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뿌리 (5)
라그나르가 존재하는 이유.
제국에서는 항상 패도의 끝이라 불리는 그들이 사실은 세계를 보호할 의무를 지녔다고?
하지만 테오는 어느 정도 그 말이 이해되었다.
천 년을 넘는 시간 동안 마해의 마물들을 막아섰던 것이야말로 자신들이었으니.
‘뭔가 더 거창하게 느껴져도, 결국 원래 라그나르가 맡고 있던 의무와는 크게 다를 게 없다는 거구나.’
「그럼 백탑을 정복하셨으니 그 대가로 얻으신 보상에 대해서 말씀드리죠.」
따악!
케르토수쿠스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테오 앞으로 메시지가 쉴 새 없이 올라왔다.
[백탑에 대한 사용권을 이양 받았습니다.]
[백탑이 업데이트 됩니다.]
[업데이트 중…….]
쿠쿵!
갑자기 백탑이 거칠게 떨렸다.
마치 무언가가 옥상 위로 더해지는 것 같았다.
‘건물이 변하고 있다.’
테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천장을 바라봤다.
실시간으로 백탑의 크기가 옆으로 확장되는 장면은 말로 표현 못 할 새로운 느낌이었다.
[기존에 정복하였던 유물 속 스테이지가 모두 백탑에 추가되었습니다.]
[백탑이 새로운 아공간 영역으로 설정됩니다. 현실 세계와 연결망이 구축되어 내부 세계의 물질을 현실 세계로 소환할 수 있게 됩니다.]
“소환?”
테오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케르토수쿠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조금 전 업데이트를 통해 이곳 백탑을 중심으로 모든 유물들이 모두 페어링 되었습니다. 앞으로 서로 간에 기능 공유도 가능할 테고, 시너지 효과도 더 커질 것입니다.」
테오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손에 낀 반지며 귀걸이, 등에 건 검들이 일제히 몸을 떨었다.
테오는 직감적으로 유물들의 기능이 이전보다 훨씬 강화되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보다 더 큰 것은 바로 각 유물들을 지키고 있던 가디언들을 지금부터 소환할 수 있다는 겁니다.」
테오는 황급히 다시 가디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갑자기 녀석들이 여기에 와 있는 건가 했더니.
설마 이런 이유로?
케에엑!
레서 드레이크는 지반을 세게 두들기면서 크게 포효했다.
쿠르륵! 쿠륵!
그리핀은 날개를 활짝 펼치면서 하늘 위로 날아올라 용맹함을 자랑했고,
「힘만 센 무식한 놈들밖에 없는 고로. 지혜가 필요하다면 내가 언제든 도와드리도록 하겠소.」
페어리 드래곤은 날갯짓을 할 때마다 신비한 가루가 떨어졌으며,
드르르륵-
이 자리에서 보이지 않는 데저트 웜은 땅 밑을 돌아다니고 있는 지 지반이 거칠게 흔들렸다.
「흥.」
마가라는 앞으로 테오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노골적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명령에서 자유롭지 못한 듯했다.
‘이들을 정말 밖으로 소환해서 부리는 게 가능해진다면…… 전력은 지금보다 최소한 몇 배로 증가하게 될 거야.’
이들 외에도 테오에게 도움을 주는 용종은 두 개체나 더 있었다.
움브라와 폰투스. 하늘과 바다의 지배자들.
이로써 육·해·공을 모두 자신의 손에 넣은 셈이나 마찬가지였으니.
「그리고 본인은 집사로서 이들이 제대로 그대에게 봉사할 수 있도록 교육하는 것과 동시에 만신전의 뜻을 전달하는 역할을 맡을 것입니다.」
케르토수쿠스는 정갈하게 예를 갖춰 허리를 숙였다.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주인님의 영토인 백탑을 관리하는 집사, 케르토수쿠스입니다.」
테오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물었다.
“앞으로 편하게 케르토라고 부르면 되겠지?”
