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마탑의 후계자 (1)
“나자리우 몬테가 나타났습니다. 쫓읍시다.”
레이와 웰링턴은 카페 벤치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할짝대다 말고 갑자기 불쑥 나타난 테오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나자리우 몬테?”
“혹시 3군8준의 ‘마준(魔俊)’을 말하는 것이오?”
3군8준에 속한 이들은 별명처럼 ‘군’과 ‘준’이 붙은 또 다른 별호가 있었다.
웰링턴의 다른 별호는 검준(劍俊). 나자리우는 마준인 것처럼 보통 그가 일가를 이룬 분야에 ‘군’과 ‘준’이 붙는 방식이었다.
“예. 맞습니다.”
“마탑의 후계자가 왜……!”
테오는 화들짝 놀라 소리치는 웰링턴의 입을 손으로 재빨리 가렸다.
쉿.
덕분에 웰링턴이 손에 쥐고 있던 아이스크림이 엉망이 되었지만, 그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꼴깍. 웰링턴은 마른침을 삼키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그가 여기에 있다고? 뭔가 착각한 것이 아니오?”
“아닙니다. 확실합니다.”
“……당장 트로이반의 손을 들어주었다 의심을 산 것 때문에 라그나르의 눈총을 받는 걸 잘 알 텐데? 왜 굳이……?”
웰링턴은 말을 잇다 말고 인상을 굳혔다.
“여기서 뭔가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이로군.”
아무래도 웰링턴은 마탑이 라그나르의 영역에 숨어들어 내부 혼란을 유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테오도 굳이 지적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당연히 그들이 선한 의도로 왔을 리는 없으니 잡아둬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하지만 그만한 거물이 움직이는데 호위 병력이 만만할 리 없잖소. 차라리 스승님이 볼일을 마치고 돌아오실 때를 기다렸다가……!”
“아뇨. 그사이에 그들이 도시를 완전히 빠져나가기라도 한다면 추적은 영영 불가능할 겁니다.”
웰링턴도 그제야 테오의 말뜻을 눈치챘다.
“설마 우리끼리 쫓자는 말씀이오?”
“괜찮을까?”
레이도 우려의 표시를 던졌다.
어디까지나 현재 일행의 수장이자 명령권자는 등룡이다. 그의 허락 없이 보인 독단적인 움직임은 자칫 정치적인 위기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실전검사는 상황에 따른 자의적인 판단과 결정을 할 수 있고, 상급검사부터는 단독 임무가 가능하죠. 그리고 저는 이번에 복귀하면 상급검사로 추천받을 예정이고 말이죠.”
“……아직은 상급검사가 아니잖소?”
“안 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거, 월권이오.”
“부담되시면 저와 레이만 가겠습니다.”
레이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남은 아이스크림을 전부 해치우고, 검을 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오는 아쉬워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웰링턴은 ‘샌님’이라는 별명답게 확실히 원리원칙을 중요시하는 편이었으니.
“부담이긴 하지. 하지만.”
웰링턴은 테오와 레이를 번갈아 보더니 피식 웃으며 똑같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준의 실력은 본인도 너무 궁금했던지라. 한번 검을 겨뤄보고 싶었소.”
웰링턴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짙은 호승심이 묻어나고 있었다.
처음 테오와 만났을 때 보였던 것과 똑같은 눈빛.
아무리 샌님이라고 해도, 그 역시 검에 죽고 검에 사는 무인이었던 것이다.
“그럼 결정은 끝났군요.”
“한데, 그들이 현재 정확하게 어디에 있는지는 아시오?”
테오는 잠시간 말없이 웃더니 지면을 가볍게 박찼다.
파앗!
웰링턴과 레이의 시선이 똑같이 그쪽으로 따라갔다.
테오는 수많은 유동 인파의 머리 위를 아무렇지 않게 지나다가, 어느 가로등 아래에서 구걸하던 거지 앞에 착지했다.
“마탑 일행, 현재 어디에 있습니까?”
“아이고, 나리! 한푼만 주십쇼!”
“저한테까지 숨길 필요는 없으실 텐데요.”
“한푼만 주시면 평생 나리의 축복을 빌면서 살겠……!”
“안 되면 정보부장님께 따로 전언을 드리죠.”
테오가 돌아서려는데 갑자기 거지가 그의 발목을 텁 하고 붙잡았다.
“어떻게 아시었소?”
푹 눌러쓴 벙거지 모자 아래 드러난 거지의 눈빛은 제법 날카로웠다.
그는 바로 흑설의 요원이었다.
테오가 엷은 미소를 띠었다.
“영업 기밀입니다만.”
“끄응. 클레베 님이 말씀하시던 대로 확실히 잘생긴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속을 알 수 없는 분이로군.”
익숙한 이름.
테오의 눈이 빛났다.
“클레베 님을 아십니까?”
“알다마다. 본인은 그분의 직속 수하요. 그리고 현재 그분은 나자리우 몬테의 뒤를 밟고 있소.”
“……!”
테오의 눈이 살짝 커졌다.
