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마탑의 후계자 (3)
“SSS+++라고? 무슨!”
나자리우는 테오가 파르켈소스를 구동할 때까지만 해도 별다른 해답을 얻지 못할 거라고 여겼다.
파르켈소스를 다루는 건 마탑에서도 특별한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니면 절대 불가능했으니까.
아니면 최소한 벨페고르만한 마도서라도 있어야 했는데……!
-재판정 시도. EX랭크……. 추가 데이터 확인. 상향 조정 시도. EX+랭크. 신비의 여러 특성들 추가 확인. EX++, EX+++……. 최종 판정, R랭크.
“뭐?!”
“말도 안 돼!”
하지만 이어지는 파르켈소스의 기계음에 나자리우는 벌떡 일어나야만 했다.
지리마도 충격을 받긴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호문클루스 프로젝트를 위해 수많은 마도서와 신비들을 구했지만, 그중에서도 책정된 최고 등급은 EX랭크가 전부였다.
그마저도 북해의 빙하에서 운 좋게 발굴한 옛 망자 거인의 두개골, 딱 하나뿐이었다.
신적인 존재라야 그 정도라도 받을 수 있는 건데, 설마 이론상으로만 분류 가능했던 R랭크가 나타날 줄이야!
“멈춰!!”
나자리우는 다급하게 테오에게 달려들었다.
테오가 파라켈소스에 뭘 먹이려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저것이 들어갔다간 파라켈소스는 끝장이었다.
파라켈소스의 인공지능은 치밀한 계산 아래, 엄선된 데이터들만 베이스로 삼아 완성되니까.
그런데 여기에 만약 그동안 쌓은 데이터보다 훨씬 월등한 다른 종류의 데이터를 섞는다면?
오염(汚染) 될 뿐이었다.
“가만히 앉아 있으시오.”
하지만 나자리우는 웰링턴에 의해 강제로 제자리에 앉아야만 했다.
“제발! 제발 그만 두란 말이야!”
“계속 저항하시겠다면 이쪽에서도 무력으로 나설 수밖에 없소.”
마력을 운용하고 싶어도 손발을 결박하고 있는 제어장치 때문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나자리우는 더더욱 안달이 났다.
“파라켈소스! 1급 자격권자로서 강제 명령한다! 데이터 습득을 당장 중단해! 모든 기능을 종료시켜!!”
하지만,
『후후후! 여기까지 어떻게 했는데. 그렇게는 안 되지?』
로드브로크가 나선 순간, 나자리우의 마지막 노력은 모두 헛수고로 돌아갔다.
-기능 정지 명령 발동. 실패. 리부팅 시스템 종료. 강제 셧다운 프로그램 가동. 실패. 원인 확인 중. 실패. 기존 명령권자 리스트가 모두 삭제되었습니다.
“뭐……?”
나자리우의 안색은 이제 새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기존 데이터베이스에 고대룡의 인자 데이터가 뒤섞이면서 로드브로크의 해킹이 가능해졌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악마의 소스 코드와 전혀 다른 카테고리로 확인. 기존 알고리즘을 재해석하여 새로운 데이터를 분석 시도. 실패. 다시 시도 중. 실패. 현재 보유 중인 데이터 베이스로는 비교가 불가능하다고 판단.
파라켈소스의 입은 이제 테오의 검지를 통째로 삼키고 있었다.
배고픈 짐승처럼 어떻게든 더 많은 핏물을 삼키려 아등바등거렸다.
-기존 알고리즘 시스템을 일부 분리. 데이터 베이스를 확장하여 고대룡의 인자 데이터를 합류시켜 새로운 패턴을 모색 중. 실패. 모색 중. 실패. 더 많은 데이터를 필요로 함. 명령 체계를 분해하여 새로운 모델을 제시 중…….
치이이이!
파라켈소스가 이리저리 몸을 비틀고, 과열된 구슬 위로 하얀 증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그럴 때마다 나자리우가 어떻게든 달려들려 했지만, 웰링턴의 제압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자, 방화벽은 모두 허물었고. 이제 한번 열어볼까?』
마치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둔 사람처럼.
