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검가의 서자가 사는 법-166화 (166/224)

166화

백탑 유적지 (1)

오랜만에 만난 율리우스는 얼굴에 피로가 가득했다.

최근에 전투가 잦았다고 하더니.

거기다 이런저런 일이 겹쳐지면서 짜증도 더러 묻어났다. 여유 가득하던 평상시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무력 충돌이라니요.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셀퍼드와 아린은 당연히 소스라치게 놀라 물을 수밖에 없었고,

율리우스는 잠시 뭐라고 대답할까 싶어 고민하다가 천천히 입을 뗐다.

“백탑에는 오랫동안 이곳을 관리하던 원주민들이 있다. 알고 있지?”

“예. 대강은.”

백탑은 현재 학계의 학자들이 아니면 대부분 관심도 없을 고대문명의 몇 안 되는 유적지 중 하나였다.

이곳에는 탑족이라 하여 오랫동안 탑을 관리하던 원주민들이 있었는데, 평상시에는 백탑을 구경하러 온 관람객들을 상대로 전통문화체험 같은 서비스를 제공하곤 했다.

“그들의 거주구역을 보호하는 데서 의견 트러블이 있었다.”

백갑용기대는 아직 발굴이 덜 끝난 유적지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탑족과 거주구역을 보호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흑색철기대는 반대로 전투가 나날이 격해지니 탑족까지 보호해줄 여유 따윈 없다면서 그들을 다른 구역으로 강제 이주시킬 것을 요청했다.

“물론, 의견 충돌이야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 사람은 저마다 하는 생각이 다 다르니까. 문제는 백탑을 둘러싸고 공방전이 벌어졌는데, 그 과정에서 트로이반의 침투조가 있었다는 거야.”

테오는 어쩐지 머릿속으로 그림이 그려지는 것 같았다.

“……시가전이 벌어졌군요.”

셀퍼드와 아린의 시선이 황급히 테오 쪽으로 돌아갔다.

율리우스가 쓰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리고 우리나 흑색철기대나 제일 싫어하는 전투 형태지.”

침투조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무분별한 충돌이 있었던 것이다.

“거기다 탑족에서도 트로이반이 심어둔 끄나풀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만.”

“너 혹시 우리 쪽에 눈이라도 붙여두고 있었니?”

“제가 트로이반이라면 어떻게 할까 싶어 고민하던 중에 내린 결론이었습니다. 만약 시건방지게 느껴졌다면 죄송합니다.”

“아니다, 아니야.”

율리우스는 손사래를 치면서도 상황을 단숨에 꿰뚫어 보는 테오의 안목에 혀를 내둘렀다.

‘바깥나들이를 하고 온 반년 동안 시야가 더 트였구나. 역시 저 녀석은……!’

그렇지 않아도 테오가 곧 상급검사에 천거될 거란 언질을 등룡에게서 서신으로 듣지 않았던가.

율리우스는 아무래도 테오를 위해 마련해뒀던 계획을 좀 더 앞당겨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간 저쪽이 자꾸 우리를 흔들어 놓는 통에 아주 죽을 맛이다, 죽을 맛이야.”

셀퍼드가 잠깐 고민에 잠기다가 물었다.

“그럼 탑족을 보호하는 것 자체가 위험하지 않을까요? 죄송하지만 이번 일은 흑색철기대의 의견이 맞는 것 같습니다. 꼭 우리가 그들을 보호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지도 않잖습니까?”

아린과 테오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탑족을 몰살시키자는 것도 아니고 감시하기 좋은 곳으로 우선 옮기자는 게 아닌가. 거주 구역이야 전쟁이 끝나고 난 뒤에 돌려주면 되는 것이고.

하지만 율리우스는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며 씁쓸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백탑에서 <신비>가 발견되었다.”

“이런…….”

“아.”

일행은 그것만으로 상황을 깨달을 수 있었다.

테오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탑족의 증언이 필요하신 거로군요.”

“그래. 현재 백탑 아래에 신비가 봉인되어 있다는 것만 파악되었지, 이걸 어떻게 해야 풀 수 있는지는 알아내지 못했거든. 그럼 결국 탑족의 구전이나 전승을 참고해야 하는데, 다른 일에는 협조적이면서도 여기에는 유달리 폐쇄적이란 말이지.”

