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뿌리 (3)
‘인과?’
만신전의 신들은 대게 진짜 이름을 숨기고, 신명(神名)을 가진다.
그 속에 그들을 대표하는 신위와 신앙이 고스란히 담기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신도들은 대부분 실생활에서 도움이 되는 전투 계열이나 행운 혹은 직업 관련의 신들에게 편중되는 편이었고,
너무 개념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신명을 가진 신들은 인기가 없거나 존재가 거의 알려지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인과의 신도 바로 그중 하나였다.
인과(因果).
원인과 결과.
단순하게는 그런 뜻이 있지만, 철학적인 관점에서는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가 실처럼 연결되어 있다는 뜻을 담은 신명.
테오도 한 번쯤 이름만 들어 봤지 그 교단을 실제로 본 적이 없었고, 마찬가지로 주변에서도 자신을 인과의 신도라고 밝히는 사람이 전무할 만큼 접점이 없었다.
그런데 필터링 시스템이 모두 종료되고 난 다음에 가장 먼저 본 메시지가 인과의 신이라니.
그 순간, 테오의 뇌리를 단번에 관통하는 가정이 있었다.
“혹시 그동안 이 메시지를 보내셨던 분이 당신이십니까?”
메시지는 항상 테오가 할 일을 제시해주고, 거기에 따른 보상을 언급해주었다.
마치 미래의 일을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리고 그것이 실패했을 경우에 생기는 패널티도 던져주었다.
-업(業)에 따른 결과.
이것만큼 인(因)과 과(果)가 확실하게 보이는 것이 어디 있을까?
[인과의 신이 그것까지 설명해주기는 힘들다고 설명하면서 엉덩이를 조금씩 들썩거립니다. 자신도 모르게 꼬리를 살랑거립니다.]
“…….”
저 정도면 자신이 맞다는 걸 알아달라는 거 아닌가?
그런데 꼬리가 있었어?
[인과의 신이 가볍게 헛기침하면서 어서 위로 올라갈 것을 종용합니다.]
다만, 걸리는 점이 있다면 인과의 신은 마치 자신을 잘 아는 것처럼 행동한다는 점이었다.
단순히 모니터에 있던 시스템과 비슷한 메시지를 다루기 때문인지.
아니면 또 다른 뭔가가 있는 건지…….
하지만 테오는 우선 인과의 신이 던지는 조언에 충실하기로 마음먹었다.
아직 백탑 등반은 끝나지 않았다.
‘백탑은 영혼이 가진 과거로, 무의식으로 계속 간다고 했었지. 그러다가 뿌리까지 닿는다고. 그럼 대체 여기서 더 과거라면 어디지? 내가 기억 못 하는 더 먼 전생이라도 되나?’
그렇게 도착한 10층은 동굴이었다.
[10층에 입장했습니다.]
[인간이 인지 능력을 갖추기 시작하고 가장 먼저 느끼는 고통은 바로 출산입니다. 좁은 산도를 통과하는 과정은 아주 힘겨우므로 오랫동안 아기의 무의식에 남게 됩니다. 하지만 좁고 어두운 산도를 통과한 후에 바깥세상의 빛을 만났을 때의 환희 또한 무의식에 같이 남아있습니다.]
[어둡고, 축축하고, 비좁은 동굴을 통과하는 과정도 바로 그런 산도를 통과하는 과정을 많이 닮았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당신이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이전으로 돌아가기 위해 동굴을 도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동굴을 되돌아 원래 있었던 곳으로 되돌아가십시오. 그런다면 당신의 탄생과 관련된 <뿌리>에 다다를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동안 테오의 앞을 밝혀주었던 빛이 모두 사라졌다.
두 눈에 [영성]을 불어넣어도 마찬가지.
남아있는 건 오로지 청각이나 후각 따위의 비가시(非可視)감각 뿐이었다.
손을 뻗어 자신이 통과해야 할 통로의 크기를 가늠했다.
‘너비는 마른 사람 한 명이 겨우 통과할 수 있을 크기. 높이는…… 내가 머리를 숙여야 할 정도. 1미터 70센티쯤 되겠어. 거리는 얼마나 되는 거지?’
테오는 마력을 가능한 만큼 외부로 최대한 확장했다.
끝이 보이질 않았다.
꾸불꾸불하고 미로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개미굴을 보는 것 같았다.
“……환장하겠네.”
[여정의 신이 당신이 어떤 방식으로 통과할지 궁금해합니다.]
[궁술의 신이 화살을 사용하면 거리 가늠이 가능한데 하찮은 검을 쓰니 그런 거라며 혀를 찹니다.]
.
[파괴의 신이 모조리 다 부수고 다니는 게 답이 아니겠냐고 조언합니다.]
[조화의 신이 너처럼 무식하게 날뛰었다간 동굴이 무너져서 그냥 생매장되지 않겠냐고 이죽거립니다.]
[파괴의 신이 너야말로 파괴되고 싶냐고 눈살을 찌푸립니다.]
[조화의 신이 해볼 수 있으면 해보라고 코웃음 칩니다.]
