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격화되는 권좌 경쟁 (4)
흑색철기대의 막사는 고요했다.
마치 한바탕 폭풍이라도 스쳐 지나간 것처럼.
언제나 자신감에 가득 차 있던 대원들의 얼굴에도 짙은 근심과 분노만이 가득했다.
“…….”
“…….”
“…….”
그건 아마도 그들이 처음으로 겪은 ‘패배감’ 때문이리라.
백갑용기대와의 전투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지만, 그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그대로 계속 시간을 끌었다면 자신들은 전멸이었다는 것을.
백갑용기대의 전력은 그만큼 강했고, 전력도 탁월했다.
“……테오 라그나르.”
부대장 ‘불도깨비’ 아이얀 소소리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면서 언젠가 자신이 포섭하려 했지만 실패했던 루키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제는 토르켈과도 비교될 정도로 명성이 높아져버린 녀석.
특히 테오가 용의 군단을 이끌고 나타났을 때 받았던 느낌은 아직도 강렬했으니.
녀석은 대체 정체가 뭘까?
토르켈이 자신의 막사에 들어가 나오지 않는 것도 전부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장이 지금 자리에 앉고 난 뒤로 처음으로 만나게 된 라이벌이나 마찬가지이니.’
승승장구라는 말은 오로지 토르켈을 위해서만 있는 줄 알았다.
그는 항상 위를 쫓는 입장이었고, 다른 후보들은 서로 쫓기기 바빴다.
그런데 이제 그 위치가 바뀐 셈이니.
토르켈이 받는 압박감은 어떠할까.
아이얀은 좀처럼 감이 잡히질 않았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토르켈은 이번에도 슬기롭게 잘 극복할 것이다.
그리고 권좌를 거머쥘 것이다…… 아이얀은 그렇게 믿었다.
그건 그녀를 포함해 대원들 모두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었다.
“다들 죽상이네. 누가 보면 초상이라도 치른 줄 알겠어?”
그때, 불쑥 막사를 찾는 사람이 있었다.
아이얀과 대원들의 시선이 모두 사납게 그쪽으로 향했다.
안시오가 한 손에 들고 있던 유리병을 살짝 들면서 웃었다.
“너희 대장과 술 한잔 나누고 싶어서 왔는데. 이야기 좀 해줄래?”
* * *
또르륵!
얼음이 담긴 유리잔을 따라 푸른색의 술이 차올랐다.
“그것만 마시고 가.”
“너무 하네. 그래도 이 누나가 마음이 싱숭생숭할 동생을 위해서 술친구라도 해주려고 온 건데.”
“헛소리를 하는군.”
“조금 전이랑 다르게 오늘따라 유달리 날카로운 걸? 진짜 화가 나긴 많이 났나 봐.”
토르켈은 가만히 안시오를 노려봤다.
하지만 안시오는 여유롭게 술잔을 입가에 기울일 뿐.
토르켈이 눈살을 가만히 좁혔다.
“누님이 원래 이런 성격이었나?”
“내 성격이 어때서?”
“오늘따라 유달리 말이 많아진 것 같아서.”
안시오는 사실 5대 후보로 거론되지만, 늘 기샤르의 그림자에 가려져 있어 존재감이 가장 적은 편이었다.
말도 적은 편이었고, 어딘가 나서는 경우도 적었다.
그런데 지금은 뭐라고 해야 할까, 사람이 달라진 기분이었다.
마치 그동안 날개로 숨기고 있던 몸을 조금씩 드러내기 시작한 듯한 느낌.
“너야말로 지금 다른 거 알아? 항상 여유롭게 카리스마가 있었는데, 지금은 꼭…….”
“꼭?”
“쫓기고 있는 것 같은데?”
“듣기는 싫지만. 뭐, 틀린 말은 아니군.”
피식!
안시오의 입술 사이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뭐가 웃긴 거지?”
“희한해서. 너는 언제나 위만 볼 것 같았거든. 누가 쫓아와도 다 무시하고 오로지 마룡 잡는 것만 집중할 줄 알았는데, 아래도 보고 있는 거잖아.”
“보통 때였으면 신경 쓰지도 않았겠지. 하지만…….”
“하지만?”
“…….”
“흐음. 아무 말도 안 하려는 거구나?”
토르켈은 이 믿을 수 없는 누이에게 차마 속에 담긴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따라잡을 줄 알았던 율리우스와는 큰 격차가 있었다. 반면에 큰 격차가 있을 줄 알았던 테오와는 별 차이가 없었다.
토르켈의 고심이 깊어진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정체된 느낌.
그게 너무 싫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것은 따로 있었으니…….
“너, 사실은 아버지가 테오를 데리고 간 게 마음에 들지 않은 거지?”
“…….”
“맞네.”
안시오는 피식 웃었다.