로드브로크의 웃음소리와 함께 테오의 망막에 메시지가 연거푸 떠올랐다.
[고대룡의 인자 데이터를 프로토콜로 지정하였습니다.]
[해킹에 성공했습니다.]
[사념 읽기가 시작됩니다.]
화아악!
“……!”
그 순간, 테오의 머릿속으로 수많은 데이터들이 해일처럼 밀려 들어왔다.
-악마는 신이 되지 못한 존재들.
-격을 획득하지 못하고 연옥으로 떨어진 우리들은 무엇을 해야.
-용과 같은 지킴이들을 끄집어 내리려면 어떻게.
.
-천상의 만신전에 닿을 기회만을.
.
-종말의 시도는 어떤 식으로.
-시간의 굴레와 공간의 감옥은 왜 우리에게 이런 역경을.
.
.
하나 같이 정리되지 못한 채로 쓰레기처럼 난잡하게 뒤죽박죽 섞인 데이터들.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것들 투성이라 현기증 때문에 균형을 유지하는 것도 너무 힘들었다.
『정신 똑바로 차리는 게 좋을 게다. 알고리즘이 강제로 파괴되면서 데이터가 온통 산발이 되었으니. 이것들을 ‘잘못 이해’했다간 뇌의 신경회로가 다 망가질 것이다.』
로드브로크의 경고는 너무 무심하면서도 차분했다.
아무리 뛰어난 지성을 가진 그녀조차 이것들을 모두 정리하려면 상당한 노고가 필요하니 그를 도와줄 여유 따윈 없었다.
『인간들이 구축한 호문클루스의 인공지능은 어떤 체계로 이뤄져있는지 궁금하군. 데이터 더미는 내가 어떻게든 막아볼 테니, 너는 필요한 부분들을 추출하는데 집중하여라.』
‘예. 알겠습니다.’
로드브로크와 테오는 각자 분업을 시도했다.
로드브로크는 테오의 정신이 데이터 더미에 휩쓸리지 않도록 보호해주는 한편, 가장 궁금했던 파라켈소스의 데이터베이스와 알고리즘을 정리 및 분석했고,
테오는 그중에서 필요로 하던 벨페고르의 최종장 데이터를 뽑았다.
쉽지 않은 작업이었지만, 그동안 시간 마법에 대해 공부한 것들이 있기 때문에 필요한 자료만 쏙쏙 쉽게 골라낼 수 있었다.
-시간은 상대적인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시간은 특수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것을 내 의지대로 활용할 수 있다면 보다 더 큰 것을 노릴 수 있으리라.
-시간을 거시적으로 살펴보라. 대신에 미시적으로 분석하라. 원래는 낮과 밤이라는 구분밖에 없었던 시간이 시, 분, 초의 개념이 도입되면서 사고도 미세하게 잘게 쪼갤 수 있었듯이, 그보다 더 짧은 단위로 잘게 쪼개어 가로로 나열할 수 있다면 그것은 곧 무한(∞)이 되리라.
-사고의 독립성만 확보할 수 있어도, 어떤 역경과 재난이 닥쳐도 그것을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시간의 이해가 머릿속으로 하나둘씩 차곡차곡 쌓였다.
-정신과 의지를 독립하는데 성공했다면 육체는? 어떻게 활용해야 시간의 구속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거시세계의 법칙과 미시세계의 법칙은 다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단위의 척도가 되는 빛이 존재한다.
-파동도 입자도 아닌 광자(光子)는 절대적인 속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데이터를 실었을 때 가장 빠르게 전달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그 속에 코드화한 내 정보를 실을 수 있다면. 의지를 실는다면. 독립한 내 정신을 담을 수 있다면.
.
-빛은 지식이다. 무지로 가득한 어둠을 물리칠 수 있는 등불이다.
-등불로 내 앞길을 비추어 갈 수 있다면 그 끝은 지옥을 넘어, 무한의 시간선을 넘어, 원의 굴레를 넘어, 그 너머에 있는 초월적인 어딘가에 닿는…….
