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마탑의 후계자 (2)
나자리우는 아주 잠깐 고민했다.
만약 여기서 자신이 마법을 펼칠 경우에 테오를 꺾고 무사히 탈출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하지만,
“다른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나자리우가 어떤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목덜미에 달라붙은 검이 더 깊게 파고들었다.
주르륵!
검신을 타고 붉은 핏물이 흘러내리는 것이 보였다.
그 순간, 나자리우는 테오가 허세를 부리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생포를 시도하되, 걸리적거린다 싶으면 바로 제거하려는 것이다.
“기대했던 것만큼 큰 인물이 온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만한 사람이면 홀대는 받지 않으려나?”
나자리우는 테오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면서 손에 쥐고 있던 지팡이를 놓아버리고, 양팔을 높이 들었다.
“항복. 되도록 아프지 않게 해달라고.”
* * *
“……뭐? 내가 귀가 이상한가. 헛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들으신 것 그대롭니다. 마탑의 후계자를 생포해왔습니다.”
“그러니까 마탑의 후계자가 왜 여기에 있냐고!”
셀퍼드는 테오 일행이 가져온 두 명의 짐덩이(?)를 보고 이게 뭔가 싶다가 진실을 듣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로서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테오도 어깨를 으쓱거렸다.
“저희라고 알겠습니까. 우연히 마주친 것일 뿐인데. 북방에서 무슨 테러라도 시도하려 했나 보죠.”
셀퍼드는 검지와 엄지로 미간을 주무르면서 되물었다.
“대상을 잘못 알아봤을 확률은?”
“없습니다. 이미 흑설의 확인도 마쳤습니다.”
“흑설? 그놈들도 이미 사실을 파악하고 감시하고 있었다는 거지?”
“예. 그렇습니다.”
“……네가 흑설 계획에다 똥물을 끼얹은 건 아니지?”
외부 활동을 하다 보면 이따금 다른 부대와 관할권 문제로 충돌이 빚어지는 경우가 허다했다.
만약 흑설이 마탑의 후계자를 두고 꾸미던 공작에다 도중에 끼어든 거라면 자칫 부대 간의 정치 분쟁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특히 최전선에서 뛰는 백갑용기대와 음지에서 활약하는 흑설은 서로를 보완하면서도, 인간관계는 그렇게 딱히 바람직하지는 못했다.
“에이, 그거야.”
“그거야……?”
“선배님이 알아서 커트 해주셔야죠.”
“뭐 인마?”
셀퍼드는 그제야 테오가 뭔가를 알고도 먼저 사고부터 치고 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잘못했다간 율리우스 대장에게 닦이게 생겼다!
셀퍼드가 다급하게 테오를 다그치려는데, 갑자기 그들이 전세 냈던 카페의 문이 신경질적으로 열렸다.
콰앙!
“테오 라그나르! 여기 있는 거 다 알아! 당장 나와!!”
씩씩대면서 들어오는 발걸음들.
셀퍼드는 그중 선두에 있는 사람의 얼굴을 보고 인상을 구겼다.
흑설에서도 단 여덟 명밖에 없다는 무설, 클레베였다.
“야! 지금 등룡 님도 아직 복귀 안 하셨는데, 너 진짜 어떡할……!”
셀퍼드는 황급히 테오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벌써 갔어. 뒤 좀 잘 부탁한다던데.”
아린이 헛웃음을 흘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었다.
셀퍼드의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너무 잘나서 문제인 후배 때문에 아무래도 자신이 크게 뒤치다꺼리를 해야 할 것 같았다.
* * *
테오가 카페 안쪽에 마련된 방으로 들어오자, 나자리우와 지리마를 감시 중이던 웰링턴이 검지로 볼을 긁적였다.
“조금 전에 밖에서 고함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괜찮습니다. 저는 셀퍼드 선배를 믿으니까요.”
테오의 개구진 웃음.
반면에 웰링턴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이래도 되는 거요? 눈앞에 둔 먹이를 빼앗기고도 가만히 있을 만큼 흑설은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오.”
“어쩌겠습니까. 결국 이분들을 손에 넣은 건 저흰데.”
“……알아서 하시오. 스승님도 여간 아니게 골머리를 싸실 것 같은데.”
웰링턴은 사실 테오가 흑설의 요원을 찾았을 때부터 왠지 모르게 등골이 싸했다.
아마 흑설 측도 테오가 반쯤 흑설 소속이니 자신들을 도와줄 거라고 여겨서 나자리우의 위치를 말해준 것일 테지.
하지만 테오는 그들의 기대를 보란 듯이 무참히 깨버렸고, 나자리우는 결국 테오의 손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것도 별다른 피해도 없이 깔끔한 제압이었지. 대체 대(對)마법사 전투 방식은 또 어디서 배운 건지…….’
이쯤 되니 웰링턴은 테오가 슬슬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대체 저 머릿속에 들어있지 않은 게 뭐가 있을까.
‘미안하오.’
한편으로는 아마 지금쯤 상사에게 죽어라 쪼인트 까기를 당하고 있을 흑설 요원에게 명복을 빌었다.
