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백탑 유적지 (5)
「만신전의 사절?」
케라토수쿠스는 로드브로크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지킴이>란 인과율의 법칙 때문에 인세에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하는 만신전을 대신하여 이 세계를 지키는 존재들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중간에서 그들을 매개(媒介)할 존재는 필요하지요.」
「그게 바로, 너다?」
「그런 것입니다.」
케라토수쿠스는 테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백탑의 ‘백’은 하얗다는 뜻입니다. 하얗다는 것은 모든 빛이 하나로 모였을 때에 만들어지는 것. 즉, 만신전에 앉아 있는 모든 신들의 시선이 닿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하지요.」
“신이라는 존재가 실제로 있긴 있나 보군요.”
카일이나 힐다 같은 반신들이 있으니 신적인 존재에 대해서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테오는 신의 이적이라는 것을 그동안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이 세계에도 종교가 없는 건 아니지만, 영향력이 아주 적은 것도 대부분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있지요. 아마 당신이 생각하는 것과는 많이 다른 모습일 테지만.」
“……?”
「흔히 인간들이 생각하기 쉬운 신의 이미지, 전지(全知)나 전능(全能)과는 사실 어느 정도 거리가 있고, 대부분 제대로 된 형상을 갖추고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대게 ■■ ■■■■ 격이 되는 이데아에 ■■■ ■■■ ■…… 음, 필터링이 걸리는 걸로 봐서는 더 이상 말할 수가 없나 보군요.」
케라토수쿠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턱을 쓰다듬다가 테오에게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그래도 한 가지 힌트를 드리자면, 당신이 보고 있는 ‘것들’도 만신전과 관련된 것이라는 정도만 말해두죠.」
“……!”
「반려가 보고 있는 ‘것들’? 반려여. 저 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느냐?」
두근두근두근!
테오는 로드브로크의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심장이 가쁘게 뛰고 있었다.
‘메시지에 대해서 알고 있다!’
다른 선택자들에게는 보이지 않았던 이상한 푸른색의 메시지.
첫 인생에서 겪었던 ‘게임 시스템’과 비슷한 형태와 인터페이스 구조를 갖추고 있어 많은 의문을 주었었는데.
설마 그것이 만신전과 연관이 있다고?
“그럼 이건……!”
「아아, 이 이상은 저도 말해드리기 힘듭니다. 어차피 필터링이 걸릴 테니까요. 하지만 ‘회차’를 겪다 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테오가 질문을 던지려던 것을, 케라토수쿠스가 손을 뻗어 막았다.
「뭔가 있긴 있나 보군. 역시 다른 반려들과는 달랐다는 건가.」
로드브로크는 옆에서 흥미가 돋는 모양이었다.
테오는 주먹을 꽉 쥐었다.
어쩌면 태고룡의 유물을 모으는 것이야말로 자신과 관련된, 그리고 가문과 관련된 비밀을 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여하튼. 이곳 백탑을 설명하자면, 저라는 매개로 인해 신들의 의지가 투영될 수 있는 몇 안 되는 성소(聖所) 중 하나라고 여기면 될 겁니다.」
테오는 가만히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그 때문에 이곳에서는 만신들이 당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펴볼 수 있게 됩니다.」
“신들이…… 나를 지켜본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짜악!
케라토수쿠스가 가볍게 박수를 친 순간, 그의 뒤쪽으로 수많은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 ■■ ■■■■ ■■■■■.]
[■■■■ ■■■ ■■!]
[■■■■■ ■■■ ■ 입장■■■■■.]
[흥미 ■■ ■■■■■ ■■ ■■■.]
[■■ ■■ ■■■■ ■■■■■. ■■■■■? ■■■■■ ■ ■ ■■■ ■■■■■.]
.
.
「이미 이렇게나 많은 분이 현재 당신을 <관람>하시는 중이랍니다.」
수도 없이 올라갔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메시지 때문에 눈이 다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불쾌한 시선들이군.」
테오와 다르게 메시지를 직접 보지 못하는 로드브로크는 저것을 시선으로 느끼는 모양이었다.
