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새로운 용 (3)
“와.”
“어딜 가도 사람 투성이네.”
“이거 제대로 구경이나 하겠냐?”
셀퍼드와 아린은 평상시에도 친하게 지내던 백갑용기대 동료 서너 명과 시내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트로이반과의 전쟁도 끝났으니 성마교 수색 작전에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한 잔이라도 꺾을 생각에 온 것인데.
최근 들어 항룡전이 개시된다는 소문이 돌아서 그런지, 구경을 위해 온 사람들로 복작거렸다.
“주점에 자리나 있을지 모르겠다, 이거.”
“그냥 술이나 좀 챙기고 숙소에 들어가서 먹을까?”
“아, 그럼 재미없는데.”
동료들은 난감하다는 듯이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물론, 영웅 취급을 받는 백갑용기대 대원이라는 사실을 밝히면 사람들이 너도 나도 자리를 양보하려 하겠지만.
그들은 딱히 그런 식으로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정체를 밝혔다간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관심 때문에 제대로 놀지도 못할 것이다.
“후후. 멍청한 놈들.”
하지만 셀퍼드는 뭐가 그리 재미난지 음흉하게 웃고 있었으니.
아린과 동료들은 ‘이 새끼, 또 시작이네’하는 표정으로 그를 돌아봤다.
한편으로는 기대 섞인 얼굴이 되기도 했다.
자신들의 친구는 항상 기상천외한 해결책을 가져왔으므로.
“앞으로 이 형님을 깍듯하게 모시거라. 짜라잔.”
셀퍼드는 뒷주머니를 뒤적거리면서 뭔가를 의미심장하게 꺼내 보였다.
동료들은 그게 뭔가 싶어서 봤다가 화들짝 놀랐다.
식권이었다.
“‘하얀 들불’의 예매석이잖아?”
“헐! 여기 요즘 최소 반년 치는 예약이 꽉 찼다고 들었는데!”
“무슨 수를 쓴 거야?”
하얀 들불은 최근 윈터러에서도 가장 선풍적인 인기를 자랑하는 술집이었다.
감각적인 인테리어는 물론, 술과 음식도 아주 맛있어서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각광을 받고 있었다.
전통 엘프 족 방식대로 술과 음식을 제조한다지?
들어보니 바스크 공방에서 출자해서 만들어졌다는 말도 얼핏 들은 것 같았다.
여하튼 그러한 특색 덕분에 하얀 들불은 미리 예약을 해두지 않으면 자리를 잡기 힘들고, 어떻게 자리가 나더라도 항시 웨이팅 하고 있는 무리가 있어서 꽉 차버리기 일쑤였다.
그런데 그런 곳을 미리 예약해뒀다고 하니 당연히 셀퍼드의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갈 수밖에.
“백갑용기대 판 건 아니지? 그럼 진짜 뒈진다.”
다만, 셀퍼드를 너무 잘 아는 아린은 감탄 보다 의심부터 던졌지만.
셀퍼드는 발끈했다.
“야! 그런 거 아니거든!”
“그럼 어떻게 구한 건데?”
“으흐흐! 당연히 이 오빠의 뛰어난 수완 덕분이지.”
“맞네, 이 새끼.”
아린의 게슴츠레한 시선은 도저히 사라지질 않았다.
“아! 진짜 아니래도!”
“…….”
“진짜야!”
“…….”
“야! 친구 말 안 믿냐? 동기 사랑 나라 사랑 몰라?”
“…….”
“아오! 속 터져! 가슴을 열어서 보여줄 수도 없고!”
아린의 시선과 셀퍼드의 원맨쇼(?)는 한참 동안 이어졌다.
“……저것들 또 시작이네.”
“저 정도면 거의 만담 커플 아니냐.”
“저렇게 매번 티격태격하면서도 잘 붙어 다니는 거 보면 참 신기해.”
일행은 질린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지만 익숙해도 항상 옆에서 구경하는 맛이 있기 때문에 요즘은 일부러 말리지 않고 오히려 부추기는 편이었다.
“아니, 도저히 앞뒤가 안 맞잖아. 우리는 그동안 계속 외부로 임무만 나가 있었는데, 네가 어떻게 예약을 해두냐고.”
테오와 함께 부유군도에 갔던 것까지 합치면 거의 1년에 가까운 시간이었으니까.
셀퍼드는 이제 아주 위풍당당하게 배불뚝이를 선보였다.
“그것이 바로 신묘한 이 셀퍼드 님의 신통력이지!!”
“하아, 이 새끼 봐라? 구라 맞네. 진짜 대장님께 일러바치든가 해야지.”
“진짜 아니라니까? 백갑용기대는 안 팔았어! 저번에 그랬다가 걸려서 나 잘릴 뻔한 거 모르냐?”