그리고,
‘이 일을 획책한 게 흑설이 아니라, 저 어린 라그나르라고?’
지리마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면서 소스라치게 놀라고 있었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마탑이 자랑한다는 다윗의 별이 일개 열여섯 청년에게 농락당한 셈이니.
자신들의 사기를 꺾으려고 고도의 심리전을 펼치는 것인가 싶기도 했지만,
돌아가는 분위기나 밖에서 들리는 고함 소리로 봐서는 그런 게 아닌 것 같았다.
무엇보다.
나자리우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평가받는 웰링턴조차 테오에게는 한 수 접어주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실질적으로 북방의 제일 기재는 웰링턴이 아닌 테오 라그나르라는 정보가 진짜였던 셈이었다.
아니, 단순히 그 정도도 아니었다.
한 수 접는 수준을 넘어 따르는 수준이니 사실상 북방의 차기 대권은 테오를 중심으로 돌아갈 것으로 봐도 될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소탑주 님도 뭔가를 획책하시는 듯하고.’
나자리우는 포로가 되고 난 뒤에도 당황하기는커녕 여유로웠다.
마치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분명하다. 소탑주 님은 애당초 이들에게 포로로 붙잡힐 생각을 하고 계셨던 거야.’
대놓고 번화가에서 쇼핑을 즐기질 않나, 흑설의 눈에 띄는 행동들을 하질 않나, 그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대체 다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구나.’
지리마는 나자리우에게 무슨 계획인지도 딱히 묻지 않았다.
그저 저 철없는 가면 아래에 숨어있는 능구렁이가 이번에도 슬기롭게 일을 잘 처리하기를 바랄 뿐.
다만, 변수라면 저 테오 라그나르라는 능구렁이도 절대 만만치 않을 거라는 점이었다.
“마도서, 당신들이 갖고 있지?”
나자리우는 테오를 보면서 싱글싱글 웃다 말고, 순간 자기도 모르게 한쪽 눈썹을 꿈틀거렸다.
눈 깜짝할 새에 있었던 변화.
테오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싱긋!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단숨에 의표를 찔러봤는데 너무 잘 먹혔다.
“역시.”
“이상한 말을 하는군. 그보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할 생각이지? 윈터러에 넘겨서 인질 협상이라도 할 생각이오? 아니면 북방 전쟁에 마탑을 끌어들일 협상 카드로?”
“문제는 어디에 있냐는 건데……. 소지품은 아무리 뒤져봐도 안 보이던데.”
“내 한 가지만 말씀드리지. 마탑주 되시는 외조부님만큼 공사 구분에 철저한 분도 없소. 그러니 협상이 쉽지는 않을 거란 말을 해주고 싶군.”
“역시 순순히 말할 생각은 없나 보지?”
“하지만 나는 그대들의 심문에 적극적으로 협조할 의향이 있소. 나는 목숨이 무엇보다 소중하거든. 위에 있는 책임자를 불러주시오.”
“고문을 해봤자 말을 들을 것 같지도 않고.”
테오와 나자리우의 대화는 서로 이어지는 것 없이 허공만 뱅글뱅글 맴돌 뿐이었다.
하지만 테오는 나자리우가 심문에 비협조적일 거란 느낌을 받았고,
나자리우는 테오가 만만치 않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마도서에 대해서 대체 어떻게 안 거지? 황실 비밀금고의 위치는 마탑에서도 극비리에 알아낸 것인데?’
당장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황제가 가장 아끼는 황후가 바로 마탑 측 인사였다.
한데, 그녀의 도움으로 겨우 얻은 정보를 라그나르가 알고 있었다?
나자리우의 머릿속에서 라그나르에 대한 위험도가 급상승했다.
A등급에서 S+등급으로.
“마도서를 다른 곳에 빼돌릴 여유 시간은 없었을 테고. 그럼 분명히 이쪽에서 갖고 있다는 건데.”
테오의 시선이 날카롭게 번뜩일 때마다 나자리우는 자기도 모르게 바짝 긴장했다.
그래도 그는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최소한 겉보기엔 파라켈소스는 평범한 구슬에 지나지 않…….
“이거군.”
갑자기 테오가 압수한 주머니에서 파라켈소스를 정확하게 짚어냈다.
나자리우와 지리마, 두 사람 모두 속으로 크게 경악했다.
‘이게 맞다는 거죠, 로디?’
『그래. 대체 얼마나 많은 마도서를 섭취해댄 건지. 악취가 여기까지 나는 것 같다. 뭘 만들어도 이딴 걸 만들어? 쯧!』
테오도 만약 로드브로크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파라켈소스를 찾아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벨페고르의 마도서뿐만 아니라, 다른 악마의 마도서들을 대량으로 삼킨 아티팩트라.’
로드브로크는 파라켈소스를 가리켜 ‘악마의 소스 코드 복합체’라고 말했다.
