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영묘의 묘지기 (2)
“제가 묘지기를…… 요?”
“그렇다네.”
등룡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을 이었다.
“비록 그 적통이 옮겨지면서 서서히 홀대받게 되었다지만, 묘지기의 자리는 절대 가볍지 않다네. 공식적인 의전 서열은 여러 전각이나 부대의 수장들과 동급이니까.”
“……!”
“자네에게 처음으로 ‘직위’라는 것이 생기는 것이지. 이게 가지는 무게를 잘 알지 않나?”
테오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직위를 갖게 된다는 것.
그리고 간부가 된다는 것.
그건 권력을 지니게 된다는 의미와 동일했다.
드디어 공식적으로 자신만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스물이 되지 않은 테오에게는 파격적인 인사나 다름없었다.
등룡은 그런 파격적인 위치를 테오의 손에 쥐어주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등룡의 의도는 둘째치더라도, 테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탐욕스러운 제안이 분명했다.
하지만 걸림돌이 있었다.
“튤립 화예조합이 계속 운영되겠습니까? 반란자의 조합인데요.”
라그나르는 반란자의 씨앗을 절대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가 이끌던 조직이 있다면 아예 몰살하거나, 그게 힘들다면 최소한 폐쇄 조치라도 진행되었다.
“아니. 그럴 일은 없을 걸세.”
그렇다면?
“공론화를…… 하지 않을 참이시로군요.”
“당연하지. 뭐가 좋은 일이라고 이번 일을 떠들어댄단 말인가?”
등룡을 뒷짐을 쥐면서 말을 이었다.
“어차피 책임이야 오드가 모두 짊어지고 눈 감지 않았나? 때마침 그녀에게는 가족도 동료도 없지. 불온의 씨앗이 없다는 의미지. 그럼 굳이 사기 떨어지기 딱 좋고, 트로이반이 헐뜯기 좋은 명분을 내놓을 이유가 뭐 있나?”
그러니 이용해 먹자.
등룡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오드는 트로이반과 성마교의 거친 공세에 맞서 싸우다 안타깝게 전사한 것일세. 자네는 마지막에 그런 오드의 임종을 지키고, 그녀의 후계자로 낙점된 것이고.”
등룡이 짓궂게 웃으면서 질문을 던졌다.
“때마침 자네도 그녀가 이어오던 검을 알고 있는 듯하고.”
“……어떻게 아셨습니까?”
흑빙만옥월을 말하는 것이다.
테오는 끝까지 잡아뗄까 하다가 등룡의 눈빛을 읽고 그냥 백기를 들었다.
아무래도 어떤 확신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오드의 조부가 나의 불알친구일세.”
테오는 검지로 볼을 긁적였다.
생각지도 못한 답변이었다.
“그가 보이던 사소한 습관이며 발재간, 상대를 가늠하는 눈빛까지…… 그 모든 걸 알고 있지. 자네는 아무래도 그보다 더 우위에 있는 진짜 적통을 찾은 듯보이지만. 축하하네.”
역시 9룡은 다른걸까.
이미 테오가 이룬 성취며 그 내역까지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
‘흑빙만옥월…… 흑염옥태양과 비슷하면서도 많이 달랐지.’
흑염옥태양은 열에너지를 마구 발산해서 막강한 엔트로피로 주변을 부순다.
반대로 흑빙만옥월은 에너지 체계를 무너뜨리면서 주변을 죽음의 세계로 만든다.
그것이 바로 <월식>.
일식과 월식.
테오는 이 두 가지를 잘 결합해서 실전에서 써먹을 생각이었다.
‘필요하다면 쌍수검 형태로 펼쳐낼 수도 있을 것 같고.’
몸의 절반은 일식, 또 남은 절반은 월식을 펼칠 수 있다면 파괴력은 이전에 비할 바가 아닐 테지.
이미 테오는 머릿속에서 이를 위한 이론의 기초를 빠르게 정립하고 있었다.
검의 구슬이 주는 영감 덕분에 가능한 사고였다.
그러니 흑빙만옥월을 자신이 이었다는 말도 사실상 틀리진 않았다.
“그러니 묘지기의 자리, 자네가 맡게. 오드의 후계자가 되었다는 말이 싫다면, 라그나르의 법칙에 의해서 자네가 전리품으로 챙겼다고 생각하고. 나쁠 것이 전혀 없지 않나?”
테오는 잠깐 고민에 잠기다가 슬쩍 이곳을 지켜보고 있던 유령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이 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언뜻 머릿속을 스치는 것이 있었다.