* * *
다그닥다그닥-
도시 외곽으로 향하는 어느 마차 안.
“……너무 느긋하게 구는 거 아니십니까? 이러다 라그나르에서 눈치를 채면 어쩌시려고!”
“괜찮아, 괜찮아. 여태 몰랐는데 설마 지금 알려고? 하여간 지리마는 너무 걱정이 많아서 문제라니까?”
지리마는 아주 잠시간 고민했다.
저 유들유들하게 웃는 낯짝을 한 대만 쥐어박을까 말까 하고.
만약 존경하는 주군의 하나뿐인 외손자가 아니었다면 진즉에 얼차려를 시켰을 터였다.
‘아니면 다른 걸 노리는 바가 있으신가?’
나자리우가 저 뻔뻔한 얼굴 아래에 얼마나 많은 능구렁이를 키우는지 잘 알기 때문에 지리마도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으니 답답할 뿐.
하지만 나자리우는 지리마의 눈빛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손에 든 물건만 귀엽게 쓰다듬었다.
“에구구, 우리 귀여운 똥강아지. 배 많이 고팠지?”
나자리우의 손에 들린 건 사람 머리 크기만한 검은 구슬이었다.
겉보기엔 별다른 특색이 없었지만, 나자리우가 황실의 비밀 금고에 몰래 훔쳐 온 마도서의 페이지들을 꺼내자 달라졌다.
지이익!
마치 지퍼가 움직이는 듯한 소리와 함께 검은 구슬 중앙에 길쭉한 실선이 그어지더니 위아래로 활짝 벌어졌다.
둥근 호선을 그린 입술 사이에는 톱니 모양의 이빨이 자글자글하게 나서 흉측한 인상을 자랑했다.
‘볼 때마다 적응이 안 되는군.’
지리마는 그걸 보고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마도생명체 파라켈소스.
마탑이 연금술 길드와 손을 잡고 극비로 진행 중인 ‘호문클루스 프로젝트’의 총아로, 마도서에 수록된 코드를 먹으면서 성장하는 성장형 호문클루스였다.
마탑에서는 파라켈소스에 거는 기대가 아주 큰 편이었다.
이것이 아주 오랫동안 그들이 바랐던 비원을 이뤄줄 열쇠라고 여기기 때문이었다.
황실의 비밀금고를 연 것도 전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마도서 벨페고르의 특정 코드를 파라켈소스에 이식시키기 위해서.
-삐빅. 삑. 먹이 확인. 등급 A랭크의 마도서로 판정.
파라켈소스는 코도 없으면서 페이퍼를 킁킁 냄새 맡는 척하더니 곧 아가리를 쩍 벌리면서 와그작 삼켰다.
우물우물!
-코드 인식. 분석 및 해독 완료. 드라이브에 저장하여 새로운 코드 배열 시도. 백업 데이터, 클라우드에 업로드 중.
과장되게 페이지를 씹을 때마다 뜻을 알 수 없는 메시지가 계속 흘러나왔다.
보기에 너무 기괴한 형태.
지리마는 미간을 더 크게 찌푸렸지만, 나자리우의 눈에는 예쁨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하하하. 하여간 귀엽다니까. 그래, 마구마구 먹고 아주 무럭무럭 자라렴.”
“이게 귀여우십니까?”
“귀엽지. 그럼 안 그래? 이놈이 ‘완성’되고 나면 어떤 형태가 될지 지리마도 잘 알잖아?”
“괴물이 되겠죠.”
“에이. 꼭 그렇게 말할 건 없지. 그 괴물이 ‘내 것’이라면 또 이야기가 다른데.”
나자리우는 흐뭇하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나는 말이야. 빨리 이 녀석이 완전체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그래야 나도 ‘완전’해질 거잖아?”
지리마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어느덧 나자리우의 눈가에는 광기가 맺히고 있었다.
“모든 마법사들이 바라는 이상향으로 가기 위한 문을 열 수 있고! 이 감옥 같은 육체와 세계에서 빠져나와서 저 드높은 만신전으로 갈 수 있는 길이 바로 거기에 있으니까! 이해 돼? 인간의 몸으로 신이 되는 거라고, 신이! 고대인 이후로 아무도 이루지 못한 신이!”
나자리우는 어느덧 마지막 페이지를 먹고 있는 파라켈소스의 머리통을 사랑스럽게 쓰다듬었다.
“그러니까 어떻게 안 예쁘겠어? 마음 같아서는 다른 마도서들도 죄다 찢어서 먹이고 싶은데.”
“코드 추출은 자칫 황실의 견제를 부를 수 있습니다.”
“알아. 그러니까 이렇게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거잖아.”
황실이 아무리 어지럽고 인망이 땅에 떨어졌다고 해도, 황실은 황실.
그들이 날을 세운다면 마탑이라고 해도 무사하지 못했다.
“그 눈치 보는 게 마음에 안 들지만.”
“…….”
지리마는 나자리우의 불만 따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별 영양가도 없는 말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걸 신경 쓸 타이밍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지리마.”