『커다란 도안 위에 여러 코드들을 아주 그럴싸하게 짜깁기하고, 특정 알고리즘을 이용해 시뮬레이션을 계속 돌리면서 학습 능력을 갖추게 한 일종의 인공지능이다.』
로드브로크의 설명이 계속 이어졌다.
『이미 이 정도라면 그 자체로 자기 판단과 의사를 가지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거다. 다행히 아직 자유의지를 가질 정도는 아니라 위험하지는 않겠지만, 임계점은 얼마 남지 않은 듯 보이는군.』
테오는 속으로 적잖게 놀라고 있었다.
그 말은 ‘생명체’가 되기에 얼마 되지 않았다는 뜻이니까.
‘대체 마탑은 뭘 만든 거지?’
전생 기억으로도 짚이는 게 없어서 감을 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확실했다.
파라켈소스에서는 푸른빛이 은은하게 뿌려지고 있었다.
테오는 한참 동안 파라켈소스와 씨름했다.
하지만 마력을 불어넣어도, 시동어를 외워 봐도 꿈쩍도 않았다.
심지어,
[알 수 없는 이유로 스킬 발동이 실패했습니다.]
사념 읽기도 불가능했다.
『아무래도 양자 얽힘을 이용한 암호계를 이용한 것 같구나. 이만한 수준은 우리 용들도 쉽게 해내기 힘든 수준인데, 인간 주제에 제법이군.』
말이 ‘제법’이지, 로드브로크는 감탄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요?’
『당장은 어렵다. 함부로 열려고 했다간 오히려 폭발할 우려가 커. 그랬다간.』
‘끝장이군요.’
『나도 널 못 살린다.』
퀘스트 완수가 바로 눈앞에 있는데 포기해야 하는 걸까?
『호문클루스라는 것은 그만큼 다루기가 어려운 학문이다. 수많은 정보들을 가공하여 코드화하고, 스스로 학습하며 판단할 줄 아는 알고리즘을 만드는 것만으로도 지난한 작업이 되니까. 그만큼 대단하지만, 세심하고 민감하기도 하다. 신의 영역으로 넘어가기 직전에 존재하는 마지막 선이기도 하고.』
테오는 침음을 흘렸다.
셀퍼드와 아린이 최대한 클레베를 막아주고 있다지만, 얼마 버티지 못하고 곧 이쪽으로 들이닥칠 게 분명했다.
그런다면 파르켈소스도 속절없이 빼앗기게 된다.
벨페고르를 복구할 단서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다.
“…….”
아니, 그런 것을 떠나서라도 테오는 이걸 해독해야 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악마의 마도서를 잔뜩 먹은 호문클루스.
만약 마탑이 악마라도 부활시키고 있는 건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테오가 답답한 마음에 나자리우를 응시하니, 녀석이 씩 웃어 보였다.
평범한 구슬을 가지고 무슨 씨름을 그렇게 하고 있냐는 투.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 굴뚝같았다.
그러던 중에 문득 뭔가가 머릿속으로 번뜩였다.
-다량의 정보를 다루기 때문에 그만큼 섬세하고 민감하다면, 그보다 훨씬 더 분석하기 어려운 정보를 불어넣으면 어떻게 될까?
‘로디, 이 녀석이 스스로 분석하고 학습하는 인공지능이라고 하셨죠?’
『일단은 그렇다만.』
‘그럼 제 피를 먹이면 어떨까요?’
『피? 그건 왜…… 아!』
‘제 피엔 고대룡의 DNA 정보뿐만 아니라, 라그나르의 혈통 인자도 잔뜩 있지 않습니까? 이게 정말로 악마의 코드만 잔뜩 먹었다면, 그것과 반대되는 용의 데이터를 대량으로 쏟았을 때 무사할 것 같지는 않은데요.’
푸른색 물감에다 붉은색 물감을 다량으로 섞으면? 그 색은 초록색이 되고 만다.
마찬가지로 테오도 고대룡의 인자를 이용해 파르켈소스의 정체성을 완전히 바꿔버리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어쩌면 코드를 바꿔서 소유권을 제 쪽으로 돌릴 수 있을지도 모르고 말이죠.’
『그러다 실패하면?』
‘그럼 부서진 잔해에서 벨페고르만 골라 취합하면 됩니다. 그건 별로 안 어려울 것 같은데요?’
테오가 씩 웃었다.
‘무엇보다 제가 못 가지면 이놈들도 못 가져야죠.’
『사악하구나.』
‘저, 라그나르입니다.’
『아주 훌륭하도다!』
테오는 로드브로크와 쿵짝을 주고받으면서 품 안에서 데스비트를 꺼내 엄지를 크게 벴다.
벌어진 상처에서 떨어진 핏물이 파르켈소스에 닿았다.
부르르르!
여태 잠잠하던 검은 구슬이 잘게 떨리더니, 곧 흉측한 톱니 이빨과 함께 붉은 혓바닥을 꺼내 날름 테오의 핏물을 삼켰다.
-새로운 데이터 더미 확인. 분석 중. 멸종된 고대룡의 인자로 파악. 등급 가치 SSS+++…….
회귀검가의 서자가 사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