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새로운 용 (4)
“킨카르논 님이 무슨 일로?”
“별로 놀라지 않는군?”
뎁트는 뚱한 얼굴로 대꾸하는 셀퍼드의 태도가 놀랍던지 눈을 살짝 떴다.
“뎁트 님이라고 하셨죠?”
“그렇다네.”
“뎁트 님이 킨카르논 님을 옆에서 보좌한 게 대략 몇 년 정도 됩니까? 7년? 8년? 그 전에는 못 뵀던 얼굴이라.”
“5년쯤 되었다네.”
“그렇다면 그동안 충분히 옆에서 가드너의 방식을 보셨을 텐데요?”
갑작스러운 질문.
하지만 뎁트는 이 셀퍼드라는 사람에게 흥미가 생겼다.
‘크게 상대할 가치가 없는 반편이라더니. 평가가 정반대였군.’
뎁트가 처음 셀퍼드와의 만남을 요청했을 때. 디에고는 신신당부했다.
건방지게 가문을 은혜를 저버리고 간 사생아이니 예의 따윈 바라지 않는 게 좋을 거라고.
어쩌면 전장을 오랫동안 구르느라 결례를 끼칠 수도 있으니 미리 양해를 구하겠다는 말까지 했었다.
마치 인간쓰레기를 보는 듯한 모습이었다고 해야 할까?
그런데 이렇게 막상 마주하고 나니 잘 알 것 같았다.
겉보기엔 디에고의 말마따나 품위 따윈 찾아볼 수 없는 무례한 작자로 보일 수도 있었지만.
두 눈빛만큼은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으니.
가드너의 웬만한 늑대들보다 이 친구가 훨씬 나은 듯했다.
‘하긴 그러니 인재를 수집하는데 환장했다는 백갑용기대장이 슬하에 오랫동안 잡아둔 거겠지만.’
킨카르논에게 좋은 검이 될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조금 아쉽다는 생각에 속으로 입맛을 다셨다.
“매번 세대가 교체될 때마다 개.새.끼.처.럼. 항상 기가 막히게 냄새를 맡는 게 가드너였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번에도 어떻게든 오지 않을까 막연하게 생각했죠.”
셀퍼드는 유달리 ‘개새끼’라는 말에 또박또박 힘을 주어 말했다.
순간, 디에고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지만, 뎁트는 피식 가볍게 웃고 말았다.
“가문에 대한 원망이 아주 큰가 보군.”
“적다고 할 수는 없겠죠?”
“뭐, 그쪽 가족의 일이야 그쪽에서 할 일이고…… 결국 가드너가 킨카르논 님을 등에 업고 언젠가 한 번쯤 접촉할 거라고 예상했다, 이렇게 말해도 되겠지?”
“마음대로 생각하십쇼. 그런데 무슨 일이십니까?”
“테오 라그나르가 자네의 후배라고 들었네만.”
순간, 셀퍼드의 얼굴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아린과 다른 동료들도 마찬가지.
“입조심 하십시오. 그분은 이제 소가주님입니다. 아무리 킨카르논 님이 키우는 ‘개’라고 해도 함부로 입에 이름을 올려서는 안 될 텐데요?”
개.
뎁트를 가드너 가문과 한데 싸잡아 표현한 것이다.
“이 건방진 새끼가 보자 보자 하니까!”
디에고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검을 반쯤 뽑았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아린과 동료들이 먼저 검을 뽑아 디에고에게 겨누었으니.
차차창!
가드너의 검사들까지 일제히 검을 뽑아 아린 일행에게 겨누면서 서로가 서로의 목을 노리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은 그저 셀퍼드와 뎁트 뿐.
디에고는 턱밑에 아슬아슬하게 놓인 아린의 검을 보고 두 눈을 파르르 떨었다.
어린 시절 자신과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던 이복 동생을 받아준 부대라기에 내심 속으로 깔보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렇게 쉽게 넘길 만하지 않을 것 같았다.
“지금 벌이는 짓거리, 백갑용기대에 대한 킨카르논 님의 선전포고라고 받아들이면 되겠습니까?”
셀퍼드의 싸늘한 경고.
디에고가 자기도 모르게 헛바람을 들이켰다.
가드너의 다른 검사들도 적잖게 당혹한 얼굴이었다.
트로이반과의 전쟁 이후, 백갑용기대에 대한 북방의 여론은 하늘을 찌르고 있다.
