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임시 5번조장 (3)
‘절대 방어와 공격 반사가 가능한 아티팩트. 그렇다는 건 목숨 여벌이 3개나 생겼다는 건데.’
앞으로 더 큰 위험한 임무를 뛰어야 하는 테오로서는 이보다 더 마음에 차는 아티팩트도 없을 것이다.
횟수에 제한이 있다는 점이 아쉽긴 하지만, 그거야 어쩔 수 없는 부분이겠지.
『보아하니 인과의 신이 가호(加護)를 건 임시 신물의 일종인 듯한데.』
로드브로크는 반지를 이래저래 살피면서 그렇게 품평을 내렸다.
‘인과의 신이요?’
테오는 백탑을 오르는 내내 자신에게 호의를 내비치던 신을 떠올렸다.
그. 혹은 그녀가 왜 자신에게 계속 그런 모습을 내비쳤는지는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다.
『그래. 인과(因果)란 반드시 정해진 원인과 결과를 의미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원인에 ‘변수’를 더해서 그 결과값을 임의로 바꿀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
로드브로크는 손으로 턱을 쓰다듬으면서 말을 이었다.
『아무래 3회용이라고 해도 이런 시기에 이런 걸 내어줬다는 건…… 인과의 신이 이 미래에서 뭔가를 봤다는 뜻인 것 같은데.』
“이번 임무…… 쉽게 볼 게 아니란 뜻이군요.”
『그래. 이번 임무에서 그대가 할 일이 단순한 암살에만 국한된 게 아니란 뜻일 수도 있다. 만신전의 신들이 보는 시간선은 우리네들보다 훨씬 더 깊고 넓을 테니.』
“그 말씀은.”
『네가 보았던 외신(外神)들의 침략이 보다 격렬해질 거란 의미가 아닐까 싶다. 특히 <이름 없는 군주>가 가장 많이 날뛰지 않을까 싶은데.』
이를테면, 안배란 뜻이었다.
앞으로 <이름 없는 군주>와 성마교가 더 크게 날뛸 테니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으라는.
인과의 신은 그런 테오가 걱정이 되어 자신의 가호를 담은 물품을 내어준 것일 테고.
현재 만신전은 외신의 침략을 막는 데 집중하느라 정작 세계의 경영에는 큰 관심을 기울일 수 없는 상태.
그런데도 이만한 물건을 내어줄 때에는 그만큼 커다란 대가를 치렀다는 뜻이겠지.
그만큼 테오를 걱정하고 있단 뜻이었다.
‘대체 뭘까? 토르켈 뒤에 있다는 건. 성마교나 <이름 없는 군주>와 연루되어 있기라도 하나?’
어쩌면 이번 일을 계기로 쫓기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았던 흑룡이나 매화궁주의 비밀과 연관되어 있을지도 몰랐다.
어차피 테오도 여기서 약해질 생각 따윈 없었다.
어쩌면 흑색철기대라는 거대한 장벽에 보호될 토르켈을 암살하는 데 가장 요긴하게 쓰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쐐애애액!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움브라는 더 힘차게 날갯짓을 퍼덕였다.
저 멀리.
어느덧 트로이반의 근거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 * *
성마교는 일종의 사교(邪敎)였다.
제국에서 반드시 배척해야 할 이단으로 취급하는 자들.
그래서 제국에선 선제후들과 함께 여러 군병들을 모아 주기적으로 그들에 대한 토벌을 감행했다.
특히 수십 년 전에 라그나르를 중심으로 뭉친 대대적인 토벌군은 성마교의 숨겨진 본단까지 궤멸시켰을 정도였으니.
한동안 성마교의 ‘성’자도 보이지 않았던 건 모두 영웅 카일 라그나르의 덕분이었다.
하지만 사교 집단은 사교 집단.
워낙에 뿌리가 깊은 탓에 그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고, 세계가 혼란에 잠길 때면 다시 슬금슬금 나타나 고개를 치켜들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제국 황실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대륙 곳곳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자연재해가 찾아오면서 수많은 유민이 탄생했다.
내일이 없는 민초들에게 내세를 약속하는 성마교의 속삭임은 악마의 목소리처럼 달콤했으니.
‘교주께서도 머지않아 돌아오실 테니…… 우리들의 부활도 얼마 남지 않았음이다!’
추기경 벡터는 크게 웃었다.
지금도 보라.
이리도 많은 신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위대한 신의 부활을 바라고 있지 않은가.
