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광룡제의 후예 (5)
“카일. 네가 어떻게?”
그라나다는 적잖게 당황한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카일이 라그나르의 본진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카일로서는 광룡제가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상황.
그러니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동안 북방 전쟁에서 카일이 전면전에 나서지 못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언제라도 나설 수 있게 만반의 준비를 해야 했으니까.
‘그러니 아이러니하게도 라그나르의 전력에서 카일을 배제할 수 있었던 것인데……!’
그라나다가 테오에 대한 함정을 파둘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하지만 카일은 오히려 냉소를 흘렸다.
“너도 세작을 심어두는데, 나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이 있나?”
“……!”
“광룡제가 나설 상황이 아니라는 건 이미 오래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내 노림수는 예전부터 너였지.”
“……설마, 그럼 그동안 전선에 직접 모습을 비추지 않았던 건.”
“너를 방심시키기 위해서.”
카일의 냉소가 더 짙어졌다.
“덕분에 이렇게 걸려들었으니. 얘나 지금이나 너는 배운 게 전혀 없구나, 그라나다.”
으드득!
그라나다는 이를 꽉 깨물었다.
-그라나다. 너는 너무 성격이 급해. 조급하다고. 그러다간 평생 내 그림자도 못 밟는다니까, 멍청아?
언제였던가.
북방과 동부의 교류를 이유로 잠시 교분을 가진 적이 있었다.
그때 이미 카일은 천재로 제국 곳곳에 이름을 날리고 있었고, 그라나다는 갓 세상에 출두한 초짜였다.
당연히 어린 혈기에 카일에 대한 호승심을 잔뜩 드러냈고.
크게 패배했다.
1초식도 제대로 뻗지 못하고.
교류회가 끝난 뒤로도, 그라나다는 몇 번씩 라그나르에 찾아와 카일에게 도전했다.
그리고 번번이 패배했다.
분명히 자신도 뼈를 깎는 노력을 하는데 어째서 카일의 옷자락도 스치지 못하는 걸까?
그래서 분한 마음에 화를 냈더니, 카일이 저렇게 말했었다.
너는 기다릴 줄 모른다고.
수를 놓는다는 것은 계산도 계산이지만, 기회가 올 때까지 기다릴 줄 알아야만 하는 것이라고.
당시에는 카일이 위에서 내려다보는 느낌이 고까워 듣지도 않았었는데.
왜 갑자기 당시의 일이 떠오른 걸까?
선택자라는 미끼가 버젓이 앞에 있는데 자신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는 걸 이미 예상 하에 두고 차근차근히 수를 둔 것이다.
카일은.
“웃기지 마라.”
팟! 파밧!
그라나다 뒤쪽으로 여러 개의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얼굴에는 나무탈을 쓰고, 몸에는 로브를 두른 봉공들.
특히 9봉공 나인과 8봉공 아크트의 안광이 흉흉하게 빛나고 있었다.
각각 사명을 띠고 외부로 움직였으나, 테오에게 실패의 굴욕을 맛보고 말았던 자들.
“그래. 내가 성미가 급해 너의 술책에 걸려들었다는 건 인정하지. 하지만 직접 여기서 모습을 드러내? 너의 오만함이 결국 라그나르를 몰락으로 이끌었다는 걸 알아야 할 거다.”
그라나다는 아예 생각을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여기서 카일을 처치하고, 테오도 생포할 수 있다면 최고의 시나리오가 아닌가?
카일은 자신의 시나리오 때문에 오히려 자신이 죽게 되리라.
파아앗-
봉공들이 섬광이 되어 카일에게 쏘아지고.
“이것들이 그 말로만 듣던 마탑과 연계해서 만들었다는 ‘실험작’인가 보군? 망신의 영육을 떼어다 이식해서 무한 마력(無限魔力)을 만들어낸다는. 하지만 실패해서 죄다 괴물이 되어 가면을 쓰고 만다는 그?”