테오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비는 때때로 한 세력의 패권을 다르게 만들 수도 있는 절대적인 힘이다.

괜히 불가해(不可解)라고 불릴까.

때문에 탑족으로서는 자신들이 오랫동안 수호했던 백탑의 신비를 내어주고 싶지 않을 것이다.

반면에 이곳을 자기 영역이라 판단한 라그나르로서는 자신들의 것이라 여겼을 테고.

‘백갑용기대는 최대한 탑족을 어루만져서 신비를 획득하자는 회유파, 흑색철기대는 탑족을 강압하자는 강경파. 이렇게 파악하면 되겠군.’

테오는 전생의 지식을 되짚어봤다.

‘백탑의 신비라면…… <계명성의 너울>이었지?’

가장 빨리 하늘에 떠오르고, 새벽녘에는 가장 크게 빛난다는 별, 계명성.

백탑의 신비는 그런 계명성의 힘을 빌려온다고 알려져 있었다.

마력 관련의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문제는 테오는 그 내용을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라그나르보다 먼저 트로이반이 이것을 해방했으니까.

하지만 이것을 얻고 얼마 있지 않아 트로이반이 무너진 것을 떠올려본다면,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었을 거란 후대의 평가가 있었다.

테오도 비슷하게 판단했기 때문에 손에 빨리 넣을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고.

‘하지만 그래도 트로이반이 가져가게 놔둘 수는 없지. 흑색철기대도 마찬가지고.’

다행히 테오는 신비를 해제하지는 못하더라도, 근처까지 접근하는 법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그때였다.

띠링!

[퀘스트가 도착했습니다.]

+

[시나리오 퀘스트 #7]

태고룡이 남긴 유적지를 방문하였습니다. 이곳에 묻힌 신비를 손에 넣으십시오.

· 난이도: A+

· 보상: 태고룡의 유물

· 실패시: 사망

+

백탑이 태고룡이 남긴 거였다고?

테오의 눈이 살짝 커졌다.

이렇게 되면 반드시 그가 손에 넣어야 하는 이유가 생긴 셈이었다.

“여하튼 다들 흑색철기대와는 되도록 충돌하지 말게. 탑족의 거주구역을 보호하고 있는 건 우리고, 그들에 대한 권한도 우리에게 있으니까. 괜히 말려서 좋을 것 없어.”

율리우스의 신신당부에 일행은 고개를 끄덕였다.

율리우스는 그제야 얼굴에서 진지함을 풀고 미소를 달았다.

“오는 길에 다들 고생이 많았다지? 어디 이야기나 한 번 들어보자.”

“보고로 받지 않으셨습니까?”

“그런 딱딱한 문서로 보는 것보다 직접 무용담을 듣는 게 몇 배는 낫지.”

“설마 그냥 들으시려는 건 아니시죠?”

“하하하. 설마. 이미 다 준비해뒀지.”

셀퍼드의 장난기 섞인 질문에 율리우스가 가볍게 박수를 쳤다.

짝짝!

순간, 뒷문이 열리면서 밖에서 대기 중이던 인파가 대거 안쪽으로 들어왔다.

“언제 부르시나 한참을 기다렸습니다!”

“오크통! 오크통부터 안쪽으로 옮겨!”

“고기는 어떻게 됐냐?”

“지금 다 구웠습니다! 가져가겠습니다!”

백갑용기대의 대원들이 저마다 술통과 안줏거리를 한가득 들고 있었다.

술파티가 시작되었다.

* * *

“파하하하! 뭐? 거기서 동상이 무너져?”

“아주 트로이반 놈들 식겁했겠구만! 몇 년을 공들인 걸 홀라당 갖다바친 거잖아?”

“그래서?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됐는데?”

“나도 부유군도의 신비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있는데. 그냥 전설인 줄로만 알았는데 진짜였단 말이지? 캬! 어디 몸 한 번 만져보자.”

시끄럽다.

술파티가 시작되는 내내 테오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생각이었다.

북방 전역에 흩어졌던 조들이 전부 모였다더니, 오랜만에 만난 얼굴들도 많아서 서로 안부를 주고 받느라 아주 시장판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중심 화제는 단연 테오였다.

『백갑용기대가 낳은 스타. 천 년만에 한 명 태어날까 말까 하는 아이돌. 천년돌이라지? 하하하하!』

‘……그만 놀리십시오.’