“예. 느끼고 있습니다.”
나자리우가 파라켈소스를 쓰다듬다 말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지리마도 조용히 주변을 살폈다.
그들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거리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적막이 더 위협적이게 돌아왔다.
“그러니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남긴 꼬리가 길어도 너무 길었다고 말입니다.”
지리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인 두 명이 재빨리 후드를 뒤집어썼다.
다윗의 별에서만 제공되는 이 로브는 사실 하나하나가 전부 아티팩트였다.
마력 순환을 도와주고, 효율성을 증폭시키는 일종의 무구인 셈이었다.
그들은 어느새 마차의 주변을 포위하고 있는 기척들을 감지하고 마법을 발동하려 했다.
“너무 그러지 말라니까? 우리 애들이 다 알아서 해줄 텐데 뭘 그래. 그렇지?”
두 하인은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마침 머리 위로 떨어지던 돌멩이 하나를 발견했다.
우측에 있던 하인이 재빨리 오른손으로 총 모양을 만들어 에어건(Air-gun)을 쏴 격추하려 했다.
속으로는 내심 코웃음을 치고 있었다.
아무래도 라그나르 놈들이 냄새를 맡고 뒤늦게 쫓아온 모양인데, 누가 뇌까지 근육으로 꽉 찬 무식한 종자 아니랄까 봐 기습을 시도하는 방식도 참 우격다짐이다 싶었기 때문이었다.
‘전투에도 예술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지.’
땀내 나는 무식한 검사들과 다르게, 마법사들은 우아한 예술과 고상한 진리를 추구하는 이들.
애당초 그들과는 서 있는 위치가 다르다는 사실을 똑똑히 가르쳐주고 싶었다.
타앙!
검지 끝에서 공기탄이 발사되었다.
표적 지정 마법까지 걸었으니 격추는 문제 없을 터였다.
하지만 공기탄이 충돌하기 직전.
지리마는 탐색 마법으로 돌멩이의 성분을 빠르게 살피다 말고 순간 흠칫 놀라고 말았다.
“잠깐……!”
하인들은 갑자기 상사가 왜 그러나 의문을 가질 새도 없었다.
퍼어엉!
돌멩이가 부서진 순간, 그 속에 있었던 뇌구가 폭발했다.
콰르르릉! 콰릉! 콰르르!
우르르르-
콰콰콰쾅!
낙뢰가 사방으로 빗발쳤다.
테오가 일식에서 착안한 여의주의 소형식(小型式)은 이미 그 자체로 끔찍한 흉기나 다름없었다.
문제는 낙뢰가 쏟아진 뒤에 벌어진 현상이었다.
땅에서 피어난 네 마리의 뇌룡이 서로 몸뚱이를 물어뜯으면서 폭발력을 더 키웠기 때문이었다.
-히드라 볼트.
역시나 테오가 뇌룡의 호흡과 마법을 뒤섞어서 만든 마법답게 폭발력은 엄청 났고,
쿠르르르-
히히히힝!
그 결과, 말들은 순식간에 숯검댕이가 되고 마차는 뒤집혀 완전히 박살 나고 말았다.
“마, 마법이……!”
“제기랄! 캔슬링이다!”
더구나 히드라 볼트에 이어 마력 EMP까지 퍼져나간 것을 확인한 뒤에는 하인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마력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건 마법사들에게 있어 치명적인 약점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퓨퓨퓻!
그리고 그 순간에 날아든 암전은 두 하인의 목덜미에 틀어박히면서 숨통을 끊어버리고,
파아아-
낙뢰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내려앉은 서리는 EMP 후유증을 극복하고 수인을 맺으려던 지리마의 움직임을 살짝 굼뜨게 만들었다.
동시에,
처척!
“그만 움직이시오. 허튼 짓을 했다간 그 목이 날아갈 테니.”
지리마의 턱 밑에는 날카로운 칼날이 드리웠다.
‘대체 어느새……!’
지리마는 식은땀을 흘렸다.
낙뢰 폭풍에 이은 마력방해 전자기파, 서리의 등장과 칼바람까지.
전부 마법사들을 ‘어떻게 사냥’해야 하는지를 너무 잘 아는 이가 계획한 게 분명한 전투 방식이었다.
7성 마법사라는 실력을 제대로 드러내기도 전에 이렇게 제압된 것이 바로 그 증거였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마탑의 하나뿐인 후계자도 이미 제압되었다는 점이었다.
그것도 이미 한 차례 호승심을 갖춘 적이 있던 상대를 대상으로.
“나자리우 몬테.”
나자리우는 마치 형틀처럼 목덜미 좌우로 바짝 붙여져 목젖 앞에서 교차하는 두 자루의 검을 힐끔 내려다보았다.
염동력.
마법사들도 쉽게 사용하기 어렵다는 기술을 저 멀리 있는 또래 청년이 구사하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잠시 우리와 같이 가줘야겠다.”
흑발에 진홍색 눈.
테오였다.
회귀검가의 서자가 사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