봉공들이 두르고 있는 로브 자락 아래에 있는 건 평범한 몸이 아니었다.
촉수들이 기괴하게 뒤엉킨 형태.
그 촉수들이 마구 풀리면서 카일의 주변을 쓸었다.
그 끝에는 독기가 잔뜩 묻어있었다.
일반인은 한 줌만 닿아도 녹아버릴 마해의 독.
“맞다. 너희 9룡을 대체하기 위해, 아니, ‘진화’시키기 위해 탄생시킨 그릇들이지. 그렇게 잘 안다면 이것들이 얼마나 위험한지도 아주 잘 알겠구나.”
지이이잉!
그라나다는 용활검에 마력을 잔뜩 불어 넣었다.
봉공들이 카일의 발을 묶는 동안, 자신은 이것으로 카일의 머리를 날려버릴 생각이었다.
‘비록 용살검이 없어 시련을 완전히 끝내지 못했다는 점이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하다.’
용활검은 모든 태고룡의 유물 중에서도 최고로 치는 지고유물(至高遺物).
선택자만이 라그나르의 가주가 될 수 있던 시절에는 군주를 의미하는 홀(笏)의 대용품이기도 했다.
여기에 숨겨진 힘은 바로 용력의 활성화.
용의 인자를 타고난 사람들에게 충성심을 불어넣고, 그들의 마력을 자유자재로 온오프(On-Off) 할 수 있는 자격이 있었다.
이미 그라나다는 광룡제가 주었던 [푸른 열쇠]를 사용해 시련을 열었고, 용활검의 기능을 깨우는 데 성공한 상태였으니.
세트인 용살검이 없어 완전한 주인으로 인정을 받은 건 아니었지만.
카일이 가진 용력을 단 몇 초나마 봉인시키기엔 충분했다.
그리고,
그들 같은 초인들의 세계에서 ‘몇 초’라는 것은 목숨을 결정짓는 중요한 순간이었다.
부아아아앙!
그 순간, 봉공들과 카일의 충돌이 벌어지고.
번- 쩍!
그라나다가 용활검을 휘두르려던 그때였다.
“말하지 않았나. 자네는 성미가 너무 급하다고. 오만한 건 내가 아니라 바로 너지.”
카일의 웃음기 섞인 소리가 그라나다의 귀를 찔렀다.
뭐?
의문을 드러내기도 전에.
푸화아악!
갑자기 그라나다의 오른팔이 허공으로 튀어올랐다.
용활검을 든 채로.
“적에게 등이나 보이고 말이야.”
다시 귓가에 꽂힌 카일의 비웃음.
그라나다는 당황한 얼굴로 자신에게 기습을 가한 봉공을 바라봤다.
나인.
-너도 세작을 심어두는데, 나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이 있나?
카일의 말이 있기도 했지만, 그래도 봉공들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특히 나인은 더더욱.
부유군도 공략전에 실패해 테오와 라그나르에 가장 크게 원한을 가지고 있지 않았었나?
나무탈 아래 보이는 두 눈이 짜증스럽게 일그러져 있었다.
「쯧! 죽일 수 있었는데. 그걸 피해?」
나인이 그라나다의 남은 팔과 머리를 가져가기 위해 몸을 날렸다.
순간, 대기가 떨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위압감이 치솟으며 그라나다의 양어깨를 짓누르더니.
화아악!
나인의 모습이 빛무리에 잠겼다가 다른 모습으로 변했다.
3미터에 가까운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거구.
“패룡……!”
그라나다의 얼굴에 경악이 어렸다.
강하기로는 9룡 중에서도 마룡과 쌍벽을 이룬다는,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는 작자가 왜!
그라나다는 알 수 없었다.
나인이 부유군도의 해저에 가라앉았을 당시에 조우했던 빛의 남자가 바로 패룡이었다는 사실을.
쿵쿵쿵쿵쿵!