『우리 천년돌이 그렇게 말씀하시는데야.』

‘하아!’

대원들은 하나 같이 테오가 예뻐 죽겠다는 듯이 친근하게 굴었다.

원래 선후배의 기강이나 텃세가 심하지 않고, 친근한 가족 같은 분위기를 자랑하던 곳인 만큼 최근에 유명세를 떨치던 테오를 막냇동생처럼 예뻐했던 것이다.

볼을 얼마나 잡아당겼는지 뺨이 아직도 얼얼했다.

거기다 다들 술기운에 이제는 팔다리에 붙은 근육을 만져보겠다며 달라붙어서 떼어내는데 진이 다 빠졌다.

문제는 테오의 머리를 어지럽게 만드는 게 백갑용기대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츄릅! 저 고기 맛있겠는데?

-아, 술 고프다. 나도 한 말술 했는데.

-아서라, 이것들아. 괜히 미련 가지면 욕심만 생긴다. 근데 정말 향기 미치겠네. 아! 아아!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성불할 걸!!

영묘검의 유령들까지 아무렇게나 돌아다니는 통에 시끄러움은 두 배였다.

백갑용기대와 용아병단.

분위기가 닮아도 너무 닮았다. 복사해서 붙여넣기 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음, 어, 음. 도저히 들어갈 틈이 없는데, 누나? 어떡하지?”

“어떡하긴 뭘 어떡해. 네 계획은 이번에도 무참하게 끝난 거지.”

“젠장.”

홀커스는 속이 탄 나머지 맥주를 연거푸 들이켰다.

그동안 자신도 절치부심 단련했으니 이제는 그래도 테오의 검을 자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자신감으로 똘똘 뭉쳐 있었는데.

세상에 상급검사란다, 상급검사.

게다가 셀퍼드의 ‘썰’에 따르면 마음먹기에 따라서 용문검사에 필적하는 게 아닐까 하니……. 홀커스의 자신감도 급격하게 쪼그라들고 말았다.

이래서야 영영 테오의 옆에 설 수 있기나 할까.

“너 약해.”

그런데 맞은편에 앉은 레이가 에리카에게 자초지종 설명을 듣고 다짜고짜 비수를 꽂아버렸다.

“뭐, 인마?”

“테오는 훨씬 강해.”

“나도 알거든?”

“아니.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강해. 테오는 사선을 뛰었고, 너는 뒤에서 놀았어.”

“내가 놀기는 뭘 놀아! 나도 그동안 열심히 전투에 참가했……!”

“그래봤자 소꿉놀이.”

“야!!”

쾅!

홀커스가 울컥하는 마음에 식탁을 세게 치며 일어났다.

하지만 레이는 여전히 태연하게 맥주잔을 입가에 가져갈 뿐이었다.

에리카는 중간에서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그 둘을 지켜봤다.

“진짜 한판 붙자는 거냐? 엉?”

“십 초.”

“뭐가 십 초라는 거야? 말 똑바로 해.”

“너 바닥에 눕는데 걸리는 시간.”

“이 새끼가……!”

“그만큼 내가 겪은 시간과 네가 겪은 시간은 달라.”

“오냐. 진짜 해보자는 거지?”

홀커스가 험악하게 레이를 압박하려던 그때였다.

처억!

어느새 턱 밑에 검이 놓여 있었다.

‘대체 어느새……!’

“미안. 내가 너를 너무 높이 평가했어. 일 초네.”

“……!”

“이것도 포착 못 할 거면 테오 옆에 서는 건 꿈에도 꾸지 마. 테오는 계속 사선 위만 달릴 친구니까.”

“…….”

레이는 흥이 다 깨졌다는 듯이 검을 조용히 거두면서 자리를 떴다.

홀커스는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그만큼 레이가 그에게 준 충격은 컸다.

분명히 개화식이 있을 때까지만 해도 그들 사이에 그렇게 큰 격차라는 건 없었을 텐데.

지금은 레이의 검을 읽을 수조차 없었다.

레이가 이 정도일진대 테오는 대체 얼마나 위에 올랐다는 걸까?

그의 시선은 멍하니 테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넌 대체 어떤 삶을 살고 있는 거냐?’

에리카가 그런 동생을 보면서 맥주잔을 가볍게 마셨다.

그녀에게도 이번 일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거, 나도 너무 안일하게 있으면 안 되겠는걸.”