“위대한 신께서 가로시되, 너희 백성들아, 어찌 그리도 슬픈 삶을 살고 있느냐, 너희들이 그토록 오로지 고통과 핍박 받는 삶을 살고 있는 이유는 지금의 세계가 거짓되었기 때문일지니-!”
999개의 계단으로 이뤄진 제단 위.
하얀 법복을 갖춰 입은 제사장이 9,999명의 열혈 신도들을 굽어다 보며 설법을 강론하고 있었다.
“너희들이 구원받는 유일한 길은 바로 거짓된 세계에서 탈출하는 방법뿐이니라. 그것을 내가 도와주겠노라. 창세와 함께 어둠 속에 묻힌 그림자에서부터 내가 돌아와 거짓된 세계의 재생을 멈추고, 너희들을 그 굴레통에서 꺼내주겠노라-!”
제사장의 설법이 길어질수록 제단 양옆에 놓인 청동 화로가 더 밝게 빛났다.
화르륵!
검은 불꽃이 거칠게 일렁거렸다.
주변 온도가 높아졌다.
양손을 끌어모은 채 기도를 올리는 신도들의 열기도 덩달아 높아졌다.
광기(狂氣).
그 분위기는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었다.
벡터는 가만히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의식은 이제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사람들이 아주 많이 모였군.”
그때, 벡터 옆으로 한 중년인이 다가왔다.
상대를 확인한 벡터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걸렸다.
“평소 설법에 관심이 없으시던 에드 형제님께서 이리 왕림하신 걸 보니 드디어 신께 귀의하시기로 마음을 먹으신 모양입니다.”
에드 트로이반.
북방에서는 라그나르의 항룡이라는 신분을 갖고 있었으나, 이제는 트로이반의 후계자 자리를 되찾은 이가 한쪽 입술 끝을 비틀었다.
“아쉽게도 나는 무신론자라.”
“안타까울 노릇입니다. 이리도 신의 기적이 바로 앞에 있는데도 그걸 멀리하시니…….”
“성마교에 대한 헌신은 아버지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나?”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래도 아쉬운 마음에 말씀을 드리는 게지요.”
트로이반과 성마교는 단순한 동맹 관계가 아니었다.
오히려 혈맹(血盟)에 가까웠다.
트로이반의 가주, 그라나다 트로이반이 성마교의 열혈한 신도였으므로.
물론, 자긍심만큼은 라그나르에 못지않다는 그라나다가 성마교에 복속한 것은 아니었다.
종교적인 믿음과 세속적인 입지는 별개였으므로.
다만, 그라나다가 진심으로 모시는 존재가 성마교의 ‘사도(使徒)’로 있다는 사실만큼은 무시할 수 없었다.
에드가 성마교의 교세 복구를 돕고, 이번 부활식에 참여한 것도 모두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신의 부활이라니. 우스운 노릇이지.’
에드는 점점 열기를 더해가는 의식을 보면서 가볍게 콧방귀를 꼈다.
신이 정말 존재한다면.
저들이 말하는 대로 그 신이란 존재가 정말 전지전능하다면.
왜 그동안 성마교는 세력의 부침을 겪었고, 이 세계는 아직도 그 신의 손아귀에 떨어지지 않았는가?
그리고 지금과 같은 ‘부활’이 왜 필요하단 말인가?
어차피 승리가 예정되어 있을 텐데?
하지만 그동안 에드가 봤던 그 신은 패배도 하고, 때로는 몰락도 겪는 불완전한 존재였다.
‘애당초 봉인부터 되지 말았어야지.’
에드는 <이름 없는 군주>가 한창 기세를 떨치다 말고 갑자기 왜 알 수 없는 이유로 봉인 되었는지를 알고 있었다.
추기경이니 주교니 하는 작자들은 신께서 기적을 너무 많이 구현하시어 쉬고 있는 중이라고 둘러댔지만.
진실은 어떤 마법적 구속에 의해 임시 봉인이 된 거였다.
그게 아니면 봉인을 풀기 위해 이런 쓸데없는 의식을 벌일 필요가 없겠지.
그리고,
‘그걸 해낸 건 테오, 그놈일 테지.’
테오 라그나르.
처음에는 증오스럽고 하찮게 여겼으나, 이제는 오히려 얼마나 더 성장할 수 있을지 궁금함이 들게 만드는 아이.
“너라면 분명히 이 부활식을 막으러 직접 올 테지. 자, 내게 보여봐라. 이번엔 어떤 모습을 할 건지.”