거기다 ‘소가주의 호위대’라는 소문까지 붙으면서 그들과 적대한다는 건 사실상 소가주, 나아가 그를 지명한 카일과도 일전을 불사르겠다는 뜻이 될 수 있었으니.
당연히 뎁트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검 내려!”
“하지만……!”
“내리라고!”
“……!!”
디에고와 가드너의 검사들이 황급히 검을 내렸다.
그리고,
짜아아악!
뎁트가 디에고의 뺨을 거세게 후려쳤다.
“지금 네가 무슨 짓을 저지를 뻔했는지 알고나 있는 거냐!”
“가, 각하! 저는 그저!”
짜아아아악!
“뭘 잘했다고 꼬박꼬박 말대꾸야!”
디에고는 아예 철퍼덕 바닥에 주저앉았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뺨을 붙잡은 얼굴에는 두려움이 맺혔다가, 곧 셀퍼드를 잔뜩 노려봤다.
‘얼씨구.’
쇼도 참 이런 쇼도 없다 싶었다.
보아하니 검도 제대로 쥐지 못할 것 같은 양반이 싸대기를 날렸다고, 가드너의 소가주가 충격을 받는다고?
그냥 분위기의 주도권을 잡으려는 쇼맨쉽에 불과했다.
“저자가 저지른 무례를 용서하게. 그리고 나의 실수로 용서해주고.”
“개새끼가 개새끼 짓을 했을 뿐인데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여전히 디에고와 한통속으로 취급한다.
뎁트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지만 곧 숨을 돌리면서 말했다.
“킨카르논 님은 테…… 아니, 소가주님과 척을 지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으시다네. 오히려 친분을 맺고 싶어하시지.”
셀퍼드의 한쪽 눈썹이 말려 올라갔다.
무슨 노림수가 있는 걸까?
“그럼 저에게 오실 게 아니라 동백궁으로 가셔야 했을 것 같습니다만?”
“그도 그렇네만, 사실 킨카르논 님이 빈손으로 그냥 가시기엔 좀 그래서 말이야.”
‘자신이 먼저 고개를 숙일 수는 없다?’
이를 테면, 이것은 권력 싸움이었다.
킨카르논은 테오가 먼저 다가와 자신을 ‘모셔가길’ 바라는 것 같았다. 큰형인 만큼 주도권이라도 잡고 싶다는 걸까.
“해서 자네가 좀 도와주었으면 싶어서 말일세.”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십시오. 자꾸 빙빙 돌려서 말하면 전 못 알아듣습니다.”
“소가주님과 자네의 관계가 아주 각별하다고 들었다네. 그러니 중간에서 기름칠 좀 해주게. 다리도 좀 놔주고.”
뎁트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면서 말을 이었다.
“소가주님의 취향이 뭔지, 요즘 관심사나 하시려는 일이 뭔지 우리에게 알려주게. 소가주님께는 킨카르논 님에 대해 잘 말해주고.”
“세작 역할을 해라?”
“뭘 그렇게 받아들이나. 대승적인 관점에서 라그나르가 더 이상 분열되지 않도록 중간에서 같이 힘을 써보자는 것이지.”
결국 뎁트가 하려는 말은 아주 간단했다.
-테오에게 킨카르논에 대해 좋은 인상을 심어주어라.
뎁트의 두 눈이 호선을 그렸다.
“필요한 게 있다면 얼마든지 지원해주지.”
「예를 들면 자네 외가의 안위라던가.」
“……!”
곧이어 뒤따르는 전음.
“어떤가? 도와주겠나?”
“…….”
셀퍼드는 뎁트의 눈웃음이 가증스럽게 보였다.
자신의 외가에 대해서 대체 어떻게 안 걸까?
분명히 숨긴다고 숨겼을 텐데?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이미 그곳에는 우리쪽 사람들이 가 있거든. 만약 자네가 우리의 제안을 거절한다면, 그들이 전부 억울하게 눈을 감……!」
끼이익!
“무슨 말을 이렇게 장황하게 하나 했네. 생각 없습니다. 얘들아, 가자. 오늘은 아무래도 튼 것 같다.”
셀퍼드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뎁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자네, 정말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은가?”
“네네. 마음대로 하십시오.”
셀퍼드의 뒤를 따라 아린과 동료들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다음부터 협박을 하시려거든 좀 더 자세히 알고 오세요. 외가랑 연 끊은 지가 언젠데 아직도 들먹이는 건지, 쯧.”