“사실 생각해보면 어렸을 때부터 너는 유독 아버지를 맹목적으로 잘 따라다녔단 말이야. 그냥 아버지가 테오를 인정하시는 게 싫은 거 아냐?”
토르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마도 우리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테오에게 똑같은 말씀을 하시지 않을까 싶은데. 당신께서는 신이 되고자 하신다. 그리고 이 세계를 감싸고 있는 만신이며 외신들을 전부 베어버릴 거다…… 그런 신화 같은 이야기. 너는 항상 그 자리를 대신하고 싶어 했잖아.”
라그나르의 사람들은 잘 모르는.
하지만 5대 후보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카일의 목적은 토르켈이 지금까지 쉬지 않고 달린 이유이기도 했다.
“너 그런 거 보고 보통 파더 콤플렉스라고 하는……!”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누님. 나는 아버지를 존경하고 숭배해서 쫓는 게 아냐.”
“으응?”
“오히려 반대지.”
“……!”
전혀 생각지 못했던 말.
안시오가 두 눈을 크게 떴다.
“내가 테오에게 자리를 뺏길까 봐 걱정하고 있다고? 그것도 오히려 반대. 그 녀석이 너무 아버지와 닮았기 때문에 신경 쓰이는 거지.”
토르켈은 주먹을 가볍게 쥐었다.
두두둑.
“그러니까 이만 사람은 그만 떠보고 용건이나 제대로 말하는 게 어때?”
안시오는 재빨리 안색을 고쳤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토르켈의 속내를 들어 놀랐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이번 설득이 잘 먹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시오는 손에 쥐고 있던 술잔을 전부 기울이고, 표정을 딱 굳히면서 말했다.
“테오는 이번 일을 계기로 주목을 받기 시작할 거야. 그리고 암암리에 그를 지지하던 9룡들도 결집을 시작할 테고.”
토르켈은 계속 말해보라는 듯이 가만히 팔짱을 꼈다.
“실제로 지금 마룡, 검룡, 흑룡에 심지어 빙룡까지 모두 테오를 만나고 있어.”
“빙룡은 큰형 쪽 사람이 아니었나?”
“그건 그렇지. 하지만
“오늘 밤을 기점으로 기반이 만들어지기 시작할 테지. 심지어 르네 언니도 그쪽에 가닥을 기울인 것처럼 보여. 권좌 경쟁이 본격적으로 촉발될 거야.”
“그래서?”
“이대로 있다간 우리 어여쁜 막내에게 송두리째 그릇을 다 뺏기게 생겼단 말이지? 그럼 우리도 힘을 합쳐야 하지 않을까?”
“날 우산으로 써먹겠다는 말로 들리는데.”
“뭐, 틀리진 않지. 확실히 나보단 네가 기반이 더 탄탄한 건 사실이니까.”
토르켈은 가만히 안시오를 바라봤고, 안시오는 가만히 그에게 곱게 접은 편지 하나를 내밀었다.
“스승님의 서신이야. 한번 잘 검토해 보라구.”
토르켈은 말없이 서신을 받았다.
편지에는 패룡을 상징하는 도장이 찍혀 있었다.
“…….”
그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세력 규합을 위한 물밑 교섭은 이곳에서도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 * *
“권좌라……. 역시 이번 일을 꾸민 건 화려한 데뷔를 위한 거였어.”
빙룡 니엘은 테오를 보면서 코웃음을 쳤다.
자신이 이용당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녀는 원래 오랫동안 지지하던 계승권자가 따로 있었다.
“네가 킨카르논보다 나은 점이 뭐가 있지?”
킨카르논.
권좌에 가장 가깝다고 불리는 카일의 맏이였다.
그만큼 실력도 무척 뛰어나 항룡의 빈자리를 두고 아모레와 가장 크게 격돌하고 있었다.
니엘과는 오랫동안 깊은 관계를 맺은 전우이기도 했다.
그러니 따스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매화궁주나 율리우스와 다르게 니엘은 냉소적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없습니다.”
“그러면서 무슨 자신감으로 날 회유하려 드는 거지?”
“회유가 아닙니다.”
“뭐?”
니엘은 이맛살을 찌푸렸고, 테오는 허리를 반듯하게 세우며 대답했다.
“기회를 드리는 겁니다. 더 늦으시기 전에 저에 대한 지분을 차지할 수 있는.”
“호호호호! 역시 시건방진 건 여전하구나.”
니엘은 한참 동안 웃다가 도중에 뚝 그쳤다.
“카일이 인정 좀 해줬다고 깨나 시건방져졌구나. 나를 상대로 눈도 똑바로 치켜들 수도 있고.”
파앗!
순간, 니엘의 신형이 꺼진다 싶더니 테오의 뒤편으로 나타났다.
너무나 신속한 이동.