결국 테오는 마음을 쉽게 먹을 수 있었다.
* * *
등룡은 잘 선택한 것이라며, 필요한 절차는 자신이 모두 도맡아 처리해주겠다고 말하면서 잠시 자리를 비웠다.
테오는 뒷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여전히 묘한 시선으로 보는 부단장과 유령들에게 말했다.
“제게 부탁하고 싶으셨던 게 바로 이것이셨군요.”
-험험!
-흠흠흠!
-거, 우리 입으로 직접 부탁하기엔 좀 그렇지 않나.
유령들은 고개를 슬쩍 옆으로 돌리면서 헛기침을 해댔다.
콧잔등이 살짝 붉어진 것이 아무리 그들이 뻔뻔하다고 해도 이번에는 조금 계면쩍었던 모양이었다.
하긴 어른이 된 입장에서 까마득한 후손에게 자신들을 계속 책임져 달라고 말하기는 힘들었겠지.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고민됩니다. 맡겠다고 말씀은 드렸지만, 그래도 제가 여유 있게 영묘를 관리할 시간이 없어서요.”
이번 충돌로 지하 영묘는 거의 반쯤 무너진 상태.
묘지기라면 당연히 영묘를 복원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하루하루가 소중한 테오에게는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
등룡이야 뒷일은 화예조합에 맡겨도 되고, 시간이 좀 더 더뎌져도 괜찮다고 했지만.
그래도 그냥 방치하자니 유령들이 직접 눈으로 보이는 이상에야 마음에 걸렸다.
-우리는 딱히 신경 쓰지 말게나. 자네 없이도 우리끼리 그동안 잘만 지냈어.
“그래도 어떻게 그냥 놔두겠습니까?”
-아니, 진짜래도? 관이야 어차피 썩어서 사라질 건데 그냥 놔둔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나.
“어르신들께서 최소한의 안식이라도 즐기시려면 편히 누워 계실 자리는 필요하시잖습니까.”
-잉? 우리가 눕긴 왜 누워?
“그야 한 번씩 와서 제사라도 지내드려면…….”
-그러니까 제사를 왜?
“예? 그야 성불하시면 못 뵈니 기념할 곳이라도 있어야 하잖습니까?”
-아니, 그러니까 왜 우리가 성불하냐는 거냐고?
“……?”
-……?
그제야 테오와 유령들은 서로 나누는 대화의 화제가 미묘하게 어긋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애당초 서로가 생각하는 ‘묘지기가 해야 할 일’이 다른 것 같다만.」
로드브로크가 중간에서 유쾌하게 웃었다.
테오가 화들짝 놀랐다.
“단순히 저더러 영묘를 지켜달란 뜻이 아니셨습니까?”
유령들은 잠시간 자기들끼리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렇게 되었으니 우리 생각을 좀 더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지.
부단장은 ‘흠흠!’ 헛기침을 몇 번 하고서 앞으로 나섰다.
-원래 자네 말대로 우리는 대장의 검보가 복원되면 바로 이승을 떠날 생각이었다네. 언데드도 아니고 계속 구천을 떠돌아다니는 망령 신세는 좀 그렇지 않나?
테오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새 우리에게 새로운 미련이 생겼다네.
“미련이라 하시면……?”
-자네가 짐작하던 대로 우리 무덤 관리, 그런 게 아니고.
부단장은 잠깐 뜸을 들이면서 슬쩍 다른 유령들을 돌아봤다.
그들은 속마음을 말하기가 여간 부끄러운 게 아니었던지 전부 부단장의 시선을 회피하고 있었다.
하여간 못된 것들. 이런 귀찮은 것만 상사라면서 떠넘기지. 평소에는 상사 대접도 안 해주면서.
-우리는 조금 더 자네의 성장을 지켜보고 싶어졌다네.
“그럼……?”
-가능하다면 자네의 뒤를 계속 따라다니고 싶은데 가능하겠나?
“……!”
순간, 테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기쁨보다는 당혹감으로.
『귀찮은 혹만 주렁주렁 매달리게 생겼구만?』
‘……꼭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이분들을 귀찮은 짐덩이로 생각하는 것 같잖습니까.’
『아닌가?』
‘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우후후!』
테오는 로드브로크의 웃음기 섞인 텔레파시를 외면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테오가 생각한 묘지기 업무는 어디까지나 유령들이 성불하고 난 뒤에 영묘를 관리하는 것에 한정되어 있었지만.
유령들은 더 나아가 자신들을 계속 책임져달라는 말을 하고 있었으니.
유령들이 싫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들이 얼마나 시끄러운지는 지난 며칠 동안 숱하게 겪은 상태.