테오 역시 어디선가 자신을 훔쳐보는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들어 거부감부터 들었다.
마치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진드기 같다고 할까.
「아무쪼록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저분들 모두 제대로 된 입장객을 본 건 너무 오랜만이어서 말이죠. 그리고 나쁘게만 보실 것도 아니십니다. 결국 이곳에서 있을 유물 시험의 평가와 보상은 저분들이 주실 예정이라.」
「우리가 잘 보여야 할 물주란 셈이군?」
「……너무 직설적인 표현이 아닐까 싶긴 합니다만.」
「원래 조물주 위에 물주가 있고, 건물주가 있는 법이지. 흠흠흠! 다들 잘 부탁하지.」
로드브로크는 유쾌하게 메시지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격하게 환영 ■ ■■ ■■■■ ■■.]
[■■ ■■■■■ ■ ■■■■■. 즐거■■■! ]
[기뻐■■ ■■■ ■■■■■! ■■■ ■■.]
.
.
「뭔지는 몰라도 아주 기뻐하는 것 같은데?」
「다들 훌륭한 퍼포먼스…… 라고 하시는군요. 이런 경우는 저도 처음 겪어봐서 조금 당황스럽습니다.」
「비록 만신전의 신들과 직접 대면한 적은 없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팍팍한 성격은 아닌 모양이군. 하계에 있었다면 좋은 술친구가 될 수 있었겠어.」
[용의 ■■ 동의■■■■ ■■!]
[■■■■ ■ ■ ■■■ ■■■■■!!]
테오는 무미건조하던 시선들에 어느새 열의로 가득한 것을 느끼면서 신이란 존재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감정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아니. 오히려 세상사에서 빠져나왔으니까 더욱더 열성적이고 감정에 충실한 건가?’
여하튼 테오는 그동안 갖고 있던 신에 대한 선입견이 많이 깨지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럼 내가 치를 시험이라는 건 뭐지?”
전생에 백탑의 신비가 열리긴 했다지만, 어쩐지 테오는 당시의 시험 내용과 자신이 겪는 시험 내용은 많이 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아 탐구입니다.」
“자아?”
「예. 무의식으로, 그리고 유전 형질에 새겨진 그대로, 더 깊게 넘어가 집단 무의식으로, 원형으로…… 당신은 당신의 영혼은 물론, 그 저층에 깔린 <뿌리>를 향해 탐험하게 될 것입니다.」
케르토수쿠스는 탑의 벽면을 쓰다듬으면서 설명을 이어 나갔다.
「백탑의 ‘백’은 만신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또한 입장객의 영혼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탑을 오른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자신의 뿌리를 향해 내려간다는 의미이기도 하지요.」
띠링!
[가디언 케르토수쿠스는 당신에게 자아 탐험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돌아보면서 반성의 시간을 가지고, 영혼의 비밀을 들추는 것입니다.]
[하지만 무의식은 또 하나의 세계이기도 합니다. 너무 깊이 함몰되어 빠져나오지 못할 경우, 자폐(自閉)가 벌어질 위험도 커집니다. 탐험에 유의하세요.]
「탑은 총 13층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오르는 층수만큼 평가와 보상이 이뤄질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하시겠습니까?」
테오는 별다른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물을 전부 모으기로 결심했다면, 이것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어떻게 13층까지 정복할지를 고민했다.
케르토수쿠스가 웃었다.
「옳은 결심을 하셨습니다. 그럼 시작하도록 하죠.」
짜악!
다시 한번 더 박수를 치자 케르토수쿠스의 모습이 사라졌다.
대신에 백탑이 변화를 일으켰다.
드드득-
벽면을 따라 놓여 있던 나선형 계단이 중앙으로 모였다.
그러더니 그 끝이 테오 앞에 놓였다.