「뜻하신 대로. 당신은 태고룡의 시험을 몇 번이나 통과한 그분의 후계자이니 용들이 당신을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럼 먼저 하나만 부탁하지.”
「하명하시길.」
명령을 내리는 테오의 모습에는 어설픔이 없었다.
마치 원래 그것이 그의 옷이기라도 했던 것처럼.
“이곳에 초대받지 못한 불청객이 있는 것 같은데.”
「추방할까요?」
“내 앞에 끌고 오도록.”
「명에 따르겠습니다.」
케르토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레서 드레이크와 그리핀이 가장 먼저 움직였다.
케에에엑!
카아악-
“제길!”
순간, 한쪽 공간이 열리면서 당혹한 표정의 기샤르가 튀어나왔다.
테오가 보상인지 뭔지를 정리하면서 정신이 팔린 동안 암살을 시도하려 했는데, 대체 언제……!
사실 테오도 조금 전까지 기샤르의 은신을 읽지 못한 상태였다.
그동안 층계를 오르랴, 니르바나를 깨달으랴, 만신전을 방문하랴, 보상을 확인하랴, 계속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설마 유물의 시험에 자격이 없는 타인이 접근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었고.
하지만 백탑에 대한 소유권을 얻는 순간, 기샤르의 기척을 감지할 수 있었다.
소유권은 단순히 백탑을 ‘소유’한다는 개념이 아니었다.
오히려 ‘지배’한다는 개념에 가까웠다.
백탑은 테오의 정신세계의 표상(表象)이라고도 할 수 있는 곳.
<니르바나>까지 깨달으면서 정신세계를 완전히 손에 넣은 그가, 정신세계에 침투한 이물질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게 말이 안 되는 일이었던 것이다.
쐐애애액-
퍼퍼퍼펑!
기샤르는 검기를 잇달아 뿌리면서 레서 드레이크와 그리핀의 접근을 차단했다.
‘어쩔 수 없어. 이렇게 된 이상 이판사판으로 달려들 수밖에!’
<관세음(觀世音) - 천비(千匕)>
기샤르는 5대 후보 중에서도 가장 독특한 검술을 자랑한다는 평가를 받는 자.
그의 걸음걸이는 밤고양이처럼 아주 가볍고, 그가 다루는 비수는 그림자조차 남기지 않는다고 하니.
얼마나 빠르면 손이 너무 빨라 천 개로 보인다고 할까?
파파파팟!
수십 개의 비수가 허공에 떠올랐다.
끄트머리에 달린 실을 잡아당길 때마다 비수는 방향을 서로 달리 하면서 두 용종의 약점을 노렸다.
그리핀은 감지하기도 힘든 비수들이 자꾸만 사각지대를 파고들어 상처만 늘리니 화가 잔뜩 났고,
레서 드레이크는 실이 다리를 묶으려 들자, 잠시 걸음을 멈추고 어떻게 비수를 짓밟을지 고민했다.
‘하! 너희들 뜻대로 될 것 같으냐? 그 실이 어떤 실인지 알고?’
천잠사라는 것이 있다.
머나먼 극동 지역에서 아주 극소수로만 태어난다는 천잠(天蠶)이라는 특별한 누에 종에게서만 뽑을 수 있는 실.
질기기가 너무 질겨 웬만한 강철로도 끊어낼 수 없고, 탄성도 좋아 생산지에서는 갑옷의 재질로도 쓴다고 했다.
하지만 기샤르는 이것을 비수를 다루기 위한 도구로 사용했으니.
워낙에 빠른 그의 손속까지 더해지니 정말 세상이 그의 비수로 가득 찬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이곳에 갇혀라!”
<천라망(天羅網)>
어느새 천장에는 실을 촘촘하게 엮은 그물이 만들어지며 테오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마가라가 입을 우물거리더니 숨결을 ‘후!’하고 내뱉었다.
