 아주 걸작이었다.
-꼬우면 네가 대장해. 그 전에는 하극상밖에는 안 되는 거 알지?
그러면서 히죽 웃던 모습이 얼마나 사람 속을 뒤집게 만들던지.
그래서 아모레는 다짐했다.
율리우스와 동급인 항룡이 되어서 한판 붙어보겠다고.
그러면 딱히 하극상은 아니잖아?
물론, 백갑용기대를 탈퇴할 생각은 없었으므로, 들이받기만 하고 도로 반납할 생각이었다.
아, 어차피 항룡이 되는 건 ‘어나니머스’이지 ‘아모레 탄’은 아니니 상관없겠지?
하여간 아모레가 봤을 때 지금 테오가 하는 짓거리는 율리우스를 너무 닮아있었다.
누가 차기 백갑용기대 대장이 아니랄까봐.
원래 저 자리는 ‘인성 갑’들만 앉을 수 있는 자리였었나?
촤아아악!
아모레가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동안 르제가 재빨리 대낫을 아래로 거칠게 휘둘렀다.
마치 종이가 찢기는 듯한 소리와 함께 공간이 갈라지면서 오러 수십 다발이 쏟아져 나왔다.
채채채챙!
아모레는 검격 다발을 이용해서 빠르게 오러를 쳐냈다.
그러다 부서진 오러가 시야를 가리고,
츠팟-
그 순간, 아모레의 사각지대를 교묘하게 노리며 그림 리퍼의 칼날이 목을 노려왔다.
어느새 칼날은 르제를 상징하는 검은 불길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으니!
<연옥로 – 사신의 칼날>
마치 저승사자가 영혼을 수확하려는 듯, 대낫이 똑같이 지옥불을 휘감은 채로 떨어졌다.
“고작 이런 것에 당하면 내가 너무 약해 보이지 않겠니?”
아모레는 한껏 웃으면서 몸을 팽이처럼 돌렸다.
마치 후배에게 가르침이라도 내리는 듯한 말투에 가까웠지만.
정작 아모레는 르제에게 강한 호승심을 느끼고 있었다.
충분히 손속을 섞을 만한 실력이라고 여긴 것이다.
이윽고 두 사람의 공격이 부딪치려는 순간.
“지겹군. 거기까지 하도록 하지-.”
갑자기 두 사람 사이로 검 한 자루가 뚝 하고 떨어졌다.
콰아아앙!
콰르릉, 우르르-
아모레와 르제는 황급히 뒤로 널찍이 떨어져서 간격을 벌리면서 폭발 장소를 노려봤다.
“대체 무슨 짓을!”
“당신!”
스테이지 정중앙.
킨카르논이 지루하다는 얼굴로 검을 추스르면서 두 사람을 바라봤다.
“준결승이니 결승이니 뭐니 하면서 수준 낮은 싸움을 계속 지켜보려니 지루할 뿐이다. 그냥 빠르게 끝내도록 하지. 다 같이 덤비도록.”
“……!”
“……!”
킨카르논이 검을 세게 움켜쥐었다.
회귀검가의 서자가 사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