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뿌리 (1)
[3층에 입장했습니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입니다. 여러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저마다 다른 역할을 맡고 있으며, 그때마다 다른 가면을 쓰고 살아갑니다. 이 가면을 가리켜 우리는 ‘페르소나’라고 부릅니다.]
[의식은 그런 무수히 많은 페르소나의 집합체입니다. 페르소나를 모두 제거하고 ‘문’을 여세요.]
2층의 테오가 정반대되는 모습을 한 그림자 같은 것이었다면.
3층에서 기다리고 있는 건 테오이되, 테오의 여러 모습을 한 것들이었다.
비정상적으로 얼굴이 큰 녀석이 있는가 하면, 거인처럼 5미터나 되는 장신을 가진 녀석도 있었고, 검 대신에 창을 든 녀석, 마법사처럼 로브를 뒤집어쓴 녀석, 요정처럼 아주 작은 크기를 한 녀석도 있었다.
“얼굴이 큰 건 겁에 잔뜩 질려 있는 걸 봐서는 과대망상증에 걸려있는 것 같고, 거인은 내 무력적인 부분을 특화시킨 건가? 창은 검 대신에 다른 무기를 쥐었을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 같고……. ‘내’가 이렇게 다양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한데.”
그 외에도 더 다양한 모습을 가진 이들도 있었다.
크림힐트의 갑옷을 입은 테오.
반인반룡의 모습을 한 테오.
영사룡처럼 검은 그림자를 몸에 감고 있는 테오까지.
‘정확하게는 상태창에서 <재능>으로 분류되는 항목에 있는 것들이 구체화 된 것 같은데.’
그렇다면 원래 테오가 갖고 있던 능력에 재능이 좀 더 특화되어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어쩌면 테오가 당장 저 재능으로 다다를 수 있는 최고의 모습을 보여줄지도…….
‘좋은데?’
테오는 오히려 웃었다.
강해질 수 있는 방법이 보인다는 것만큼 마음에 드는 것도 없었다.
[■■■■■가 수련광■ ■■■■■ ■ ■ ■■■ ■■■■■!]
[■■ ■■■■ ■■!]
[■■■■ ■ 격하게 환영■■ ■■ ■ ■■ ■■■!]
[무신 계통이 ■■■■ 환영■■ ■■■■ ■■ ■■■.]
.
“……?”
테오는 갑자기 이상한 데서 반응하는 신들의 메시지를 보고 왜 저러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페르소나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으니까.
파아앗-
가장 먼저 창술사와 크림힐트의 갑옷을 입은 테오가 달려들었다.
그리고 이어 요정과 마법사들이 이상한 주문을 외며 허공에다 손가락을 튕기고, 반인반룡과 거인이 검을 세차게 휘둘렀다.
콰르르릉!
콰릉!
하늘에서부터 낙뢰가 쏟아지고, 지면은 검기가 휩쓸고 지나갔다.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쏟아지는 공격들 속에서.
테오는 월백, 용살, 영묘의 세 자루 검을 허공에 띄우고, 두 눈에 영성을 불어넣었다.
화아악-
[크로노그래프가 감기기 시작합니다.]
테오의 발밑으로 희미한 시계판이 나타나 분침을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외부 세계가 마치 정지된 것처럼 고요해졌다.
테오에게 금방 떨어질 것 같던 낙뢰도, 몸을 양단시킬 것 같던 검기도 정지했다.
물론, 시간이 완전히 정지한 건 아니었다.
의식 세계가 가팔라지면서 생긴 결과.
하지만 덕분에 테오는 빽빽하게 밀집된 낙뢰와 검기들 사이로 여러 개의 빈틈을 찾아낼 수 있었고.
그 순간, 검의 구슬이 주는 영감이 극대화되어 머릿속이 새하얗게 백열을 일으켰다.
찾았던 빈틈들이 선과 선으로 연결되었다.
그것들이 서로 뒤엉키면서 면이 되었고, 테오는 지체 없이 그 위로 발을 얹었다.
이 순간. 전장은 오롯이 테오의 손바닥에 떨어졌다.
쐐애애액!
세 자루의 신검이 날았다.
번- 쩍!
무언가가 번뜩인다는 착각과 함께 외부 시간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을 때,
콰콰콰쾅!
낙뢰와 검기는 모두 아슬아슬하게 테오를 스치고 지나가면서 애꿎은 바닥과 벽면을 때렸다.
단 한 걸음만 옮겼을 뿐인데도 모든 공격을 허무로 돌리는 신기를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스걱!
짧은 절삭음과 함께 페르소나들이 일제히 자신의 목을 붙잡았다.
푸우우우!
핏물이 번져나왔다.
몸이 분리된 페르소나들이 일제히 바닥에 쓰러졌다.
그 뒤로 세 자루의 검이 공명을 일으키고 있었다.
웅, 우우우웅!
‘역시 된다.’
신검을 활용한 이기어검에 이어서 크로노그래프와 검의 구슬의 조화까지.
그동안 익혔던 기예들을 하나로 뒤섞는 작업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큰 폭발적인 시너지 효과를 보이고 있었다.