패룡이 지면을 박찰 때마다 엄청난 격진이 일어나고,
콰아아앙!
이윽고 그라나다 앞에 도착하며 휘두른 주먹은 마치 성문을 부수는 공성추처럼 위협적이었다.
오른팔을 잃은 그라나다는 허겁지겁 왼손으로만 그걸 막아야 했다.
결국 엄청난 충격파가 번지면서 먼지 구름이 높게 치솟았다.
동시에 하늘에서부터 먼지 구름을 확 젖히는 빛무리들이 꽂혔다.
검룡 매화궁주, 흑룡 로베르, 빙룡 니엘, 환룡 청검근위단장, 심지어 원룡 원로원장까지.
다섯이나 되는 9룡의 등장이었다.
“청검근위단장, 토르켈과의 결탁 혐의가 있는 만큼 이번 전투에서 제대로 된 공적을 보이지 못한다면 부득이하게 당신의 혐의를 물을 수밖에 없소. 원로원장도 마찬가지요. 지난 과업을 씻고 싶다면 최선을 다해서 싸우시오.”
흑룡은 짧은 경고와 함께 가장 먼저 몸을 날렸다.
그의 목표는 그라나다.
정적이기도 한 패룡에게 중요한 공적을 놓칠 수 없다는 생각이 눈에 가득했다.
“제기랄. 하필이면 일이 꼬여도.”
“……아직 왼손이 익숙지 않지만. 그래도 이것이 결백을 증명할 길이라면.”
환룡은 지난 며칠 동안 좋은 술친구였던 토르켈을 떠올리며 분통을 터뜨렸고,
울프강은 오래 전에 자신도 축출하는데 한 손 거들었던 친형의 수하들을 죽이기 위해 발을 옮겼다.
칼바람이 불어 닥쳤다.
콰르르릉!
그라나다의 손발이 어지러워졌다.
조금 전까지 자신감으로 가득하던 두 눈에 새로운 감정이 어렸다.
암담함.
그리고 두려움이었다.
* * *
[올 버프 모드가 종료됩니다.]
[패널티가 찾아옵니다.]
털썩!
테오는 물 먹은 솜처럼 무거워진 몸과 함께 바닥에 주저앉았다.
단순히 토르켈만 암살하면 될 줄 알았는데, 카일과 9룡의 등장이라니.
연이은 빅 이벤트 때문에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긴장감은 탁 풀렸다.
저들이 패배할 거란 생각은 전혀 되지 않았으므로.
‘날 미끼로 쓰시는 걸로도 모자라 감시의 눈인지 보호자인지도 모를 사람으로 패룡까지 붙이셨을 줄은 몰랐지만.’
봉공들 중에 패룡이 정체를 드러냈을 때는 자신도 어찌나 놀랐던지.
자신도, 그 임무를 같이 뛰었던 셀퍼드와 아린도 전혀 몰랐던 사실이었다.
대체 카일은 그라나다를 처치하기 위해서 몇 수나 앞을 내다봤던 걸까?
『정말이지 보면 볼수록 인간 같지 않은 작자로다.』
로드브로크는 그런 카일이 영 마뜩잖은 듯했다.
『아무리 가문 부흥이 최우선이라 해도, 어떻게 자신의 아들을 이렇게 도구로밖에 여기지 않는 건지. 결국 토르켈인가 하는 저 아이도 카일에게 이용만 당한 셈이 아니냐?』
테오도 토르켈의 반란이 애당초 카일의 포석이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신의 경지를 목전에 둔다더니. 그래서 그런가? 감정까지 말소되고 만 게?』
‘저는 다르게 생각합니다.’
『뭐?』
‘당신께서도 그런 비정한 선택을 하시는 데 있어 많은 고민이 있지 않으셨을까요?’
『반려여, 그대는 그대의 아버지를 그리 오래 겪고도 아직도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모른단 말이더냐?』
‘요즘 들어서 저나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던 아버지가 꼭 그런 아버지가 아닐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어서요.’