* * *

떠들썩한 분위기가 한 차례 지나간 뒤.

테오는 정식으로 다른 대원들과 통성명을 나눌 수 있었다.

“인사가 늦었지? 내 이름은 이트 볼세만. 2번조장을 맡고 있다.”

마해 탐색을 주로 맡는 2번조의 수장은 깡 마른 체구에 표독한 눈빛을 자랑하고 있었다.

음산한 분위기를 풍긴다고 해서 별호도 ‘음산검’.

테오는 그가 고고한 표범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나는 고리토 켄. 만나서 반갑다. 앞으로 기회가 되면 술이라도 한 잔 나누자고?”

우악스럽게 손을 내밀면서 악수를 청하는 3번조장은 ‘철벽’이라는 별호답게 전체적으로 단단한 느낌을 주었다.

극동 지방에 있는 먼 국가에서 넘어왔다는 이민족 출신답게 검은 눈과 황색 피부가 특징이었다.

“하나타 라그나르. 반가워.”

4번조장 ‘폭화검’은 라그나르 성씨가 맞나 싶을 정도로 따스한 성품과 말투가 인상적인 여인이었다.

하지만 테오는 거기에 속지 않았다.

하나타가 한 번 화가 났을 때 얼마나 폭력적인지를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테오 라그나르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테오는 깍듯하게 그들과 인사를 나눈 뒤에 마지막 인물 앞에 섰다.

겉보기엔 150센티미터도 안 되는 왜소한 체구에 앳된 얼굴을 갖고 있었지만, 3미터도 훨씬 넘는 장창이 등에 매달려 흉흉함을 자랑했다.

‘1번 조장, 악귀(惡鬼) 아모레 탄.’

율리우스의 친위대로서 세간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거의 없이 오로지 위험한 최전선만 돌아다닌다는 1번조의 수장은 그만큼 대단한 무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현재 공석으로 남아있는 ‘항룡’의 자리를 누군가에게 수여해야 한다면 1순위로 거론된다는 이가 바로 이 여인이었으니.

테오는 자신이 아모레와 30센티나 키 차이가 나는데도 불구하고, 그녀가 너무 크게만 느껴졌다.

“하이. 방가방가. 앞으로 잘 부탁해. 사석에서는 모레 누나라고 부르렴. 알았징?”

다만, 이미지에 어울리지 않게 말투가 너무 귀엽다는 건데…….

“우웨엑.”

“모레 누나? 모레 누나아아아? 1조장님? 양심 어디?”

“내일모레 환갑을 앞둔 양반이 저딴 말이라니……. 아니, 그보다 방가방가는 언제적 유행어야?”

“오랜만에 잘생긴 후배 들어와서 이미지 관리 좀 하려는데. 다들 안 닥쳐?”

아모레가 쌍심지를 켜자 다른 세 조장들이 황급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테오는 계면쩍은 얼굴로 볼을 긁적였다.

‘1번조장이 대장님보다 나이가 더 많다는 소문이 진짜였구나.’

60세에 가까운 나이에 많이 잡아봐야 30세도 안 될 것 같은 동안이라니. 비결이라도 물어서 어머니께 알려드리고 싶었다.

“하여간 앞으로 조장 생활하는데 궁금한 게 있거나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 편하게 이 누나를 찾아오렴.”

아모레가 가볍게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하지만 테오는 그런 것보다 다른 것에 정신이 팔리고 말았다.

조장?

“어라. 이거 설마 아직 비밀이었나?”

아모레도 테오의 표정을 읽고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던지, 손으로 입을 툭 때리면서 슬쩍 율리우스를 돌아봤다.

율리우스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뭐, 어차피 곧 말할 거긴 했었는데…… 그냥 말해야겠군. 테오 라그나르.”

“예. 대장님.”

테오는 어쩐지 정신이 번쩍 들어 허리를 바짝 세웠다.

“자네는 이번 임무들의 공적에 더해 등룡 님의 추천을 받아 조만간에 상급검사 자격시험을 치르게 될 걸세. 그리고 만약 합격하고 난 뒤에는.”

율리우스의 두 눈이 빛났다.

마룡의 눈이었다.

“자네만의 조를 꾸리게 될 게야.”

“……!”

두근!

테오의 심장이 뛰었다.

회귀검가의 서자가 사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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