기존의 재능들을 모두 한꺼번에 뒤엎어버릴 만큼.
파아아!
테오는 다시 4층으로 움직였다.
[00:08:41]
[00:08:40]
.
35초.
층계를 정복하는 시간은 오히려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 * *
토르켈은 고민했다.
‘어떻게 한다?’
율리우스의 패기가 이미 백탑 주변부를 모두 장악하고 있었다.
그 역시 항룡의 빈자리를 메울 후보 중 하나로 언급되고 있다지만, 아직은 마룡에 비할 바는 아닌지 피부가 따끔거렸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섰다간 흑색철기대의 사기가 바닥에 떨어지고 만다.
적검기사단과 비밀리에 맺었던 연대도 없던 일이 될 테고, 북방의 사람들은 흑색철기대가 백갑용기대보다 아래라고 수군거릴 것이다.
그럼 그 뒤는?
불에 보듯 뻔했다.
다른 후보들이 옳다구나 하고 그를 물어뜯기 시작할 테지.
‘그건 절대 안 된다.’
쌓는 건 어려워도,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단 한 번이라도 꺾인 후보는 더 이상 후보일 수 없는 법.
특히 평생 불패의 기록을 자긍심으로 삼았던 토르켈로서는 절대 여기서 굽힐 수 없었다.
‘이것까지 드러낼 생각은 없었지만……!’
고민은 잠시뿐.
토르켈은 지지 않겠다는 듯이 그동안 오러홀 안에다 꽁꽁 숨겨뒀던 잠재력을 격발시켰다.
콰르르릉!
순간, 천둥소리가 울렸다.
흑색철기대의 시선이 뒤쪽으로 돌아갔다.
“대장!”
“대장님! 설마 마음을 먹으신 겁니까!”
“드디어……! 저희도 대장의 뜻을 따르겠……!”
“아니. ‘아직’은 아니다. 하지만.”
깊게 눌러쓴 흑색 투구 아래로 시푸른 안광이 삐져나왔다.
“마룡께 일부는 보여드릴 수 있겠지.”
토르켈의 기세가 팽창하며 율리우스의 기운을 한껏 밀어냈다.
일견 겉보기엔 막상막하라 할 수 있을 만큼 대단한 기세.
쿠르르릉-
쿠쿠쿠쿠……!
기세와 기세가 충돌하면서 격진을 일으키고, 사방에다 스파크를 터뜨렸다.
“제법 숨겨둔 힘이 있나 보지?”
율리우스가 뜻밖이라는 투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뜻하지 않았던 인연이 있었습니다.”
“인연이라. 그래. 그런 것도 좋지. 하지만 고작 이 정도로 내게 덤비겠다고 생각한 거라면 조금 실망인데.”
율리우스가 쥐고 있던 검을 휘두르려 했다.
마기가 잔뜩 응집하면서 폭발하려는 광경은 등골이 서늘해질 정도였다.
토르켈이 손에 쥐고 있던 창을 높이 들었다.
흑색철기대도 황급히 토르켈을 중심으로 뭉치려 했다.
마룡의 발톱은 그만큼이나 두려운 것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때였다.
파아앗!
갑자기 백탑의 2층에 불이 켜졌다.
어두운 자정의 밤하늘을 물리치려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환한 불빛.
1층에 이어서 2층까지?
율리우스와 토르켈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그쪽으로 돌아갔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라는 거였다.
얼마 있지 않아 3층이, 그 다음에는 4층이.
“대체 무슨 일이……!”
5층, 6층, 7층까지…….
층계가 차례로 밝혀질 때마다 흑색철기대 대원들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들이 입고 있던 흑색 갑주조차 빛에 의해 하얗게 보일 지경이었으니.
“이렇게나 빨리 신비를 정복한다고?”
토르켈은 사실 백탑의 정체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태고룡의 유물.
라그나르의 권좌를 쟁취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얻어야 할 왕홀 같은 것.
당연히 비밀을 해제하는 것도 상당히 힘들 테고, 막상 시험을 치르기 시작하면 상당한 시간이 소모될 것을 알았기 때문에 원주민들을 배제하고서 백탑의 영역을 손에 넣으려 했던 것이다.
설사 백갑용기대와 충돌을 벌이는 한이 있더라도.
율리우스와 연결된 흑룡과 매화궁주까지 잠재적인 적으로 돌리더라도 얻을 가치가 있었다.
그런데 만약 여기서 백탑 안에 있는 유물을 테오에게 빼앗긴다면?
죽 써서 남주는 꼴이 되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각 층계에 불이 밝혀지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2층이 40여 초, 3층이 30여 초 정도였다면, 4층과 5층은 이제 그것조차 되지 않는 것 같았다.
분명히 윗층일수록 난이도가 더 높을 텐데도 불구하고.
“지금!”
하지만 율리우스는 토르켈이 머리를 쓰는 시간 따윈 주지 않겠다는 듯, 응집했던 마기를 토르켈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적검기사단이 있는 곳이었다.
‘이런!’
토르켈이 아차 싶어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마룡의 발톱은 적검기사단을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뒤였다.
“크아악!”
“커헉!”