“그럼? 딴 거 팔았구만?”
“흥! 당연하지.”
셀퍼드는 여전히 당당했다.
“테오를 팔았다.”
“이런 미친 놈이…….”
탁!
아린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동료들은 헛웃음을 흘렸다.
“테오가…… 아니, 소가주님이 그러고 보니까 바스크 공방의 모델이었지?”
“요즘 소가주님 덕분에 장사 엄청 잘 된다는 말은 들었는데. 진짜 하얀 들불도 거기 거였어? 그럼 팔면 가능하지.”
“아, 그런데 자꾸 소가주님, 소가주님 하니까 입에 안 감기긴 하다.”
“야, 너도? 야, 나도.”
“아아, 우리 귀여운 막내가 너무 높은 곳까지 올라가 버려서 아쉬워요.”
동료들이 하는 말은 도저히 아린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이 철없는 친구 놈을 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는 생각 뿐.
까드득!
“진짜 너는 내가 징계위에 올리고 만다.”
“아, 왜! 나는 그냥 거기 가서 내가 테오랑 친하다는 것밖에 말 안했거든?”
“이제는 자기가 학연, 지연을 아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자각도 없는 거냐.”
“그게 바로 이 셀퍼드 님이시지.”
결국 폭발한 아린이 뭐라고 빼액 소리 지르려던 그때였다.
“야! 야! 그만하고 저기 봐!”
“왜……!”
동료들이 갑자기 아린을 붙잡고 다른 쪽을 검지로 가리켰다.
아린은 또 이게 무슨 짓인가 싶어 고개를 돌렸다가 인상을 딱딱하게 굳혔다.
30여 명의 검사가 완전무장을 한 채로 길거리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절도 있는 모습이 마치 군대라도 보는 것 같았다.
-와아! 어디지? 엄청 화려한데?
-6설가인가?
-선두에 선 사람은 킨카르논 님의 사람인 것 같은데…….
-가드너! 가드너다!!
사람들 중에 검사의 좌흉에 박힌 늑대 인장을 알아본 이들이 모두 감탄을 터뜨렸다.
가드너.
6설가 중에서도 날렵한 검술을 자랑하며 상징 동물인 늑대처럼 유기적인 단결성이 장점인 곳.
윈터러에서도 랑케와 함께 가장 호의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아린은 도저히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으니.
그녀가 다급하게 셀퍼드를 돌아봤다.
셀퍼드는 그동안 장난기 섞인 모습이 사라지고,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가드너의 행진을 보고 있었다.
‘이럼 안 되는데.’
아린은 다른 동료들과 재빨리 눈짓을 주고받았다.
어서 셀퍼드를 데리고 여길 빠져나가자는 의미였다.
“와! 우리 진짜 하얀 들불, 거기 가보고 싶었는데. 어떻게 딱 그걸 맞췄냐? 하여간 우리 셀퍼드, 참 대단해.”
“그러니까, 내 말이! 야, 예약 시간이 언제냐? 늦을라, 빨리 가자.”
두 동료가 셀퍼드의 양팔을 붙잡고 뒤로 빠지려던 그때였다.
“야! 이게 누구야? 셀퍼드 아냐?”
갑자기 뒤쪽에서 들리는 고함 소리.
아린과 동료들의 안색이 더 딱딱하게 굳고, 사람들의 시선이 일행에게로 쏠렸다.
가드너 행진에서 선두에 있던 사람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셀퍼드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남자.
하지만 자세히 보면 셀퍼드와 외양이 많이 닮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인파가 갈라지며 길이 만들어졌다.
“맞네! 셀퍼드! 아하하! 이게 얼마만이야? 이렇게 갑자기 보게 되니까 반갑다, 내 동생.”
남자, 가드너의 소가주 디에고 가드너는 양팔을 벌리면서 셀퍼드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셀퍼드는 한 발 뒤로 물러서는 것으로 포옹을 거부했다.
“형이 여긴 어쩐 일이야?”
디에고는 형제의 감격적인 재회가 실패하자 조금 계면쩍은 얼굴로 볼을 긁적이면서 대답했다.
“어쩐 일이긴. 항룡전 참관하러 왔지.”
“항룡전? 아, 가드너는 킨카르논 님 쪽 줄을 잡고 있었지.”
“……하, 하하. 줄은 무슨. 기수 가문으로서 큰 행사가 있으니 참관하러 온 거지.”
디에고의 얼굴에 순간 당황한 기색이 어렸지만, 곧 태연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셀퍼드로서는 코웃음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그래. 그럼 잘 참관하고 가.”
셀퍼드가 가볍게 인사하고 돌아가려는데, 디에고가 팔을 붙잡았다.