물대포가 쏘아지면서 그물망이 휘청거렸지만, 테오와 용종들의 움직임을 방해하기엔 충분했고-
<음살비(陰殺匕)>
테오 일행이 하늘의 그물에 정신이 팔린 동안, 땅 위를 몰래 달리고 있던 비수가 단번에 수직으로 튀어 올랐다.
파앗!
마치 먹이를 노리는 뱀처럼.
그물망은 어디까지나 눈속임이었을 뿐.
진짜 노림수는 바로 이것이었다.
‘끝이다!’
기샤르는 자신의 성공을 직감했다.
음살비는 이대로 소리 소문도 없이 테오의 목덜미에 틀어박힐 터였다.
그런데,
‘웃어?’
기샤르는 어쩐지 테오가 그동안 용종들에게만 보호를 맡길 뿐,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갑자기 페어리 드래곤이 테오 앞으로 툭 떨어졌다.
그리고 형성되는 투명막.
차아아앙!
음살비가 너무 허망하게 튕겼다.
“대체 언제……?”
“이렇게 제대로 대면하게 된 건 처음이라 그런지, 아직 절 모르셔도 너무 모르시나 봅니다. 형님.”
기샤르는 몰랐지만, 페어리 드래곤은 <색적(索敵)>이라는 마법으로 테오에게 접근하는 것들을 전부 파악해두고 있던 상태였다.
그러니 아무리 음살비가 은밀하게 움직인다고 한들 감지될 수밖에 없었고,
“전 절대 질 싸움은 걸지 않는 주의라는 것을요.”
「얼어붙어라.」
오히려 테오는 이걸 역이용해서 기샤르의 발을 묶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페어리 드래곤이 언령을 외친 순간, 대기 중의 공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파아아아!
쩌저적-
기샤르의 살갗 위로 서리가 내려앉았다.
아차 싶어 몸을 물리려 할 때는 이미 두 다리가 잔뜩 얼어붙은 상태였으니.
콰쾅!
그 틈을 노리고 데저트 웜이 지반을 뚫고 튀어나왔다.
카아아악!
데저트 웜은 천잠사가 만들어낸 그물망에 살갗이 찢어지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기샤르를 집어삼켰다.
꿀- 꺽!
「잘못 먹다간 탈이 날 수 있는데 괜찮겠느냐?」
데저트 웜은 한참 동안 우물우물거리다가 페어리 드래곤의 충고를 듣고 난 뒤에야 기샤르를 내뱉었다.
퉤엣!
“너……!”
기샤르는 타액에 잔뜩 범벅이 된 모습으로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데저트 웜의 침은 독소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미 중독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페어리 드래곤은 녀석을 완전히 묶어둘 생각으로 속박 마법을 시전해서 포승줄로 묶어버렸다.
“계승권자들 사이에 때때로 서로의 목숨을 거두는 경우도 적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노골적으로 암살을 시도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날 여기서 죽인다면…… 뒤가 좋지 못할 거다…….”
기샤르는 빨갛게 달아오른 눈으로 테오를 노려봤다.
“목숨을 구걸하시는 겁니까?”
“헛소리하지 마라. 나는 네가 살 길을 말해주는 것이다.”
기샤르는 암살이 실패한 이상, 어떻게든 여기서 살아남을 생각만 하고 있었다.
‘지금은 여기서 패배하더라도…… 반드시 놈의 진상을 외부에다 알려야 해. 스승님께 말씀 드려야 해!’
기샤르는 이미 테오를 쫓아 백탑을 전부 올랐기 때문에 테오가 ‘평범한’ 라그나르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세계와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는 녀석.
어쩌면 라그나르의 탈을 쓰고 있을 뿐, 라그나르가 아닐지도 몰랐다.
‘개화식 전까지만 해도 숨 죽여 지냈던 놈이 갑자기 달라졌었지. 그 회색 건물이 많던 곳과 녀석이 어떤 연관이 있다고 친다면……!’
만약 이 추론이 사실이라면, 테오는 애당초 계승권에 도전할 자격조차 없는 셈이었다.