레드 카펫도 깔렸다. 어서 이 위를 밟고 올라오라는 듯.
「무의식의 세계는 그렇게 쉽게 볼 것이 아니다. 상상의 영역이기 때문에 현실 세계와는 전혀 다른 법칙이 가동되고, 비상식이 상식처럼 벌어지지. 조심해야 될 게다.」
“사실 로디가 모르는 게 있습니다.”
「모르는 것?」
“사실 비상식만큼 제게 쉬운 것도 없습니다.”
지구인의 기억을 일부 가지고 판타지 세계를 경험하는 것만큼, 그리고 회귀를 겪은 것만큼 비상식적인 게 어디 있었을까.
테오는 로드브로크의 배웅을 뒤로 한 채 1층을 지나 2층에 올랐다.
그러자 1층에 환한 빛무리가 밝혀지면서 어느새 로드브로크의 모습이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바깥 세계에서 백탑 1층에 불이 밝혀졌던 것이 바로 이때였다.
화아악!
[2층에 입장합니다.]
테오가 빛의 장막을 완전히 통과했을 때.
드넓은 대리석 바닥 위에 한 남자가 테오 쪽으로 등을 진 채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하얀 복장인 테오와 다르게 오로지 검은색 옷을 입었고, 머리 역시 긴 흑발인 테오와 다르게 짧은 하얀색이었다.
그는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듯 인기척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테오는 잠깐 멈칫거렸다.
상대가 누군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무의식 세계에 본격적으로 입장하기 위해서는 먼저 ‘의식’의 문을 열고 들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눈앞에 있는 나를 쓰러뜨려 그 문을 여십시오.]
그 순간, 앉아 있던 사내가 천천히 일어서서 이쪽을 돌아봤다.
복장과 머리가 테오와 정반대였던 것처럼 눈도 파란색으로 빛났다.
하지만 얼굴은 테오와 똑같았다.
마치 쌍둥이처럼.
파앗-
파란 눈의 테오가 지면을 거세게 박찼다.
양손에는 하얀 월백검과 까만 용살검을 들고 있었다.
역시나 실제 테오의 것과는 상반된 형태였다.
채애애앵!
테오도 재빨리 월백검과 용살검을 뽑아 공격을 막았다.
그것으로 알 수 있었다.
힘도, 실력도, 기술도. 녀석은 자신과 똑같았다.
이래서 ‘나’를 꺾으라는 거였나.
“재미있겠는데.”
언제 또 이런 상대를 만나볼 수 있을까.
테오는 웃었다. 하지만 파란 눈의 테오는 웃지 않았다.
[올 버프 상태가 시작됩니다.]
[제한 시간: 10분.]
[카운트가 시작됩니다.]
쿵쿵쿵쿵쿵!
용의 심장과 단전이 가쁘게 뛰면서 공명을 일으켰다.
이전보다 훨씬 발동 시간이 길어진 용인 모드가 개시되면서, 테오는 양손에서 월백검과 용살검을 손에서 놓아버렸다.
‘이 녀석이 정말 나와 똑같은 기술과 실력을 가지고 있다면 정면 승부로는 결과를 내기 힘들어. 그렇다면……!’
새롭게 구상했던 전투 방식을 활용해볼 생각이었다.
결과는 모 아니면 도.
하지만 테오는 모에 자신의 판돈을 걸었다.
파앗! 파앗!
월백검과 용살검이 떨어지다 말고 허공을 질주했다.
허리춤에 걸려있던 영묘검도 같이 검집과 분리되어 튀어 올랐다.
세 자루의 검이 한데 어울리며 푸른 눈의 테오에게 떨어졌다.
쾅! 쾅! 쾅!
푸른 눈의 테오가 뒤로 물러설 때마다 한 자루씩 검이 지면에 박혔다.
먼지구름이 일어나고, 바닥에 균열이 퍼졌다.