혼잣말로 작게 중얼거리는 에드의 눈빛에는 광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테오에 대한 집착이 낳은 광기.
그리고 완성을 목전에 둘 때까지 기다렸다가 직접 제 손으로 부수고자 하는 광기.
“그래도 저는 걱정하지 않는답니다. 에드 님도 앞으로 있을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신다면 신을 믿을 수밖에 없을지니!”
추기경 벡터가 양손을 활짝 펼쳤다.
마치 하늘에서 쏟아지는 신의 은총을 직접 맞으려는 것처럼.
벡터의 얼굴에는 붉은 홍조가 돌며 그가 깊은 환희에 젖어들 때쯤.
부활 의식도 어느새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위대한 신을 맞이하는 방법은 오로지 하나뿐일지니. 그분의 재림을 믿는 것뿐이로다. 그러니 묻겠다. 너희 어린 양들아. 그분의 재림을 믿는가?”
“믿습니다!”
“믿습니다아아!”
제사장이 던진 질문에 신도들이 일제히 소리쳤다.
광기와 광기가 뒤섞이면서 열락의 공기를 더 뜨겁게 달구었다.
“그분의 구원을 믿는가?”
“믿습니다!”
“믿겠습니다!!”
“그분의 종말을 믿는가?”
“그렇습니다!”
“신이시여, 종말을 내려주소서!”
“그렇다면 그 믿음을 증명하라!”
“어떻게……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어드리겠습니다! 재산이라면 재산을! 아내라면 아내를! 자식을 내놓으라면 자식을!”
그리고 거대한 광기는 이제 신도들의 이성을 완전히 마비시켜 불쾌한 검은 그림자를 꾸역꾸역 토해냈다.
“그분을 위해 너희들이 내어놓을 수 있는 가장 값진 것을 내놓아라!”
제사장이 명령을 내린 순간, 신도들은 각자 옆에 공손하게 놓아뒀던 단검을 높이 들었다.
그리고 역수로 쥐어 거침없이 왼쪽 가슴을 가르고, 심장을 바깥으로 뽑아 터뜨렸다.
푸화악!
9,999개의 심장에서 쏟아진 핏물과 9,999개의 광기가 한데 뒤섞였다. 검게 물든 핏물은 강을 이루며 점점 제단 쪽으로 모여 들었다.
“신이시여. 이곳으로 돌아와 우리들을 구원하소서.”
마지막 제사장의 심장까지 터지며 1만 개의 목숨이 공양되었다.
에드는 너무 불쾌한 광경이라 인상을 찌푸렸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진짜 불쾌한 광경은 지금부터가 시작이었으므로.
콰르르륵!
쿠드득, 쿠득-
1만 명 분의 피가 잔뜩 모인 웅덩이에서부터 검은 촉수가 하나둘씩 튀어 나왔다.
마치 나무 넝쿨처럼 서로 뒤엉키고 얽히기를 반복하다가, 하늘을 꿰뚫을 듯이 높게 치솟았다.
“아아……! 나무가 일어납니다! 꽃봉우리가 곧 맺힐 거예요! 곧 꽃이 필 테고, 그 안에는 신께서 계실 테지요!”
이미 광기에 잔뜩 홀린 벡터는 마치 신이라도 배알한 것처럼 황홀함에 젖어 있었다.
‘저게 꽃이라고? 웃기지도 않는군.’
에드는 당장 검을 뽑아 꽃을 꺾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눌렀다.
저것은 그로테스크(Grotesque), 그 자체였다.
일반적인 진화 법칙으로는 절대 탄생할 수 없는 것.
갖가지 죽음의 기운과 마기, 사이한 기운과 멸망의 기운이 난잡하게 뒤엉켜 있었다.
일반적인 상식을 지닌 생명체라면 본능적으로 혐오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쿠드득, 쿠드드득!
촉수 다발에 더 많은 촉수들이 달라붙으면서 어느새 수십 미터 크기에 달하는 거대한 꽃봉오리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꽃봉오리가 천천히 열리려는 순간.
추기경 벡터의 얼굴도 가장 큰 환희에 젖어드려는 순간.
화아악!
갑자기 하늘 위로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백여 개나 되는 그림자가.
당연히 벡터의 시선이 황급히 그쪽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고.
에드도 똑같이 시선을 돌렸다가 처음으로 웃었다.
‘왔구나.’
그토록 기다렸던 존재들이 나타난 것이다.
하늘을 잔뜩 뒤덮은 백색 비룡의 군단.
백갑용기대였다.
회귀검가의 서자가 사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