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검가의 서자가 사는 법-192화 (192/224)

192화

승전식(勝戰式) (2)

“나 혹시 기억하나? 예전 지명식에서……!”

“흠흠! 질풍검단의 단장 조세핀이라고 하네. 혹시 시간 되면 나중에 차라도 한잔……!”

“비켜, 이것들아! 내가 먼저 줄 선거 안 보여? 흠흠! 나는 율법청의……!”

“너나 비켜!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율법청이 여기 있으면 어쩌자는 거야!”

“이놈이?”

“뭐?”

테오는 자신에게 지정된 좌석에 앉기도 전에 구름떼처럼 모여든 사람들을 보고 볼을 긁적였다.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줄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많이 모일 줄은 몰랐던 탓이었다.

‘토르켈은 전사하고, 나는 살아남았다는 소문이 돌아서 더 그런 거겠지.’

토르켈에 줄을 대던 사람들이 전부 말짱 황이 되고 만 셈이었다.

“테오 라그나르.”

하지만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은 따로 있었으니.

“저, 저 사람은……!”

“9룡까지 나선다고?”

“청검근위단장 님.”

인파들이 놀라서 자기들끼리 물러서는 가운데.

환룡이 조금 어색하게 웃으면서 테오에게 인사했다.

“오랜만일세.”

“최종 보고식이 있어 이틀 전에도 뵀었습니다만.”

“아, 그랬던가? 요즘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하루하루 깜빡하고 있구만. 험험!”

감정 표현을 드러내는 일이 거의 없다고 알려진 환룡이었지만.

어쩐지 그는 테오에게는 유독 약한 모습을 보였다.

-청검근위단과 백갑용기대, 백탑 사건 때문에 사이가 안 좋은 거 아니었어?

-자네, 그 소식 못 들었나?

-으응? 무슨 소식?

-청검근위단이 요즘 들어 흑색철기대와 유독 관계가 가깝지 않았나? 그래서 그런 모양이던데?

-천하의 환룡이라고 해도 정치 싸움은 무서운 거구만.

-딱 그런 거지.

환룡은 주변에서 쏟아지는 사람들의 시선이 어떤지 잘 알고 있었지만, 최대한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긴히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데 말일세. 나중에 따로 식사라도 한 끼 괜찮겠나?”

“예. 그러시죠.”

“후후. 고맙군.”

혹시 테오가 지난 일로 경계할 것을 우려했던 환룡은 살짝 안도에 찬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렇게 어린아이를 신경 써야 하는 자신의 모습이 조금 울적했다.

아침에 카일에게 들은 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늘 소가주 발표가 있을 거라는 말이 사실이냐고? 글쎄. 어쩌면.

그렇다면 그 자리가 누구 것인지는 불에 보듯 뻔했다.

환룡은 발등에 불똥이 떨어진 심정이었다.

후계 구도가 정해진다는 것은 간부진들에도 변화가 생긴다는 뜻.

그는 이 나이에 벌써 현역에서 물러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이 자리에 몰려든 다른 간부들도 마찬가지인 셈이니.

‘이 아이가 정말 소가주가 된다면…… 킨카르논이나 안시오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르겠어.’

그들이 지난 수십 년 동안 카일의 눈에 들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지를 잘 알기 때문에 가진 생각이었다.

그렇게 환룡이 자리를 떠나고.

그 뒤에는 율리우스와 매화궁주, 흑룡이 차례로 다가왔다.

“오늘따라 헌앙하구만? 내가 참 사람을 잘 뽑았단 말이지. 하하하!”

“축하해, 아…… 들.”

“감사합니다, 어머니.”

매화궁주는 ‘아들’이라는 말이 영 어색했던지 그녀답지 않게 콧잔등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그러면서도 슬쩍슬쩍 눈치를 살피는 것이 테오의 반응이 어떨지 몰라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몇 달 전에 세실리아와 따로 시간을 가졌던 때가 떠올랐다.

-테오를 양자로 들이게 되었어요.

-그런가요?

-화가 나지 않으신지?

최근 들어 세실리아의 성격이 많이 유해졌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래도 그녀의 시기와 질투는 라그나르에서도 악명이 높았다.

그래서 매화궁주는 그녀를 찾을 때까지만 해도 욕 먹을 각오를 단단히 해두었었다.

하지만,

-조금 섭섭하긴 하지만…… 굳이 그럴 게 있을까요. 아드님이 선택하신 일이신 것을요.

예상과 달리, 세실리아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입가엔 잔잔한 미소를 달고 있었다.

그 순간, 매화궁주는 깨달았다.