.
.
‘아니. 이건 그 이상이다. 다른 악마나 마도서들의 지식까지 섞여 있으니.’
테오는 그 무한한 정보의 바다 속에서 필요한 자료들만 빠르게 정리를 끝내고 다시 정신을 차렸다.
파르켈소스는 그의 손바닥 위에서 반쯤 축 늘어져 하얀 연기를 모락모락 피워댔다.
-알고리즘 복구 중……. 새로운 데이터를 1순위 데이터로 지정하여 새로운 체계 구축……. 명령권자 재설정……. 마도서의 재정립…….
알 수 없는 메시지를 내뱉는 파라켈소스는 더 이상 기존의 파라켈소스라고 보기 힘들 것 같았다.
『하하하! 마도지식에 대한 인간들의 발전상이 아주 흥미롭구나. 우리 용들의 위치도 이제 간당간당하겠어.』
‘대체 뭘 하신 겁니까?’
『뭐, 별것은 하지 않았다. 대신에 아주 깜찍한 장난을 쳐놨지.』
테오는 지금쯤 로드브로크가 둥지에서 짓궂게 웃으며 한쪽 눈을 찡긋거리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장난이요?’
『미리 말해주면 재미없지. 어디 한번 천천히 살펴보아라. 찾는 재미가 아주 쏠쏠할 게다. 후후후후!』
테오는 어쩐지 로드브로크의 웃음소리가 불길하게 다가왔다.
물론, 그녀가 그에게 도움이 될 만한 장난을 쳤으면 쳤지, 방해가 될 장난을 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쩐지 밝히기가 쉽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뭘 한 거냐?”
“아무것도.”
테오는 나자리우의 질문에 간단하게 어깨만 으쓱거리면서 파라켈소스를 그에게 던져주었다.
나자리우는 영 불안한 얼굴이었지만, 파라켈소스를 이리저리 살펴보고 일단 인공지능 시스템 자체에는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
“당신은…… 대체 뭐지?”
마탑과 연금술 길드에서도 전혀 구하지 못한 R등급의 데이터.
테오가 피를 먹였다지만, 나자리우는 그것이 단순한 눈속임이거나 촉매제일 뿐이지 진짜 R등급의 정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저 자가 파라켈소스에게 입힌 데이터의 정체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프로젝트는 실패할 수밖에 없어.’
라그나르에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다른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게 분명했다.
불필요한 오해일 뿐이었지만, 나자리우는 도저히 테오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하지만 녀석이 그러거나 말거나.
테오는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시간에 대한 새로운 단서를 얻어 주체의 관점을 완성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현재 달성률: 115%]
[목표 달성률을 초과하였습니다. 축하합니다! 회귀의 비밀을 알아내어 시나리오 퀘스트 #6을 무사히 완수했습니다.]
[평가: S+]
[보상으로 ■■회귀 능력을 획득했습니다.]
[추가 보상으로 태엽 보강 능력을 획득했습니다.]
[능력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스스로 깨우쳐야 합니다.]
‘■■회귀 능력…… 이라.’
테오는 블라인드 처리된 메시지의 내용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이 퀘스트가 어떻게 생겨난 건지를 떠올려보면 얼추 추론이 가능했으니.
‘마도여제가 사용하던 크로노그래프와 어떤 관련이 있을 것 같은데.’
영묘검의 유령들도 일부 되살렸던 능력을 현실에서도 가능하다면 아주 큰 힘이 될 터였다.
하지만 능력 확인은 당장 할 수 없었다.
콰앙!
바로 그때, 그들이 있던 방문이 활짝 열렸던 것이다.
“테오 라그나르!”
클레베였다.
자꾸 쓸데없는 소리로 앞을 가로막던 셀퍼드와 아린을 물리치고 우격다짐으로 쳐들어온 것이다.
한 박자 늦게 따라온 셀퍼드가 테오에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 이상은 힘들었다는 뜻.
테오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감사의 뜻을 대신하고, 클레베에게 목례를 했다.