테오는 출전하기 전에 만났던 카일의 모습을 떠올렸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어째선가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나, 억지로 삭인 것 같은…….
『그래. 그대의 아비이지, 내 아비는 아니니까. 하지만 그대도 언제 뒤통수를 맞을지 모르니 조심해라.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니.』
여전히 로드브로크는 카일에 대한 불신이 엄청나서 테오는 계면쩍게 볼을 긁적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아이고, 죽겠다아.”
그때, 홀커스가 테오 옆에 주저앉으며 한숨을 토했다.
덕분에 로드브로크와 더 이상 입씨름할 필요가 없었다.
테오가 엷게 웃었다.
“고마워.”
입씨름을 끝낼 수 있었던 것과 조금 전에 자신을 구해준 것. 모두를 담은 인사였다.
“……내가 한 것도 없는데, 뭐.”
홀커스는 살짝 콧잔등이 붉어진 채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사실 그는 진심이었다.
테오를 지키겠다고 나섰지만, 사실상 거기서 카일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을 거란 걸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테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 게 없긴 왜 없어? 그라나다에게 한 방 먹였는데.”
“칼 한 번 제대로 못 부딪쳤……!”
“그게 뭐 중요해? 중요한 건 네가 나선 덕분에 가주님이 나타날 시간을 벌었단 거지. 그라나다는 그것 때문에 아무것도 이뤄낸 게 없고.”
“……!”
“넌 엄청난 성과를 낸 거야, 홀커스. 그리고 내 생명의 은인이고.”
두근두근두근!
테오가 한 마디 한 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홀커스는 심장이 마구 뛰는 걸 느꼈다.
-드디어 테오의 인정을 받았다.
선망하던 친구의 저런 따뜻한 한 마디가 가진 힘은 너무 대단했다.
지금까지 갖고 있던 열등감이며 자괴감이 모두 날아갔다.
홀커스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지만, 너무 목이 멨다.
“이열, 내 동생. 요즘 너무 찐따 같아서 어디다 쓰나 했는데 이젠 좀 치네?”
그때, 팔로 홀커스의 목을 감으며 에리카가 앉았고, 테오 옆에는 레이가 앉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 인정한다는 듯이.
오랜 격전 때문인지 그들 네 사람 전부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제기…… 랄.”
가슴이 간질간질하다.
홀커스는 울컥한 나머지 고개를 옆으로 홱 돌렸다.
“뭐야? 너 우냐? 울어? 푸하핫! 덩치도 산만한 새끼가!”
“울긴 누가 울어!”
“우긴 누가 우어.”
“따라 하지 마!”
“따라 하지 마.”
“따라 하지 말라고!!”
“따라 하지 말라그.”
“야!”
홀커스와 에리카가 친남매 같은 모습을 보면서.
‘내가 조를 새롭게 만든다면. 이 친구들과 같이 한다면 재미있지 않을까?’
테오는 얼핏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들과 같이 세계를 뛰어다닌다면 정말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카일과 의형제들이 지금의 라그나르를 만들어낸 것처럼.
자신도 이들과 함께 한다면 새로운 라그나르를 그려볼 수 있겠다는 생각까지도.
‘여기다 웰까지 있다면 더 좋을 텐데.’
웰링턴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아주 잠깐 동안 들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비록 흑룡은 웰링턴을 죽여야 할지도 모른다고 말했지만, 자신은 어떻게든 그를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겠다고.
그리고 등룡도, 나아가 힐다까지도.
‘내가 만들 라그나르에는 토르켈 같은 사람이 더 이상 없도록. 그렇게 만들자.’
그렇게 미래까지 다지는 동안.
촤아아악!
거칠게 목이 잘려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테오와 친구들의 시선이 전부 그쪽으로 돌아갔다.
카일이 휘두른 일격에 그라나다의 머리통이 날아가고 있었다.
회귀검가의 서자가 사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