윈터러가 자랑한다는 가주 호위대가 단번에 박살 나 사방으로 밀려났다.
진영이 완전히 뭉개진 건 아니었지만, 자잘한 틈까지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고.
미리 대기 중이던 아모레와 1번조가 앞으로 뛰었다.
“자, 그럼 가자, 얘들아!”
“으하하하! 그 말만 기다렸습니다!”
“저 시건방진 놈들 낯짝부터 후려갈기고 싶었지!”
때마침 허공을 뱅글뱅글 돌던 와이번이 강하를 시도, 그들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 위로 올라타면서 적검기사단을 한바탕 크게 휘저었다.
“잡아!”
에리카 구출은 바로 그때 이뤄졌다.
에리카는 1조 부조장의 손을 잡아 황급히 백룡에 올라탔다.
“임무 완수했습니다!”
“자, 그럼 다시 비상!”
임무를 마친 백룡들이 일제히 허공으로 날아오르는 광경은 장관이 따로 없었다.
덕분에 적검기사단은 닭 쫓던 개처럼 허망하게 허공을 바라봐야만 했고,
“우리도 뒤처질 수는 없지.”
“이참에 누가 진짜 라그나르의 최강인지 보여주자고.”
남은 2, 3, 4, 5번조도 일제히 앞으로 달렸다.
백룡이 하강했고, 그들은 올라탔다.
편대를 이룬 채 시도되는 저공비행은 마치 거대한 성곽이 달려드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콰콰쾅!
히히히힝-
“고삐! 고삐를 잡아라!”
“놈들에게 길을 열어주지 마라!”
흑색철기대는 단단히 안쪽으로 뭉치고, 백갑용기대는 각 조별로 찢어져 외곽을 휘젓거나 돌파를 시도했다.
원래 흑색철기대가 주로 구사하는 전술이 뒤집힌 셈.
그런대로 잘 버티나 했지만, 1조가 크게 선회하고 후방을 에워싸면서 진형은 삽시간에 허물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콰아아앙!
율리우스와 토르켈이 중앙에서 격돌했다.
번쩍!
때마침 8층에도 불이 들어왔다.
토르켈의 심장이 가쁘게 뛰었다.
두근두근두근-
‘어떻게든 해야 한다.’
토르켈은 정말 이대로 있다간 유물을 빼앗기겠다는 생각에 율리우스를 밀어내고 말머리를 돌리려 했다.
“어딜 그리 가려 하시는 겐가?”
하지만 율리우스는 토르켈을 보낼 생각 따윈 없다는 듯 악착같이 검을 밀고 들어왔다.
이미 이왕에 이렇게 된 것, 테오가 백탑을 완전히 정복할 수 있도록 도울 생각이었다.
“비키십시오.”
“말하지 않았나. 이미 그러기엔 너무 늦었다고.”
“그럼 진짜 남은 건 전쟁뿐이군.”
“크게 착각하고 있나 보구나.”
토르켈이 이를 악물며 율리우스에게 정면으로 부딪쳤다.
반면에 율리우스는 조금 의외라는 듯 놀라는 표정을 짓다가, 차갑게 웃었다.
“이건 전쟁이 아냐. 숙부가 버릇없는 조카에게 한 수 가르쳐주는 것에 지나지 않지.”
콰아아앙!
폭발이 사방으로 번졌다.
백갑용기대와 흑색철기대.
라그나르가 자랑한다는 두 최정예가 부딪치는 순간이었다.
적검기사단도 여기에 가담하면서 분쟁은 급속도로 커져갔다.
결국 사상자가 나타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전투가 격화된 그 순간.
파라라락!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개판이 다 되었군-!”
“그만두지 못할까-!”
사자후와 함께 하늘에서부터 두 명의 여인이 떨어졌다.
매화궁주와 수선궁주.
두 명의 용이 각각 백갑용기대와 흑색철기대 사이에 떨어져서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고,
쾅!
때마침 토르켈을 죽이기 위해 달려들던 율리우스의 검을 가까스로 빗겨내는 존재가 있었다.
“마그누스.”
“마룡. 이번 소란에 대해 제대로 된 설명이 있어야 할 거요. 그렇지 않으면 분란조장죄로 너와 토르켈 모두 모가지를 한꺼번에 막사 앞에다 걸어버릴 테니.”
9룡 중에서도 카일의 가장 큰 심복이라 알려진 환룡(幻龍).
청검근위단의 단장, 마그누스 라그나르가 등장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때,
“신비란 말이지? 토르켈이 노렸던 게 역시 저거였군. 저런 걸 성인도 되지 못한 애송이 따위에게 줄 수는 없지.”
“정말 가려고?”
“그럼. 안 가는 게 더 이상하잖아?”
“그래. 알아서 해. 단, 이번 일은 난 모르는 거야. 오라비 알아서 하라고.”
“후후. 나중에 후회나 하지 말라고. 이번 전리품은 절대 안 나눠줄 거니까.”
“알아서 하라니까?”
5대 후보 중 다른 하나.
기샤르가 장기인 잠행술을 펼치며 조용히 백탑으로 들어섰다.
회귀검가의 서자가 사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