밖으로 나서려는 그들 앞을 가드너의 검사들이 가로막았다.
셀퍼드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너희들은 어떻게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냐? 이쯤 되면 좀 달라질 때도 된 거 아냐?”
뇌물, 회유, 공갈, 협박…….
이제는 가드너라면 모든 게 지긋지긋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유도 전부 저 때문이었으니까.
그토록 지키려 애썼던 외가에게 신물이 났던 것까지도.
“안 나와? 왜? 진짜 제대로 한따까리 해보려고?”
검사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디에고와 뎁트 쪽으로 향했고,
‘어렸을 때부터 외가에 끔찍하니 볼모로 협박하면 될 거라고 호언장담하더니. 하여간 저놈의 말을 믿어서 제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구나!’
뎁트는 아직 항룡전이 끝나지 않은 지금, 킨카르논이 괜한 구설수에 휘말리는 것을 막을 생각에 뭐라고 명령을 내렸다.
뎁트의 손에 잡힌 구슬 모양의 아티팩트가 ‘번쩍’하고 빛을 발했고,
세상이 조용해졌다.
* * *
‘역시 셀퍼드 선배밖에 없어.’
테오가 백갑용기대 6번조의 부조장으로 생각한 사람은 바로 셀퍼드 가드너와 아린 네거티브였다.
테오가 신입으로 왔을 때부터 줄곧 옆에서 잘 챙겨줬던 고마운 사람들.
둘이나 데려가고 싶다고 한다면 원래 5번조장인 이블린이 화를 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욕심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인망이면 인망, 실력이면 실력, 안목이면 안목.
모두 두루 갖춘 사람은 찾기 어려웠으니까.
‘거기다 레이나 홀커스, 에리카까지 데려갈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텐데. 거기다 웰까지 있다면.’
같이 개화식을 거쳤던 동기들이야말로 먼 미래에서도 널리 이름을 떨쳤던 인재들이었으니.
게다가 그들의 배후에 있는 나르시오나 랑케까지 그를 떠받쳐준다면.
테오는 그 어느 누구도 탄생시키지 못할 만큼 단단한 라그나르를 만들 수 있을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겸사겸사 그들과도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백룡의 둥지’로 왔는데-
“셀퍼드와 아린? 어쩌지? 항룡전 구경하겠다고 그쪽으로 갔는데.”
“그렇습니까?”
타이밍이 맞지 않았던지 두 사람은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아무래도 새롭게 탄생하게 될 항룡이 누군지 확인하고 차후 대책을 마련하려고 그러는 것일 테지.
그럼 어쩔 수 없이 다른 동기들이라도 찾으려는데, 전혀 생각지 못한 대답이 들렸다.
“음, 저기 백룡의 둥지로 가려고?”
“예. 그렇습니다만.”
“거기 가는 건 추천하진 않는데.”
난감하다는 듯이 볼을 긁적이는 대원의 태도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그게…… 아니다. 직접 보면 알겠지. 가봐.”
“……?”
테오는 의문만 잔뜩 안은 채로 백룡의 둥지를 찾았고, 곧 이유를 알게 되었다.
“자네가 바로 테오 라그나르로군. 이번에 소가주가 되었다던.”
뜻하지 않은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이다.
정말 곰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엄청난 거구와 흉악한 인상을 지닌 남자.
‘브라켄 랑케!’
랑케 가문의 가주가 소탈한 모습으로 에리카 남매를 비롯한 5번조 조원들과 함께 불판에다 고기를 구워 먹고 있었다.
에리카 남매가 얼마 전에 고향으로 잠깐 휴가를 다녀왔다더니.
어쩐지 자식들과 같이 온 모양이었다.
그런데,
‘어째…… 다들 표정이……?’
겉보기엔 아주 친해진 것처럼 브라켄 랑케와 어깨동무를 한 채로 옹기종기 모여 있지만.
백갑용기대 대원들의 얼굴 표정은 절대 그게 아니었다.
핼쑥해진 얼굴들이 다 같이 소리치고 있었다.
‘살려줘!!’
……주변에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술주전자와 술독들, 그리고 곳곳에 쏟아진 토사물과 쓰러져 꿈틀대는 대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위험하다.
테오는 본능이 울리는 경종에 자기도 모르게 뒤로 주춤 물러서고 말았다.
아무래도 뭔가 잘못된 것 같았다.
회귀검가의 서자가 사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