세실리아는 더 이상 자신이 알던 예전의 세실리아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리고 저는 항상 1부인께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었답니다. 1부인이 아니셨다면 저도, 테오도 그 자리에 계속 있을 수 없었을 테지요.

더군다나 세실리아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과거. 모두가 그녀를 못마땅하게 여겨 장미궁에서도 축출하자고 말하던 것을, 유일하게 그녀를 비호 했던 사람이 매화궁주였단 사실을.

-저는 비록 가는 길이 달라 아드님께 드리지 못한 길을, 1부인께서는 아드님께 잘 보여드릴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답니다.

그러면서 앞으로도 테오를 잘 부탁한다고 말하던 모습은 어찌나 그리 부드럽고 자상하던지.

‘테오가 성장한 것처럼 이 여인도 그만큼 성장했구나.’

매화궁주는 테오가 ‘어머니’라는 말로 화답하자 싱긋 미소를 지었다.

두 모자의 웃음이 왜 이렇게 닮은 건지. 조금 질투도 났다.

“뭐지? 아들? 양자로 들였다는 소문이 그럼 사실이었나?”

옆에서 흑룡은 놀란 얼굴로 매화궁주와 테오를 번갈아 봤다.

“어쩌다 보니까요.”

“허! 이런 식으로 선수를 친다고?”

율리우스는 아예 작정하고 후임으로 삼으려는 것 같던데.

그럼 대체 난 뭘 주지?

흑룡은 진지하게 테오에게 당장 무설이 아니라 흑설주 자리를 주고 자신은 뒤로 빠져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기다리던 소식이 있을 거니까 기대하고 있으렴.”

매화궁주는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으면서 지정석으로 이동했다.

‘기다리던 소식.’

테오는 그 말을 가만히 곱씹었다.

아무래도.

오늘 하루는 정말 길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 * *

본격적인 논공행상식이 시작되었다.

“먼저, 패룡.”

카일의 호명에 따라 단상 위로 거구의 한 남자가 걸어나왔다.

자신만만한 표정의 얼굴.

세상을 뒤집을 것 같은 패기까지.

쿵! 쿵! 쿵!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단상이 들썩거렸다.

-역시 패룡……!

-공개 석상에 나타나신 게 너무 오랜만이지?

-들어보니 그동안 가주님의 명령에 따라 트로이반 측에 잠입해서 동태를 살피고 계셨다더군. 이번에 그라나다의 오른팔을 자르기도 했다던데?

-역시 대단하시군.

사람들이 수군거릴 때마다 패룡의 입꼬리도 들썩거렸다.

‘역시 전생이나 지금이나 똑같으시네.’

테오는 쓰게 웃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전생을 통틀어 패룡을 직접 대면한 건 몇 번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때마다 그에게서 받았던 인상은 매번 대단했었다.

뽐내기를 자랑하고, 주목받기를 좋아한다.

관심 종자 기질이 아주 강했던 것이다.

‘그랬던 사람이 내 뒤를 계속 몰래 지켜보고 있었단 말이지. 아니, 정확하게는 원래 부유군도 쪽의 상황을 알고 대기하고 있었던 거라고 해야겠지?’

테오도 이제 부유군도에서 해저에 처박혔던 봉공이 왜 그 뒤로 나타나지 않았는지를 알고 있었다.

당시 테오가 나타났을 때, 패룡도 내심 황당했으리라.

그는 카일의 명령을 받고 부유군도를 라그나르 측으로 회유하기 위해 상황을 관측하고 있던 중이었으니.

하지만 갑자기 테오가 나타나 그 공을 고스란히 가져간 셈이었으니.

아니나 다를까.

패룡이 살짝 고개를 돌려 이쪽을 보았다.

두 눈이 잠깐 마주친 동안. 두 사람 사이에 숨 막힌 적막이 흘렀다.

테오는 자신의 속이 낱낱이 해체되는 느낌이었다.

흥!

하지만 패룡은 못마땅한 눈치로 가볍게 코웃음만 칠 뿐, 더 이상 테오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과연 자신에게 어떤 평가를 내렸을까?

테오는 기샤르와 안시오의 스승이기도 한 패룡의 생각이 궁금했다.

“패룡, 단테 롤. 그대는 이번 전쟁을 종전시키는 데 지대한 공적을 세웠다. 남서쪽에 위치한 옛 크루난 백작령을 봉토로 하사하고, 가문을 열 수 있는 <창업의 권>을 하사한다.”

순간, 패룡이 등장했을 때보다 주변이 더 어수선해졌다.

-차, 창업의 권?!