그러다 세 자루의 검을 모두 피했을 때, 푸른 눈의 테오는 어느새 벽면에 등을 붙이게 되었다.
진퇴양난.
뒤로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었다.
쐐애액-
테오가 그 틈을 노려 드레이크의 날붙이를 뽑으며 달려들었다.
푸른 눈의 테오가 몸을 옆으로 돌렸다.
그가 있던 자리로 대검이 틀어박혔다.
“어딜.”
테오는 검이 벽에 꽂힌 그대로 옆으로 달렸다.
가가가각!
벽면에 크게 균열이 일어났다.
수없이 튀어 오르는 파편 사이로 뇌기가 번쩍였다.
콰르르릉-
우르르!
뇌전의 파도가 푸른 눈의 테오를 덮쳤다.
녀석이 황급히 땅바닥을 굴렀다.
대검이 또 다시 아슬아슬하게 그 위를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테오의 공세는 멈추지 않았다.
바닥에 박혔던 월백, 용살, 영묘의 검 세 자루가 어느덧 다시 염동력과 함께 위로 떠올라 움직였던 것이다.
그동안 짧은 데스비트로만 구사하던 이기어검이었지만, 마력 제어력이 월등히 높아진 지금은 장검으로도 충분히 가능했다.
그리고 거기서 빚어지는 뇌룡은-
파지지지직!
데스비트의 뇌룡과는 비교할 것이 아니었다.
크롸롸롸롸-!
이전보다 훨씬 크고 용맹함을 자랑하는 세 마리의 뇌룡이 튀어나와 아가리를 벌렸다.
월백검은 잔혹했다.
그리핀의 의식을 고스란히 옮겨 담은 것처럼 닿는 모든 것을 짓밟으며 푸른 눈의 테오를 쫓았다.
콰아앙!
녀석이 들고 있던 대검이 단번에 박살 났다.
얼굴에 적잖은 당혹감이 어렸다.
용살검은 날카로웠다.
크림힐트의 검술을 담은 것처럼 너무 빨라 푸른 눈의 테오가 어떻게 미처 반응할 틈이 없었다.
스걱!
푸우우-
그의 오른팔이 잘리며 허공에 튀어 올랐다.
푸른 눈의 테오가 이를 악물면서 몸을 뒤로 물렸다.
왼손이 순식간에 뇌전으로 물들었다.
검술로 안 되면 마법이라도 발동하려는 것 같았다.
라이트닝 볼트.
눈앞으로 뇌전이 튀어 오르면서 환한 빛이 2층을 가득 채웠다.
여기에 영묘검이 정면으로 맞섰다.
뇌룡이 크게 몸을 틀며 숨결을 내뱉자, 마법이 고스란히 수직으로 꺾여 천장을 마구잡이로 긁었다.
그리고 푸른 눈의 테오가 충격파와 함께 튕겨났다.
어느새 새카맣게 그을린 녀석은 몸뚱이가 절반 이상 파괴된 상태였다.
잘생긴 얼굴이 화상으로 흉측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하지만 고통이나 분개보다 녀석의 얼굴에 더 크게 어린 감정은 따로 있었다.
의문.
“왜 똑같은 스펙을 하고서도 네가 밀리는지 궁금한 모양이지?”
푸른 눈의 테오가 딱딱한 뭔가에 부딪혔다.
고개를 위로 들자, 진짜 테오가 어느새 차갑게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고정’되어 있는 너와 다르게 나는 계속 ‘변화’하고 싶거든. 그 차이뿐이야.”
푸른 눈의 테오가 뭐라고 말을 하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드레이크의 날붙이가 목을 가르고 지나갔다.
푸우우우!
붉은 피 분수 아래, 3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나타났다.
테오는 지체하지 않고 다시 그쪽으로 뛰었다.
‘1분에 한 계단씩 오른다.’
[00:09:17]
[00: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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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초.
테오가 또 다른 자신을 죽이는 데 소모된 시간이었다.
회귀검가의 서자가 사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