“에이, 정 없게 그냥 가려고? 형제끼리 오랜만에 만났는데 술이라도 한 잔 해야지. 친구 분들도 같이 모시고 가자.”
“미리 예약을 해둬서.”
“거기가 어딘데? 우리도 마침 예약해뒀거든. 하얀 들불이라고.”
“……!”
셀퍼드의 얼굴이 굳었다.
이 만남이 절대 우연이 아닌 모양이었다.
* * *
“요즘 여기가 윈터러에서 제일 핫하다며? 확실히 뭐가 다르긴 다른 것 같네. 사람도 많고.”
셀퍼드 일행은 디에고에게 강제로 납치되다시피 하면서 하얀 들불로 이동했다.
10인 대형실이 꽉 찼다. 셀퍼드 일행 6명과 가드너 측 4명.
상대 중 한 명은 셀퍼드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절도 있게 앉은 다른 검사들과 다르게 여유롭게 맥주 향을 즐기는 걸로 봐서는 가드너의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저쪽이 진짜인 것 같은데.’
“셀퍼드.”
“알아. 조심할게.”
셀퍼드는 옆에서 조심스럽게 자신을 부르는 아린을 보며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은 저쪽이 뭐라고 할지 지켜보자고. 나도 최대한 감정 안 드러낼 테니까.”
그러면서 씩 웃는 모습이, 아린에게는 더 위태롭게 보일 뿐이었다.
긴장감 넘치는 전장에서도 항상 여유롭게 웃는 셀퍼드였지만.
가드너가 그에게 끼치는 악영향은 그 이상이었다.
트라우마, 그 자체였으니.
“야,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 집에는 소식 한 번 전달하지 않으니 잘 살고 있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어머니랑 아버지가 얼마나 걱정하고 계시는지 알아?”
셀퍼드의 어깨를 두들기면서 정답게 이야기하는 디에고의 모습은 겉보기엔 동생을 아끼는 자상한 형 같았다.
하지만,
피식!
셀퍼드는 웃기기만 할 뿐이었다.
“걱정은 무슨.”
“동생…… 아?”
“오히려 속시끄러운 놈이 나갔으니 잘 되었다 싶었겠지.”
“야,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디에고는 서운하다는 투였지만, 셀퍼드의 비웃음은 더 커졌다.
“형, 같잖은 연기는 이제 그만 집어치워. 어차피 보는 눈도 없어.”
“…….”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적막이 흐르고,
“아, 씨발 새끼. X나 띠껍게 구네.”
자상했던 디에고의 얼굴은 짜증으로 일그러졌다.
그는 앞에 놓여있던 맥주를 단번에 들이키고는 세게 내려놓았다.
쾅!
깨진 유리 조각이 우수수 아래로 쏟아졌다.
“야, 그리고 누가 형이라고 부르라던? 윈터러에서 짬바 좀 먹고 나니까, 왜? 너도 라그나르가 된 것 같냐?”
디에고의 두 눈이 흉흉하게 빛났다.
“정신 차려, 새꺄. 너는 여기서 그냥 개일 뿐이야. 짖으라고 하면 멍멍 짖는 개, 어?”
셀퍼드는 웃었다.
그래, 이거지.
이래야 가드너 아니겠어?
그에게 가드너의 이미지는 아주 간단했다.
양아치.
겉으로는 사생아도 친자식처럼 따스하게 품는 듯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학대를 서슴지 않는 곳.
그래서 나이가 차자마자 바로 박차고 도망치다시피 하며 나와야 했던 곳.
-잘못했어요! 잘못했으니까,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네? 네?
덜덜…….
순간, 어린 시절에 본부인과 디에고가 그에게 하던 학대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맥주잔을 쥐고 있던 손이 살짝 떨렸다.
그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는데도 아직 극복되지 않았던 걸까.
셀퍼드는 왼손으로 오른손을 꾹 누르면서 더 독한 눈으로 디에고의 옆에 있던 남자를 노려봤다.
“쓸데없는 이야기는 집어치우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으면 좋겠는데. 당신 뭐야?”
무시당한 디에고가 옆에서 쌍심지를 켰지만, 셀퍼드는 그냥 무시했다.
남자는 흥미롭다는 듯이 두 이복형제를 번갈아 보다가 가볍게 웃었다.
“제3자가 괜히 형제의 우애 시간을 방해하는 건지 모르겠군. 내 최대한 빨리 용건만 마무리하고 떠남세.”
남자가 가볍게 헛기침을 하면서 목을 가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정식으로 인사함세. 본인은 킨카르논 님을 옆에서 모시는 책사 뎁트라고 한다네. 제안하고 싶은 거래 건이 있어 이렇게 결례를 무릅쓰고 찾아왔다네.”
회귀검가의 서자가 사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