-그렇게나 큰 상을 내리신다고? 이거 200년 만에 있는 일 아냐?

-일곱 번째 설가가 열리는 건가……!

창업(創業)의 권(券).

그건 라그나르의 긴 역사에서도 발행된 횟수가 단 아홉 번밖에 되지 않는 엄청난 권리였다.

무려 ‘가문’을 열 수 있는 권리였다.

물론, 라그나르의 허락이 없어도 빈 영토가 있으면 자리를 잡거나, 마해 지역을 개척한 후에 가문을 일구는 것은 가능했다.

그리고 라그나르에 충성을 맹세하면 봉신 및 기수 가문으로 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라그나르에서 산하 세력으로서 보호만 해줄 뿐, 별다른 지원은 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창업의 권을 받은 가문은 달랐다.

개척에 필요한 전폭적인 지원이 뒤따랐고, ‘방계’로 인정되어 라그나르의 권좌에 도전할 수 있는 권리도 인정되었다.

때에 따라서는 라그나르, 그 자체가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현재 북방에서 창업의 권을 하사받아 가문을 일군 곳은 모두 여섯 곳.

그들이 바로 6설가였고, 최근에는 200년 전의 랑케 가문이 전부였다.

카일이 자신과 함께한 의형제들에게도 내어주지 않았을 만큼 엄청난 것인데.

그걸 패룡에게 허락한다?

더구나 옛 크루난 백작령이라면 북방에서도 손꼽히는 옥토(沃土)였다.

그곳에다 가문을 창업한다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카일이 패룡의 업적을 높게 샀다는 뜻.

당연히 사람들도 난리가 날 수밖에 없었다.

“형님.”

“……나도 처음 듣는 이야기다. 하, 하하하……. 우리 형님, 정말이지 이런 폭탄을 안기실 줄은 생각도 못했는데.”

율리우스는 다급하게 흑룡을 돌아봤지만, 흑룡도 헛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결국 두 사람은 똑같이 매화궁주를 돌아봤다.

하지만 매화궁주도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저도 듣지 못했어요. 안시오에게 힘을 실어주실 의향이신 것 같은데…… 카일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저도 모르겠어요.”

이미 그들 세 사람이 테오를 지지하고 있다는 의사는 카일에게 충분히 전달한 상태.

카일의 속마음도 테오에게 향하고 있단 것을 확인했기 때문에 이번 승전식에서 후계 구도를 확실시 할 것이라고 예상했었는데.

‘설마 지금 이 다툼을 더 끌고 갈 생각이신가?’

율리우스는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맏형을 보면서 속이 답답해졌다.

그도 패룡이 얼마나 야망이 넘치는지, 안시오가 얼마나 욕심이 넘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머지않아 대대적으로 성마교 토벌전도 벌어야 하는데.

사도 박멸을 앞에 두고 가문을 단합하기는커녕 오히려 또 분열을 일으키려는 카일의 속내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도 아니면……?’

그러다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다.

옛 크루난 백작령은 비옥한 땅만큼이나 마해와 윈터러에서도 한참 떨어진 곳.

즉, 북방 정계만 따진다면 변방이란 뜻이었다.

그렇다면 오히려 안시오를 패룡과 함께 윈터러에서 강제로 떨어뜨리려는 계책이 아닐까?

“주신 권한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다만, 봉토는 거절하겠습니다.”

그때, 갑자기 부복하던 패룡이 자세를 풀고 상체를 일으켰다.

9룡들도 함부로 쳐다보기 힘들 만큼 강렬한 카일의 안광을 마주하고도, 그는 일절 주눅 드는 게 없었다.

“가문의 힘은 봉토에서 나오는 법. 봉토가 없는 가문의 창업은 인정되지 않는다만?”

“크루난 백작령은 필요한 다른 놈들에게나 내려주시고, 저에게는 트로이반의 땅을 주십시오. 그 정도는 가질 자격이 충분하지 않습니까?”

트로이반의 땅을 달라!

사실상 동부에 대한 지배권을 넘겨달라는 뜻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율리우스를 비롯한 9룡과 여러 간부들이 모두 기함을 터뜨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카일이 덤덤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 자격은 충분하지. 아니, 넘치지. 넘치고 말고.”

“그럼……!”

“하지만 그건 안 된다. 이미 내어줄 사람이 내정되어 있으니까.”

패룡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번 전쟁에서 자신보다 더 큰 공적을 세운 사람이 있다고?

그때, 카일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돌아갔다.

패룡도 그쪽으로 돌렸다가 인상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 자리에는 테오가 앉아있었다.

“그 땅은 소가주에게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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