그러니 기샤르는 그동안 외부에는 철저하게 비밀로 부쳤던 자신의 신상을 일부 드러낼 각오까지 하고 있었다.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
“그동안 권좌 경쟁 때문에 숨겨두고 있었지만, 내 배후는 절대 무시할 것이 못 된다. 날 여기서 죽인다면 너는 평생 고달파질 테지만, 날 여기서 살려준다면 앞길이 훨씬 편해질 거다. 손을 잡자.”
기샤르는 테오가 절대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할 거라고 확신했다.
그가 르제에게 들었던 테오는 거래를 할 줄 아는 녀석이었으니까.
율리우스나 매화궁주, 흑룡, 등룡 등이 그에게 깊은 관심을 보인다는 말은 있지만,
실제로 테오에게 배후가 되어주는 이는 아직 없다.
아니, 오히려 녀석도 맏형인 킨카르논을 무시할 수는 없을 테니, 입지를 더 다지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제안은 꽤 매력적으로 들릴……!
“형님께서 패룡(覇龍)의 숨겨진 제자라는 사실을 말씀하고 싶으신 겁니까?”
하지만 기샤르는 숨겨뒀던 패를 보이기도 전에 테오가 꺼내버리자 벙 찐 표정이 되고 말았다.
“너, 그, 그걸 어떻게……?”
“패룡과의 동맹……. 확실히 구미가 당기긴 합니다만.”
패룡.
9룡 중에서 마룡, 환룡과 함께 최강을 논한다는 자.
얼마나 패도적인 성격을 자랑하는지, 카일을 제외하면 그는 절대 다른 사람과 어울리지 않았다.
등룡처럼 홀로 움직이지만, 그 자체로 이미 하나의 군단이나 다름 없다던가.
괜히 ‘일인군단’이라는 별명이 붙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패룡도 권좌에는 관심이 아주 깊지. 그래서 알려진 것과 다르게 세력을 아예 두고 있지 않은 것도 아냐.’
다른 9룡들과 다르게 패룡은 그가 직접 세력을 다스리지만 않을 뿐이었다.
기샤르를 따르는 추종 집단이 바로 그 세력이었으니.
“문제는 형님께서 한 가지 놓치고 있는 점이 있다는 겁니다.”
“……뭐?”
“설마 패룡 님께 접근할 방법이 형님만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실 테죠?”
“무슨……!”
기샤르는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고 버럭 소리를 지르다가, 순간 떠오르는 것이 있어 두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예. 패룡 님은 제자를 형님만 두신 게 아니어서요.”
“……!”
그 순간, 기샤르는 안시오를 떠올렸다.
자신의 어여쁜 이란성 쌍둥이 누이이지만, 이따금 속은 전혀 알 수 없었던 아이.
“역시 모르고 계셨나 봅니다.”
“그, 그, 그게!”
“죄송하지만 저는 제 목숨을 노린 사람을 살려줄 만큼 호인이 아니라서요. 또 뒤통수를 맞고 싶지는 않군요.”
기샤르는 ‘잠깐!’이라고 외치고 싶었다.
“그리고 제 비밀을 이렇게 많이 아시게 되었는데 어떻게 살려드릴 수 있겠습니까?”
백탑에 대한 내용.
용종을 부리고 있다는 사실까지.
아직은 모두 비밀로 하고 있어야 했다.
스걱!
기샤르는 테오를 말리지도 못했다.
뒤에 서 있던 케르토가 손날로 머리를 쳐버린 것이다.
푸우우!
데구르르…….
경악에 찬 표정 그대로 기샤르의 머리통이 바닥을 굴렀다.
털썩!
쓰러지는 목 없는 시체를 보면서. 테오는 생각했다.
‘이제 정말 시작이구나.’
그렇게 까마득하게만 보이던 5대 후보 중 하나를 제거했다.
이건 촉발제가 될 게 분명했다.
본격적인 권좌 경쟁의 서막을 알리는 촉발제가…….
회귀검가의 서자가 사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