[두 명의 신이 격돌합니다!]
[여정의 신이 시끄럽다며 관자놀이를 짚습니다.]
.
.
[인과의 신이 두 주먹을 불끈 쥐며 파이팅을 외칩니다.]
.
신이란 존재들은 아무래도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아니, 사실은 아주 많이 소란스럽고 경망스러운 것 같았다.
아니, 그보다 앞은 못 보게 하면서 메시지는 보게 하는 건 또 무슨 심보람?
테오는 조금 심통이 나서 메시지 창을 그냥 꺼버렸다.
[인과의 신이 제발 끄지말라고 황급히 달려듭니……!]
팟!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테오는 천천히 동굴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외부 인지는 가능해서 걷는 자세가 불편하기만 할 뿐, 이동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길을 조금 방황할 수는 있어도, 이대로만 갈 수 있으면 아무리 길어도 문제는 없겠는데.”
하지만 말이 씨앗이 된다고, 문제는 바로 그 뒤에 찾아왔다.
[미각을 잃었습니다. 외부 세계의 맛을 느낄 수 없습니다.]
다른 감각도 하나둘씩 차단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후각을 잃었습니다. 외부 세계의 냄새를 맡을 수 없습니다.]
[청각을 잃었습니다. 외부 세계의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냄새와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되었을 때부터 테오의 머릿속에는 경고등이 켜졌다.
‘이대로는 위험해!’
외부 세계에 대한 인지 경로가 사라진다는 것은 이렇게 비좁은 동굴에서 치명타였다.
하지만,
[촉각을 잃었습니다. 외부 세계의 감촉을 느낄 수 없습니다.]
오감은 끝내 모두 폐쇄되고 말았으니.
이제 테오는 마력에 의한 외부 인지에만 집중해야 했다.
마치 코끼리 다리를 더듬는 장님처럼 아주 천천히 걸었다.
걷는 내내 천장에 머리가 찧어져 피가 흐르고,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서 다리가 순식간에 피범벅이 되었다.
그런데도 동굴은 도저히 끝이 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이쯤 되니 자신이 제대로 길을 가고 있는지도 헷갈렸다.
‘뭐지? 분명히 이 길은 조금 전에 왔던 것 같은데? 아, 아닌가? 천장 위치가 다른 것 같기도 하고……!’
언제 끝날지 모를 정도로 고통스러운 긴 시간.
여기서는 크로노그래프를 이용하는 것도 별 의미가 없었다.
이동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했으므로.
동굴 크기가 너무 큰 까닭에 사고 시간을 느리게 해서 고심에 잠겨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또 다른 문제는 인지 범위였다.
마력 범위를 너무 넓게 확장하면 세부적인 요소들을 확인하기가 어렵고, 그렇다고 너무 좁히면 길의 방향이 헷갈리기 시작했다.
넓혔다가 좁혔다가를 너무 반복하다 보니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 때는 테오의 머릿속에 잡혔던 개미굴의 구조도 조금씩 혼선이 생겼다.
‘조금만…… 조금만 더 빠르게 앞으로 가자. 차라리 이럴 것 같으면 계속 속도를 붙이는 게 나아.’
테오는 조금씩 조급함을 느꼈다.
서둘러야 한다는 [강박증]이 그를 둘러쌌다.
또 언제 다른 제약이 가해질지 모른다는 [피해망상]이 덧붙었다.
그 외에도 [혼란]과 [정신적 충동], [인지부조화], [신경증]이 생겨나고, 여기에 따라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생각에 [우울장애]와 [불안장애], 그리고 세상이 좁혀지는 [공황 증세]까지 차례로 붙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이유로 마력 사용이 제한됩니다. 외부 세계에 대한 인지가 모두 차단됩니다.]
믿었던 마지막 수단까지 끝났을 때.
테오를 괴롭히던 불안 요소들이 폭발하면서 정신 세계를 뒤덮고 말았다.
한순간 그는 자신이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듯한 착각을 받았다.
전, 후, 좌, 우, 상, 하, 어느 것도 구분되지 않는 이런 상황에서 대체 어떻게 길을 찾으라는 건지.
아니, 애당초 자신이 제대로 존재하고 있는 게 맞는 걸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난 이미 죽은 게 아닐까? 백탑을 통과하지 못하고 여기서 파묻혀서……. 실패 시 패널티도 사망이니까……. 이전에 죽었을 때도 이랬던 것 같기도 하고…….’
테오의 의식은 한없이 위축되었다.
동굴을 가득 채우고 있던 어둠이 그의 존재를 완전히 뒤덮은 것만 같았다.
그 어둠이 영혼까지 잡아먹어서 그의 존재를 낱낱이 해체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자타(自他)의 구분이 없는 세계.
그곳에서 의식이란 아무리 유지하고 있어봤자 헛된 미망밖에는 되지 않는 부스러기에 지나지 않았다.
아무리 강한 의지를 가져도 아무런 결과도 볼 수 없으니 의지 따위 알 게 뭐란 말인가…….
[세상과의 경계선이 옅어집니다.]