그 잡소리 하며 잔소리까지 계속 들을 생각을 하니 벌써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로운 면도 그만큼 크다는 건 알고 있겠지?』
‘예. 알고 있으니 제가 이렇게 고민하는 거죠…….’
유령들은 하나하나가 뛰어난 고수들.
그들이 던지는 조언은 앞으로 테오가 성장하는 데 있어서 아주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그러다 마법적 능력이 발전하게 된다면? <시계태엽의 나열>에서 했던 것처럼 실제 병력으로 동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이분들의 부탁을 들어드린다고 해도 문제입니다. 299명이나 되는 분들을 계속 데리고 다니기도 힘들지 않을까요? 영체 상태 지속도 문제구요.’
아무리 지박령이 아니라고 해도, 언데드가 된 게 아닌 이상에야 영체를 유지하는 건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했다.
그것을 충원할 방법이 없는 이상에야 진짜 짐덩이밖에 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방법이 있다면 데리고 다닐 의향은 있다?』
‘방법이 있습니까?’
『있다마다. 여기서 중요한 건 그대의 의지이다. 정말 ‘묘지기’가 될 생각이 있느냐?』
단순히 영묘를 관리하는 묘지기가 아닌 유령들을 지키는 묘지기.
테오는 아주 잠깐 고민에 잠기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용아병단이 보인 힘은 여러 단점을 배제하고도 남을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예.’
『영혼검이라는 게 있다.』
‘영혼검…….’
『영혼을 봉인할 수 있는 일종의 마도구이지. 담고 있는 영혼의 숫자가 많아지거나, 혹은 격이 높을수록 등급도 올라간다. 그걸 구하거라.』
테오는 영혼검이 혹시 황실의 비밀창고에 있을까 고민하다가 순간 다른 쪽에 생각이 미쳤다.
[상점창을 오픈합니다.]
+
[봉인영령검]
봉인된 영혼들의 종류에 따라 성질이 변화한다. 검이라기보다 마도구에 가까운 듯하다.
· 종류: 양손검. 마도구.
· 효과: 영혼 봉인.
+
‘있다.’
테오는 남은 코인으로 영혼검을 구매하고 인벤토리에서 꺼냈다.
겉보기엔 그저 평범하게 생긴 철검이었다.
로드브로크의 눈이 살짝 커졌다.
『또 그 아공간 능력이군. 그대는 확실히 다른 선택자들과는 여러모로 많이 달라.』
테오는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면서 유령들을 돌아봤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지만, 유령들은 혹시 테오가 거절할까봐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아무리 유령 상태라고 해도 299명이나 되는 이들을 데리고 다니기엔 여간 버거운 게 아닐 테니.
-이건…… 영혼검이로군. 이곳에 들어오란 뜻인가?
“예. 만약 싫으시다면.”
-들어가지.
부단장은 테오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뭐, 조금 답답하긴 하겠지만.
-그거야 영묘에 계속 머물던 것과 별 다르지도 않겠구만.
-오히려 같이 세상 구경할 수 있으니 좋은 것 같은데?
마찬가지로 다른 유령들도 긍정적이었다.
몇몇은 굳이 걸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에 즐거워하기도 했다.
테오는 조금 허탈했다.
사실상 도구 취급되는 꼴이니 싫어하지 않을까 조심스러웠는데, 이렇게 쉽게 받아들일 줄은 몰랐으니.
-이렇게 하면 되나?
부단장이 영혼검에 손을 갖다대자 그대로 빨려 들어갔다.
-오오, 재미있겠는데!
-내부 구조가 어떠려나?
다른 유령들도 하나둘씩 영혼검에 봉인되면서 영혼검의 형태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자잘한 상처도 있던 재질이 점점 단단해지다가, 곧 빛깔도 보랏빛을 내면서 마지막엔 보석처럼 영롱하게 변했다.
그냥 겉보기에도 용살검이나 월백검에 못지않은 신검이 되어 있었으니.
웅웅! 우우웅!
영혼검이 잘게 떨릴 때마다 파장이 허공에 남을 정도로 풍기는 힘이 대단했다.
테오는 손끝으로 영혼검을 어루만지다가 생각했다.
영혼검이라는 이름은 너무 정이 없는 것 같았다.
다른 이름을 붙여주고 싶었다.
무너진 지하 영묘를 이곳에 통째로 옮긴 것이나 마찬가지니, 붙일 이름도 아주 간단했다.
‘영묘검(靈廟劍).’
테오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회귀검가의 서자가 사는 법