하지만 테오는 별다른 동요 없이 드레이크의 날붙이를 꺼내 니엘의 검을 튕겨냈다.
“감각이 제법 날카로워졌구나? 집중력도 좋아진 듯하고.”
테오가 니르바나를 깨달으면서 일어난 변화는 단순한 경지의 상승이 아니었다.
사고력의 확장(擴張).
판단력과 집중력이 이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
사고의 지평이 넓어졌다고 해야 할까?
때때로 미래를 내다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감’도 좋아진 상태였다.
‘단순히 검의 구슬에 담긴 광기가 커져서 그런 것만이 아냐. 그보다 더 근원적인 부분에서 큰 팽창이 있었어. 단단해지고. 백탑 때문일까?’
물론, 백탑의 이유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테오는 단순히 그것만이 아닌 것 같다는 직감을 강하게 받았다.
‘만신전. 만신전을 봤기 때문이야.’
신은 모두 개념적인 존재들이다.
이 세계를 규정하는 법칙이자 부품과도 같은 것.
하지만 그 깊이는 무궁무진하기 때문에 한번 그들과 마주한 것만으로도, 세계를 바라보는 시야가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하지만 고작 이런 수로 나를 설득하기엔 모자랄 텐데.”
채채채챙!
따다다당-
니엘은 연거푸 검을 휘둘렀다.
그럴 때마다 테오가 어렵지 않게 튕겨내면서 거리를 확 벌렸고, 율리우스는 가볍게 탄성을 터뜨렸다.
“보셨소, 매화궁주? 칼질 하나하나에 마룡육예의 비전이 묻어나는 것이? 캬! 이거 어쩔 수 없이 테오야말로 우리 백갑의 일원이라는 게 확실해지는구만.”
“어머. 백갑용기대장께서는 보이시지 않는 건가요? 검의 속도하며 초식과 초식을 연결 짓는 건 빼도 박도 못 하게 매화이십사수인 것을요.”
“그럼 뭣하오? 매화는 피지도 못하는데. 도와주는 용도밖에는 되지 않은 것으로 보이오만?”
“아무래도 안경이라도 쓰셔야 할 것 같군요. 마룡육예가 자랑하는 살벌함은 다 빠지고 화사함만 보이지 않나요?”
“이게 정말?”
“왜? 해볼래?”
율리우스와 매화궁주가 체면도 잊고 서로 멱살이라도 잡을 것처럼 으르렁거리자, 중간에 있던 흑룡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해라, 이것들아. 나이도 그만큼 먹었으면 정신 좀 차릴 때 되지 않았어?”
“하지만 이 못된 꼬맹이가……!”
“이 허울대만 멀쩡한 쭉정이가……!”
테오만 연관되면 꼭 이런 식으로 젊었을 때처럼 유치해지니, 원.
흑룡은 더 이상 그쪽으로 신경을 완전히 꺼버리고, 손에 쥐고 있던 단검을 던졌다.
따앙!
니엘이 그걸 옆으로 쳐내면서 흑룡을 노려봤다.
“이게 무슨 짓이죠, 정보부장?”
“그만하면 시험은 충분히 통과한 셈이지 않은가, 수선궁주. 오늘 이곳을 찾은 목적을 잊지 말았으면 하는데.”
칫!
니엘은 투덜거리면서 조용히 검을 도로 검집으로 밀어 넣었다.
찾은 목적?
신비에 대한 내용 말고 또 궁금한 것이 있는 걸까?
테오는 의문을 가지면서 흑룡 쪽을 바라봤다.
“우리 대화가 많이 의아한 모양이구나.”
“예. 그렇습니다.”
“사실 조금 전에 너는 상급검사 시험을 통과하였다.”
“……!”
“축하한다. 역대 최연소로 상급검사가 되었구나.”
두근두근!
테오의 가슴이 마구 뛰었다.
테스트가 까다로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선물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기쁨보다 의아함이 앞섰다.
어쩐지 이게 끝이 아닐 것 같았다.
“그리고 보고서도 그랬지만, 직접 눈으로 보니 알겠구나. 실력이 그새 일취월장해서 용문검사까지도 노려볼 법하겠어.”
흑룡은 양손으로 깍지를 끼더니 거기다 턱을 괬다.
“내가 여기에 온 이유는 사실 필요하다면 너에게 용문검사의 승급시험을 주는 것 외에 한 가지 질문할 게 있어서란다.”
질문?
“그리고 여기에 따른 네 대답이나 태도에 따라서 나와 흑설은 너에 대한 지지 여부를 결정할 생각이다.”
“……!”
두근두근두근두근!
심장이 너무 가쁘게 뛰었다.
흑룡의 붉은색 눈이 깊어졌다.
“승급시험으로 네 친구인 웰링턴 나르시오의 목을 베라고 한다면, 할 수 있겠느냐?”
회귀검가의 서자가 사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