[의식이 사라집니다.]
[인(因)이 해체되고 있습니다. 과(果)가 자연스럽게 떨어져 나갑니다. 인과의 고리가 더 이상 당신에게 적용되지 않습니다.]
[퀘스트가 실패하고 있습니다.]
.
.
[인과의 신이 황급히 일어나라며 소리칩…….]
[파괴의 신이 간만에 기대한 존재였는데 이것밖에 되지 않냐며 혀를 찹니…….]
[조화의 신이 아쉬워…….]
[여로의 신이 당신의 여정에 종료를 선언…….]
.
테오의 의식은 한없이 작아지다가 결국 하나의 점이 되고 말았다.
어둠이 테오의 존재를 끝내 전부 먹어 치우면서 무(無)의 시간이 찾아왔다.
…….
[광기가 발작을 일으킵니다.]
그러던 그때, 테오를 구성하고 있던 요소 중에서 사라지지 않은 딱 한 가지 깨어났다.
검의 구슬.
테오에게 무한한 영감을 가져다주면서도, 한편으로는 검과 검술에 대한 집착을 가져다주었던 사념이 일어나면서 테오의 정신 세계를 뒤흔들었다.
사실 기샤르가 엿봤던 것처럼 테오는 조금씩 광기를 보이고 있던 상황.
그 잔존 불씨가 꺼지지 않고 남아있다가 깨어나면서 화마처럼 거칠게 일어났으니.
동시에 테오가 갖고 있던 광기도 걷잡을 수 없이 팽창하면서 어둠을 밀어냈다.
테오의 정신 세계를 회복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무한하게 확장을 거듭했다.
광기 안에는 여러 감정들이 복잡하게 담겨 있었다.
밖으로 나가고자 하는 욕구.
강해지고자 하는 열망.
권좌에 대한 갈증.
그것은 검의 구슬에 담겨 있던 사념의 주인이 살아생전에 추구하던 방향과도 어느 정도 일맥상통했고, 테오의 의식과 융화되는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두근두근두근두근-
고동 소리는 끝내 거친 폭발이 되었다.
쿵쿵쿵쿵쿵쿵……!
[인과의 신이 입을 쩍 벌리면서 당신에게 벌어지는 기현상을 멍하니 바라봅니다. 침이 질질 떨어집니다.]
마치 우주가 아주 작은 한 점에서 폭발과 함께 시작되었듯이.
테오의 의식도 광기라는 폭발과 함께 팽창하면서 외부 세계를 밀어내고 무한하게 커져만 갔다.
‘애당초 이번 층계의 미션은 내가 잘못 이해한 거였어. 이 개미굴에 도착 지점은 없었던 거야.’
테오는 의식의 ‘시선’을 아래가 아닌 위로 향했다.
이곳은 탑.
그렇다면 아래를 볼 게 아니라 위를 봐야 하지 않겠는가?
‘나라는 존재가 외부 세계와 분리되어 닫히더라도 잊지 말라는 것……. 오히려 위로 향하라는 것이 주 내용이라고 한다면…….’
테오는 이제 검의 구슬이 주는 광기를 연료로 삼아 도리어 백탑을 태울 듯이 굴었다.
‘자타의 구분에 관계 없이 의식을 최대한 외부로 내보내는 것이 해결책이었던 거야.’
테오의 의식 세계는 이제 어둠을 물리치다 못해 뒤섞였다.
그러자 모든 감각이 돌아왔다.
‘나’라는 존재도 다시 자각할 수 있었다.
[마력을 다시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모든 감각이 회복되었습니다.]
[11층에 입장했습니다.]
테오는 어느새 동굴을 지나 새로운 층계에 와 있었지만.
‘아니. 아직이야.’
테오의 의식 세계 확장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으니. 11층은 중간 거점에 불과할 뿐이었다.
‘꼭대기까지 간다.’
[12층에 입장했습니다.]
[13층에 입장했습니다.]
‘그리고…….’
[13층까지 모두 정복하여 옥상에 도착했습니다.]
‘그 위까지 본다.’
탑의 꼭대기는 13층이 아닌 옥상이 된다. 하지만 그보다 더 위라면 딱 한 군데밖에는 없었다.
-만신전(Pantheon).
테오의 의식은 백탑을 넘어 하늘을 뚫고, 행성을 넘어 그 외부에 있는 우주의 영역에까지 다다랐다.
해탈(Nirvana)이었다.
자타의 구분이 사라지고, 내가 곧 세계가 되며 세계가 곧 내가 되는 정신적 경지.
[인과의 신이 원래대로라면 11층을 오르는 정도로 끝났을 정신적 깨달음이 광기라는 연료와 전생의 비밀 때문에 그런 것 같다고 허겁지겁 설명을 덧붙입니…….]
한창 출력되고 있던 메시지가 갑자기 나타난 거대한 크기의 철문에 눌려 부서졌다.
쿵……!
수많은 신들이 한데 뒤엉켜 있는 조각이 새겨진 철문.
테오는 그 앞에서 주먹을 꽉 쥐었다.
회귀검가의 서자가 사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