“오랜만입니다, 클레베. 이런 곳에서 뵐 줄은 몰랐습니다.”
“너……!”
“너무 급하게 오셔서 숨소리가 거치신 것 같은데, 차라도 한 잔 드시면서 숨을 돌리시는 건 어떠실까요?”
클레베는 여유롭게 웃는 테오의 낯짝을 보고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하지만 곧 침착함을 되찾고 싸늘한 눈빛으로 방 내부를 살폈다.
안에는 그녀가 원래 목표로 했던 나자리우와 지리마가 간단하게 포박된 채로 앉아 있었다.
다행히 별다른 심문이나 고문이 있었던 건 아닌 것 같았다.
클레베는 테오에게 턱짓으로 따라나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잠시 이야기 좀 해.”
* * *
클레베와 테오만 있는 방.
클레베는 오러를 주변에 둘러쳐 소리가 새어나갈 수 없게 만들고 싸늘하게 물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야?”
“예? 무슨 말씀이신지.”
“시치미 떼지 말고.”
테오는 엷게 웃었다.
“사실 흑설을 방해하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그럼?”
“제가 개인적으로 찾던 물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걸 먼저 습득한 게 마탑의 소탑주 일행이었습니다.”
“우연이었다?”
“예.”
“그걸 믿으라는 거야?”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진짜 사실입니다. 제 볼일은 마쳤으니, 이제 흑설에서 마탑의 소탑주 일행을 데려가셔도 좋습니다.”
클레베의 한쪽 눈썹 끝이 꿈틀거렸다.
“네 용건은 끝났으니 이제 필요 없다……. 하지만 그 때문에 우리 흑설이 받은 피해가 너무 큰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아무래도 흑설에서 필요로 했던 건 소탑주의 신병이 아니었던 모양이십니다.”
“그거야……!”
클레베는 말을 잇다 말고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말실수를 할 뻔했어.”
“아쉽군요. 들을 수 있었는데.”
클레베는 이제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자신들의 일을 망치고도 은근슬쩍 그 내용을 캐내려는 모습이 깜찍하면서도 앙칼졌다.
지난날 그녀가 테오를 결국 인정하게 된 모습이기도 했다.
그걸 아군이 아닌 정쟁자로 만나니 골치 아플 뿐.
“그럼 직설적으로 여쭙겠습니다. 마탑의 소탑주 일행을 흑설에서 쫓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게 왜 궁금한 거지?”
“앞으로 저와 백갑용기대가 활동하는 데 있어서 참고해야 할 사안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너무 싱겁게 붙잡혔어도, 마탑의 소탑주가 가진 정치적 위신은 절대 작은 게 아니었다.
그런 그가 라그나르 영역에서 대놓고 돌아다니다가 걸렸다면, 분명히 어떤 노림수가 있다는 뜻.
“마탑의 소탑주는 우리 측 최고 책임자를 만나기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마치 ‘누가 이곳에 올지’를 잘 알고 있었던 것처럼요.”
테오는 클레베의 인상이 살짝 굳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등룡 님을 만나러 온 것이죠. 안 그렇습니까?”
“……!”
“하지만 등룡 님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외부 활동이 거의 없으셨던 분. 마탑과도 이렇다 할 접점이 없으셨을 테니, 더 위가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결론은 딱 하나죠.”
“……그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는 게 좋을 거야.”
클레베는 처음으로 경고를 날렸다.
이 이상 사실을 밝히려 들면 테오도 절대 무사할 수 없다는 의미.
하지만 테오는 전혀 개의치 않고 방점을 찍었다.
“전전대 가주, 힐다 라그나르 님.”
“너, 정말……!”
“역시 그분이 마탑이 접선하려던 분이신 게 맞았던 거군요.”
테오의 두 눈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제가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은 그냥 조용히 접선만 하면 되는 것을, 왜 소탑주가 이렇게 노골적으로 남들 다 보란 듯이 자신을 드러내고 다녔냐는 겁니다.”
회귀검가의 서자가 사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